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 슬프고 안타깝도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 그의 삶이 참으로 애처롭구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안봤다. 그 때는 이순신에 대해 잘 몰랐다. 그저 임진왜란의 장수. 한산도대첩, 거북선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정도만. 아마 대한민국 국민이라도 이순신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그의 삶과 업적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에 대해 자세히 알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이순신은 전쟁을 준비하고 용감히 맞서 싸우고 승리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파직과 옥살이, 모진 형벌이었다. 선조의 질투, 의심, 불안과 원균의 합작품이었다. 다행히 우의정 정탁의 명문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아직 전시 상황이라 함부로 그를 죽이기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명받는다. 


 이순신은 효심이 대단했다. 백의종군길 도중에 어머님의 부음을 듣는다. 이순신은 마당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4월13일.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난중일기>


 더욱 안타까운 일은 어머니 변씨가 의금부에 하옥된 아들을 보러 여수에서 나룻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기력이 쇠약해져 배 위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자식 입장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데, 못난 자식 얼굴 한번 보겠다고 80대 늙은 노모가 무리한 길을 나서다 그만 돌아가신 것이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아마도 이순신이 죽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 죽기 전에 아들 얼굴을 보기 위해 나선 것이리라. 이순신의 마음을 생각하면 같이 억장이 무너진다.


 4월16일.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집에 이러르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난중일기>



 아마 이 때부터 이순신은 임금, 조정에 대한 신뢰를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여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생에 대한 미련, 집착도 버렸을 것이다. 그저 나라와 백성에 대한 忠 만 남았으리라.



 원균의 트롤짓은 임진왜란 시작부터 칠전량해전의 대패까지 계속 된다.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술 쳐마시고 아몰랑 돌진으로 134척의 판옥선 중 122척을 잃고 조선수군 1만명을 잃었다. 일본 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다행인지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원균의 명을 어기고 12척의 판옥선과 함께 진영을 이탈했다. 12척의 판옥선이 없었다면 노량해전도 없었다. 아니 임진왜란의 승리도 없었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한 사관의 원균에 대한 평을 들어보자.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칠천량)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 1598년 4월 2일. 사관의 논평>

 

 

 이순신은 지형을 이용한 전략, 전술로 단 한 척의 판옥선도 잃지 않고 압도적인 승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원균은 대책도 없고 정찰도 없고 전략, 전술도 없이 무리한 출정을 하다 일본 함대에 포위당해 괴멸되었다. 그로 인해 전쟁 5년 동안 무사했던 호남지역은 쑥대밭이 되었다. 


 이순신은 홀로 수군을 재정비했다. 패잔병들과 민병, 승병들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확보했다. 30일간 60km의 대장정이었다. 이순신이 보성에서 여러 장수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선조의 교지가 내려왔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수군의 전력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 


 이순신의 억장은 무너졌다. 수군이 육군에 합류하여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왜군이 서해 바다를 돌아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간다면 그때는 어쩔 것인가.

 (중략)


 이순신은 교지를 받은 다음날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다.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전선의 수는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p301


 

 역사 속 명량해전은 영화보다 더 처절했다. 칠전량해전의 대패로 인한 사기 저하. 적은 300척이 넘는 대군인데 조선의 판옥선은 고작 12척이었다. 이순신에겐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웠을 것이다. 바로 병사들의 공포감. 


정탐꾼 임준영이 전갈을 전해왔다.

"내일 일본군이 벽란진 쪽으로 싸움을 걸어올 것 같습니다." 

(중략)

 이제 일본군이 전라우수영을 공격하려면 울돌목을 지나쳐야만 했다. 이순신이 생각했던 전장은 울돌목, 즉 명량이었다. 역사적인 전투 하루 전인 1597년9월15일 밤, 이순신은 전라우수영에 모든 군졸들을 도열시켰다. 

 "죽으려고 하면 곧 살 것이요,

 살려고 하는 자는 곧 죽을 것이다."

 "능히 길목에서 한 명이 천 명을 막아낼 수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막아 낼 수 있다."

 "내일 내 명령을 듣지 않으면 군법을 제대로 적용하리라." 

-p312



 하지만 그럼에도 병사들과 장수들의 공포감은 극복하기 힘든 것이었다. 생각해보라 13척으로(1척의 판옥선이 추가되었다) 300척이 넘는 일본함대를 막아야 한다. 모든 이들은 승산이 없다 생각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도망가고 싶었으리라.


 실제 전투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진격명령을 내렸는데도 대장선을 제외한 나머지 판옥선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저 눈 앞에 다가오는 수많은 일본함대를 바라보며 죽음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었으리라. 


 

 

 

 결국 이순신의 대장선만 앞으로 나선 채 일본함대의 선발부대 133척과 맞서 싸우게 된다. 몇 시간을 버티며 치열하게 싸움을 계속하자 거제 현령 안위와 중군장 김응함의 판옥선이 합류했다. 그렇게 3척으로 맞서 싸우다보니 정오가 되자 물살이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일본군이 순류를 타고 공격을 하고, 조선 수군은 역류에서 맞서며 몇 시간 동안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정오까지 버티자 이순신의 계획대로 물살은 조선 수군의 편이 되었다. 


 물살이 바뀌면서 난파된 세키부네의 잔해들이 거친 물살을 타고 일본 군 지영으로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일본의 100여 척의 함선들은 떠내려오는 자기 편의 난파선들을 피하기에 급급하였다. 반면 이순신과 안위와 김응함의 판옥선은 순류 물살을 타고 빠르게 전진하면서 함포 사격을 전개하였다. 

 3척의 판옥선이 승기를 잡자 후방에서 구경하던 9척의 판옥선들이 용기를 얻어 합류하였다. 이제야 12 대 133의 해볼만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p321

 

 울돌목은 우리나라에서 물살이 가장 센 곳이다. 지형이 좁아 일본군 함대가 조선의 함대를 에워쌀 수 없다. 그리고 물살이 바뀌면 조선군에게 유리했다. 절호의 위치 선정이었다. 결국 일본 함대는 역류 때문에 자기들끼리 부딪혀서 나아갈 수도 없고 판옥선의 포탄에 얻어맞는 샌드백이 되었다. 31척이 침몰되고 92척이 난파 되었다. 선발대는 괴멸하였고 후방에 있던 부대는 후퇴했다. 정말로 12척으로 300척을 막아선 것이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후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군들을 본국으로 송환시키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국토를 짓밟고 백성들을 유린한 일본군을 단 한 명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탈출하려는 자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자들의 마지막 처절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뿐 아니라 세계 해전사에도 기록될 대전투였다. 일본전함 500척(고니시 300척 제외)과 조선 판옥선 83척, 명나라 호선 61척. 조선명연합군 2만명과 일본군2만명(고니시 1만 5천 명 제외)의 전투였다. 노량해전은 그전까지의 이순신이 싸워온 방식과 달랐다. 그 전까지는 유리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취할 수 있는 싸움만 하였다. 하지만 노량해전은 달랐다. 한 명의 외적이라도 더 죽이겠다는 살기가 서린 섬멸전이었다. 처절한 전투 중 이순신 장군은 적군에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조명연합군은 대승을 거뒀다. 500척 중 살아서 도망간 함선은 50여 척에 불과했다. 고니시의 300척과 1만 5천명은 같은 편이 싸우는 것도 무시한채 혼란을 틈타 도망쳤다.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각 진영에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치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난 듯 슬퍼했다. 그의 영구 행렬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든 백성이 길가에 나와 제사를 지내면서 울부짖었다. 

 "공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수많은 백성이 영구를 붙들고 울어 길이 막히고 행렬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징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많이 나와 울었으니,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동정을 얻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을까. <이덕형의 장계>



 이순신 장군 묘소에 가본 적이 있는가? 

 갈 때 마다 항상 혼자였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러나 현충사는 한적함이 좋다. 

 그게 서글프다. 

-p369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전사설과 자살설이 있다. 저자는 전사설에 비중을 두고 자살설을 일축했지만 나는 자살설에 더 비중을 두고 싶다. 이순신 장군은 수군의 총대장이다. 과연 그가 자기 자신을 위험에 노출 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후방에서 지휘하고 방패 뒤에서 충분히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었다. 아니 그게 총대장이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다. 명량해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대장선 홀로 돌진할 수 밖에 없었지만 노량해전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켰다. 여러 기록들이 이를 뒷바침 한다. 

 

 선조의 그간 행실을 봤을 때 이순신이 전쟁 후에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칫하면 역모죄로 자신 뿐만아니라 가족까지 연류될 수 있었다. 한창 전쟁 중일 때도 죽이려고 했는데 전쟁이 끝나면? 그의 인기와 역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절대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평소에도 주위에 그렇게 말했다.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자. 먼저 이순신과 함께 싸우고 그를 존경했던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의 <제이통제문>을 보자. 


 평시에 사람을 대하면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라, 오직 한 번 죽는 것만 남았노라' 하시더니 이제 와선 강토를 이미 찾았고 큰 원수를 갚았거늘 무엇 때문에 오히려 평소의 맹세를 실천해야 하시던고, 어허 통제여! -p376

 

 진린 역시 이순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린은 명나라 황제에게 진언하여 이순신이 전쟁 후에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순신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면사첩(죽음을 면해주겠다는 황제의 밀지)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비가 내렸다. 

 경리 양호의 차관이 초유문과 면사첩을 가지고 왔다. <난중일기 1597년 11월 17일>

 

 이순신의 면사첩이 확실하다는 주장말고 당시 친일했던 순왜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초유문(용서하겠다)과 순왜자들의 면사첩(죽이지 않겠다)을 이순신에게 건네주었다는 해석이 강하다고 한다. 명나라에서 왜 순왜자들을 신경썼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순신의 부하로 총애를 받았고, 훗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던 류형은 생전에 이순신이 했던 말을 기록하였다.


 자고로 대장이 자기의 공로를 인정받으려 한다면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다. 따라서 나는 적이 퇴각하는 날에 죽어 유감될 일을 없애겠다. 


 숙종 때 대제학까지 지냈던 이민서는 이렇게 말했다. 


 의병장 김덕령이 옥사하자 제장과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곽재우는 드디어 군직을 떠나 생식을 하며 당화를 했고,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일 때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벗고 적탄에 맞아 죽었다.


 어떤 의병장은 역모죄로 옭아매질까 두려워 전쟁 후 미친 적을 했다고도 한다. 


 끝으로 숙종 때 영의정 이여의 말을 들어본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순신은 얼마든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나 스스로 큰 공이 용납되기 어려움을 알고 드디어 싸움터에 이르러서 그 몸을 죽였다고 했다. 장군의 죽음은 미리 결정된 것이다. 오호, 슬프도다.


 

 마지막으로 일본과 서양의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옮기며 글을 마무리 한다. 


 p395-396


일본의 사토 테츠타로는 이순신과 영국의 넬슨을 이렇게 비교했다.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다. 거기에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선 이순신에 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 덕분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제국국방사론>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는 러일전쟁 승리 직후 축사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조선사 연구소>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었던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역시 조선의 이순신을 알고 있었다.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전쟁의 역사>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 제독이었던 영국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은 이순신과 넬슨을 비교했다.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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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8-03 2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서인으로 하여금 책을 집어들게 하는
리뷰, 이러한 리뷰를 우리는 명문이라
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2-08-03 21:34   좋아요 1 | URL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책이 좋아서 인용만해도 좋은 리뷰가 되는 거 같습니다. 이 책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mini74 2022-08-03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순신 일기에 진짜 원균 욕이 많더라고요 ㅠㅠ 선조가 김덕령을 참수한 일은 정말 열받더라고요. 라디오님 잘 읽었습니다 ~

고양이라디오 2022-08-03 21:35   좋아요 1 | URL
선조와 원균은 정말... 리더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