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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계단 -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6년 12월
평점 :
대단했다. 채사장의 역량을 나는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거 같다. 나는 그의 팟캐스트를 즐겨 듣고 그의 저서들도 모두 보았다. 그는 <지대넓얕>과 <시민의 교양>에서 넓고 얕은 지식을 보여줬다. 그런데 돌연 이번 책에서 그는 문학적이고 서사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사실 <시민의 교양>도 약간 서사적인 구조를 띠고 있긴 하지만 그는 이번 책에서 잘 짜여진 서사구조를 보여줬다. 이 책은 한 개인의 성장, 나아가 인간의 성장과 영혼의 성장을 보여주는 책이다.
<열한 계단>은 채사장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기력하고 모자라보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6개의 고전과 두 명의 인물, 하나의 상상, 하나의 노래, 하나의 여행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언제 성장하는가? 채사장은 정신의 성장을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정반합의 변증법.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정신의 성장이란 모순을 통합하면서 한 단계 오르는 과정이다. '정'이라는 기존의 지식 혹은 정신이 있다. '정' 은 반대되는 지식과 정신인 '반'을 만난다. 모순이 발생하지만 좀 더 높은 단계에서 해소되며 통합된다. 이 과정이 '합' 이다. 그렇게 정신은 성장해간다. 이는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산타클로스가 존재한다고 믿는 아이가 있다(정). 어느 순간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반). 아이의 믿음은 깨지지만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 혹은 교훈으로 통합하고 한 걸음 나아간다. 산타클로스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마음 속에, 혹은 이야기 속에, 혹은 하나의 비유나 상징으로서 아이의 정신에 통합된다.(합)
우리는 언제 성장했는가? 채사장은 문학, 기독교, 불교, 철학, 과학, 이상, 현실, 삶, 죽음, 나를 만남으로써 초월의 경계까지 왔고 초월 너머로 나아가고 싶어 한다. 나또한 살아오면서 분명 많은 변화를 혹은 성장을 겪었다. 문학, 철학, 과학이 나의 정신을 성장시켰다. 삶과 죽음, 이상과 현실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내게 무엇보다 큰 성장은 나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제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를 관찰하고 관조하게 되었다.
나를 가장 성장시킨건 사랑이었다. 그리고 책이었다. 어찌보면 책 또한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면서 접하게 되었으니 나를 성장시킨건 사랑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달라진 부분도 있다. 사랑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삶이 무너지고 죽음의 근처에서 나를 만났다. 형편없는 나지만 크게 한 번 조건없이 용서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용서를 배웠다.
이 과정에서 많은 책들이 도움이 되었다. 사랑, 이별, 그리고 수용의 과정을 겪으며 나는 전과 다른 인간이 되었다.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변했다. 사랑에 실패하고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 상처 입히고 힘들게 했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죄책감이 나를 옮아맸다. 달라이 라마의 <용서>가 나를 용서해주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상실의 아픔을 달래주었다. 이지성씨를 통해서 독서와 꿈을 얻게 되었다. 다치바나 다카시씨를 통해 지식의 쾌락을 맛봤다. 그 후에도 수많은 작가, 책들을 만났다.
수많은 작가와 책들을 만나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성장했다. 뒤를 돌아보니 벌써 꽤 온 것 같다. 앞을 보니 아직 갈 길이 멀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즐겁게 계속 걷고 싶다. 이 길의 끝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즐겁게.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