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즐겨 읽는 동물행동학자 프란스 드 발의 동물의 문화에 대한 책이다. 프란스 드 발의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야겠다.
돕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생각할 짬이 거의 없는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일이다. 도망자가 문을 노크할 때 집에 들일지 말지는 그 자리에서 바로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p366
인간 뿐 아니라 동물들도 이타적 행동을 한다. 아래는 수색 및 구조견 앨리의 이야기다. 1985년 멕시코 지진 때 앨리는 수색에 참여했지만 생존자들 찾을 수 없었다.
앨리는 잔해 더미에서 생명의 징후를 감지하면 온몸으로 흥분과 기쁨을 드러냈지만, 죽은 사람밖에 나오지 않을 때는 축 처져 있었다. 헤바드의 말을 빌린다면, 인간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던 앨리는 이런 많은 친구들이 죽은 것을 견디지 못했다. "앨리는 상을 열렬히 바랐고 캐롤라인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인간을 찾아냈다는 확신이 없는 한, 앨리는 스스로가 이 상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중략)
며칠이 지나자 엘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큰 갈색 눈동자에 슬픔을 가득 머금은 채, 헤바드가 데리고 나가려 해도 침대 밑에 숨은 채로 꼼짝을 안 했다. 먹이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다른 구조견들도 모두 식욕을 잃었다.
-p369~370p
구조견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멕시코인 수의사가 생존자 역을 맡았다. 개들이 그를 발견하고 구출하자 개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었다. 흥미롭고 감동적인 일화입니다.
대부분의 영장류들은 수컷이나 암컷 중 어느 한쪽이 무리를 이동함으로써 근친 교배를 막고 있다. 무리에서 나간 성은 혈연관계가 없는 새로운 교미 상대와 만나고, 무리에 남은 성도 다른 데서 들어온 자와 교배하여 유전자의 다양성을 획득한다. 게다가 함께 사는 근친자들도 서로 성 관계를 회피한다. -p378
예전에 사자와 같은 수컷 동물들이 성장하면 무리를 떠나는 것의 이유를 몰랐습니다. 이러한 동물의 습성이 근친교배를 막고 유전적 다양성을 획득하기 위한 진화적 적응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과거 유목인들에게도 이러한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외부인이 방문하면 자신의 아내를 그와 동침하게 하는 관습도 이러한 본성에 입각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정말로 친절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단지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일 뿐이며 따라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야 한다니, 이렇게나 비비 꼬인 아이러니는 다시 없을 것이다!
-p384
휴, 저는 간혹 독서모임에서 이타적인 행동도 결국 본인에게 좋은 이기적 행동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화가 납니다. 이타적 행동을 하면 본인 기분이 좋아지지 않느냐.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합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마나한 말이라 생각합니다. <이기적 유전자>를 어설프게 읽었거나 곡해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도덕성이 진화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보는 헉슬리 부류의 생각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부모자식 간의 애정을 포함하여 뚜렷한 사회적 본능을 부여받은 동물은, 그 지적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든가 인간과 비슷한 정도로까지 발달한 날에는 도덕적인 감각, 즉 양심을 반드시 획득하게 될 것이다." -p389
다윈은 저렇게 한 번씩 통찰력 있는 말씀을 하시지만 <종의 기원>을 읽어본 바로는 재밌는 독서를 보장해주는 작가는 분명 아니다. <인간의 기원>1, 2 도 읽어보고 싶지만... 끈기와 인내가 요구될 듯하다.
어느 날 맹자의 논적인 고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간의 본성은 버들가지와 같고, 의로움은 잔과 그릇과 같다. 인간의 본성에서 인자함과 의로움을 만드는 것은 버들가지로 잔과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는 헉슬리의 정원 및 정원사의 은유와 아주 흡사하다.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대는 버들의 성질에 손을 가하지 않은 채 버들로 잔과 그릇을 만들 수 있는가? 버들에 힘을 가하여 상처내지 않는 한, 그대는 버들로 잔과 그릇을 만들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자함과 의로움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성에 힘을 가하여 상처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천하의 사람들이 그대의 말을 듣고 인자함과 의로움을 재난으로 생각할까봐, 그것이 실로 통탄스럽다! -p390~391
여기에서 맹자는 '이중 의도'의 가능성을 배제하려고 한다. 공감을 비롯한 도덕 감정에 그것이 밀치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p391
우리는 선을 행할 때 주위의 칭찬을 듣거나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악행을 듣기 싫어서가 아니다(물론 그럴 때가 없지는 않다.) 측은지심은 인간의 본질이다.
문명사회는 정원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손질해야 하는, 잡초가 제멋대로 자라 있는 정원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진화가 만들어온 성향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p393
아래는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이다.
이리하여 유인원과 초밥요리사는 한 장의 사진에 담길 수 있다. 이 둘은 음식의 처리 방식,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선 안 되는 것을 서로로부터 배워왔다. 유인원은 요리사의 일과 관련된 상징들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전수된 지식에 의존하는 정도로 보아서는, 둘 다 문화적이라고 말해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들만이 아니다. 이 세상은 서로에게서 삶의 교훈과 습관과 노래 방법을 배우는, 깃털 달린 동물과 털북숭이 동물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문화적인 생물들과 더불어, 이제야말고 낯익은 이분법들을 무덤 속에 집어넣을 때가 다가왔다. -p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