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한강 작가님. 기사 검색 중 영문학자 정은귀 교수가 한강 작가의 시 '저녁의 소묘5'를 제재로 쓴 올 여름의 칼럼을 발견했다. [정은귀의 詩와 視線] 살아 있어 고마운 오후 https://v.daum.net/v/20230829050332495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일본어판과 중국어판도 있구나. 한강의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재발간되지 않을까? [소설가 한강씨 25분짜리 자작음반 내] https://v.daum.net/v/20070114195111680?f=o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발간 당시의 기사.






Silent Seasons - Winter, 1968 - Will Barnet - WikiArt.org


'시 번역과 창조성_정은귀'가 수록된 'K 문학의 탄생 - 한국문학을 K 문학으로 만든 번역 이야기' 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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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희곡 '겨울의 불꽃놀이(전집 '판도라의 상자' 수록)에는 군주의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저자 특유의 염세적 비관이 깔린 생존의 양상이 드러난다. 민음사 '인간 실격' 해설 중 관련 대목을 옮긴다.

Festival Night Fireworks, 1924 - Yamamura Toyonari - WikiArt.org





가토 노리히로는 「패전후론」(1997)에서 다자이의 희곡 「겨울의 불꽃놀이」(1946)의 "졌다, 졌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해. 망한 거지. 멸망한 거라고. 일본 구석구석까지 점령당하고 우린 한 명도 빠짐없이 포로인데. 어쩜 그걸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시골 사람들은 바보야."라는 부분을 인용한 다음, 전쟁 중에 협조하라는 당국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용케도 군국주의 체제에 저항했던 나카노 시게하루(1902~1979), 다자이 오사무가 전후에 주류가 된 ‘전후파 문학’이라는 범주에서 배제되어 구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니 무뢰파 문학이니 하는 범주로 옮겨진 것은 이들만이 전후 일본 사회의 일그러진 현실을 제대로 인식했던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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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 박사의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 중 '2장 잘못된 출발, 아시아태평양전쟁, 패배를 껴안은 일본'으로부터

만주의 관동군(1944)


[제국 일본에겐 전쟁과 승리의 방정식이 있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29104.html 이시와라 간지의 세계최종전쟁론이 소개된다.






만주를 차지한 일본 군부는 공격의 대상을 중국 본토로 설정했다. 그러나 이시와라 간지는 중일전쟁으로 확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1937년 당시 국력으로 전선의 확대는 잃을 것이 많았다. 만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이 쳐들어오는 날에는 만주마저 잃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 침략 당시 이시와라 간지가 걸었던 길은 후배들을 자극했다. 후배들은 상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으킨 행동으로 인해 출세한 선배가 부러웠다.

이시와라 간지가 우려한 상황이 곧 현실로 되었다. 1938년 10월, 한커우漢口와 우창武昌, 한양漢陽 등 우한武漢 3진을 점령하고, 1939년 2월 중국 남부 하이난섬海南島을 차지한 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일본군의 승전보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중국을 관통한 후 동남아를 거쳐 미국으로 가려던 세계최종전쟁의 발걸음은 일단 멈췄다. - 3.그럼에도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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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우리가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가치'(정혜경)의 '2장 잘못된 출발, 아시아태평양전쟁, 패배를 껴안은 일본' 중 '3.그럼에도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선택했다'로부터 옮긴다. 

관동군 사령부(1935)


[가상 인터뷰] 이시와라 간지 https://v.daum.net/v/20060731181509665?f=o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일본은 침략전쟁을 택했다.

이시와라 간지는 1929년부터 착실한 준비에 들어갔다. 2년 후인 1931년 9월 18일, 일본 육군 관동군 참모 자격으로 만주 침략에 나섰다.

일본은 러일전쟁 후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관둥저우 방비와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은 중동철도의 남쪽 지선인 남만주철도를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관동군이었다. 이시와라 간지는 모략을 사용해 전쟁을 일으켰다. 관동군이 일본 측 철도의 선로 일부를 스스로 폭파하고 중국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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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원 '여학생'(다자이 오사무) 연보로부터

다자이와 미치코의 결혼식


올해 여름에 발간된 다자이 오사무 산문집 쏜살문고 '마음의 왕자'도 담아둔다.






1939년 30세 1월 8일, 이부세 부부의 중매로 야마나시 현 쓰루 고등여학교 교사인 26세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식을 올리고 고후 시에 살림을 차림.

1941년 32세 6월 7일, 장녀 소노코가 태어났고, 모친 병문안차 10년 만에 고향 가나기의 생가를 방문함. 11월에 문인 징용령에 의해 징발되었으나 흉부질환으로 면제 처분을 받음. 12월 8일, 태평양전쟁으로 전시체제에 접어듦. -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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