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
책숲하루 2024.12.23. 함께 울다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국어사전 짓는 서재도서관)
: 우리말 배움터 + 책살림터 + 숲놀이터
누구나 오늘을 살아가면서 어제하고 모레를 나란히 돌아봅니다. 오늘·어제·모레는 따로 흐르지 않습니다. 어제인 듯싶으나 바로 눈앞에 있구나 싶도록 떠올리고, 까마득한 앞날 같은데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요. 오늘 누리는 동안 그대로 어제로 흐르되, 이 오늘이 씨앗으로 깃들어 새롭게 모레를 이룹니다.
우리 보금자리에서는 곁님하고 두 아이하고 나누는 마음을 맞아들이면서 배웁니다. 저는 저대로 늘 새로 배운 마음을 새삼스레 풀어놓아 들려줍니다. 언제나 서로서로 오가는 마음이 있기에 늘 싱그러이 오늘과 어제와 모레가 맞물려요. 어제그제 부산에서 ‘이오덕 읽기 모임’을 꾸리면서 만난 이웃님을 돌아봅니다. 나중에 한 분이 제 글이 참 ‘수수하다’고 말씀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굳이 수수하게 쓰려는 마음은 아니지만, 멋을 내거나 꾸미거나 더하거나 덜려는 마음이 없이, 늘 제 민낯을 그대로 담으려는 글일 뿐이거든요.
민낯이란 맨낯입니다. 맨낯이란 맨몸이자 맨손이고 맨발입니다. 저는 한겨울이건 한여름이건 으레 맨발로 다닙니다. 얇은 바닥인 고무신을 꿰고서 시골도 서울도 걷습니다. 서울 아닌 시골조차 시골이웃은 저를 보며 “아니, 한겨울에 고무신에 맨발이면 안 추워요? 발 안 시려요?” 하고 묻습니다만, 저는 으레 “날씨가 찰 수 있지만, 찬바람을 구태여 받아들일 마음이 없고, 저는 발바닥과 발가락이 땅과 바람을 고스란히 느끼려고 할 뿐입니다.” 하고 여쭙니다.
제가 뭘 잘 한다거나 못 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늘 그만큼 하면서 그만큼 배운다고만 느낍니다. 그러나, 배울 적마다 늘 두 마디를 나란히 말합니다. 첫째는 “고맙습니다”요, 둘째는 “잘못했습니다”입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고맙습니다” 못지않게 자주 말합니다. 곁님하고 두 아이한테도 아마 날마다 말하지 싶은데, 아직 덜 배우거나 못 배운 나를 민낯 그대로 밝혀야, 비로소 작은걸음을 내딛는다고 느껴요. 그리고, 제가 아직 덜 배운 대목을 짚거나 알려주었기에 바로 “고맙습니다” 하고 보태요.
부산에서 마주한 ‘이오덕 읽기 모임’ 이웃님 가운데 한 분이 한참 울었습니다. “이제 교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싶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오늘날에도 얼뜬 길잡이는 수두룩하지만, 거꾸로 얼뜬 아이도 너무 늘었습니다. 교실에서 아이를 부르는데 아이가 손전화에 넋이 나간 터라 부르는 소리를 못 듣기에,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면서 “아무개야.” 하고 부르며 이 아이한테 알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는데, 이 아이는 길잡이를 ‘아동학대’로 걸고넘어지기 일쑤입니다. 이 ‘아동학대’ 탓에 여섯 달이나 이태 남짓 시달린 숱한 ‘길잡이 이웃’이 있는데요, 부산 길잡이 이웃님도 “학교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할는지 모르겠을 만큼 힘들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배우는 어른일까요? 우리는 배우는 아이일까요? 우리는 안 배우며 고여가는 고인물일까요? 우리는 고맙다거나 잘못했다는 말을 잊어버리고 꼬여버린 꼰대일까요?
이웃님이 이오덕 어른 이야기를 듣고 나누면서 울 적에,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울면서 함께 녹일 일이요, 눈물을 닦고서 앞으로 새로 일굴 보금자리·마을·배움터·나라·우리별을 그릴 노릇이라고 봅니다. 어른으로서 어진 마음을 함께 배우고 익히기를 빕니다. 아이로서 알아가는 길을 함께 걷기를 빕니다.
ㅅㄴㄹ
*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 짓는 일에 길동무 하기
http://blog.naver.com/hbooklove/28525158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지기(최종규)가 쓴 책을 즐거이 장만해 주셔도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짓는 길을 아름답게 도울 수 있습니다
+ + +
읍내에서 돌고도는 시외버스를 내려서
옆마을로 지나가는 시골버스를 1시간 기다렸고
옆마을에 내려서 한참 논두렁을 걸어
집에 닿았다.
이러고서 여섯 시간을 쓰러져 잤다.
이제 몸이 조금 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