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21. 막말잔치


  어릴 적에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옛말을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어린이가 이 옛말을 알아듣기에는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나 조금 더 생각을 기울이면 “바람이 살랑 분다”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는 결이 다르니, 아 다르고 어 다른 까닭을 어렴풋이 헤아릴 만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말맛’입니다. 말끝을 살짝 바꾸면서 말맛이 바뀌어요. 다시 말하자면 말끝마다 말결이 달라 말맛이 다릅니다. 말끝을 바꾸기에 말결이 새롭고 말맛이 살아나면서 말멋까지 생길 수 있어요.

말잔치 : 말로만 듣기 좋게 떠벌리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막말 : 1. 나오는 대로 함부로 하거나 속되게 말함. 또는 그렇게 하는 말 ≒ 막소리

  말을 둘러싼 두 가지 낱말을 헤아려 봅니다. 먼저 ‘말잔치’입니다. 말잔치를 한다고 할 적에는 말로 즐거운 잔치가 아니라 떠벌이기를 가리켜요. ‘잔치’라는 말이 붙는데 뜻은 딴판이지요. 다음으로 ‘막말’을 헤아리면, 마구 하는 말이기에 줄여서 막말이에요. 이때에는 말뜻 그대로입니다.

  자, 그러면 새롭게 생각해 봐요. ‘막말 + 말잔치’로 새말을 엮는다면 어떠할까요? 언제부터인가 ‘막말잔치’라는 말을 쓰는 분이 있어요. 요새는 이 ‘막말잔치’를 무척 널리 씁니다. 아직 사전에 안 실립니다만, 사전에 실리든 말든 사람들은 이 낱말이 매우 어울린다고 여겨서 알맞게 써요.

  ‘끝말잇기’가 있어요. 아이들이 스스로 말을 익히도록 놀이로 삼는 끝말잇기입니다. 끝말잇기처럼 ‘앞말잇기’라든지 ‘샛말잇기(사잇말잇기)’도 할 만해요. 처음에는 ‘말’ 하나였습니다만, 어느새 여러모로 가지를 뻗어요. 말잇기놀이를 더 헤아리면 ‘텃말잇기’도 할 수 있습니다. 아직 텃말잇기를 하는 분을 못 보았습니다만, 표준 서울말 한 마디를 놓고, 다 다른 고장 사람들이 모여서 제 고장 텃말로 외치는 놀이예요. 여러 가지 표준 서울말을 놓고 제 고장 말마디를 얼마나 더 살피거나 헤아려서 말할 수 있느냐로 판가름하는 놀이예요.

  텃말잇기를 해 볼 수 있으면 ‘새말잇기’도 해 볼 만합니다. 아직 한국말로 슬기롭게 옮기지 못한 영어나 일본말이나 중국말을 놓고서, 저마다 한 마디씩 새롭게 한국말로 지어 보는 놀이예요. 반드시 국어순화를 해야 한다는 어깨짐이 아닌, 즐거운 놀이로 새말잇기를 해 본다면 뜻밖에도 무척 어울리면서 아름다운 새말을 얻을 만하지 싶어요.

  다시 ‘막말잔치’로 돌아가 볼게요. 한자말로는 ‘폭언·폭설·언어폭력’을 사람들 나름대로 슬기로우면서 알맞고 재미있게 걸러내거나 새로 지은 말씨가 바로 ‘막말잔치’입니다. 막말을 일삼는 사람을 참으로 부드럽게 나무라면서 ‘막말잔치’ 아닌 ‘꽃말잔치’가 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고도 할 만해요. 참말로 ‘잔치’를 즐겁게 펼 수 있는 말을 하라는 뜻으로 ‘막말잔치’를 그만두라고 지청구를 한달 수도 있지요.

  어느새 새말이 하나 또 태어났습니다. 꽃말잔치. 꽃길을 걷듯 꽃말을 나누는 자리라면 이때에는 잔치라는 이름에 걸맞게 즐거운 꽃말잔치입니다. 더 나아가 ‘웃음말잔치·사랑말잔치·꿈말잔치’ 같은 말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어요. 그리고 꿈말잔치에서 눈을 번쩍 뜬 이웃님이 있다면 ‘버킷리스트’ 같은 영어를 ‘꿈바구니’나 ‘꿈그릇’이나 ‘꿈꽃’처럼 새롭게 써 볼 만하겠구나 하고 느낄 수 있고요.

  말짓기는 참 쉽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살림을 짓고 사랑을 짓듯 부드러이 마음을 열면 언제 어디에서나 참하게 어울리는 새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밤손님 : ‘밤도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밤손

  온누리 모든 말은 저마다 아기자기하면서 재미있는데, 한국말에서 재미난 대목이 있으니, 바로 ‘밤손님’ 같은 낱말입니다. 훔치는 짓을 일삼는 이를 두고 ‘도둑’이라고만 하지 않고 ‘손·손님’이라고 일컬은 셈인데요, 이 말은 오늘날 삶자리로만 생각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지 싶어요. 왜 그러한가 하면 ‘손’이라는 낱말은 “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을 가리키는 오래된 말이에요.

  밤에 몰래 훔치려고 찾아온 이는, 이곳에 있던 이가 아닌 다른 곳에 있던 사람입니다. 다른 곳에서 이곳에 있는 알뜰한 것을 가로채려는 마음으로 모두 잠든 어두운 때에 찾아오니 ‘밤손’입니다. 게다가 이런 밤손에 ‘-님’을 붙여 ‘밤손님’이라고까지 했으니, 님은 님이로되 반갑지 않은 님이요, 이 반갑지 않은 님이 부디 여기 오지 말거나, 님다운 님이 되기를 바라는 뜻까지 담은 셈이에요.

  밤손님이 밤에만 슬그머니 다녀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떳떳이 얼굴을 드러내어 이웃‘님’이 되기를 바란다고 할까요. 똑같은 사람이지만 밤손님일 적하고 이웃님일 적은 사뭇 달라요.

  우리는 서로 어떤 님이 될 만할까요? 우리는 서로 어떤 님으로 어울릴 적에 즐겁거나 아름다울까요? 어깨동무를 하는 이웃님이 될까요? 목숨앗이 같은 밤손님이 될까요?

  ‘님’은 고이 여기거나 거룩히 삼으려고 할 적에 붙입니다. 상냥하거나 반가운 동무로 삼으려고 하면서도 붙입니다. 귀엽기에 붙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매우 싫거나 얄궂다고 여길 적에 넌지시 붙여요.

  지난날 사람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를 놓고 ‘임금님’이라 불러야 했습니다. 님을 안 붙이고 ‘임금’이라고만 했다가는 끌려가서 볼기를 흠씬 두들겨맞았겠지요. 그런데 아 다르고 어 달라 재미난 한국말인 터라, ‘님’을 살짝 바꾸면 ‘놈’이 되어요. 나라를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착하게 다스릴 적에는 ‘임금님’일 테지만, 나라를 엉터리로 휘젓거나 윽박지르거나 억누를 적에는 ‘임금놈’이지요.

  어느 모로 본다면 밤손님을 ‘밤손놈’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웃에 있는 분이 참으로 못마땅하면 ‘이웃놈’이라 할 수 있어요. 말끝을 살짝 바꾸는데 뜻이며 느낌이 사뭇 달라요. 이른바 ‘진상고객’이라는 요즈막에 새로 생긴 한자말이 있는데, 얼토당토않는 짓을 일삼는 손(손님)이 있다면 이이를 두고 ‘손님’ 아닌 ‘손놈’이라 하면 어울리겠구나 싶습니다.

  곰곰이 살피면 ‘선생님’을 놓고 ‘선생놈’이라 하기도 해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모자라거나 엉터리일 적에 이런 이름을 씁니다. 님은 어느 날 놈이 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놈이 어느 날 님이 될 수 있어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은 아주 작은 한 가지 때문에 스스로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아주 작은 곳부터 찬찬히 살피며 아낄 줄 아는 몸짓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주 작은 곳이라고 업신여길 적에는 바로 놈이 됩니다. 아주 작은 곳을 살뜰히 돌볼 줄 알기에 시나브로 님이 되어요.

  말 한 마디를 어떻게 다스리느냐는, 삶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고 맞닿습니다. 작은 말 하나라고 대수로이 여기지 않으면, 우리 삶도 작은 곳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몸짓이에요. 말 한 마디는 생각 한 줌입니다. 말 한 마디를 슬기로이 다스리면서 생각 한 줌을 슬기로이 다스립니다. 말 한 마디를 알뜰히 가꾸면서 생각 한 줌을 알뜰히 가꾸어요.

  멋모르고 튀어나오는 막말잔치라기보다는, 여느 때에 삶을 마구 부렸기에 드러나는 막말잔치일 테니, 막말은 막삶에서 비롯합니다. 꽃말은 꽃삶에서 비롯할 테고, 사랑말은 사랑삶에서 비롯하겠지요. 넋과 말과 삶이 늘 한줄기인 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살펴서 스스로 아름다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8.4.18.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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