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24. 키



  우리 집 아이들은 ‘금연 구역’이라는 말을 못 알아봅니다. 다만, 이 말 옆에 나란히 있는 그림을 보면서 “저기, 담배에 연기 나는 그림에 빨간 줄로 찍 그었으니까, ‘금연 구역’은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뜻이야?” 하고 묻기는 합니다. 열한 살 큰아이가 들려주는 말을 듣고서 제 열한살 무렵을 떠올립니다. 그때에 제 또래 가운데 ‘금연·흡연’을 못 알아듣는 동무가 꽤 있었어요. 저도 때로는 무슨 말인지 헷갈렸습니다. 아무래도 열한 살 어린이가 ‘담배 피우다·담배 안 피우다’ 아닌 ‘금연·흡연’을 알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한자말을 아는 어린이가 더러 있을 수 있으나, 모르는 어린이는 어김없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어른도 제법 있지 않을까요?


  아이들은 ‘출입 금지’라든지 ‘통행 금지’라는 말을 쉽게 못 알아듣습니다. 이때에 우리 어른들은 생각해 볼 만하겠지요. 왜 저 아이들은 이런 말을 못 알아듣느냐고 말이지요. 그리고 달리 생각한다면, 왜 아이들이 못 알아들을 만한 말을 곳곳에 알림글로 쓰는가를 따질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공공기관에서 쓰는 어려운 말을 나무라거나, 지식인이 쓰는 일본 한자말이나 영어를 놓고서 따지는 목소리가 거의 없었어요. 나라에서 쓰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여기기 일쑤였고, 지식인이 쓰면 ‘배운 사람이 쓰는 말’이니 틀린 말이 없으리라 여기곤 했어요. 오히려 그런 어려운 말이나 일본 한자말이나 영어를 써야 사회를 잘 안다거나 똑똑하다고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이제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우리는 오늘 어떤 말을 써야 서로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울까요? 우리는 어제 어떤 말을 쓰면서 마음을 나눌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앞으로 어떤 말을 쓰면서 새롭게 삶을 지피는 길을 갈 만할까요?


  “키를 재다”가 아닌 “신장을 측정하다”라 해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몸무게를 달다”가 아닌 “체중을 측정하다”라 해야 할까요? 학교나 회사에서는 으레 ‘신체 검사’를 한다는데, 이는 “몸 살피기(몸을 살피다)”입니다. 우리는 왜 아이한테도 어른 사이에서도 ‘몸살피기(또는 몸 살피기)’나 ‘몸재기’처럼 쉽게 알아들을 만한 말을 안 썼을까요? 일제강점기에 스며든 일본 한자말이니 안 써야 한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잘 따져 보면 좋겠습니다. 예나 이제나 아이들은 ‘신체 검사’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해마다 이런 말을 듣고서 몸을 살피는 일을 겪고 나면 비로소 그 말이 그러한 뜻으로 그러한 자리에 쓰는구나 하고 어림합니다. ‘신체’하고 ‘검사’가 저마다 무슨 뜻인지를 새길 적에는 굳이 안 써도 될 말을 껍데기를 씌워서 쓰는 얼거리인 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숫자가 좀 많지만 국립국어원 사전에서 ‘신장’이라는 낱말을 찾아서 옮기겠습니다. 모두 열일곱 낱말이 나오는데, 이 가운데 몇 낱말이나 한국말사전에 실을 만한지 낱낱이 따져 보면 좋겠어요.


신장(-欌) : 신을 넣어 두는 장 ≒ 신발장

신장(申檣) : [인명] 조선 전기의 문신(1382∼1433)

신장(伸長) : 길이 따위를 길게 늘림

신장(伸張) : 세력이나 권리 따위가 늘어남. 또는 늘어나게 함

신장(伸葬) : [고적] = 펴묻기

신장(身長/身丈) : = 키

신장(信章) : = 도장(圖章)

신장(信藏) : [불교] 불도에 대한 신앙심에 일체 공덕이 포함되어 있는 것

신장(神將) : 1. [민속] 귀신 가운데 무력을 맡은 장수신. 사방의 잡귀나 악신을 몰아낸다 2. [불교] = 화엄신장 3. 신병을 거느리는 장수 4. 전략과 전술에 능한 장수

신장(神漿) : 1. 신에게 올리는 음료 2. 영험이 있는 음료

신장(訊杖) : = 형장(刑杖)

신장(晨粧) : 식전(食前)에 하는 화장(化粧)

신장(腎腸) : 콩팥과 창자라는 뜻으로, ‘진심(眞心)’을 이르는 말

신장(腎臟) : [의학] = 콩팥

신장(新粧) : 건물 따위를 새로 단장함. 또는 그 단장

신장(新裝) : 1. 시설이나 외관 따위를 새로 장치함. 또는 그 장치 2. 새로운 복장

신장(Xinjiang[新疆]) : [지명] =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신발장을 가리키는 ‘신장’은 사전에 실을 만합니다. 그런데 조선 무렵 사람 이름이라든지, ‘늘리다·늘어나다’라든지 불교에서 쓰는 말이라든지, 의학에서 쓴다는 말이라든지, 중국 땅이름을 굳이 한국말사전에 실어야 할는지 아리송합니다. ‘콩팥’이란 낱말이 어엿이 있는데 꼭 ‘신장’을 써야 할까요? 새로 꾸밀 적에는 “새로 꾸몄다”고 하면 넉넉하지 않을까요? “새로 열다” 아닌 “신장 개업”이라고만 해야 할까요?


  사전을 보면 ‘키’를 가리키는 한자말 ‘신장’은 “= 키”로 풀이합니다. 이는 한국사람이 쓸 낱말은 ‘키’ 하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를 더 헤아리면 좋겠어요. ‘키’라고 할 적에 무엇이 떠오를까요? 소릿값 ‘키’로는 어떤 낱말이 떠오를까요?


 키 1 : 몸이 얼마나 높은가

 키 2 : 곡식을 까부르는 연장

 키 3 : 배가 가는 길을 다루는 연장


  한국말 ‘키’는 세 가지입니다. 제 어릴 적을 떠올리면, 저는 ‘키’라는 말을 들으면 내 몸높이가 얼마나 되는가를 먼저 생각했어요. 우리 어머니는 ‘키’라고 할 적에 곡식을 까부르는 연장을 먼저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씀했어요. “옛날에는 이부자리에서 쉬를 하면 머리에 키를 씌우고 집집마다 소금 얻으러 다니도록 했지.” 아마 우리 어머니는 머리에 키를 쓴 어린 날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적에 머리에 키를 쓸 일이 없었습니다. 제 어릴 적은 어느새 키를 안 쓰는 도시살림이었어요. 우리 집이 시골이었다면 으레 키로 까부르는 키질을 했을 테지요.


  뱃사람이라거나 바닷가에서 산다면 또 다른 ‘키’를 먼저 생각할 만합니다. 저는 바닷마을인 인천에서 나고 자란 터라 셋째 키를 둘째 키보다 먼저 생각했습니다. 키질을 하는 배를 쉽게 보고 만지면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키질’을 놓고도 세 가지로 헤아릴 만합니다. 하나는 몸높이를 헤아리는 키질이요, 누구 키가 더 크거나 작은가를 따지는 몸짓입니다. 곡식을 까부르는 키질 둘에 배가 가는 길을 다루는 키질이 더 있어요. 그런데 있지요, 이런 ‘키·키질’보다 ‘열쇠’를 가리키는 영어 ‘key’가 익숙한 분이 부쩍 늘었습니다. 요새는 자동차를 몰건 아파트에서 살건 열쇠라는 한국말보다는 ‘key’라는 영어를 매우 쉽게 씁니다.


  어느 자물쇠이든 다 딸 수 있다면 ‘온열쇠’라 할 만하지만 ‘마스터키’라고들 합니다. ‘숫자열쇠’라 말하는 분은 드물고 ‘숫자키’라 하지요. 이밖에도 온갖 자리에서 키는 키대로 열쇠는 열쇠대로 자리를 빼앗깁니다. 설자리를 하나둘 잃으면서 쓰임새가 잊히고, 이러면서 새롭게 알맞게 즐겁게 짓는 말길이 조용히 막힌다고 할 만해요.


  얼마 앞서 어느 고장에 마실을 다녀오는데 “건너지 마세요”라 적은 알림글을 보았습니다. 찻길을 함부로 건너지 말라는 뜻으로, 찻길 한복판에 울타리를 세워서 글씨를 새겼더군요. 예전 같으면 “무단횡단 금지”처럼 딱딱하고 메마른 일본 한자말을 썼을 테지만, 어느새 부드러우면서 쉬운 말씨를 쓰는 손길이 되었구나 싶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가꿀 나라를, 삶터를, 마을을 곱게 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롭고 아름다운 말길하고 글길도 곱게 그릴 수 있기를 바라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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