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15. 술잔을 부딪히는 한 마디
사람들마다 쓰는 말이 다릅니다. 사람들마다 사는 고장이 다르고, 사람들마다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가는 터전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고장이나 삶터나 일터가 다르더라도 비슷하게 쓰는 말이 있어요. 이를테면 술잔을 부딪히면서 하는 말은 비슷하곤 해요. 요새는 “위하여!” 같은 말을 흔히 씁니다.
그런데 저는 ‘위하다’라는 말을 아예 안 씁니다. 아이들 앞에서도 안 쓰고, 이웃 앞에서도 안 써요. 글을 쓰든 말을 하든 저로서는 ‘위하다’를 쓸 일이 없습니다.
‘위하다’는 ‘爲’라는 한자를 붙인 말씨예요. 공문서라든지 책을 살피면 “이를 위하여”나 “하기 위하여”나 “지원을 위하여”나 “여행을 위하여”나 “나라를 위하여”나 “꿈을 위하여”나 “사랑을 위하여”나 “시행하기 위하여”나 “보호하기 위하여”나 “발전을 위하여”나 “너를 위하여”나 “우리를 위하여”나 “평화를 위하여”나 “육성을 위하여”나 “출근을 위하여”나 “육아를 위하여”처럼 참말로 ‘위하다’는 이곳저곳에 안 쓸 수 없는 말인 듯 여길 만해요.
이렇게 온갖 곳에 흔히 쓰는 말마디이니, 제가 이런 말마디를 안 쓴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이 많습니다. 어떻게 그 말을 안 쓰면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아리송해 하시지요.
이때에 저는 넌지시 되묻습니다. 어릴 적에 참말로 ‘위하다’라는 말을 꼭 쓰셨느냐 하고요. 옛날에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위하다’라는 말을 쓰셨는지 되묻기도 해요. 그리고 1970년대라든지 1960년대라든지 1950년대라든지, 또는 1980년대에 어린 나날을 보내면서 ‘위하다’라는 말을 쓴 적이 있는지 가만히 여쭙기도 해요.
이렇게 여쭙거나 되묻는 까닭은, 저로서는 어릴 적에 ‘위하다’라는 말을 쓴 적이 참말 한 차례도 없기 때문이에요. 어른들 흉내를 내면서 물잔을 부딪힐 적에 “위하여!”라 말한 적은 있으나, 이 말이 도무지 무엇을 뜻하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전을 뒤적여 보아도 우리가 왜 “위하여!”를 써야 하는지 알쏭했어요. 다만, ‘위하다’가 일본 말씨인 줄은 어른이 되고서 알았고, 이 일본 말씨는 공문서를 비롯해서 학문이나 책이나 방송에 어마어마하게 쓰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이를 위하여 → 이 때문에
하기 위하여 → 하려고
지원을 위하여 → 도우려고
여행을 위하여 → 여행 때문에 / 여행으로
나라를 위하여 → 나라를 생각해서 / 나라 때문에
꿈을 위하여 → 꿈을 이루려고 / 꿈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 사랑을 이루려고 / 사랑 때문에
시행하기 위하여 → 하려고
보호하기 위하여 → 지키려고
발전을 위하여 → 발돋움하려고 / 크려고
너를 위하여 → 너를 도우려고 / 너 때문에 / 너를 생각해서
우리 때문에 → 우리를 생각해서 / 우리 때문에
평화를 위하여 → 평화를 이루려고 / 평화를 지키려고
육성을 위하여 → 키우려고
출근을 위하려 → 출근하려고 / 일하러 가려고
육아를 위하여 → 아이 때문에 / 아이를 생각해서
하나하나 짚어 보니까 먼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살아온 분들은 ‘위하다’라는 외마디 한자말을 쓸 일이 없었구나 싶어요. 일제강점기 뒤로 부쩍 퍼진 이 말씨는 그야말로 우리 말씨가 아니네 싶어요. 책이든 논문이든 방송이든 공문서이든 ‘위하다’가 끝없이 나오더라도 시골 할머니하고 할아버지 입에서 ‘위하다’가 나오는 일은 없어요.
다만 농협 일꾼한테서 물들어 “마을을 위한 일”이라고 할 적에는 나타나지요. 그리고 이때에는 예전에 “마을을 생각하는 일”이나 “마을을 살피는 일”이나 “마을을 걱정하는 일”이나 “마을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했구나 하고 알아차렸어요.
다시 말해서 지난날에는 때하고 곳하고 사람을 살펴서 알맞게 온갖 말을 마음껏 썼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날에는 이도저도 아닌 채 어영부영 뭉뚱그리면서 ‘위하다’를 아무 자리에나 쓰는구나 싶어요.
그러면 술자리 같은 데에서는 어떤 말을 써야 좋거나 즐거울까요? “위하여!” 같은 느낌을 살릴 만한 말씨는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 스스로 새로운 말씨를 살리면서 뜻을 북돋우려고 하면 얼마든지 새롭거나 재미있거나 즐겁거나 뜻있는 말마디를 지을 만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예전부터 썼다는 생각으로 그냥그냥 따라서 쓴다면 새로운 말마디를 못 짓겠지요. 더구나 예전에는 우리 나름대로 재미있거나 알맞게 쓰던 말씨가 있지만, 일제강점기나 미군정이나 군사독재를 거치는 동안 우리 말씨를 잊고 말아서, 외려 이제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로 제대로 결이나 넋을 살리는 말을 생각하지 못할 수 있어요.
누가 저한테 묻는다면, 이를테면 술자리라든지 잔치마당에서 “이보게, 자네가 한 마디 할랑가?” 하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려고 생각해요.
사랑으로!
꿈으로!
웃음으로!
잔을 부딪히는 잔치마당이라면 “사랑을 위하여!”가 아닌 “사랑으로!” 한 마디로 넉넉하지 싶어요. “마을을 위하여!” 같은 말을 외치고 싶다면 “마을사랑!”이라고 외칠 수 있어요. “우리 마을 좋구나!”라든지 “우리 마을 으뜸!”이라든지 “우리 마을 좋아!” 하고 외칠 수 있고요.
가만히 보면 술자리에서 외마디로 외치는 말로 “지화자!”라든지 “좋구나!”라든지 “얼씨구!”를 읊는 분이 있어요. 이런 외침은 참 수더분하구나 싶어요. 이와 비슷하게 “좋아!”라든지 “좋지!”라든지 “좋네!”라든지 “좋다꾸나!”라든지 “좋지롱!”이라든지 “좋아뿌러!”처럼 말끝을 바꾸어서 외쳐 볼 수 있어요.
“너를 위한다”고 할 적에는 너를 생각하거나 헤아리거나 아끼거나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한국말은 숨기지 않아요. 그래서 “너를 사랑해”라든지 “너를 아껴”라든지 “너를 좋아해” 하고 또렷하게 밝힙니다. 또는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가 아니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나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나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처럼 외칠 만해요.
생각하기에 새로운 말이 태어납니다. 좋아하기에 알맞게 쓸 말을 떠올립니다. 사랑하기에 즐거이 나눌 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자, 한번 마음을 모아 봐요. 우리가 먼먼 날을 고이고이 가꾸면서, 앞으로 새로우면서 즐겁게 이어서 쓸 만한, 이쁘고 애틋하며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우면서 재미날 뿐 아니라, 싱그럽고 알뜰하며 즐거울 말 한 마디를 혀에 얹어 봐요. 우리가 주고받는 말은 언제나 가을하늘 같은 바람이 되고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2017.10.23.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