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16. 어정쩡한 겹말을 털고 말꽃으로
2017년 10월에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이라는 글쓰기 사전을 한 권 써냈습니다. 이 글쓰기 사전에는 모두 1004가지 보기를 다룹니다. 어느 이웃님은 사람들이 어정쩡하거나 엉뚱하게 쓰는 겹말이 이렇게 많으냐며 놀랍니다. 그런데 저도 놀랐습니다. 느낌을 살리거나 힘주어 밝히려는 뜻이 아닌 자리에, 어정쩡하거나 엉뚱하게 말을 겹쳐서 쓰는 버릇이 대단히 널리 퍼졌을 뿐 아니라 숱하게 많은 모습을 보면서 저부터 제 글을 새롭게 가다듬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쓰기 사전인 《겹말 사전》을 써낸 뒤에도 겹말 보기는 꾸준히 모읍니다. 그야말로 끝도 없이 나오는데요, ‘시시때때로’나 ‘삼시세끼’나 ‘한도 끝도 없이’나 ‘누군가가’나 ‘무언가가’나 ‘가끔씩’이나 ‘이따금씩’은 매우 귀엽다고 할 만합니다. 이런 겹말은 살짝 손질해도 쉬 고칠 만하고, 가볍게 알려주어도 고개를 끄덕이겠지요. 그러면 다음에 드는 보기를 함께 살펴봐요. 우리는 참말로 우리 스스로도 못 깨닫는 채 온갖 겹말을 쓰고 맙니다.
마침 타이밍 잘 맞췄네 → 마침 잘 맞췄네
사찰을 다 다녔으나 그 절은 못 찾다 → 절을 다 다녔으나 그 절은 못 찾다
그곳에서 시작한 것이 처음이다 → 그곳에서 처음 했다
두어 번씩 정기적으로 → 두어 번씩 / 두어 번씩 꾸준히
없는 척 가장하더라도 → 없는 척하더라도 / 없는 척 꾸미더라도
해안도로를 달리는 길 → 바닷가를 달리는 길 / 바다를 끼며 달리는 길
종류를 나누다 → 나누다 / 갈래를 짓다 / 갈래짓다
혼자라는 고독을 체감하다 → 혼자라고 느끼다 / 외롭다고 느끼다
침입해 들어오다 → 쳐들어오다 / 마구 들어오다
몸으로 실천하다 → 몸으로 하다 / 몸소 하다
힘든 노동일에 종사하다 → 힘든 일을 하다 / 힘든 일을 맡다
희게 탁해지다 → 허얘지다 / 뿌얘지다
겹겹이 포개다 → 포개다 / 겹겹이 두다
내 적성에 맞다 → 내게 맞다 / 나한테 어울리다
키 작은 관목 → 키 작은 나무 / 떨기나무
꾸미고 치장한다 → 꾸민다
소수의 몇 그루가 생존하다 → 몇 그루가 살아남다 / 몇몇 그루가 살아남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할 일 → 무엇보다도 할 일 / 먼저 할 일
본을 보이다 → 보기를 들다 / 보여주다 / 거울이 되다
날이 잘 서 예리하다 → 날이 잘 서다 / 날카롭다
딸기를 마음껏 만끽하다 → 딸기를 마음껏 먹다 / 딸기를 누리다
스케일이 크다 → 크다 / 통이 크다
이러한 일련의 글을 보면 → 이러한 여러 글을 보면 / 이러한 글을 보면
책의 저자입니다 → 책을 쓴 사람입니다 / 지은이입니다 / 글쓴이입니다
크게 심호흡을 하다 → 크게 숨을 쉬다 / 크게 들이마시다
조용히 침묵하다 → 조용하다 / 입을 다물다
남녀노소 누구나 → 누구나
서울로 상경하다 → 서울로 가다
시골로 낙향하다 → 시골로 가다
농사일로 바쁘다 → 농사로 바쁘다 / 흙짓기로 바쁘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다 → 묵은 것이 내려가다 / 얹힌 것이 내려가다
작은 형태의 책 → 작은 책
도중에 중퇴했다 → 중퇴했다 / 다니다 그만뒀다
직감적으로 느끼다 → 곧바로 느끼다 / 바로 느끼다
우리는 왜 겹말을 쓸까요? 첫째로는 말이나 글을 쉽게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하면 될 말이나 글에 자꾸 뭔가 덧붙이려 하면서 겹말이 되고 맙니다. 뭔가 붙이거나 꾸며야 그럴듯해 보인다거나 뜻이 또렷하다고 잘못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큰 책이면 “큰 책”이라 하면 됩니다. 빠르게 달리면 “빠르게 달린다”라 하면 됩니다. “큰 형태의 책”이나 “빠른 속도로 달린다”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음으로 한국 사회는 ‘겹말 굴레’에 갇혔습니다. 겹말 굴레란, 쉽거나 수수하거나 또렷한 말로 생각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얽매이거나 꼬인 굴레라 할 만합니다. 우리한테는 한국말이라는 텃말이 있습니다만, 예부터 권력자하고 지식인은 중국 한문을 높이 여겼습니다. 이러다 보니 ‘어머니·아버지’는 낮춤말로 삼고 ‘모친·부친’은 높임말로 삼고 말지요. 여기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말만 써야 한 서른 몇 해를 보냈고, 일본 한자말이 신문이나 책이나 방송을 거쳐 어마어마하게 밀려들었습니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다가 대학 학문까지 죄다 일본 한자말로 범벅이 되었지요.
그리고 한국 사회는 조선 봉건 부스러기하고 일제강점기 찌꺼기를 털 겨를이 없었어요. 해방 뒤로는 독재와 새마을운동과 경제성장이라는 채찍질에 시달리면서 말을 말답게 건사하거나 글을 글답게 갈무리하는 살림을 못 지었어요. 이러면서 눈부신 인터넷 나라로 달라지는 동안 한국말은 ‘의사소통 도구’로조차 구실을 못할 만큼 나뒹굽니다.
책의 작가·책의 작자·책의 저자·책의 필자 → 지은이·글쓴이·책쓴이
불거지거나 늘어나는 겹말을 걷잡지 못하는 까닭을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새로운 낱말을 지어서 살찌우겠다는 생각을 못하기 일쑤입니다. 맞춤법하고 띄어쓰기하고 표준말이라는 데에 너무 얽매이지요. 서로 생각을 즐거이 나누도록 돕는 말법이 아닌, 틀에 맞추지 못하면 ‘틀렸어!’나 ‘잘못이야!’ 같은 손가락질을 하는 말굴레가 억누르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면 고장말(사투리·텃말·마을말·시골말)은 문학에서도 버림을 받고, 책이나 교과서나 방송에서는 더더욱 못 나옵니다. 고장마다 말이 달라 ‘어머니’라는 표준말이 아닌 ‘어무이·오마니·어매·오마이·어마이·엄매·엄메·움마’ 같은 고장말을 쓰지만 정작 이러한 여러 고장말은 차츰 설자리를 잃습니다. 한국말에는 ‘진지’나 ‘여쭈다’나 ‘계시다’처럼 꼴이 아예 다른 높임말이 더러 있으나, 자리나 말씨에 따라서 여느 말도 모두 높이는 느낌을 나타내요. ‘어머니·어무이……’만으로도 얼마든지 높이는 말을 나눌 수 있어요. 토씨에 따라서도 높이고요. 이러한 말결을 제대로 못 가르치면 “저희 어머니 아무개 모친은” 같은 겹말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새로 나온 최신곡”이 아닌 ‘새노래’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바꾸고 교환하”지 말고 그냥 ‘바꾸’면 좋겠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 아닌 ‘옛이야기’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놀랍고 충격적”이라 여기지 말고 ‘놀랍게’ 여기면 좋겠어요. “반질반질 광이 나”게 안 닦아도 좋으니 ‘반질반질’ 닦으면 좋겠어요. “딱 잘라 거절하”지 말고 그냥 ‘딱 자르’면 돼요.
학교나 사회는 ‘석차순’으로 사람을 가르곤 하는데 ‘석차’나 ‘성적순’으로는 이제 그만 가르면 좋겠어요. “작은 사이즈”인 옷을 입겠다며 “다이어트로 살을 빼”는 일을 굳이 안 해도 되지요. ‘작은’ 옷도 좋고, ‘살빼기’를 안 해도 좋아요. “늦게 핀 대기만성”이 아닌 ‘늦게 핀’ 꽃이거나 ‘늦꽃’일 뿐이에요.
곱게 말꽃을 피우면서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며 쉽게 말하려고 하면 겹말은 말끔히 사라져요. 투박한 시골말을 쓰거나 수수한 고장말을 사랑할 적에도 겹말은 눈녹듯이 사라져요. ‘오밤중’도 ‘야밤’도 아닌 ‘한밤’에 별잔치를 보며 생각합니다. 겹말이나 군말에서 거품을 빼면서 홀가분하게 피어날 이야기꽃을 그립니다. 2017.11.2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