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밝은 책벗

 


  눈이 밝은 책벗은 마음으로 알아챈다. 눈이 맑은 책벗은 사랑으로 헤아린다. 눈이 고운 책벗은 삶으로 어깨동무한다. 책을 써내는 사람으로서 돌아보자면, 그냥저냥 사서 읽어 주는 책벗도 고마웁지만, 누구보다도 눈이 밝은 책벗과 눈이 맑은 책벗과 눈이 고운 책벗이 반갑다. 그래, 책을 사서 읽어 주는 사람은 누구나 고맙다. 그리고, 책을 제대로 읽어 주는 이들은 더없이 반갑다. 책을 살뜰히 아끼면서 사랑해 주는 이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고마운 책벗이 있어 새로운 책을 낼 힘을 얻는다. 반가운 책벗이 있어 새롭게 글을 쓸 넋을 가다듬는다. 아름다운 책벗이 있어 내 삶길을 한결 즐겁게 걸어간다.


  나부터 누군가한테 눈이 밝은 책벗이 되고자 한다. 나부터 내 이웃한테 고마우면서 반갑고 아름다운 책벗으로 지내려 한다. 휘영청 밝은 겨울 보름달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겨울에 걸맞게 부는 찬바람을 쐬며 생각한다. 이 겨울에 포근하게 누리는 작은 보금자리에 책 하나 곁에 있어 기쁘다. 4347.1.1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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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는 두 갈래 길

 


  책을 읽고 나서 ‘책을 말하자’ 하고 생각할 적에, 으레 두 갈래 길에 선다. 이 책을 이웃한테 알려주면서 선물할 만한가, 이 책은 조용히 서재도서관에 갖다 두고는 마음속에서 잊을 만한가.


  어느 책이든 스스로 주머니를 털어서 장만한 뒤 읽는다. 다 읽고 나서 즐거운 책이든, 다 읽은 뒤에 아쉽구나 느끼는 책이든, 스스로 살림돈을 덜어 책을 장만한다. 그러니, 책을 읽고 나서 ‘책을 말하자’ 하고 쓰는 느낌글은 으레 두 갈래 길에 선다. 내 살림돈을 들여서 장만한 이 책이 즐거웠다면, 조금 들인 책값으로 이렇게 큰 보람을 누리는구나 하고 깨닫는다. 내 살림돈을 그러모아 장만한 이 책이 아쉽거나 모자라거나 따분했다면, 조금 들인 책값조차 씁쓸하거나 쓸쓸하다.


  나는 어느 책 하나를 아쉽거나 안타깝다고 느낄 테지만, 다른 이는 이 책을 아쉽지 않다고 느끼거나 안타깝지 않다고 느끼리라. 왜냐하면, 좋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펴내지 않았겠는가. 생각해 보면 그렇다. 나는 냇물을 즐겁게 마신다. 다슬기와 가재가 함께 살아가는 냇물을 즐겁게 마신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수돗물을 마신다. 시골마을 여럿을 잠기게 하고 시멘트로 둑을 세운 커다란 댐에 가둔 물을 시멘트관을 잇고 이어서 화학처리와 살균처리를 한 수돗물을 마시는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다. 정수기로 거르더라도 수돗물은 수돗물이다. 수돗물에서 나는 냄새를 느끼는 사람은 페트병에 담긴 샘물을 마시는데, 페트병 샘물도 샘물이지만, 플라스틱통에 담긴 채 퍽 오랜 날 고인 샘물이다. 흐르는 물이 아니다.


  골짜기와 들과 숲 사이를 흐르는 냇물을 마시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오늘날 아주 드물다. 도시사람과 시골사람이 99:1이라 할 만하니, 1만 냇물을 마실는지 모른다면, 1조차 냇물을 마시지는 않는다. 시골에도 수돗물이 들어온다. 중앙정부와 지자체와 농협에서는 ‘냇물이 안 깨끗하다’는 이야기를 자꾸 퍼뜨린다. 아마 999:1쯤 되지 않을까.


  냇물맛을 모르고 냇물내음을 모르는 사람한테 냇물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냇물빛과 냇물노래를 들려주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조용히 믿는다. 우리 몸을 이루는 물을 헤아리고, 지구별을 둘러싼 빗물과 바닷물을 떠올린다. 어느 누구도 빗물과 바닷물을 화학처리나 살균처리 하지 않는다. 바닷물을 화학처리나 살균처리 한다면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와 조개는 모두 죽는다. 공장에서 냇물에 쓰레기를 흘려 보라. 논밭에서 냇물에 농약을 풀어 보라. 이때에도 물고기는 몽땅 죽는다. 발전소에서 열폐수를 바다에 쏟아부으면 ‘따뜻한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는 몰릴는지 모르나, 발전소 둘레 바다는 몽땅 망가진다.


  독자 자리에 서건 작가 자리에 서건, 모든 사람들이 별을 떠올릴 수 있기를 빈다. 별은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똑같이 뜬다. 별은 낮에도 밤에도 똑같이 저 하늘에 있다. 매캐한 먼지띠에 가려 별을 못 본다 하더라도 별은 틀림없이 저 하늘에서 맑게 빛난다. 지구도 우주 한쪽에서 맑게 빛나는 별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누구나 맑은 별빛을 온몸으로 담으면서 살아가는 숨결이다.


  책이 되어 준 나무한테 아름다운 빛을 흩뿌리는 삶이 되기를 빈다. 무늬로만 책이 아닌, 속살로 살뜰히 책이 될 수 있기를 빈다. 아름다운 빛을 알뜰히 품는 책이 태어날 수 있기를 빈다. 아름다운 빛을 즐겁게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빈다. 4347.1.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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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을 타면 놓치는 책

 


  자가용을 타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수많은 빛과 바람을 모두 놓치고 말아요. 무엇보다 ‘아무런 책도 못 읽고’ 말아요. 굳이 자가용을 탈 까닭이 없어요. 자가용을 몰아 보셔요. 두 손은 손잡이를 잡아야지, 책을 손에 쥐지 못해요. 자가용 모는 이 옆에 앉아 보셔요. 혼자서 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먼길을 달릴 적에는 자가용 모는 이가 심심하지 않도록, 또 졸지 않도록, 두런두런 말을 걸어 주어야 해요. 그러니, 자가용 모는 이뿐 아니라 자가용 타는 이까지 책을 읽지 못해요.


  자가용을 타면, 종이책뿐 아니라 삶책 또한 못 읽어요. 다른 자동차를 살펴야 하고, 길알림판 찾아야 하며, 이래저래 앞만 한참 쳐다보아야 해요. 자동차를 모는 이와 자동차를 함께 탄 이 모두 둘레를 살피지 못해요. 게다가, 자동차 소리만 들어야 할 뿐, 자동차가 지나가는 마을이나 숲이나 멧골이나 바닷가에서 퍼지는 수많은 소리는 하나도 못 들어요. 봄에 봄내음을 자동차에서 못 맡아요. 가을에 가을내음을 자동차에서 못 느껴요.


  자가용에서 내려야 비로소 봄빛과 가을빛을 온몸으로 누려요. 자가용하고 헤어져야 비로소 종이책과 삶책 모두 가슴으로 안을 수 있어요.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도 좋지만, 들과 나무와 숲과 바다와 하늘이 들려주는 노래에 귀를 기울여 봐요. 기계가 들려주는 노래는 살그마니 내려놓고, 우리 목소리를 가다듬어 스스로 예쁘게 노래를 불러 봐요. 내 이야기를 동무한테 들려주고, 동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요. 풀밭을 거닐며 풀내음을 맡고, 나무 곁에 서서 나무를 포옥 안으며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어요.


  언제나 우리 둘레에 있는 책을 읽어요. 늘 우리 곁에서 따사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는 수많은 책을 사랑스레 누려요. 4347.1.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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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옥 님 만화를 다시 읽으며

 


  경상남도 진주에 있는 헌책방 〈소소책방〉에 들렀는데, 마침 《스타가 되고 싶어?》 1권과 2권이 있다. 아, 강경옥 님 옛날 만화책이네. 고등학생 때 읽은 만화책인데 아주 새삼스럽다. 아무 망설임 없이 장만한다. 수없이 읽은 만화책이고, 서재도서관에도 갖춘 만화책이지만 다시 장만한다.

  차근차근 읽는다. 고등학생이던 지난날 느낌을 떠올리고, 마흔 살 오늘날 느낌을 되새긴다. 아름답구나. 예쁘구나. 이런 이야기를 그무렵 청소년은 얼마나 두근두곤 설레면서 읽었던가. 강경옥 님 만화를 놓고서 얼마나 오랫동안 신나게 수다를 떨었던가.


  그런데 1993년에서 스무 해가 흐른 2013년에 강경옥 님 만화책 가운데 《설희》를 표절한 연속극이 공중파에서 흐른다. 적잖은 사람들은 표절이고 아니고 안 따지면서 공중파 연속극을 즐긴다. 더 많은 사람들은 표절인 줄 아닌 줄 하나도 모르면서 공중파 연속극에 사로잡힌다.


  아름다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예나 이제나 아름다움을 사랑스러운 빛으로 선보인다. 꿈 씨앗을 마음밭에 심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제도 오늘도 꿈 씨앗을 스스로 가꾸고 돌보면서 하루를 맑게 빛낸다. 4347.1.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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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빛 읽는 손길

 


  박노해 님이 쓴 시를 읽던 고등학생 때인 1992년 여름날이었다. 기계를 하도 만지다가 손그림이 모두 지워져 그만 주민등록증 새로 고칠 적에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보고는 숨이 멎었다. 문득 궁금해서 사포로 손그림을 긁어 보았다. 책상이나 벽이나 바닥에 손가락과 손바닥을 질질 문대어 보았다. 칼로 살살 살점을 잘라 보기도 했다. 날마다 한두 시간쯤 철봉을 잡고 턱걸이와 뒤돌아넘기를 해 보았다. 손그림은 웬만해서는 지워지거나 벗겨지지 않는다. 언제나 무엇이든 손으로 쥐고 잡고 만지고 하는데, 손그림은 그야말로 씩씩하게 열 손가락마다 다 다른 모양새로 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머니 아버지와 제금나서 따로 산 지 스무 해가 넘은 오늘, 내 손그림을 새삼스레 들여다본다. 첫째 아이를 낳고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날마다 수없이 기저귀를 빨래하고 다리고 걸레질을 하고 물을 만지고 아이들 쓰다듬고 하면서 손그림이 살짝 무디어지곤 했다. 칼이나 낫에 벤 손가락이 아물면서 손그림이 살짝 울퉁불퉁 바뀌기도 한다. 그렇지만 빨간 물 묻혀 척 찍으면 손그림이 번듯하게 나온다. 손그림이 사라질 만큼 되자면 손으로 얼마나 일을 많이 해야 했을까. 손그림이 사라진다면, 맨손으로 무언가 잡을 적마다 자꾸 미끄러져 얼마나 힘들면서 고단할까.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손그림이 무디어질까. 글을 많이 쓰는 사람도 손그림이 지워질까. 책짐을 많이 나르는 사람이나, 헌책방에서 책먼지를 쉴새없이 닦는 사람도 손그림이 살짝살짝 뭉그러질까.


  손가락과 손바닥에 손그림이 있어 책을 손에 쥔다. 손가락에 손그림이 있으니 얇은 책종이를 살몃살몃 붙잡아 찬찬히 넘긴다. 책을 읽는 손길은 어떤 이야기를 얻고 싶을까. 책을 살피는 손길에는 어떤 빛이 서릴까. 책빛은 우리들한테 어떤 노래가 될까.


  종이를 만지면서도 책빛을 읽는다. 나무를 심거나 돌보면서도 책빛을 읽는다.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며 아이를 품에 안으면서도 책빛을 읽는다. 박노해 님은 공장에서 함께 기름밥 먹는 동무와 이웃을 바라보면서 책빛을 읽었을 테지. 우리는 모두 언제나 엄청난 책빛을 읽고 나누는 이웃들이다. 4347.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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