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큰아이, 처음으로 책을 사다

 


  우리 집 큰아이는 그동안 이 책도 고르고 저 책도 고르곤 했다. 아버지 어머니랑 책방마실을 수없이 다니면서, 아이 마음에 드는 책은 모두 골라서 장만했다고 할 만하다. 이번 설에 할머니한테서 세뱃돈을 이만 원 탄 큰아이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시골집까지 돌아왔다. 고흥 읍내 하나로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장만하는데, 큰아이는 색칠하기 그림책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너 혼자 그림 잘 그리면서 굳이 이런 책을 봐야 하겠니,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큰아이한테 말한다. “벼리야, 저 책 사고 싶어?” “응.” “그러면, 할머니한테서 받은 돈 줘 봐.” “왜?” “네가 받은 돈으로 사면 되지.” “그래. 그렇구나. 알았어. 자.” “한 장만 주면 돼. 한 장은 주머니에 도로 넣어.”


  2014년 2월 1일, 일곱 살 큰아이는 제 돈으로 제 책을 처음으로 산다. 이제껏 아버지나 어머니 돈으로 제 책을 장만했지만, 이날 처음으로 제 돈을 치러 제 책을 산다. 네가 보고 싶은 책이라면, 네가 즐기고 싶은 책이라면, 앞으로 네가 스스로 즐겁게 돈을 벌어서 예쁘게 장만하면 돼. 남한테서 선물받는 책도 좋고, 네가 스스로한테 선물하는 책도 좋아. 4347.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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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글을 쓰는 작은아이

 


  아이들은 어버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찬찬히 지켜본다. 그러고는 스스로 가만히 따라하곤 한다. 아이들이 쓰는 말이란 모두 어버이가 쓰는 말이요, 여기에 둘레 어른들이 쓰는 말을 곁들인다. 아이들이 누리는 놀이란 어버이가 누리는 놀이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먹는 밥이란 모두 어버이가 늘 먹는 밥이다.


  네 살 작은아이가 그림책에 볼펜으로 금을 죽죽 그린다. 그림도 그린다. 무엇을 하는가 하고 지켜보니, 아버지가 책을 읽으며 하는 양을 고스란히 흉내낸다. 아버지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대목이 있으면 밑줄을 긋는다. 때로는 빈자리에 이런 생각 저런 느낌을 적어 넣는다. 아직 글을 모르고 읽거나 쓰지 못하는 작은아이인 만큼, 글씨 흉내를 꼬물꼬물 그림으로 보여준다.


  큰아이는 두 살 적에 이런 금긋기와 그림그리기를 했다. 큰아이는 무엇이든 스스로 하려 했으니 두 살 적부터 아버지 흉내를 냈고, 작은아이는 누나가 언제나 잘 챙기거나 도와주기 때문에, 두어 해쯤 늦는다고 여길 만하다. 작은아이가 볼펜을 쥐고 ‘아버지가 안 보는 데’에서 몰래 책에 금을 긋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참 예쁘다. 비록 책을 다 어저립히듯이 금을 긋고 그림을 그려서 “아이고, 보라야, 그림책을 하나 새로 사야겠구나.” 하고 말했지만, 이렇게 아이들이 ‘맨 처음’으로 금도 긋고 글(그림)도 그린 책은 오래오래 건사하며 애틋하게 되돌아볼 만하리라 느낀다. 4347.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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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로 여행하는 책

 


  두 아이를 데리고 기차여행을 한다. 설날을 맞이해 고흥에서 음성으로 가는 길이란 기차여행이다. 먼저 고흥 읍내까지 군내버스를 타고 20분 달린다. 고흥읍에서 순천 버스역까지 시외버스로 한 시간 달린다. 순천 버스역에서 순천 기차역까지 30분 걷는다. 기차를 기다리며 한 시간 즈음 기차역 언저리에서 뛰논다. 기차를 타고 네 시간 가까이 달려 조치원역에 닿는다. 조치원역에서 한 시간 즈음 다시 기차를 달려 음성역까지 간다.


  작은아이는 순천을 떠난 기차가 전주를 지날 즈음 앙탈을 부리다가 새근새근 잠든다. 큰아이는 졸린 눈빛이지만 졸음을 참고 “언제까지 가? 할머니 집 멀었어?” 하고 스무 차례 넘게 묻는다. 조치원역에서 내려 기차를 갈아탄 뒤, 서서 가는 할매가 보여 내 자리를 내준다. 할매더러 앉아서 가시라고 이야기한다. 할매는 일부러 값싼 표를 끊으셨을 수 있다. 애써 자리를 내주지 않아도 된다. 아이를 돌보지 않고 자리를 내주는 셈인가 하고 살짝 생각해 보는데, 두 녀석이 저희끼리 잘 노니, 내 자리를 할매한테 내주어도 되겠다고 느낀다.


  할매는 고맙다고 자리에 앉는다. 다리가 무척 아프시겠지. 큰아이는 걸상 아닌 바닥턱에 앉는다. 아마 그 자리가 더 재미있으리라. 나도 큰아이 나이만 하던 지난날에 기차에서 저 바닥턱에 앉으며 놀지 않았을까. 어렴풋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자리에 앉으라고 꾸중하셨는데, 그래도 저 바닥턱 자리가 더 마음에 들었다.


  바닥턱에 앉아 동생하고 놀던 큰아이가 천가방에서 그림책을 꺼낸다. “책 읽어야지. 보라야, 누나가 책 읽어 줄게.” 하면서 그림책을 종알종알 읽는다. 이번 기차여행길에는 그만 《도라에몽》 만화책을 못 챙겼다. 깜빡 잊었다. 그러나 그림책은 두 권 챙겼으니, 이 그림책 두 권으로 잘 놀자꾸나. 큰아이는 예쁜 그림을 예쁜 말씨로 읽어 준다. 내 자리에 앉아서 가는 할매도 일곱 살 큰아이가 읽는 그림책을 함께 들여다본다. “아기가 어찌 그리 잘 읽누? 유치원 다니나?” “아니요. 안 다녀요.” 일곱 살 아이와 일흔 훌쩍 넘은 듯한 할매는 이야기도 잘 나눈다. 놀고 책을 읽고 까르르 웃는 사이 어느새 음성역에 닿는다. 4347.1.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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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과 책

 


  아이들은 밥그릇을 놓고 다투지 않는다. 다만, 예쁜 밥그릇이 있으면 서로 차지하고 싶다. 그러니, 아이가 둘을 넘으면 똑같은 밥그릇을 아이들 머릿수대로 갖춘다. 다만, 똑같은 빛깔로까지 맞추고 싶지 않아 붉은 빛과 파란 빛으로 갖춘다. 처음에는 큰아이가 파란 그릇을 갖겠다 하더니 어느 때부터인가 “그동안 파란 꽃그릇 했으니 이제 빨간 꽃그릇 할래.” 하고 말한다. 작은아이는 빨간 꽃그릇을 누나한테 내줄 마음이 없다. 그러다 마침, 어머니 몫 그릇은 밥그릇과 국그릇 빛깔을 다르게 쓰는 모습을 깨닫는다. 동생더러 “보라야, 난 국그릇이 파랑이니까 너는 국그릇을 빨강으로 해. 난 밥그릇을 빨강으로 하고, 넌 밥그릇을 파랑으로 해.” 이렇게 하니 동생이 얌전히 따른다. 때로는 누나가 빨강 밥그릇을 쓰고, 때로는 파랑 밥그릇을 쓴다. 그날그날 바꾸어 본다.


  사이좋게 나누어 쓰기도 하지만,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기도 하는 두 아이가 개구지게 놀면서, 작은아이는 어느새 낮잠을 거르는 날이 있다. 그렇지만 누나만큼 힘이 닿지 않으니 저녁이 되면 이내 지쳐서 곯아떨어진다.


  두 놈이 같이 자면 한결 수월할 테지만, 한 놈이 자고 한 놈이 깨면 아이들 밥을 차려 주기 마땅하지 않다. 그렇다고 큰놈을 굶길 수 없으니 작은 밥상에 큰놈 몫을 차려서 준다. 큰놈이 밥을 다 먹을 즈음 작은놈이 늦은 낮잠에서 깬다. 큰놈이 먹던 밥상에 작은놈 밥그릇과 국그릇을 놓는다. 밥을 다 먹은 큰놈은 밥상맡에서 만화책을 펼친다. 작은놈은 누나가 무얼 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늦은 낮잠에서 깨어나 한창 배고프다. 아무것도 안 쳐다보고 오로지 밥상에 척 붙어서 밥그릇 비우기에 바쁘다.


  배고픈 사람은 밥을 먹는다. 마음이 고픈 사람은 책을 읽는다. 꿈이 고픈 사람은 꿈을 키우고, 사랑이 고픈 사람은 사랑을 키운다. 아이가 읽는 책에는 어떤 빛이 있을까. 아이가 읽도록 어른들이 만든 책에는 어떤 빛이 서릴까. 어른들은 저마다 어떤 빛을 누리고 살면서 아이한테 어떤 빛을 마음밥으로 내줄까. 4347.1.2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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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성장소설’

 


  어린이책은 모두 ‘성장 이야기’이지 싶어요. 어른들이 쓰는 문학도 ‘어른이 되어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느껴요. 어느 책을 읽더라도 우리는 차근차근 아름답게 자라는구나 하고 깨달아요. ‘성장’이라는 한자말은 ‘자람’을 뜻해요. “자라는 이야기”인 어린이책이요 어른문학이에요.


  날마다 새롭게 자라는 어린이입니다. 몸이 자라고 마음이 자랍니다.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는 어른입니다. 어른은 키가 더 안 큰다고 하지만 모든 세포가 새롭게 태어나고 숨쉬면서 몸과 마음이 새로운 빛이 됩니다. 곧, 어린이가 즐기는 책과 어른이 즐기는 문학 모두 ‘늘 새롭게 자라’고 ‘언제나 새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담는다고 할 수 있어요. 이 멋진 책들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마음을 살찌웁니다. 마음을 살찌우면서 몸을 아름답게 가꿉니다.


  새롭게 자라는 즐거움을 담아 글입니다. 새롭게 거듭나는 기쁨을 노래해 문학입니다. 책은 새로운 빛입니다. 이야기는 새로운 사랑입니다. 4347.1.1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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