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빛 읽는 손길

 


  박노해 님이 쓴 시를 읽던 고등학생 때인 1992년 여름날이었다. 기계를 하도 만지다가 손그림이 모두 지워져 그만 주민등록증 새로 고칠 적에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보고는 숨이 멎었다. 문득 궁금해서 사포로 손그림을 긁어 보았다. 책상이나 벽이나 바닥에 손가락과 손바닥을 질질 문대어 보았다. 칼로 살살 살점을 잘라 보기도 했다. 날마다 한두 시간쯤 철봉을 잡고 턱걸이와 뒤돌아넘기를 해 보았다. 손그림은 웬만해서는 지워지거나 벗겨지지 않는다. 언제나 무엇이든 손으로 쥐고 잡고 만지고 하는데, 손그림은 그야말로 씩씩하게 열 손가락마다 다 다른 모양새로 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머니 아버지와 제금나서 따로 산 지 스무 해가 넘은 오늘, 내 손그림을 새삼스레 들여다본다. 첫째 아이를 낳고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날마다 수없이 기저귀를 빨래하고 다리고 걸레질을 하고 물을 만지고 아이들 쓰다듬고 하면서 손그림이 살짝 무디어지곤 했다. 칼이나 낫에 벤 손가락이 아물면서 손그림이 살짝 울퉁불퉁 바뀌기도 한다. 그렇지만 빨간 물 묻혀 척 찍으면 손그림이 번듯하게 나온다. 손그림이 사라질 만큼 되자면 손으로 얼마나 일을 많이 해야 했을까. 손그림이 사라진다면, 맨손으로 무언가 잡을 적마다 자꾸 미끄러져 얼마나 힘들면서 고단할까.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손그림이 무디어질까. 글을 많이 쓰는 사람도 손그림이 지워질까. 책짐을 많이 나르는 사람이나, 헌책방에서 책먼지를 쉴새없이 닦는 사람도 손그림이 살짝살짝 뭉그러질까.


  손가락과 손바닥에 손그림이 있어 책을 손에 쥔다. 손가락에 손그림이 있으니 얇은 책종이를 살몃살몃 붙잡아 찬찬히 넘긴다. 책을 읽는 손길은 어떤 이야기를 얻고 싶을까. 책을 살피는 손길에는 어떤 빛이 서릴까. 책빛은 우리들한테 어떤 노래가 될까.


  종이를 만지면서도 책빛을 읽는다. 나무를 심거나 돌보면서도 책빛을 읽는다.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며 아이를 품에 안으면서도 책빛을 읽는다. 박노해 님은 공장에서 함께 기름밥 먹는 동무와 이웃을 바라보면서 책빛을 읽었을 테지. 우리는 모두 언제나 엄청난 책빛을 읽고 나누는 이웃들이다. 4347.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