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바다 - 바다의 비밀을 밝힌 여성 해양학자 실비아 얼 이야기
클레어 A. 니볼라 지음, 이선오 옮김 / 봄나무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곁 좋은 벗님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74] 클레어 A.니볼라, 《나의 아름다운 바다》(봄나무,2012)

 


  전남 고흥 시골집 마당에 서면 먼 멧등성이 너머로 새벽해 뜨는 모습과 저녁해 지는 모습을 붉고 노랗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좋은 햇살 즐겁게 누립니다. 새벽이 밝으며 차츰 하얗게 트는 동을 느낄 때면 으레 예전에 신문배달을 하던 나날을 돌아봅니다. 아주 깜깜한 밤부터 신문을 돌려 새벽녘에 하루일을 마치는데, 짐자전거가 가벼워질수록 하늘빛이 차츰 밝아집니다. 짐자전거가 텅 비어 홀가분하게 신문사지국으로 돌아갈 무렵 아침 새 햇살이 먼 데에서 드리웁니다. 일을 다 마친 어느 날은 마지막 구역인 15층 아파트 바깥마루에 서서 해돋이를 바라보곤 합니다.


  인천에서 태어나 살던 어릴 적에는 5층 아파트 4층집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창문으로 스미는 빛살을 느끼다가는 툇마루로 나와 바닷가 뱃고동 소리 나는 데를 바라봅니다. 새벽에 집을 나서며 학교로 가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습니다. 새벽하늘과 아침하늘에는 낮하늘과 저녁하늘에 없는 빛무늬가 있습니다. 저녁하늘에는 낮과 아침에 없는 빛살이 있습니다. 낮하늘에는 아침과 저녁에 없는 빛결이 있어요.


  어릴 적부터 둘레 어른들한테서 ‘예전에는 하늘만 올려다보아도 날씨를 다 알았다’ 하는 이야기를 으레 들었습니다. ‘제비 날갯짓’과 ‘개미 움직임’과 ‘풀잎 기운’ 들을 살피며 날씨읽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름빛을 살피면서, 하늘가 빛깔을 헤아리면서, 바람내음을 맡으면서, 날씨읽기를 너끈히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도 하늘만 보며 날씨를 읽고 싶었습니다. 나도 구름을 좇고 하늘가를 살피며 날씨를 읽고 싶었습니다. 잠자리 날갯짓에도 날씨가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풀벌레 노랫소리나 나뭇가지 떨림새에도 날씨가 있나 하며 고개를 갸웃갸웃했어요.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는 날씨 소식이 아닌, 내 살갗이 느끼는 날씨 목소리를 듣고 싶었어요.


.. 실비아는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 실비아가 세 살 때, 부모님이 미국 뉴저지 주 폴스보로에 있는 오래된 농장을 샀거든. 실비아는 거기서 두 남동생과 함께 자랐어. 어릴 때부터 실비아는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대. 혼자 다녀도 별로 무서워하는 게 없었지 ..  (2쪽)

 


  꼬맹이로 살던 무렵, 나는 내가 신문배달 일을 하며 몸으로 날씨를 느끼지 못하면 신문일을 할 수 없는 줄 생각했을까요. 어쩌면, 나는 신문배달을 할 사람으로 크려고 어린 나날 날씨읽기에 그렇게 마음을 기울였을까요. 이리하여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에도 옆지기와 아이들이랑 함께 시골마을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살아갈 오늘을 누릴 수 있을까요. 아주 오랜 어느 옛날, 내 오늘 삶자락을 그림으로 환하게 그렸을까요.


  신문배달을 하던 내 스무 살 몸뚱이는 살갗으로 바람기운을 느낍니다. 새벽에 일어나 맨 먼저 후다닥 바깥으로 달려나와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팔을 쭉 뻗습니다. 눈으로 밤구름을 좇고, 두 팔로 밤바람 기운을 헤아립니다. 바람에 물기가 어느 만큼 감도는가를 살핍니다. 오늘 비가 올는지 안 올는지, 비가 온다면 언제부터 뿌릴는지 곱씹습니다. 신문을 비닐에 넣어야 할는지, 오늘은 비오는 흐름에 맞추어 골목집 대문이나 손잡이에 신문을 꽂아야 할는지, 그냥 문 앞 땅바닥이나 안쪽 마당에 신문을 놓아야 할는지 가늠합니다. 하나라도 어긋나면 신문을 버려야 할 뿐더러, 신문을 다시 돌려야 합니다. 깊은 밤 두 시 무렵 바람을 읽지 못하면 내 하루일은 아주 어그러집니다.


  집식구 옷가지를 날마다 여러 차례 빨래해서 틈틈이 말리는 오늘날, 나는 예전처럼 날씨를 몸으로 읽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살갗으로 바람내음을 맡습니다. 이대로 마당에 널어도 될는지, 언제쯤 마당에서 걷어야 할는지 찬찬히 가늠합니다. 햇살을 어느 만큼 먹었을 무렵 빨래를 걷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알맞게 햇살을 먹어 알맞게 마른 옷가지를 즐겁게 개어 제자리에 놓으며 이야, 이렇게 또 한 가지를 마치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 어린 실비아는 연못가나 숲속 쓰러진 나무 옆에 오랫동안 앉아 있기도 했어.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말 궁금했거든 …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고 있으면 저절로 친해지는 친구처럼, 실비아는 물고기들과 가까워졌어.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없듯이, 똑같이 생긴 물고기는 한 마리도 없었지 ..  (5, 18쪽)

 


  꽃을 바라봅니다. 너 참 예쁘구나 하고 마음으로 말을 건네고, 어느 때에는, 아아 참 예쁘네,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나무를 바라봅니다. 나보다 나이를 한참 많이 먹은 나무 앞에 서면서도, 이야 참 아름답고 푸르네, 하고 말합니다. 굵직한 나무줄기에 손을 대고 볼을 대며 귀를 댑니다. 얼마나 오랜 나날 얼마나 따사로이 둘레를 바라보며 살아왔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나무 한 그루가 지켜본 삶과 꿈과 사랑은 어떠했을까 하고 그립니다.


  아이들 볼을 부비며 생각합니다. 내 몸을 구석구석 주무르며 생각합니다. 나는 얼마나 좋은 하루를 누리는가 돌이킵니다. 나한테 얼마나 어여쁜 이야기가 찾아들거나 스며드는가 하고 곱씹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일 때에 좋은 생각이 피어나겠지요. 사랑하는 넋일 때에 사랑스러운 꿈이 자라겠지요. 기뻐하는 얼일 때에 기뻐하는 이야기가 무르익을 테지요. 맑은 눈짓과 몸짓일 때에 맑은 말과 글이 찬찬히 태어날 테지요.


  내 눈으로 좋은 빛과 무늬를 느낍니다. 내 귀로 좋은 소리와 노래를 느낍니다. 내 코로 좋은 내음과 물기를 느낍니다. 내 살갗으로 좋은 손길과 결을 느낍니다. 달력에는 무슨무슨 기림날만 굵게 적히지만, 내 삶자락에는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예쁘장하게 아로새겨집니다.


.. 그해 생일에 실비아는 물안경을 선물로 받았어. 실비아는 그걸 쓰고 얕은 바닷물을 헤엄쳐 다니며 ‘조사’하느라 굉장히 바빴어. 물속에는 작은 게들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물고기, 농장의 말처럼 생긴 해마도 있었어. 새로 만난 물속 친구들 덕분에 실비아는 농장을 떠난 슬픔을 달랠 수 있었지. 한 방울의 물에도 온갖 생명이 가득한 바다를 보면서 어떻게 외로울 수 있었겠니 ..  (8쪽)

 


  클레어 A.니볼라 님이 빚은 그림책 《나의 아름다운 바다》(봄나무,2012)를 읽습니다. 우리 곁 좋은 벗님들을 맑고 밝으며 즐겁게 느낀 ‘실비아 얼’ 님 삶과 꿈을 소담스레 담은 그림책이로구나 싶습니다. 실비아 얼 님은 숲속에서, 냇가에서, 들판에서, 바닷가에서, 이윽고 바다 밑 깊디깊은 곳에서 당신 곁 좋은 벗님들을 느낍니다.


  실비아 얼 님으로서는 ‘조사’나 ‘연구’나 ‘학문’이나 ‘과학’이나 ‘성공’이나 ‘논문’이나 ‘권위’나 ‘업적’이나 ‘명예’ 같은 허울은 하나도 안 대수롭습니다. 당신 둘레에서 언제나 마주하며 즐거이 사귀는 온갖 좋은 벗님들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해맑은 벌레들이 반갑고 티없는 목숨들이 고맙습니다. 싱그러운 물풀이 즐겁고 푸른 물고기가 귀엽습니다.


  함께 살아가고픈 좋은 벗님을 만나는 ‘바다 과학’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좋은 벗님을 느끼는 ‘바다 밑 연구와 조사’입니다.


.. 실비아가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서 바라보면, 그 바다 생물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실비아를 마주보았다지 … 실비아는 고래의 마음을 알고는 이렇게 말했어. “고래는 자기가 얼마나 크고 내가 얼마나 작은지 잘 알고 있었어요. 절대로 나를 해칠 마음이 없었죠.” … 놀랍게도, 그곳 바다에는 한낮의 태양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단다.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었어. 투명한 바닷물 사이로 옅은 푸른빛이 어른거리고 있었지. 땅 위에 붉은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이면, 바닷속에도 짙은 남색 노을빛이 감돌았어. 그렇게 깊은 곳에도 말이야 ..  (12, 21쪽)

 


  쌀알 하나에도 우주가 담기고, 바닷물 한 방울에도 우주가 담겨요. 실비아 얼 님은 바닷물에서, 바닷물고기한테서, 바다에서, 들에서, 또 스스로 우주를 느껴요. 우주를 느끼며 지구별을 느낍니다. 지구별을 느끼면서 나를 느낍니다. 나를 느끼며 목숨을 헤아립니다. 목숨을 헤아리며 사랑을 꿈꾸어요. 사랑을 꿈꾸기에 삶을 짓는 이야기를 손수 맑게 그립니다.


.. 아주 깊은 바닷속 단 한 방울의 물에도 생명은 숨 쉬고 있었단다 ..  (22쪽)


  실비아 얼 님 삶을 그림책으로 담은 클레어 A.니볼라 님은 어떤 넋이었을까요. 이러한 삶자락을 하나하나 좇으며 그림으로 옮기고 글로 적바림할 때에 어떤 얼이었을까요. 위인전을 빚으려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겠지요. 아이들한테 영웅 한 사람 알려주려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테지요.


  삶을 아끼고 사랑을 빛내며 꿈을 나누는 좋은 벗님을 생각하면서 그림책 하나 내놓을 수 있겠지요.


  누군가 훌륭하다고 말할 만하다면, 누군가 사랑스레 살아가기 때문이로구나 싶어요. 누군가 아름답다고 말할 만하다면, 누군가 즐겁게 꿈을 꾸기 때문이로구나 싶어요. 누군가 멋스럽다고 말할 만하다면, 누군가 활짝 웃으며 이녁 곁 좋은 벗님이랑 오순도순 어깨동무를 하기 때문이로구나 싶어요. (4345.6.16.흙.ㅎㄲㅅㄱ)

 


― 나의 아름다운 바다 (클레어 A.니볼라 글·그림,이선오 옮김,봄나무 펴냄,2012.4.10./11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뒷모습 글쓰기

 


  아이들 옷은 상표딱지가 으레 옷 뒤쪽 바깥에 붙는다. 아이들한테는 상표딱지 하나조차 몸에 거슬릴 뿐 아니라, 자칫 두드러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어른들 옷은 상표딱지가 옷 안쪽에 붙는다. 어른이 되면 이런 상표딱지 하나가 거슬리지 않거나 두드러기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일까.


  곰곰이 돌이킨다. 먼먼 옛날까지 아니더라도, 사람들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지어 살아가던 때에는 어느 옷에든 상표딱지가 붙지 않았다. 상표딱지가 안 붙는 옷이었으니, 이런 것 때문에 걸거칠 까닭이 없었다. 상표딱지를 드러낼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옷 앞이나 뒤나 옆 어디에도 ‘옷 만드는 공장이나 회사 이름’을 알리거나 보여줄 까닭 또한 없다. 그예 예쁘게 짓고, 그저 튼튼하게 빚는 옷 한 벌이었다.


  나는 어린 날부터 형한테서 옷을 물려입고, 이웃한테서 옷을 얻어입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가끔 새 옷을 사 주기도 했지만, 동생은 으레 헌옷을 받아서 입는 흐름이었고, 나는 이렇게 받아서 입는 옷이 좋았다. 나는 새 옷을 입을 때마다 몸이 간질간질 힘들었다. 동무들은 새 옷이 좋다고 말하지만, 나는 새 옷이 달갑지 않았다. 나는 퍽 닳거나 낡은 옷이 내 몸에 잘 맞는다고 느꼈다. 이제 와 헤아리자면, 공장에서 만든 옷은 몽땅 화학섬유이기 때문에 내 살결이 이런 화학섬유를 안 좋아한 셈이다. 퍽 닳거나 낡은 옷 또한 화학섬유이지만, 여러모로 닳거나 낡으면서 화학섬유 결이 많이 누그러졌으니 내 몸에서도 이럭저럭 받아들여 주었으리라 느낀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은 시골에서 호젓하게 살아가며 들판에서 얻은 풀이나 나무로 실을 잣고 천을 마름해 옷을 지으며 입어야 가장 어울린다고 하리라. 또, 나 같은 사람뿐 아니라 누구라도 이렇게 자연한테서 선물받은 옷을 자연스럽게 입을 때에 가장 홀가분하면서 빛나겠지.


  그러고 보니까, 내가 갓 나온 새책보다 한참 묵은 헌책을 한결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까닭도, 오늘날 모든 책종이는 화학처리를 한 종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새책을 마다 할 까닭이 없고, 굳이 헌책으로 찾아 읽을 까닭 또한 없다. 그렇지만, 헌책방 헌책은 숱한 사람들 손길을 거치면서 화학처리 된 종이 느낌이 거의 사라지거나 아주 누그러들면서 따사로우며 보드라운 결이 싱그럽다.


  어여쁜 아이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며 생각에 젖는다. 이 아이가 언제 잠들려나 기다리다가 아이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내 삶을 돌이킨다. (4345.6.16.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밭에서 노는 아이들 (도서관일기 2012.6.14.)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아이들이 낮잠을 거르면서 더 개구지게 놀고 싶어 한다고 느끼기에, 두 아이 모두 자전거수레에 태워 마을 논둑길을 한 바퀴 빙 돌고 나서 서재도서관으로 간다. 막바로 서재도서관으로 갈 수 있지만,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으니, 천천히 논둑길을 돈다. 서재도서관으로 쓰는 옛 흥양초등학교 자리는 논 한가운데이다. 1960년대 어느 날, 이곳에 작은학교를 세우려 했을 적에, 시골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땅뙈기를 조금씩 내놓고 품을 함께 들여 학교 터를 닦고 운동장을 마련하며 건물을 올렸겠지. 나무를 심고 아이들을 돌봤겠지. 학교 둘레로는 온통 논이니, 아이들은 학교에서 제 어버이와 이웃 어르신들 일 매무새를 언제나 바라보았겠지. 흙일로 바쁜 철에는 학교 교사 또한 마을 일손을 거들지 않았을까. 관사에서든 학교에서든 뻔히 둘레에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볼밖에 없는데, 가만히 구경만 할 수는 없었으리라 본다.


  둘째 아이가 씩씩하게 걷고 달릴 수 있을 무렵에는 이곳 운동장까지 우리가 쓸 수 있을까. 아직 건물 반쪽만 겨우 쓸 수 있으니 무척 아쉽다. 운동장과 빈터까지 우리가 쓸 수 있다면, 이 좋은 흙밭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구르고 뒹굴며 흙놀이를 할 텐데. 아이들은 이 너른 흙땅에서 나무를 타고 나무를 돌보며 나무와 하나가 될 텐데.


  오늘은 오늘 누릴 수 있는 만큼 누리자고 생각하며 책 갈무리를 바삐 한다. 자질구레해 보이는 것을 치운다. 틈틈이 바닥을 새로 닦는다. 나무바닥 자리는 걸레로 닦기만 해도 되는데, 돌바닥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인다. 곧 둘째가 걸어다닐 테니 덜 걱정스럽지만, 어디에서든 맨발로 폭삭 앉아 책을 누릴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는데.


  아버지가 이러거나 말거나 두 아이는 서로서로 좇고 쫓기면서 논다. 이곳에서 뛰고 저곳에서 긴다.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춘다.


  좋다. 따로 어떤 굴레나 틀에 아이들을 집어넣어 이것을 배우고 저것을 외우라 시키지 않을 수 있으니 좋다. 아이들이 부를 노래는 어버이가 먼저 즐겁게 익힌 다음 함께 부르면 좋다. 아이들이 뛰놀 자리는 어버이가 먼저 즐겁게 건사한 다음 서로 누리면 좋다. 어버이가 일하는 데가 아이들이 노는 데가 될 때에 아름답고, 어버이가 살아가는 곳이 아이들이 똑같이 살아가는 곳이 되면서 고향이라는 이름이 붙으리라.


  두 시간 남짓 책밭에서 놀던 아이들을 다시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이웃마을 한 바퀴 빙 도는데, 모두 스르르 잠든다. 집에 닿아 한 아이씩 살포시 안아 잠자리에 누인다. 오래도록 새근새근 꿈나라를 누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유리가면 48
미우치 스즈에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름다움을 깨닫는 길
 [만화책 즐겨읽기 156] 미우치 스즈에, 《유리가면 (48)》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만화영화 〈미래소년 코난〉이나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함께 볼 수 있는 하루란 참 아름다운 나날입니다. 잠결에 기저귀에 쉬를 하고는 아랫도리가 축축해 꼬보장하게 엎드려 자는 아이를 토닥토닥 달래 새 기저귀로 갈고는 반듯하게 눕혀 팔베개를 한 뒤 새근새근 잠들도록 할 수 있는 하루란 매우 아름다운 나날입니다. 즐겁게 끓인 국과 기쁘게 차린 밥을 식구들 함께 먹으면서 기운을 새롭게 차릴 수 있는 하루란 몹시 아름다운 나날입니다.


  이래저래 돌이키면, 하루하루 누리는 이야기 가운데 아름답지 않은 모습은 없습니다. 방을 비질하면서, 옷가지를 빨래하면서, 그릇을 설거지하면서, 아이들 손을 잡고 마실하면서, 여름날 멧딸 따러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고 읽히면서, 글을 쓰고 가르치면서, 고단히 드러누워 허리를 펴면서, 어느 한 가지 아름답지 않을 삶은 없어요.


- ‘저건 바위. 저건 수풀. 나무들 사이로 걸려 있는 덩굴. 개울물. 여긴 매화골. 잘 안 보인다는 게 이렇게 편리할 줄이야. 여기가 매화골이라고 상상하기가 훨씬 쉬워졌어. 마야, 분명 그 앤 평소에도 이렇게 자기가 연기하는 세상을 상상해 왔겠지?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당할 수가 없어! 난 지금 이렇게 돼서야 겨우 기타지마 마야의 상상력의 일부를 이해했을 뿐인데! 우습군. 눈이 아픈 후에야 그 애에 근접할 수 있다니.’ (18∼19쪽)
- ‘눈을 감으면 사람들의 대화 소리. 차 소리. 처음 알게 된 소리의 홍수. 사람들이 움직이는 기척.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냄새. 다가오는 소리. 멀어져 가는 소리. 눈을 감고 있어도 거리감은 확실히 느껴진다. 공기의 움직임에 사람들의 기척.’ (69쪽)

 

 


  저녁나절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면내로 마실을 합니다. 두 아이 모두 몹시 졸음에 겨운 얼굴인데, 어떡하든 더 놀겠다는 다짐이 드셉니다. 이럴 즈음 자전거수레에 태워 마을 한 바퀴 휘 돌면 으레 하나씩 곯아떨어지기에 슬슬 자전거를 달리며 흰구름과 매지구름 얼기설기 얽힌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두 아이가 자전거수레에서도 좀처럼 잠들려 하지 않습니다. 외려 시원한 바람을 쐬며 잠을 깬 듯하기까지 합니다.


  그래, 그러면 더 놀아라. 더 신나게 놀아라. 다만, 너희 아버지는 이제 몸이 힘드니까 아버지 곁에 달라붙지 말고 너희끼리 재미나게 놀아라. 너희가 서로를 아끼고 서로를 좋아하면서 이 시골마을 바람과 저녁빛과 들내음과 개구리 노랫소리를 실컷 누리면서 놀아라.


  빗소리도 비내음도 오랜만에 찾아든 저녁나절, 아이들 빨래한 옷가지와 기저귀는 방 곳곳에 널었습니다. 아침에 말리려고 넌 옷가지는 저녁에 거의 말랐으나 보송보송 마르지는 않습니다. 낮과 저녁에 한 빨래는 하룻밤 지나면 마를까요. 가늘게 뿌리던 빗줄기가 저녁부터 아예 사라졌으니 새 아침 맞이할 무렵 천천히 다 마를까요. 날마다 몇 차례 아이들 옷가지 빨래를 하며 살아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만, 빨래기계 쓸 일 없이 두 아이 옷가지를 틈틈이 빨래합니다. 조그마한 옷가지 몇 벌을 기계에 넣고 돌릴 수는 없어요. 척척 비비고 착착 헹구면 끝인걸요. 똥기저귀나 똥바지를 기계에 넣고 돌리지도 못해요. 걸레를 기계에 넣고 돌리지도 못하고요. 이러하든 저러하든 아이들 작은 이불까지 으레 손으로 빨래하며 살아요.


- “마야의 유일한 결점은 너무 역에 몰입해서 상대 배우가 그에 끌려다니느라 존재감이 없어지는 거였어. 무대 위에서 마야에게 맞추느라 급급할 뿐이었지. 결과적으로 단역일지라도 마야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주인공’은 마야가 되고 말아. 이래선 배우들이 모두 저 아일 싫어하게 될 거야 … 연극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캐치볼처럼 상대 배우와의 호흡이 제일 중요해.” (41쪽)
- “마야, 뭐가 그렇게 즐거워?” “아니,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요. 저, 그런 데서 연기하는 거 처음이거든요! 어떤 식으로 연기할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막 떨려요! 빨리 가 보고 싶다!” (131쪽)

 

 


  무거운 몸뚱이로 날마다 빨래를 하다가 곧잘 떠올립니다. 나는 언제부터 빨래돌이 삶을 생각했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나는 지구별이나 한국땅에 드문 빨래돌이 아버지라 하겠으나, 지구별이나 한국땅에 숱하게 많은 빨래순이 어머니들 삶은 어떠할까 하고 헤아립니다. 내 어머니와 옆지기 어머니를 그립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 옆지기 어머니와 아버지를 낳고 보살피던 어머니를 그립니다. 이분들을 낳고 돌보았을 어머니를 그립니다.


  먼먼 옛날부터 어머니들은 식구들 옷가지를 빨래하며 보내던 삶이 섦거나 고단하기만 했을까 궁금합니다. 사랑스러운 식구들이라 한다면, 사랑스럽게 보듬으며 빨래하는 옷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식구들 옷가지 빨래하는 몫을 가시내한테만 맡긴 사내들은 삶을 누리는 사랑 가운데 하나를 스스로 등돌리거나 내팽개치면서 자꾸 엇나가거나 비뚤어지기도 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렇습니다. 사내들은 왜 정치 권력에 눈길을 둘까요. 사내들은 왜 지식 쌓기에 마음길을 둘까요. 사내들은 왜 주먹힘을 불리는 데에 몸길을 둘까요.


  내 보금자리에서 사랑을 다스릴 때에 사랑스러운 삶일 텐데요. 내 마을에서 믿음을 나눌 때에 믿음직한 삶일 텐데요. 지구별 숲속에서 꿈을 키울 때에 꿈같은 삶일 텐데요.


  사랑이나 믿음이나 꿈이란 늘 내 마음속에서 싱그럽게 피어나요. 사랑도 믿음도 꿈도 언제나 내 곁에서 예쁘게 노래해요. 사랑이든 믿음이든 꿈이든 노상 나 스스로 빚고 나 스스로 북돋울 수 있어요.


- ‘누군가를 위해 방안을 신경쓰는 건, 마야 네가 내 안의 무언가를 바꾸려 하고 있어. 기다려 줘! 마야! 널 꼭 근사한 모습으로 맞아 줄게!’ (63쪽)
- “나도 연극배우가 될 걸 그랬나 봐. 당신 상대 배우가 부럽더군. 그 미소를 혼자 독점할 수 있으니까.” (125쪽)
- “왜죠? 눈앞에 있는 성공과 출세를 버리면서까지, 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동안 전 행복해지고 싶단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어쩌면 행복의 의미조차 모르고 살았는지도 모르죠.” (153쪽)

 

 


  미우치 스즈에 님 만화책 《유리가면》(대원씨아이,2012) 마흔여덟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첫머리부터 ‘아유미’는 ‘홍천녀’ 연기에서 ‘마야’를 ‘이길’ 수 없겠다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왜냐하면, 아유미는 스스로 즐거울 수 있으며 사랑스러울 수 있는데, 자꾸 스스로 마야와 아유미 저를 견줍니다. 마야는 마야대로 마야 삶과 사랑을 누리면서 마야 연기를 할 텐데, 아유미는 아유미대로 아유미 삶과 사랑을 누리면서 즐길 연기가 무엇인지 아직까지 종잡지 못해요. 그저 ‘이제야 마야가 하는 연기를 따라잡는다’ 하고 여겨요. 이런 생각이 아유미 스스로 발목을 잡는 줄 깨닫지 않아요. 스스로 삶을 깨닫지 않으면서 자꾸 ‘욕심’을 부리는 쪽으로 나아가요. 마야이든 아유미이든 홍천녀를 연기하고 싶으면 연기하면 되는걸요. 반드시 ‘치구사’ 선생님 뒤를 물려받는 홍천녀가 되어야 하지 않아요. 스스로 새로운 홍천녀가 되어 새로운 연극밭을 일구면 돼요. 굳이 연극밭이 아니어도 삶에서 사랑밭을 일굴 수 있어요. 내 좋은 보금자리에서 꿈밭을 일굴 수 있어요.


  무대에서 주역이든 조역이든 올라서서 무언가 보여주어야 아름다운 삶이 되지 않아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도마질을 하면서 살아갈 때에도 아름다운 삶을 빛내며 마음껏 누릴 수 있어요. 참말 마음껏 누릴 삶이거든요. 재주껏 보여줄 삶이나 솜씨껏 자랑할 삶이 아니에요. 마음껏 누릴 삶이요, 실컷 즐길 사랑이에요. 예쁘게 돌보는 삶이고, 기쁘게 보살피는 사랑이에요.


  마야는 아주 더디기는 하나, 가장 마야다운 걸음걸이로 삶길과 사랑길과 꿈길로 나아가는데, 아유미는 아유미다움을 생각하지 못하면서 가장 어설픈 우격다짐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만 해요.


- ‘시오리 씨. 오늘 난 처음으로 당신에게 솔직해질 겁니다. 당신에게 진정한 성의를 보여 드리죠. 이 이상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141쪽)
- ‘처음 그 애 공연을 본 순간, 그 애가 무대에서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내게는 없는 살아 있는 열정 같은 걸 느꼈죠. 그런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어요.’ (149쪽)
- “(시오리 씨) 당신은 아름답고 총명하고 멋진 여자예요. 하지만 같은 하늘을 바라봐도 당신과 난 보고 있는 것과 느끼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전 하늘의 별을 찾고, 당신은 도시의 야경에 감동하니까요. 결혼을 해도 분명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을 겁니다.” (154쪽)

 


  스스로를 채찍질하면 여러모로 솜씨나 재주를 키울 수 있습니다. 어느 만큼 갈고닦는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삶도 사랑도 믿음도 꿈도 이야기도 ‘채찍질하기’나 ‘갈고닦기’로는 즐기지 못해요. 이래서야 누리지 못해요. 이렇다면 나눌 수조차 없어요.


  억지스레 어느 한 사내하고 짝을 짓겠다고 하는 ‘시오리’ 또한 스스로 누릴 꿈과 사랑과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못 깨달아요. 스스로 옭아매는 사슬이 시오리 스스로뿐 아니라 제 식구들과 이웃과 동무까지 얼마나 옭아매는가를 깨닫지 않아요.


  옭아매어서는 사랑이 될 수 없고, 옭아맨다고 붙잡힐 사랑은 없으며, 옭아맬 때에는 내 삶조차 늘 조마조마하면서 두려울 뿐이에요.


  사랑은 어깨동무예요. 사랑은 두레예요. 사랑은 따순 손길이에요. 사랑은 고운 눈길이에요. 사랑은 밥 한 그릇 나누는 작은 밥상이에요. 만화책 《유리가면》 마흔여덟째 권에서는 스스로 좋은 이야기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가냘픈 몸짓이 춤을 춥니다. 마흔아홉째 권에서는 이 슬프며 고단한 굴레가 씻길 수 있을는지, 앞으로도 내내 이어질는지 궁금합니다. (4345.6.16.흙.ㅎㄲㅅㄱ)

 


― 유리가면 48 (미우치 스즈에 글·그림,서수진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12.7.15./4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국꽃 책읽기

 


  첫째 아이와 읍내 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가 마을회관 안쪽을 넘겨 보다가 “와, 여기 꽃 피었어요.” 하면서 마을회관 마당으로 들어간다. 나는 아이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 않는데, 아이는 참 잘도 두리번거리며 알아본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래저래 두리번거리다가 무언가 보기도 하고, 내 옆지기도, 또 둘째 아이도, 저마다 다 다른 눈높이에서 저마다 다 다른 무언가를 두리번거리며 서로 알려주고 서로 좋아한다.


  겨우내 마른 잎 모두 떨구어 앙상하더니, 봄부터 새 잎을 틔우고, 이제 알록달록 어여쁜 꽃봉오리까지 피운다. “와, 예쁘네요.” 하고 말하는 아이는 손가락으로 꽃잎을 살며시 만진다. 아이 키높이 즈음으로 피어난 꽃들은 더할 나위 없이 곱다. 마을회관 마당에 어느 분이 이 수국을 이렇게 심으셨을까. 머잖아 울타리 너머 들판은 한결 짙푸를 테고, 푸른 물결 넘실거릴 무렵 수국꽃은 더 환하며 곱게 흐드러지겠지. “나는 왜 꽃을 좋아할까요?” 응? 네가 꽃처럼 예쁘게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천천히 피어나니까 꽃을 좋아하겠지, 아이야. (4345.6.16.흙.ㅎㄲㅅㄱ)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읽는나무 2012-06-16 10:01   좋아요 0 | URL
딱 그책이 생각나네요.
<비오는 날 또 만나자>그책요.
사름벼리 장화 신고,빨간 후드 옷 입은 모습이
딱 그책 주인공이에요.^^

파란놀 2012-06-16 11:4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아이들이 빨간 옷과 장화 신고
비 뿌리는 날 꽃잎 빗물 구경이 재미있나 봐요.

하늘바람 2012-06-17 10:59   좋아요 0 | URL
아이 사진 하나하나가 다 동화 한장면이네요
이뻐요

파란놀 2012-06-17 19:57   좋아요 0 | URL
아이가 바로 동화와 같은 삶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