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앞에서 책읽기

 


  아이들이 하나둘 깨어나면 아침밥 차려야겠다고 천천히 생각한다. 풀물을 짤 만한 겨를이 얼마나 될까 헤아리고, 밥과 국을 다 마련하면서 둘째 죽까지 마무리짓는 동안 아이들이 얼마나 기다릴까 하고 살핀다. 늘 어슷비슷하다 싶은 푸성귀로 밥을 차리면서 늘 같은 밥상을 할 수는 없다고 여겨, 조금씩 달리 마련해 보는데, 밥상을 차리기까지 두 시간쯤 훌쩍 지나가지만, 밥상 앞에 앉아 수저를 들면 십 분이나 이십 분쯤 지나면 다 먹기 일쑤이다. 밥상을 받는 사람은 밥상이 놓이기까지 어떤 땀과 품과 겨를을 들여야 하는가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집에서 차려서 내놓는 밥상을 받는 사람과, 가게에서 차려서 내놓는 밥상을 받는 사람은, 저마다 어떤 넋과 매무새가 될까. 집에서든 가게에서든 밥상을 차리는 품과 땀과 겨를은 다르지 않다. 가게에서 더 금세 밥상을 차리는 듯하다면, 그만큼 미리 손질하는 품과 땀과 겨를이 있었을 테고, 밥상을 차리고 나서 ‘밥손이 못 보는 자리’에서 뒤를 치우는 품과 땀과 겨를을 많이 들여야 하리라.


  내가 차린 밥상을 아주 가끔 사진으로 담는다. 나 스스로 이 밥상을 사진으로 찍지 않으면 그날그날 밥상을 차린 줄 생각조차 못 하리라 느낀다. 곰곰이 돌이키면, 내 어머니가 차리던 밥상을 환하게 떠올리자면, 따로 사진으로 찍든 밥상을 찬찬히 살피면서 마음으로 새기든 해야 한다. 스스로 밥상을 차리면서 내 어머니가 어떻게 밥상을 꾸몄는가를 되살려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으레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맛스럽고 멋스럽다는 밥상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런데, 막상 이녁 어머니나 아버지가 차린 수수하거나 투박한 밥상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수수하거나 투박한 밥상을, 날마다 으레 함께 누리는 밥상을, 오랜 옛날부터 죽 대물림하면서 차리던 밥상을, 기쁘고 새롭게 맞아들이며 사진으로도 찍고 마음으로도 찍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임금님 푸짐한 밥상도 밥상이요, 니어링 부부 수수한 밥상도 밥상이지만, 여느 살림집 여느 밥상도 밥상이다. 삶을 살리고 사랑한 밥상은 아직 역사책에도 문화책에도 요리책에도 사진책에도 문학책에도 실리는 법이 없다. (4345.6.1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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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6-18 22:54   좋아요 0 | URL
ㅎㅎ 소박하지만 맛나 보이는 밥상이네요^^

파란놀 2012-06-19 07:27   좋아요 0 | URL
그냥... 풀밥상입니다 ^^;;

책읽는나무 2012-06-19 10:18   좋아요 0 | URL
점심때 시원한 마루에 걸터앉아 저런 밥상을 받아 먹고 싶을때가 있어요.
특히 여름에요.

어린시절엔 마루에 앉아 마당에 심어진 텃밭을 바라보며
앉은뱅이 밥상을 차려 먹었는데..^^
가끔씩 그랬던 시절이 생각나요.님의 밥상을 보니 문득 어린시절이 생각나네요.^^




파란놀 2012-06-19 14:13   좋아요 0 | URL
오늘도 내일도
시원한 밥상 누려 보시기를 빌어요~~
좋은 하루예요~
 

‘절대’와 ‘꼭’
[말사랑·글꽃·삶빛 15] 익숙하게 굳어진 말투

 


  아이들과 살아가며 어버이인 내가 하는 말은 언제나 아이들이 배우는 말이 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인 내가 하는 말을 늘 들으면서 아이들 나름대로 생각을 나타내고 마음을 드러내는 말마디로 삼습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지내는 어버이한테서 온갖 말을 듣습니다. 어느 말은 곧장 알아차리고, 어느 말은 하나도 못 알아차립니다. 어느 말투는 즐겁게 따라하고, 어느 말투는 조금도 따라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활짝 웃으며 말할 때에 아이 가슴에는 활짝 피어나는 웃음꽃이 스며듭니다. 어버이가 잔뜩 찡그리며 말할 적에 아이 가슴에는 잔뜩 그늘진 짜증스러움이 배어듭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말 지식’이 아니라 ‘말 삶’, 곧 말을 나누는 삶과 말에 담는 삶과 말로 일구는 삶을 물려주어요.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때에도 온갖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만화나 영화를 보면서 갖가지 말을 익힐 수 있어요. 그런데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한 아이’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떠한 마음도 사랑도 꿈도 없이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흐르기만 하는’ 말이 나올 뿐입니다. 이와 달리,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는 노상 ‘한 아이’만 바라봅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말은 여러 사람한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낯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 집 아이가 듣도록 들려주는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땅 어버이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으레 유아원부터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맡겨 버릇합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까지 집에서 삶을 보여주고 가르치며 물려주려 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날 한국땅 어버이는 아이들과 살가이 어울릴 겨를이 너무 적습니다. 꼭 아이한테 맞추어 일자리를 바꾸거나 일거리를 줄여야 하지는 않습니다만, 아이들이 즐겁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자면 돈만 많이 벌어야 하는 줄 잘못 생각합니다. 아이들 누구나 돈 아닌 사랑을 먹으며 자라야 하는 줄 미처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어느 회사에서든 ‘육아휴직’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돌볼 말미’를 마련합니다. 아이는 어머니만 낳지 않습니다. 아이는 어머니만 돌보지 않습니다. 아이는 두 어버이가 함께 낳고, 두 어버이가 나란히 돌봅니다. 곧, ‘아이를 돌볼 말미’란 두 어버이가 똑같이 받으면서 똑같이 마음을 기울여야 올바릅니다. 그나저나, 집에서든 조산소에서든 병원에서든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돌볼 말미’가 끝나지 않아요. 바로 이때부터 할 일과 맡을 몫과 나눌 사랑이 잔뜩 기다려요. 그래서 두 어버이는 아이를 낳기 앞서 둘이 앞으로 어떤 일을 어떻게 나누어 맡으면서 살림을 꾸려야 좋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한테 들려줄 말을 살피고, 아이한테 보여줄 집과 마을을 헤아리며, 아이가 누릴 옷과 밥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갓난쟁이일 적에는 갓난쟁이 몸에 맞게 젖을 물리고, 이가 나고 차츰 크면서 젖떼기밥을 마련하며, 젖떼기밥을 지나 어른과 똑같이 밥상에 앉아 밥을 먹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아주 마땅히, 아이 나이에 걸맞게 아이한테 들려주어 아이가 받아들이며 아로새길 말을 가누어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지으며 말문을 열어 줍니다. 이 같은 몫과 삶과 넋은 유아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떠넘길 수 없어요. 어느 어버이나 흐뭇하며 홀가분하고 즐거이 맡으면서 누릴 노릇이에요. 저마다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꿈과 사랑을 누리며 어여삐 자라도록 이끌어야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은 ‘말만 듣고 배우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좋으면서 즐거울까를 생각하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노래만 배우지 않고 노래에 담는 삶결을 함께 배워요. 아이들은 한글만 익히지 않고 한글 닿소리와 홀소리에 싣는 삶넋을 함께 익혀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밥 한 그릇 차려서 내놓을 때에도 배만 채우는 밥을 내놓지 않습니다. 아이가 기쁘게 받아먹을 사랑을 함께 담아 내놓아요. 아이가 입는 옷을 빨래할 때에도 아이가 누릴 사랑을 생각합니다. 아이하고 손을 잡고 길을 거닐 때에도 아이가 맞아들일 사랑을 헤아립니다. 모든 삶은 사랑이고, 모든 이야기는 사랑이며, 모든 말은 사랑이에요.


  이제 초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의무교육으로 삼아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아직 들지 않았어도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영어를 들을 뿐 아니라, 영어 노래와 영어 만화를 봅니다. 한국말이나 한국글(한글)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영어와 알파벳에 더 익숙해지고 말아요.


  우리 아이들이나 우리 어른들은 영어를 반드시 잘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땅 사람들은 누구라도 영어를 배워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땅에서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며 흙을 일구고 버스를 몰며 고기를 낚고 나물을 캐며 빗자루를 들고 사무실 펜대를 굴릴 사람들 모두 영어를 배우는 데에 삶을 들여야 할까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영어는 외국말이거든요. 꼭 배워야 할 외국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스스로 바라면서 찾고, 스스로 느끼면서 익힐 외국말일 때에 누구라도 즐겁게 배우면서 살뜰히 맞아들이리라 생각해요. 영어가 되든 일본말이나 중국말이 되든, 러시아말이나 핀란드말이 되든, 프랑스말이나 포르투갈말이 되든, 스스로 좋아하면서 아끼는 매무새로 익힐 수 있어야지 싶어요. 한편, 외국말을 익히기 앞서, 정작 한국사람으로서 익힐 말이란 내 이웃을 아끼며 사랑하는 넋으로 어깨동무할 말이어야지 싶어요. 이를테면, ‘손말(수화)’과 ‘점글(점자)’이에요. 내 곁 좋은 동무와 이웃을 아낄 수 있게끔, 한국땅 어린이집부터 손말과 점글을 함께 이야기하며 익히도록 이끌어야지 싶어요. 또한, 전국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표준말만 쓰도록 하는데, 고장마다 오랜 옛날부터 이어온 고장말을 서로서로 익힐 때에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서울 아이도 제주말과 전라말을 익혀야지 싶어요. 광주 아이도 경상말과 강원말을 익혀야지 싶어요. 대구 아이도 충청말과 전라말을 익혀야지 싶어요. 외국에 갔을 때에 그 나라 말을 할 줄 알아야 그 나라와 살가이 사귄다고들 하는데, 정작 한국사람 스스로 전라도에 가든 경상도에 가든 제주도에 가든, 전라말이나 경상말이나 제주말을 슬기롭게 깨닫거나 기쁘게 주고받지 못해요. 배우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니까요.


  파비오 제다 님이 빚은 푸른문학 《바다에는 악어가 살지》(마시멜로,2012)를 읽다가 14쪽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경우를 만나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어.” 하는 대목을 읽고, 18쪽에서 “그런 호텔과는 다르다. 절대 비슷하지 않다.” 하는 대목을 읽습니다. ‘절대(絶對)’라는 낱말이 잇달아 나와 눈과 입에 걸리적거립니다. 이 글월에 나오는 ‘절대’는 ‘절대로’와 같은 낱말이요, 말뜻은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입니다. 그러니까,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반드시’라는 말마디를 한자말로는 ‘絶對’나 ‘絶對로’로 적바림한다는 소리입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한국사람은 영어를 반드시 배우고 반드시 잘 해야 할까 생각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답게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슬기롭게 찾으면 맑게 빛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니까 배울 영어일 수 없고, 학교에서 시키니까 대학입시만 바라보는 시험공부 굴레에 갇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어 즐기는 공부여야지, 대학교에 가야 하니 외워야 하는 시험문제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스러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하고 사랑스레 나눌 말을 익힐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릴없이 받아들일 교과서 지식이나 시험공부 정보일 수는 없고, 티없이 깨우칠 삶이자 넋이자 말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슬픈 굴레에 익숙해지면 슬픈 굴레에 갇히며 딱딱한 말이 됩니다. 아픈 생채기를 달래지 않으면 아픈 생채기가 곪으며 메마른 말이 됩니다. (4345.6.1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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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마다 스스로 바라는 책을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 읽으라 했기에 읽을 수도 있는데, 누군가 이녁더러 이런 책을 읽으라 말했기에 읽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읽을 만하리라 여기니까 읽지, 억지스레 읽지는 않습니다. 교도소에서 꼭 읽으라며 내민 책이기에 하는 수 없이 읽는다 하더라도, 교도소에서 살아남자는 뜻으로 읽는다면, 이러한 뜻 또한 스스로 바라는 넋입니다.


  남이 시켜서 할 수 있는 내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은 내가 바라서 하는 일입니다. 글쓰기도 글읽기도 스스로 마음으로 우러나와 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오지 않을 때에는 글 한 줄 못 쓰고 글 한 줄 못 읽습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와 배가 고프다 느끼기에 밥술을 듭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오지 않으면 어떠한 밥상 앞에서도 꼼짝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삶을 읽는 사람입니다. 더 좋은 삶을 읽을 수 있으나, 더 나쁜 삶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영부영 삶을 흘리면서 어영부영 아무 책이나 함부로 읽기도 할 테고, 다부지게 삶을 아끼면서 어느 책이든 알차게 받아들이거나 살피기도 합니다. 곧, 스스로 삶을 어떻게 아끼려 하는가에 따라 책읽기가 달라집니다. 스스로 삶을 사랑하는 만큼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살피며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삶을 사랑하지 못할 때에는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또한 제대로 안 살피고 제대로 안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책이 될 글을 쓰는 사람은 삶을 쓰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아끼고 좋아하며 빛내고픈 삶을 글로 씁니다. 책쓰기란 언제나 삶쓰기일밖에 없습니다. 아름답다 느낄 만한 삶이든 엉터리로구나 하고 느낄 만한 삶이든, 어떠한 글이든 삶을 담는 글이 됩니다.


  책을 읽으며 내 이웃이 어떠한 삶을 어떠한 넋으로 일구는가 하고 들여다봅니다. 글을 쓰며 나 스스로 오늘 하루를 어떠한 꿈으로 누렸는가 하고 되새깁니다.


  나는 사랑을 하고 싶어 글을 쓰고 책을 읽습니다. 나는 사랑을 꿈으로 이루고 싶어 글을 쓰며 책을 읽습니다. 나는 사랑을 맑은 빛으로 보살피고 싶어 글을 쓰는 한편 책을 읽습니다. 좋은 삶을 좋은 넋으로 누리고 싶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좋은 말마디에 실어 글로 빛내고 싶습니다.


  이른새벽부터 노래하는 제비들은 여름비 내리는 들판을 마음껏 날아다닙니다. 비오는 날 먹이를 찾느라 훨씬 부산스럽게 다녀야 할 테지요. 나는 이른새벽에 뒷간에서 똥을 누며 제비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뒷간에 앉아 한손에는 책을 들어 펼치면서도 한귀로는 제비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가만히 생각합니다. 내가 쓰는 글은 아무나 읽을 수 없다고 문득 깨닫습니다. 아니, 내 글은 아무한테나 읽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한테만 내 글을 읽히고 싶습니다. 스스로 사랑하고 싶은 삶을 어떻게 느끼며 어떻게 돌볼 때에 흐뭇할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만 내 글을 읽히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고맙게 맞이하면서 즐거이 누리고 예쁘게 마무리하고픈 꿈을 키우는 사람한테만 내 글을 읽히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내 글에 지식이나 정보를 담고프지 않습니다. 내 글을 읽을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깜냥과 슬기를 북돋아 이녁 삶을 곱게 살찌울 수 있기를 빕니다. 내 글 담긴 책을 장만하여 읽을 사람들 누구나 이녁 스스로 이녁 보금자리를 곱다시 돌보면서 온 하루 흐드러지게 밝힐 수 있기를 빕니다. 이루고 싶은 꿈을 꾸면서, 나누고 싶은 사랑을 생각할 수 있기를 빕니다. (4345.6.1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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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시스터즈 5
쿠마쿠라 다카토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무엇을 느낄 때에 웃으며 즐거울까
 [만화책 즐겨읽기 132] 쿠마쿠라 다카토시, 《샤먼 시스터즈 (5)》

 


  아침저녁으로 좋다고 느끼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는 하루라 한다면, 내 넋은 언제나 좋은 결로 보드랍습니다.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물소리도 모두 좋은 소리로 맞아들이면서 기쁜 노래잔치라 여깁니다. 이때에는 내 말소리 또한 노랫소리처럼 곱게 울릴 수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듣는 소리를 좋다고 느끼지 못할 때에는 내 마음이 말라붙습니다. 어느 때에는 골이 아프고, 어느 때에는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를테면, 끽끽 붕붕 소리 시끄럽게 울리는 자동차나 기차나 버스가 밤새 지나다니는 길가에서 살아야 한다면, 느긋하게 잠들지 못하고 한갓지게 쉬지 못합니다. 이른바, 서울이나 부산처럼 커다란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알쏭달쏭합니다. 자동차도 전철도 버스도 밤새 끝없이 달리는데, 이런 데에서 누가 어떤 삶을 살가이 일굴 만할까요. 들판에서 자라는 나무와 벼와 푸성귀 또한 고속도로나 기찻길 옆에서는 제대로 못 자라는걸요.


  그러고 보면, 송전탑이 선 들판에서도 벼는 힘을 잃습니다. 우람한 송전탑은 사람들 살아가는 집 둘레에 세우지 않습니다. 송전탑 전자파가 몹시 나쁘니까 사람들 살림집 둘레에는 안 세운다 할 텐데, 사람들이 먹는 벼가 자라는 들판 옆에는 어떻게 송전탑을 세울 수 있을까요. 사람들 살림집 곁에 고속철도나 고속도로를 내려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람들이 먹는 벼와 열매와 푸성귀가 자라는 들판 옆으로 고속철도나 고속도로를 낼 수 있을까요.


- “다음엔 그 공장 뒤까지 가 볼까. 그 부근엔 아직 가 본 적이 없으니까. 필름이 더 있어야겠네.” (19쪽)
- “그 카메라 한동안 빌려 주마.” “정말요?” “난 별로 안 쓰니까. 필름은 네가 사려무나.” “가지가 나무가 되기도 하겠지.” (36쪽)
- “카메라 담당 힘들겠다.” “아냐. 도움이 되는 거 같아서 즐거워. 수학여행 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뻐! 나, 여럿이 여행하는 거 처음이거든.” (115쪽)
- “너 정말 뻔뻔하다. 우리 사진 다 망쳐 놓고서. 지금부터 다시 찍자고?” “시, 시끄러워.” “찍자.” (150쪽)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뿐 아니라, 공항 또한 사람들한테 덧없으리라 느낍니다. 이런 찻길, 저런 기찻길, 그런 하늘길이 없이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오가며 살겠느냐고 따질는지 모르는데, 참말 자동차와 기차와 비행기가 없으면 서로서로 만나러 오갈 수 없을까요. 참말 자동차와 기차와 비행기를 타고 움직여야만 서로서로 만나러 오갈 수 있을까요. 자동차와 기차와 비행기를 타고 더 빨리 더 한갓지게 더 짐을 싣고 다닐 만하기에, 이 지구별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더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드나드는가요.


- ‘안 되겠다, 나. 중요한 일은 잊어버리고. 아무리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긴 하지만.’ (24쪽)
- “미즈키. 이런 지팡이, 언젠가는 썩는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때 넌 어떻게 할 테냐?” (32쪽)


  1950년 언저리에 한국땅에서 크나큰 전쟁이 터진 적 있습니다. 이무렵, 모든 초·중·고등학교는 문을 닫았습니다. 모든 학교는 문을 닫으면서, 모든 학교는 ‘군대 건물과 막사’가 되었습니다. 학교 교실은 군인 간부들 회의실이 되고, 운동장은 병사들 천막을 치는 막사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터지면 공항은 전투기와 폭격기가 드나드는 자리가 됩니다. 전쟁이 터지면 항구는 구축함이나 잠수함 같은 ‘무기 실은 배’가 드나드는 자리가 됩니다. 전쟁이 터지면 철길은 무기와 자원을 실어 나르는 길이 됩니다. 전쟁이 터지면 모든 찻길은 군대 짐차와 전차가 드나드는 길이 됩니다.


  전쟁이 터지면 모든 옷공장은 군인옷을 짓습니다. 모든 다른 공장도 군대에서 쓸 물건을 만듭니다. 총을 만들고 총알을 만듭니다. 여느 사람들이 쓸 물건은 공장에서 만들지 못하기도 하지만, 만들 수도 없습니다. 낫이나 쟁기나 호미를 만든다 하면 중앙정부에서 큰소리로 나무라겠지요. 낫이나 쟁기나 호미를 들고 들판에 나간다 하면 군인들은 큰소리로 꾸짖겠지요. 연필을 들고 아름다운 사랑을 시로 짓는다든지, 아름다운 삶터를 그림으로 옮긴다 하면, 정부 공무원이나 군인들은 코웃음을 치며 무슨 짓을 하느냐고 깔보겠지요.


  온통 전쟁통인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합니다. 전쟁통인 나라에서는 겨우 학교를 다니더라도 아이들은 전쟁놀이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서로를 죽이면서 나도 죽는 전쟁인 줄 아직 살갗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다리가 잘리고 머리에 구멍이 나야 비로소, 아아 전쟁이었구나, 하고 깨닫다가 숨을 거둡니다. 깨달을 만하면 모두 죽습니다.


  온통 전쟁투성이인 곳에서는 젊은 사내도 전쟁터로 끌려가고 젊은 가시내도 전쟁터에서 몸을 팔아야 합니다. 온통 전쟁판인 데에서는 웃음꽃이 피지 못합니다. 그예 눈물바다입니다. 내가 너를 죽여도 눈물바다요, 네가 나를 죽여도 눈물바다예요. 이쪽에서든 저쪽에서든 모두 눈물바다를 이룹니다.


  총알과 미사일이 넘나드는 지구별은 아니라 할는지 모르나, 이 지구별은 우리 눈에만 잘 안 보인다 할 뿐, 수없이 온갖 총알과 미사일이 넘나드는 싸움별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믿으며 서로를 아끼는 길이 아니라, 서로서로 돈과 이름과 힘을 홀로 거머쥐려 하는 싸움누리 모습이 아닌가 싶어요.


  왜 대학교에 계급이 붙을까요. 왜 일자리마다 일삯이 다를까요. 왜 시골에서는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써서 흙을 일구어야 할까요. 왜 고등학교는 사람됨을 못 가르치고 입시문제만 집어넣을까요. 왜 어른들은 아이들과 사랑스러운 나날을 누리지 못하면서, 그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학교에 집어넣은 채, 하루 내내 돈벌이에만 마음과 몸을 빼앗겨야 할까요. 왜 영어에 그토록 목매달아야 하나요. 왜 텔레비전을 쳐다보며 웃고 울어야 하나요. 왜 도시에는 숲이 없을까요. 왜 국립공원에까지 굴을 뚫고 케이블카를 놓을 뿐 아니라, 국립공원 한복판에 화력발전소를 짓겠다며 밀어붙이기까지 할까요(포스코는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인 고흥 바닷가에 화력발전소를 지으려 합니다).


- “바보구나.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이루어져.” (54쪽)
- “레이코. 레이코가 아픈 원인은 집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닐까?” “시즈루?”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지금은 신경쓰지 않는 게 좋아. 그리고 혹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좋아.” (95쪽)


  사람들은 무엇을 느낄 때에 웃으며 즐거울까 아리송합니다. 내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 때에 웃고, 어느 때에 즐거운지 알쏭달쏭합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께서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1등을 거머쥐거나 우등상을 타야 웃습니까. 아이들이 2등을 하거나 10등을 하거나 막등을 하면 찡그리거나 웁니까. 회사에 나가 일하는 어른들께서는 어느 때에 웃고, 어느 때에 즐거운지 궁금합니다. 월급봉투가 두툼해야 웃습니까. 회사에서 계급이 높아져야 즐겁습니까.


- “우리는 쓸데없는 것까지 너무 느끼지. 그래서 녀석들이 들러붙는 거다. 남을 먹어버릴 만큼 비정해지거나 뻔뻔해지면 괜찮아.” “그 방법밖엔 없는 건가요?” “난 늘 그렇게 해 왔다. 자신이 찾는 거다. 혹시 너는 다른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지.” (134∼135쪽)
- “앗! 어째서 또?” “말했지. 내가 있는 곳에 네가 있는 거라고. 네가 접근하는 거야. …… 실망스럽겠구나.” “네에.” “하지만, 와서 즐거운 일도 많이 있었잖아? 친구들과 함께 보낸 많은 시간들. 사진은 유감이지만, 그것보다 소중한 것을 얻었잖아. 넌 오길 잘한 게야.” (141쪽)


  쿠마쿠라 다카토시 님 만화책 《샤먼 시스터즈》(대원씨아이,2006) 다섯째 권을 읽으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깁니다. 이웃사람을 살피기 앞서 언제나 내 삶을 살필 노릇인데, 왜 우리들은 ‘아름다운 삶’을 생각하기보다 ‘돈을 버는 삶’을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삶, 기쁜 웃음, 맑은 밥, 고마운 하루, 예쁜 이야기, 멋진 숲, 훌륭한 냇물, 따스한 보금자리, 넉넉한 마음씨, 고운 꿈, 밝은 사랑, 보드라운 손길, 그윽한 눈길, 씩씩한 가슴, 착한 말, 참된 글, …… 들을 아낄 때에 웃고 즐거울 만하지 않겠느냐 싶어요.


  나는 아침저녁으로 우리 시골마을 들소리와 멧소리와 하늘소리와 물소리를 맞아들으며 즐겁습니다. 아이들 소리와 옆지기 소리를 들으며 즐겁습니다. 나 또한 좋은 소리로 우리 살붙이를 얼싸안고 싶습니다. 나부터 내 작은 시골집에서 작은 땅뙈기 아끼고 싶습니다. 좋은 하루를 누리며 좋은 웃음으로 신나게 누리고 싶습니다. (4345.6.18.달.ㅎㄲㅅㄱ)

 


― 샤먼 시스터즈 5 (쿠마쿠라 다카토시 글·그림,대원씨아이 펴냄,2006.5.15./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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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자전거 책읽기

 


  시골 할아버지들이 경운기를 몹니다. 짐차를 모는 할아버지가 더러 있으나 으레 경운기를 몹니다. 경운기가 나오기 앞서, 시골 할배나 아저씨는 으레 소를 몰았습니다. 누구라도 으레 소를 몰며 들판으로 나가 들일을 했는데, 어느 무렵부터 자전거가 나타나 한 사람 두 사람 자전거를 장만해 자전거에 삽을 꽂고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자전거라는 탈거리 다음으로 오토바이가 나오고, 오토바이와 함께 자동차가 나옵니다. 짐을 싣는다든지 더 멀리 나간다든지 할 적에는 자동차가 퍽 좋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런데, 지구자원이 말라붙는다는 소리가 높은 오늘날까지도 지구자원을 갉아먹는 자동차만 끝없이 나옵니다. 새로 나오는 번쩍거리는 자동차조차 지구자원을 갉아먹는 자동차일 뿐입니다. 지구별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자동차는 만나기 너무 힘듭니다. 지구별을 갉아먹으면서 겉멋을 뽐내는 자동차만 넘칩니다. 자동차는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온통 나쁜 것투성이입니다. 내 다리와 내 몸이 덜 힘들게 해 준다고 하지만, 막상 자동차가 한 번 지나가면 끔찍한 배기가스가 피어나 내 몸을 망가뜨립니다. 자동차를 만든다며 공장을 돌리느라 내 삶터 물과 바람과 햇살을 더럽힙니다. 자동차 다닐 찻길을 닦는다며 숲을 밀고 들을 밀며 냇물까지 밀어냅니다. 자동차에 넣을 기름을 뽑느라 지구별 곳곳에 구멍이 뚫릴 뿐 아니라, 바다에서 석유를 캐내느라 바다는 아주 지저분해집니다. 캐내거나 뽑아낸 석유를 배로 실어나르느라 커다란 기름배를 만든다며 또 물과 바람과 햇살이 어지러워지고, 커다란 기름배는 기름을 태워 움직일 뿐더러, 참 자주 기름을 바다에 흘립니다. 기름배가 싣고 온 기름, 그러니까 석유는 자동차에 곧바로 집어넣지 못합니다. 정유공장이라는 데에서 다시 기름을 태워 ‘자동차에 넣을 만한 기름’으로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동안 새삼스레 물과 바람과 햇살은 자꾸자꾸 무너집니다. 다 만든 ‘자동차에 넣을 기름’은 또다시 기름을 태워야 굴러가는 커다란 짐차에 실려 온 나라 기름집에 보내고, 온 나라 기름집은 거듭 새삼스레 ‘기름을 태워 얻은 전기’로 불을 환하게 밝히면서 기름을 팝니다.


  여느 사람이 여느 살림을 꾸리며 모는 자동차에 넣는 기름 한 방울은 그냥 기름 한 방울이 아닙니다. 여느 사람이 여느 마을에서 여느 자동차를 몰며 쓰는 기름 한 방울은 그냥 기름 한 방울이 아닙니다. 자동차공장에서도, 기름집에서도, 기름 나르는 짐차에서도, 기름 나르던 짐배에서도, 정유공장에서도, 석유 캐는 나라에서도, 석유 캐는 나라에서 쓰는 기계에서도, …… 그야말로 끝없이 기름을 쓰고 또 쓰는 얼거리가 이어집니다.


  하나하나 돌이켜, 여느 마을 여느 살림집 여느 사람으로서 자동차를 안 몬다면, 자동차를 몰더라도 기름이 아니라 햇볕을 먹거나 물을 먹거나 바람을 먹으며 달리는 자동차를 몬다면, 모든 어지럽고 슬프며 지저분한 굴레를 걷을 수 있겠지요.


  시골마을 흙일꾼 할아버지가 삽 한 자루 자전거에 꽂고는 들판으로 들일을 하러 나옵니다. 자전거는 할아버지 걸음만큼 느립니다. 자전거는 시골 들바람을 시원스레 맞으며 천천히 달립니다. 삽자루 자전거가 달리는 시골 들바람은 맑고 상큼합니다. (4345.6.1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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