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와 ‘꼭’
[말사랑·글꽃·삶빛 15] 익숙하게 굳어진 말투

 


  아이들과 살아가며 어버이인 내가 하는 말은 언제나 아이들이 배우는 말이 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인 내가 하는 말을 늘 들으면서 아이들 나름대로 생각을 나타내고 마음을 드러내는 말마디로 삼습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지내는 어버이한테서 온갖 말을 듣습니다. 어느 말은 곧장 알아차리고, 어느 말은 하나도 못 알아차립니다. 어느 말투는 즐겁게 따라하고, 어느 말투는 조금도 따라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활짝 웃으며 말할 때에 아이 가슴에는 활짝 피어나는 웃음꽃이 스며듭니다. 어버이가 잔뜩 찡그리며 말할 적에 아이 가슴에는 잔뜩 그늘진 짜증스러움이 배어듭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말 지식’이 아니라 ‘말 삶’, 곧 말을 나누는 삶과 말에 담는 삶과 말로 일구는 삶을 물려주어요.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때에도 온갖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만화나 영화를 보면서 갖가지 말을 익힐 수 있어요. 그런데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한 아이’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떠한 마음도 사랑도 꿈도 없이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흐르기만 하는’ 말이 나올 뿐입니다. 이와 달리,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는 노상 ‘한 아이’만 바라봅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말은 여러 사람한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낯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 집 아이가 듣도록 들려주는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땅 어버이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으레 유아원부터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맡겨 버릇합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까지 집에서 삶을 보여주고 가르치며 물려주려 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날 한국땅 어버이는 아이들과 살가이 어울릴 겨를이 너무 적습니다. 꼭 아이한테 맞추어 일자리를 바꾸거나 일거리를 줄여야 하지는 않습니다만, 아이들이 즐겁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자면 돈만 많이 벌어야 하는 줄 잘못 생각합니다. 아이들 누구나 돈 아닌 사랑을 먹으며 자라야 하는 줄 미처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어느 회사에서든 ‘육아휴직’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돌볼 말미’를 마련합니다. 아이는 어머니만 낳지 않습니다. 아이는 어머니만 돌보지 않습니다. 아이는 두 어버이가 함께 낳고, 두 어버이가 나란히 돌봅니다. 곧, ‘아이를 돌볼 말미’란 두 어버이가 똑같이 받으면서 똑같이 마음을 기울여야 올바릅니다. 그나저나, 집에서든 조산소에서든 병원에서든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돌볼 말미’가 끝나지 않아요. 바로 이때부터 할 일과 맡을 몫과 나눌 사랑이 잔뜩 기다려요. 그래서 두 어버이는 아이를 낳기 앞서 둘이 앞으로 어떤 일을 어떻게 나누어 맡으면서 살림을 꾸려야 좋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한테 들려줄 말을 살피고, 아이한테 보여줄 집과 마을을 헤아리며, 아이가 누릴 옷과 밥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갓난쟁이일 적에는 갓난쟁이 몸에 맞게 젖을 물리고, 이가 나고 차츰 크면서 젖떼기밥을 마련하며, 젖떼기밥을 지나 어른과 똑같이 밥상에 앉아 밥을 먹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아주 마땅히, 아이 나이에 걸맞게 아이한테 들려주어 아이가 받아들이며 아로새길 말을 가누어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지으며 말문을 열어 줍니다. 이 같은 몫과 삶과 넋은 유아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떠넘길 수 없어요. 어느 어버이나 흐뭇하며 홀가분하고 즐거이 맡으면서 누릴 노릇이에요. 저마다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꿈과 사랑을 누리며 어여삐 자라도록 이끌어야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은 ‘말만 듣고 배우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좋으면서 즐거울까를 생각하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노래만 배우지 않고 노래에 담는 삶결을 함께 배워요. 아이들은 한글만 익히지 않고 한글 닿소리와 홀소리에 싣는 삶넋을 함께 익혀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밥 한 그릇 차려서 내놓을 때에도 배만 채우는 밥을 내놓지 않습니다. 아이가 기쁘게 받아먹을 사랑을 함께 담아 내놓아요. 아이가 입는 옷을 빨래할 때에도 아이가 누릴 사랑을 생각합니다. 아이하고 손을 잡고 길을 거닐 때에도 아이가 맞아들일 사랑을 헤아립니다. 모든 삶은 사랑이고, 모든 이야기는 사랑이며, 모든 말은 사랑이에요.


  이제 초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의무교육으로 삼아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아직 들지 않았어도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영어를 들을 뿐 아니라, 영어 노래와 영어 만화를 봅니다. 한국말이나 한국글(한글)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영어와 알파벳에 더 익숙해지고 말아요.


  우리 아이들이나 우리 어른들은 영어를 반드시 잘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땅 사람들은 누구라도 영어를 배워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땅에서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며 흙을 일구고 버스를 몰며 고기를 낚고 나물을 캐며 빗자루를 들고 사무실 펜대를 굴릴 사람들 모두 영어를 배우는 데에 삶을 들여야 할까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영어는 외국말이거든요. 꼭 배워야 할 외국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스스로 바라면서 찾고, 스스로 느끼면서 익힐 외국말일 때에 누구라도 즐겁게 배우면서 살뜰히 맞아들이리라 생각해요. 영어가 되든 일본말이나 중국말이 되든, 러시아말이나 핀란드말이 되든, 프랑스말이나 포르투갈말이 되든, 스스로 좋아하면서 아끼는 매무새로 익힐 수 있어야지 싶어요. 한편, 외국말을 익히기 앞서, 정작 한국사람으로서 익힐 말이란 내 이웃을 아끼며 사랑하는 넋으로 어깨동무할 말이어야지 싶어요. 이를테면, ‘손말(수화)’과 ‘점글(점자)’이에요. 내 곁 좋은 동무와 이웃을 아낄 수 있게끔, 한국땅 어린이집부터 손말과 점글을 함께 이야기하며 익히도록 이끌어야지 싶어요. 또한, 전국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표준말만 쓰도록 하는데, 고장마다 오랜 옛날부터 이어온 고장말을 서로서로 익힐 때에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서울 아이도 제주말과 전라말을 익혀야지 싶어요. 광주 아이도 경상말과 강원말을 익혀야지 싶어요. 대구 아이도 충청말과 전라말을 익혀야지 싶어요. 외국에 갔을 때에 그 나라 말을 할 줄 알아야 그 나라와 살가이 사귄다고들 하는데, 정작 한국사람 스스로 전라도에 가든 경상도에 가든 제주도에 가든, 전라말이나 경상말이나 제주말을 슬기롭게 깨닫거나 기쁘게 주고받지 못해요. 배우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니까요.


  파비오 제다 님이 빚은 푸른문학 《바다에는 악어가 살지》(마시멜로,2012)를 읽다가 14쪽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경우를 만나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어.” 하는 대목을 읽고, 18쪽에서 “그런 호텔과는 다르다. 절대 비슷하지 않다.” 하는 대목을 읽습니다. ‘절대(絶對)’라는 낱말이 잇달아 나와 눈과 입에 걸리적거립니다. 이 글월에 나오는 ‘절대’는 ‘절대로’와 같은 낱말이요, 말뜻은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입니다. 그러니까,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반드시’라는 말마디를 한자말로는 ‘絶對’나 ‘絶對로’로 적바림한다는 소리입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한국사람은 영어를 반드시 배우고 반드시 잘 해야 할까 생각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답게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슬기롭게 찾으면 맑게 빛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니까 배울 영어일 수 없고, 학교에서 시키니까 대학입시만 바라보는 시험공부 굴레에 갇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어 즐기는 공부여야지, 대학교에 가야 하니 외워야 하는 시험문제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스러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하고 사랑스레 나눌 말을 익힐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릴없이 받아들일 교과서 지식이나 시험공부 정보일 수는 없고, 티없이 깨우칠 삶이자 넋이자 말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슬픈 굴레에 익숙해지면 슬픈 굴레에 갇히며 딱딱한 말이 됩니다. 아픈 생채기를 달래지 않으면 아픈 생채기가 곪으며 메마른 말이 됩니다. (4345.6.1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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