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일기 39] 나무가 베푸는 숨빛
― 나무가 해맑기에 시골

 


  나뭇잎을 바라보면서 따분하거나 심심하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아름드리 나뭇줄기를 안으면서 춥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왜 이런 느낌이었는지 예전에는 찬찬히 헤아리지 못했어요.


  고즈넉한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귀를 어지럽히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가끔 대문 앞으로 짐차나 오토바이 지나갈 때가 있지만 하루에 몇 대 안 지나갑니다. 마을 어귀로 지나가는 자동차도 아주 드뭅니다. 자동차 소리가 아예 없지 않으나 거의 없어요.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아무 자동차도 지나가지 않아요. 오직 바람소리가 감돕니다.


  한낮에도 자동차 소리 없이 멧새가 우리 집 둘레에서 지절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시골살이란 바람살이일까? 시골노래란 바람노래일까? 시골빛이란 바람빛일까? 그리고, 시골살이란 풀살이일까? 시골노래란 풀노래일까? 시골빛이란 풀빛일까?


  나무가 있기에 숨을 쉽니다. 풀이 있기에 밥을 먹습니다. 풀밥을 즐겨먹든 고기밥을 즐겨먹든 풀과 나무가 있어서 밥 한 그릇 누립니다. 풀을 그대로 먹으면 풀이 있어야 하고, 고기를 먹자면 고기를 살찌우는 풀이 있어야 합니다. 풀밥이든 고기밥이든 모든 사람은 언제나 풀숨을 받아들이는 셈이에요.


  나무가 있어 집을 짓습니다. 나무가 있어 불을 피웁니다. 나무가 있어 종이와 연필을 얻습니다. 나무가 있어 호밋자루와 삽자루로 삼습니다. 나무가 있어 지게를 만들고 배를 뭇습니다. 석탄이 없고 석유가 없더라도 나무와 풀은 있어야 해요. 석탄과 석유 또한 나무와 풀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기에 생겨날 수 있어요.


  도시에서 문화나 정치나 사회나 예술을 꽃피우는 밑바탕이란, 제도와 시설과 돈이 아닙니다. 시골을 이루는 풀과 나무로 이루어지는 들과 숲이 바로 문화나 정치나 사회나 예술을 꽃피우는 밑바탕입니다. 시골들이 푸르고, 시골나무가 아름다울 적에 시골살이가 빛나고 도시살이가 알찹니다.


  나뭇잎을 바라보면서 하루 내내 재미나게 놉니다. 나뭇줄기를 쓰다듬으면서 어제도 오늘도 맑게 웃습니다. 나무 곁에서 숨을 쉬고, 나무 둘레에서 밥을 먹습니다. 아이는 나무 곁에서 까르르 웃으며 뛰놉니다. 어른은 나무 둘레에서 밝은 얼굴로 일손을 놀립니다. 시골에는 나무가 있어 푸릅니다. 시골은 나무가 우거져서 포근합니다. 도시에도 나무가 있으면 푸릅니다. 도시에서도 나무가 우거지면 사람들 마음에 따스한 사랑이 새록새록 퍼지리라 생각합니다. 4347.1.1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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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미 고르기

 


  지난 구월에 집안에 들인 누런쌀에서 바구미가 나온다. 다른 쌀에서는 바구미가 나오지 않는데, 이 누런쌀에서만 바구미가 나온다. 다른 쌀을 섞어서 불리기 앞서 바구미부터 고른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찍어서 개수대에 톡톡 턴다. 이 바구미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이 누런쌀 틈바구니에서 깨어났을까.


  어릴 적에 어머니 일손을 거들며 바구미 고르기를 으레 했다. 어릴 적에 툭하면 바구미를 고르면서 ‘바구미 고르지 않는 쌀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어머니는 바구미 깃든 쌀푸대 주둥이를 열어서 바람을 쏘여 놓곤 했는데, 바구미가 볼볼 기어나와서 마룻바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바구미를 고르며 예나 이제나 생각한다. 바구미 먹는 쌀은 농약을 덜 친 쌀일까? 바구미가 깃들 만큼 농약은 적게 남거나 없다고 여겨도 될까?


  바구미 있대서 농약을 적게 치거나 안 쳤을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어릴 적이나 요즈음이나 바구미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잡은 다음 개수대에 톡톡 털며 생각한다.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면 손끝에 붙잡히는 아주 작은 바구미인데, 이 작은 바구미와 개미를 나란히 놓으면 어느 벌레가 더 튼튼하거나 셀까? 손끝으로 누를 적마다 퍽 단단하며 야무진 벌레라는 생각을 지울 길 없다. 고작 쌀속을 파먹으면서 이렇게 단단하며 야무진 껍데기와 다리를 내놓으며 살아간다니, 참 대단하구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바구미들아, 너희는 쌀푸대 말고 풀숲으로 가서 너희 삶을 너희 깜냥껏 누리기를 빈다. 4347.1.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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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노래 부르기

 

 

  이오덕 님이 쓴 글에 백창우 님이 가락을 붙인 〈염소〉라는 어린이노래가 있다. 아이들한테는 살짝 길다 할 만한 노래이지만, 노랫말과 가락이 아름답다고 느껴 곧잘 이 노래를 자장노래나 놀이노래 삼아 불렀다. 보름쯤 앞서부터 이 노래를 종이에 반듯하게 옮겨적어 큰아이한테 보여주었다. 노래가 어느 만큼 익숙하니까 이 노랫말을 공책에 옮겨적으며 한글을 익히라고 했다.


  아이는 글씨놀이보다는 노래를 제대로 익히는 쪽에 더 마음을 쓴다. 그래서, 공책에 글씨는 더듬더듬 옮겨적고, 노래만 한참 부른다. 이렇게 보름쯤 흐르니, 큰아이는 노래를 한 군데도 안 틀리고 아주 잘 부른다. 어젯밤 잠자리에 큰아이가 〈염소〉를 아주 또릿또릿 맑으며 고운 목소리로 불러 주었다.


  잠자리에 들면, 작은아이가 먼저 조잘조잘 노래를 부른다. 누나랑 아버지더러 잘 자라며 부르는가 보다. 작은아이 조잘거림이 살짝 수그러들 무렵 내가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작은아이는 또 조잘조잘 따라한다. 내가 노래를 마치면, 큰아이가 살며시 큼큼 한 다음 노래를 부른다. 큰아이도 동생과 아버지가 잘 자기를 바라며 부르는 셈일 테지.


  서로서로 잘 자도록 노래를 불러 준다. 서로서로 마음 곱게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 고운 마음이 된다. 자장노래가 아름다운 까닭이란,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책을 읽어 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아름다우며 뜻깊은 까닭이란, 바로 우리들 목소리에는 우리 스스로 살찌우면서 둘레 사람들을 따스한 빛으로 감싸는 사랑이 깃들기 때문이로구나 싶다. 4347.1.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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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에 두고 나온 아이들

 


  내가 왜 시외버스에서 이렇게 골골대면서 몸이 아팠는가를 돌아본다. 스스로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탓일 텐데, 왜 나는 시외버스에서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을까.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삶인데, 아이들을 시골집에 두고 나온 탓 아닌가. 아이들하고 함께 다닐 만한 곳에 다니며, 아이들이 곁에서 신나게 놀 수 있을 만한 데에서 일을 하려는 내 뜻과 길인데, 이런 흐름하고 엇나가면서 몸을 축냈기 때문 아닌가.


  아이들하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으면 아플 일이 없다. 아이들과 맛나게 밥을 먹으면 아플 일이 없다. 아이들과 신나게 뛰놀다가 어른인 내 일을 하면 힘들거나 고될 일이 없다.


  아이들이 위층 아래층 걱정하지 않고 개구지게 뛰놀 수 있는 보금자리일 때에, 어른도 씩씩하고 아름답게 일할 수 있다. 아이들이 뭐 잘못 만질까 걱정할 일이 없이 신나게 놀 수 있는 터전일 때에, 어른도 착하고 참답게 일할 수 있다.


  어른도 속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운 시외버스라면, 아이들은 얼마나 힘들까. 어른도 도시에서 자동차 소리로 귀가 아프고 매캐한 바람 때문에 재채기가 나오면, 아이들은 얼마나 고될까. 아이들이 즐겁게 다니면서 방긋방긋 웃을 수 있는 마을이 되어야지 싶다.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웃으면서 맑게 노래하고 뛰놀 만한 도시요 시고이 되어야지 싶다. 4347.1.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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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과 일곱 살

 


  일곱 살이 된 큰아이는 새해 첫날 아침에 “나 이제 일곱 살 되었어?” 하고 묻는다. 지난해에는 “나 여섯 살 아니야. 다섯 살이야!” 했고, 그러께에도 “나 다섯 살 아니야. 네 살이야, 네 살!” 하던 아이인데, 일곱 살이 되니 나이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셈일까. 네 살이 되는 작은아이는 나이를 놓고 딱히 생각이 없다. 작은아이더러 세 살이라 하면 그러려니 네 살이라 해도 그러려니, 백 살이라 해도 그러려니 한다. 작은아이는 아직 스스로 몇 살이라고 말할 줄 모른다. 4347.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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