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일기 36] 밥상에 고구마풀
― 집안을 밝히는 푸른 빛

 


  지난 십일월 첫머리에 이웃 할매가 고구마 캐실 적에 일을 거들며 고구마를 조금 얻었어요. 그때 쥐가 쏠아서 이래저래 먹기 힘들 듯해서 버린다고 하는 고구마 가운데 서넛은 물을 담은 병에 놓아 줄기 오르는 모습을 보자 싶어 따로 챙겼습니다. 이레쯤 여러 병에서 고구마 잎사귀 푸르게 올랐는데, 꼭 하나만 남기고 모두 잎을 더 뻗지 못하고 속으로 썩었어요. 부엌 창가 자리는 저녁에 찬바람 새어 들어오니 추워서 이렇게 되나 하고 헤아려 봅니다. 저녁에는 따순 곳으로 옮겼다가 낮에 창가 자리로 두어야 하나 싶기도 해요. 그렇지만 하나 남은 고구마풀은 씩씩하게 한 자리에서 잎사귀를 내놓으며 한 달 남짓 우리 아이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밥상머리에 놓은 고구마풀은 밥을 차릴 적에 언제나 들여다봅니다. 아이들과 밥을 먹으면서 새삼스레 바라봅니다. 밥상머리에 꽃그릇을 하나쯤 두는 까닭을 어렴풋하게 깨닫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면서 차린 밥을 기쁘게 웃으면서 누리도록 북돋우는 빛이 바로 꽃 한 송이한테서 우러나오는구나 싶어요. 시골에서는 문만 열면 바로 풀밭이요, 앙증맞은 풀꽃을 언제 어디에서나 만나요. 십이월로 접어든 시골이라 하더라도, 동백꽃이 피고, 동백나무 둘레에도 밭둑과 길가에도 때이르게 피어나는 봄꽃이 있어요. 별꽃과 코딱지나물꽃은 벌써부터 작은 꽃망울 내놓고, 방가지똥도 이 추운 겨울에 노랗게 꽃을 피워 하얗게 씨앗을 맺어요.


  고흥은 날이 포근하니 겨울에도 겨울콩을 심습니다. 십이월을 지나 일월이 다가오는데에도 밭자락 군데군데 하얗게 콩꽃이 올라옵니다. 콩씨를 조그마한 꽃그릇에 심어서 밥상머리 한쪽에 놓아도 참 좋겠구나 싶기도 해요. 콩이 자라는 모습을 밥을 먹으면서 함께 누리고, 콩꽃이 피어 맑은 빛깔을 밥을 먹으면서 같이 즐길 수 있어요.


  옛날 사람들도 부엌이나 밥상에 꽃그릇을 살그마니 올렸을까요. 굳이 집안에까지 꽃그릇을 마련해서 꽃을 보려고 하던 사람은 없었을까요. 마당 한쪽을 꽃밭으로 가꾸어 바라보기만 하면 넉넉하다 여기고, 애써 밥상이나 부엌에는 꽃그릇을 놓을 까닭이 없다고 여겼을까요.


  참말 집 둘레 어디나 풀밭이고 꽃밭인 셈이니, 꽃그릇을 굽는다든지 마련한다든지 안 해도 된다고 느끼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고구마 한 알이라든지 당근 꽁당이라든지 가만히 놓고 푸른 줄기 올라오고 푸른 잎 뻗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쏠쏠하게 즐거운 살림 되리라 느껴요. 아이들이 마당에서 겨울에도 흙놀이를 하더라도, 집안에서 새롭게 푸른 빛을 바라보는 살림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구나 싶어요. 4346.12.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추워 안 추워

 


  밤 열두 시 가까운 때에 작은아이가 깬다. 밤오줌 마렵구나. 얼마나 착한가. 바지에 싸지 않고, 기저귀를 대지 않아도 되는 세 살이란! 아이들 밤오줌을 헤아려 기저귀를 대고는 밤새 숱하게 기저귀를 갈고는 이 오줌기저귀를 밤과 새벽과 아침과 낮에 쉴새없이 빨아대며 아이를 돌본 어버이라면, 아이들이 밤에 쉬 마렵다고 잠에서 깨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줄 알리라. 그리고, 이 아이들은 머잖아 어버이가 굳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혼자서 일어나 쉬를 누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어버이가 아이들 밤오줌 가리는 햇수는 아주 짧다. 나는 작은아이 밤오줌 거드는 일을 아주 즐겁게 한다. 큰아이는 앞으로 이태쯤 지나면 거들 일조차 없으리라 느끼고, 작은아이도 누나 따라 대여섯 해쯤 뒤면 어버이를 부르지 않고 홀로 씩씩하게 밤오줌을 챙길 테지.


  밤에 깬 아이인데, 잠을 더 폭 잘 들기를 바라면서 부러 바깥바람을 쏘여 본다. 네가 밤오줌 누는 김에 아버지도 밤오줌을 누어 보자. 작은아이를 왼어깨로 안는다. 작은아이가 “추워.” 하고 말한다. 나는 작은아이한테 “안 추워.” 하고 말한다. 작은아이는 “안 추워?” 하고 묻는다. “그럼. 저녁이잖아. 아니, 밤이잖아. 그리고 우리 집은 안 추워.” “안 추워?” “아직 한겨울도 아니야. 게다가 우리 집은 아주 따뜻하지. 할머니 할아버지 계신 데가 추워. 할머니 할아버지 이 추운 데 잘 계실까 모르겠네.” “할머니 할아버지 추워?” “아침에 전화라도 해 봐야겠다.” “응.” 작은아이를 잠자리에 누인다. 큰아이는 어느새 이불을 걷어찼네. 두 아이 이불깃을 여민다. 작은아이한테 속삭인다. “아버지는 아직 밤에 써야 할 글이 있어 마무리를 지을 테니까 먼저 자렴. 곧 올게.” “응.” 4346.12.2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버지 그림놀이] 사름벼리 날자 (2013.12.17.)

 


  꽤 오래 아이하고 그림놀이를 못 했다. 아이 혼자만 그림놀이를 했다.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이 잔뜩 밀리기도 했지만, 좀처럼 아이한테 제대로 곁을 주지 못했다.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그득 쌓인 어느 날 저녁,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싶어, 밀린 일을 더 미루기로 하고 접는다. 그러고는 종이를 펼친다. 작은아이가 이래저래 슥슥 금 몇 줄 긋고 던진 종이에다가 나도 덩알아 슥슥 그린다. 큰아이를 헤아리면서 큰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훨훨 나는 이야기를 그려 본다. 구름을 넘고 별과 나란히 하늘을 날도록 그린다. 이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과 잠든 날, 새벽까지 하늘 나는 꿈을 꾸었다. 아이더러 하늘 날도록 그림을 그렸는데 왜 내가 하늘을 날았을까. 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겨울눈

 


  좀 늦게 낮잠을 잔 아이들이 좀 늦게 깨어난다. 배고프지는 않을 테니 따로 주전부리를 챙겨 주지는 않는데, 이 아이들 아무래도 너무 늦도록 안 자려 하기에 토닥토닥 재우려고 하면서, 쉬를 누이고는 바깥을 바라보다가, 어라, 눈이 오네, 하고 깨닫는다. 깊은 저녁에 마을 한 바퀴 빙 돌며 저녁바람 쏘일까 했더니, 전남 고흥에 올들어 제대로 된 첫눈 드리운다. 큰아이는 춥다며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간다. 나 혼자 섬돌에 선 채 발가락이 얼든 말든 밤눈을 바라본다.


  아침이 되면 모두 녹을까. 아침이 되어도 살짝 쌓인 채 이럭저럭 눈놀이 할 만큼 될까. 아이들한테 “얘들아, 눈놀이 하고 싶으면 일찍 자야지.” 하고 말할걸 하는 생각은 겨우 재우고 나서 떠오른다. 그래도, 자장노래 부르며 살뜰히 재웠다.


  겨울이라 겨울눈 맞이하는 일이 마땅한데, 겨울에도 포근한 고장에서 살다 보니, 겨울눈은 아예 잊는다. ‘겨울눈’ 하면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이 가지마다 그득그득 맺는 조그마한 봉오리만 떠오른다. 이 찬눈 드리우면서 동백잎은 더 푸르게, 동백꽃망울은 더 단단하게, 이 겨울 씩씩하게 누리겠지. 이제 아이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서 누워야겠다. 아이들이 아버지 기다리겠다. 4346.12.2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골살이 일기 35] 20대가 없는 고흥
― 도시로 떠날 아이들 만나고

 


  아침에 읍내로 군내버스를 타고 간 뒤, 읍내에서 도양읍으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찾아갑니다. 도양읍 버스역에서 도양읍을 살짝 한 바퀴 돌고 나서 녹동고등학교로 갔어요. 오늘은 아침에 한 시간 반 동안 녹동고 3학년 푸름이하고 ‘삶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푸름이는 대입시험을 마쳤으며, 고등학교를 마치면 곧 도시로 떠나 대학교를 다닌다고 해요.


  그런데, 입시에 시달리면서 잠을 제대로 못 잤을까요. 아이들은 처음부터 책상에 엎드려서 잠을 자기도 합니다. 1/4쯤은 잠을 부르고, 1/4쯤은 맨 뒤에 앉아서 등을 돌린 채 수다를 떱니다. 그렇지만 1/2이 되는 아이들이 저를 바라보면서 눈빛을 밝혀요. 그래서 자는 아이는 굳이 깨우지 않기로 했어요. 이야기보다 잠을 바라는 아이라면 잠을 자야 맞아요. 이야기보다 저희끼리 수다를 떨 아이들도 저희끼리 수다를 떨어야지요.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도시를 떠나 시골마을 고흥으로 온 까닭을 들려주고는, 아이들더러 “고흥에 무엇이 없을까요?” 하고 물었어요. ‘영화관’이 없고 ‘백화점’이 없다고 말하더니, 누군가 ‘20대’가 없다고 말해요. 무엇이 없느냐고 물은 뒤 ‘고흥에 무엇이 있을까’ 하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어요. 그래, 너희 말대로 고흥에 20대가 없지. 그러면 왜 고흥에 20대가 없을까?


  녹동고등학교뿐 아니라 고흥고등학교에서도 고3 아이들은 입시를 마치고 모두 고흥을 떠나 서울로 가요. 고흥을 한 번 떠난 아이들은 어른이 되도록 고흥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처음에는 명절날 맞추어 돌아오다가도 나중에는 아예 안 오기 일쑤예요. 그러니, 고흥은 남녘에서 인구가 가장 빠르게 줄어드는 시골입니다.


  나는 아이들한테 내 삶을 들려주었습니다. 눈빛을 맑게 밝히는 아이라면 가슴으로 아로새겨 주리라 믿고 이야기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장만 갖고도 한국말사전 만드는 일을 이 시골에서 하는 마흔 살 아저씨는, 고속도로와 골프장과 공장과 발전소와 군부대를 비롯한 위해시설뿐 아니라 극장도 백화점도 아파트숲도 없이 조용하며 깨끗하고 아름다운 이 시골에서 뿌리내릴 생각이라고, 우리 집 아이들이 커서 나중에 이곳을 떠나더라도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은 고향이 되도록 집숲을 일구어 나무와 풀과 꽃과 흙과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사랑하며 살아갈 생각이라고, 찬찬히 말했어요.


  예쁜 아이들아, 왜 고흥에 20대가 없는 줄 아니? 다들 대학교만 바라보고 회사원이나 공무원만 바라보면서 우리 삶터이자 고향인 이 시골에 어떤 빛과 꿈과 사랑이 있는 줄 하나도 살피지 않고 아끼지 않기 때문이란다. 숲을 바라보지 않고, 바다를 껴안지 않으며, 나무와 풀과 흙을 보듬지 않기 때문이란다. 4346.12.1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고흥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