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빛과 그림자의 예술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18
캉탱 바작 지음, 송기형 옮김 / 시공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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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서 사진을 만들어 걸어온 길
 [찾아 읽는 사진책 82] 캉탱 바작, 《사진》(시공사,2004)

 


  사진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면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야구를 하며 살아가는 이라 한다면, 스스로 야구가 무엇인가 하고 갈피를 잡지 않을 때에 흔들리거나 샛길로 빠집니다. 과학을 하든 문학을 하든, 예술을 하든 여느 공무원으로 일하든 늘 매한가지입니다. 시골 면사무소 일꾼으로 일할 때에는 시골사람다운 넋에 면사무소 일꾼다운 땀방울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늘 제 삶자리를 옳게 바라보며 사랑스레 보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 할 때에는, 어버이다운 꿈과 사랑을 짓는 나날이어야 합니다. 이래저래 아이가 태어났으니 어버이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살가이 꾸리는 좋은 살림을 빚을 때에 비로소 어버이라 할 만합니다. 나이를 먹기에 어른이 아니에요. 어른다이 살아갈 때에 바야흐로 어른입니다. 아이들 가운데 너무 이른 나이에 생채기를 많이 받거나 아픔이 잦은 나머지 ‘애늙은이’가 되는 슬픈 목숨이 있어요. 이 아이들은 스스로 얼마나 사랑스러운 나날이요 어린이다운 꿈인가를 생각하지 못해요. 그래서 겉으로는 아이들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까맣게 타들어 간 외로운 넋이에요.


  사진은 한국사람이 빚지 않았습니다. 사진은 한국사람이 누리지 않았습니다. 사진기는 한국사람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람처럼 거의 누구나 아무렇지 않게 마음껏 사진을 찍는 지구별 사람도 없으리라 느낍니다. 참말, 한국사람은 사진 없이는 죽을 사람 같습니다.


  필름이나 메모리카드를 쓰는 사진기 말고, 손전화로 찍는 사진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합니다. 어린이부터 할멈 할아범까지 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지만, 막상 ‘사진을 누가 만들었을까’라든지 ‘사진을 왜 만들었을까’라든지 ‘사진이 어떻게 이 나라로까지 흘러들어 널리 퍼졌을까’ 같은 대목을 헤아리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서양사람 캉탱 바작 님이 엮은 《사진》(시공사,2004)이라 하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은 더도 덜도 아닌 ‘사진’입니다. 오직 사진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따지고, 오로지 사진이 어떻게 흘러왔는가 하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이 기념할 만한 회의가 있고 며칠이 지나자 벌써 “광학 기계 상점들은 다게레오타입 애호가들로 붐비게 되었다. 역사적 기념물과 각종 건물 및 조각품 들에 사진기를 들이대는 사람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누구나 자기 집 창가에서 보이는 전망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했다. 가장 형편없는 사진조차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낳을 정도로 이 기법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것이었고 당연히 경이롭게 받아들여졌다(24∼25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프랑스이든 영국이든 독일이든 어디이든, 유럽에서 처음 사진기계를 만들어 특허를 내놓을 무렵, 이들은 너나없이 온갖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건사하고 싶었다 합니다. 그러면 이무렵, 이른바 1800년대 끝무렵 즈음 한국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한겨레 사람들은 어떤 삶을 누리고, 어떤 넋을 빛내며, 어떤 나날을 보냈을까요.

  사진이 처음으로 한국땅에 들어올 무렵, 사진기를 쓰는 한국사람도 나타날 무렵, 여러모로 서양사람이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무렵, 일본사람조차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 한국땅 골골샅샅 사진으로 담을 무렵, 한국사람은 이 사진을 어떻게 느끼거나 바라보았을까요.


  오늘날 한국사람은 1800년대 끝무렵과 1900년대 첫무렵에 서양과 일본에서 한국땅 골골샅샅 누비며 한겨레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듯, 아프리카나 중남미나 인도나 네팔이나 티벳이나 몽골이나 베트남이나 동남아시아나 여기저기로 찾아다니면서 온갖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라밖 가난한 사람들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가난을 얘기하고, 나라밖 해맑은 자연을 사진으로 찍으며 자연을 노래하며, 나라밖 여느 사람을 사진으로 옮기며 삶과 꿈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미국에서는 대개 이름없는 떠돌이 사진사들이 사진 제작의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37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해마다 모든 초·중·고등학교에다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까지 졸업사진책을 내놓습니다. 혼인사진이나 돌사진은 으레 사진첩 한 권으로 두툼하게 묶입니다. 졸업사진책이든 혼안사진책이든, 이러한 사진책에 사진쟁이 이름이 박히는 일은 없습니다. 갓 태어난 사랑스러운 아이를 찍는 어버이는 제 아이들 사진에 제 이름을 새기지 않습니다.


  “초기의 영국 칼로타입 사진가들은 사회학적으로 상당히 동질적인 부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교양을 갖춘 그들은 과학만이 아니라 예술에도 관심이 있었고, 돈과 시간이 충분하여 오락과 취미에 탐닉할 수 있었다(40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사진은 틀림없이 어떤 모습을 꾸밈없이 담는다 합니다. 사진은 참말 어떤 모습을 내가 바라보는 대로 옮긴다 합니다.


  그러면, 내가 바라보는 어떤 모습을 고스란히 옮기는 일은 어떤 값을 하나요. 사진기가 1/100초이든 1/1000초이든 시간을 잘라내어 어떤 모습을 간직할 수 있다 하는 일이란 어떤 뜻을 담나요.


  사진을 찍는 일이란 내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 일이 될까요. 사진으로 찍어 어느 모습 하나를 되새기는 일이란 내 삶을 얼마나 좋아하는 일이 되나요. 사진으로 찍힌 삶과 사진으로 안 찍힌 삶은 서로 얼마나 다를까요.


  “부유한 부르주아지를 겨냥한 초호화판 사진관들은 대도시의 중심가에 자리를 잡았다 … 로열층에 위치한 사진관은 대리석과 수정으로 치장되었다. 사진관에 들어서면 치과병원의 대기실보다는 응접실에 더 가까운 방이 손님을 맞이했다(59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사진책 《사진》을 읽는 내내, 돈이 없고 이름이 없으며 힘이 없는 사람들이 누렸음직한 사진 이야기는 한 줄로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사진이 없고, 고단한 사람들한테는 사진이 멀며, 아프거나 슬프거나 힘든 사람들 둘레에는 사진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술을 하거나 신문기자 일을 하는 사람 가운데 몇몇이 뒷골목을 드나들며 사진 몇 장 찍곤 한다지만, 막상 뒷골목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 제 삶자리를 사진으로 옮기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에는 뒷골목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옮기는 이가 더러 나타납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 가운데에도 제 어둡거나 슬프거나 힘겹던 지난 삶자락을 낱낱이 옮기는 이가 드문드문 나타납니다. 그런데, 삶이든 무엇이든 꾸밈없이 담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는 사진 갈래에서만큼은, 좀처럼 여느 자리 여느 삶 여느 이야기 여느 꿈 여느 사랑을 들려주는 사진쟁이를 만나기 어려워요.


  “남북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철도 회사들은 사진가들을 고용하여 그들에게 한창 진행중인 철로 건설 사업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기차가 통과하게 되면서 펼쳐지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도록 했다(79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참 옳구나 싶으면서 참 슬프네 하고 느낍니다. 무언가 먹고살 길을 찾자면, 돈이 있는 사람이 시키는 일거리를 얻어야 한답니다. 어찌저찌 살림을 꾸릴 길을 걷자면, 돈이 될 사진을 찍고, 돈을 거머쥔 사람한테 가까이 다가서야 한답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다면, 참으로 이와 같다면, 내 좋은 보금자리에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빚으면서 내 좋은 꿈과 사랑을 살가운 이야기로 빚는 사진길을 걸으면 될 노릇 아니랴 생각합니다. 사진으로 돈을 버는 삶이 아닌, 내 삶을 사랑하며 누리는 나날 그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 그지없이 아름다운 모습 아니랴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진이란 고스란히 드러내는 빛살이요, 삶이란 고스란히 누리며 어깨동무하는 빛줄기일 테니까요.


  오늘날 한국땅에서 사진을 배우고 싶다 말하는 푸름이와 젊은이는 으레 서양 학문을 배우고 서양 문화흐름을 좇으며 서양으로 몸소 찾아가 사진학교를 다닙니다. 아무래도 사진이 태어나고 널리 퍼진 데는 서양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기 때문이고 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좀 달리 느낍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꼭 에스파냐라든지 덴마크로 글배움을 하러 가야 할까 궁금합니다. 시를 쓰거나 동화를 쓰거나 희곡을 쓰는 사람이 애써 칠레나 스웨덴이나 독일로 글배움을 하러 떠나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림을 그리고픈 이가 네덜란드나 벨기에나 영국으로 그림배움을 하러 찾아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내 곁 좋은 삶을 깨닫고 내 둘레 좋은 사람을 느끼며 내 자리 내 모습과 내 꿈과 내 사랑을 헤아리면서 사진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면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 스스로 내 자그마한 사진기 하나로 ‘내 새로운 사진길’을 열면서 ‘내 고운 꿈 실은 사진역사’를 이루면 어떠한 그림이 될까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특허가 될 수 없던 사진입니다. 처음부터 누구한테서 배우지 못하는 사진입니다. 고스란히 담는 사진이라는 빛깔이기 앞서, 내 눈길은 내 삶을 얼마나 고스란히 바라보며 고스란히 맞아들이고 고스란히 즐길 줄 아는가를 스스로 찾을 때에 사진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노래이든 영화이든 춤이든 만화이든 시나브로 예쁘게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서양사람은 서양나라에서 서양물결대로 사진을 이룹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한국결대로 사진을 일굽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사람대로, 시골사람은 시골사람대로,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누구나 제 삶을 사랑하는 결대로 사진을 보듬습니다. (4345.3.14.물.ㅎㄲㅅㄱ)


― 사진 (캉탱 바작 글,시공사 펴냄,2004.2.28./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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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드롭스 1
우니타 유미 지음, 양수현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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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줌 싸 주니 이불 빨래
 [만화책 즐겨읽기 130] 우니타 유미, 《토끼 드롭스 (1)》

 


  첫째 아이랑 처음 함께 살던 나날을 떠올립니다. 첫째 아이는 이불에 참 자주 쉬를 누었습니다. 천기저귀를 대더라도 늘 대야 하니까, 오줌을 누고 나서 곧장 갈아 주더라도 고추가 발개지기 마련입니다. 이제 막 쉬를 누었으니 다문 10분이라도 알몸으로 있으라 하는데, 이렇게 열어 놓았을 때 어김없이 쉬를 누곤 했습니다. 밤에 자면서 쉬를 푸지게 누어 이불까지 흥건히 젖기 일쑤였습니다. 여름에 태어난 첫째는 겨우내 두꺼운 이불을 자주 빨도록 이끌었어요.


  둘째 아이는 첫째 아이와 달리 아직 이불에 쉬를 거의 안 합니다. 그러나 둘째도 첫째처럼 오줌가리기를 할 무렵에는 어김없이 이불에 쉬를 할 테지요. 돌이 지나면 낮에는 기저귀를 푼 채 지내도록 하고 쉬를 누일 텐데, 이때에 이불이며 방바닥이며 책꽂이이며 온갖 곳에 쉬를 할 테지요.


  아이들 똥오줌 때문에 이불을 빨아야 하면, 이제 아침부터 두 팔이 욱씬욱씬 저리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이불을 빨래하면서, 아이들아 너희들 얼른 자라서 너희 이불을 너희가 신나게 밟으며 빨아 주렴,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너희가 이불에 똥도 누고 오줌도 누니 이불을 자주 빨아 보송보송 포근히 덮고 잘 수 있겠지요. 아버지 몸은 고단하고 고달프며 고되지만, 아버지 어릴 적에도 이불에 얼마나 자주 똥오줌을 누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 어느 화창한 가을날, 나는 외할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휴가를 얻어 고향집에 내려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7∼8쪽)
- 말인즉슨 혼자 살던 방년 79세의 외할아버지가 가족들 몰래 첩을 두고 아이까지 만들었다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에게 첩이나 숨겨둔 자식이 있었다면 솔직히 나도 심란했겠지만, 글쎄, 뭐랄까, 외할아버지가 그랬다면 왠지 용서가 될 것 같은 마음이 든달까. 오히려 제법이시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11∼12쪽)


  돌을 앞둔 둘째 아이는 하루에 네 차례 안팎 똥을 눕니다. 볼볼 기어다니던 아이 손을 만질 때에 차갑네, 하고 느끼면 어김없이 쉬를 누었거나 똥을 누었습니다. 아침 일곱 시 반 무렵 잠에서 깨어 꽁꽁거리는 아이가 엉덩이를 실쭉샐쭉 흔들며 아버지한테 기어오면, 나 똥 누었으니 얼른 기저귀 갈고 밑 씻어 주셔요, 하는 뜻입니다.


  밤에 자다가 쉬를 누면 으앙 하고 자지러질듯 울면서 기저귀를 다 갈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볼볼 기어다니며 놀 때에는 바지까지 축축히 젖도록 쉬를 두어 차례 누고도 암 말을 안 해요. 요 녀석, 밤에만 그렇게 울어대지 말고, 낮에 낑낑거리기라도 해야 알아차리지 않겠니.

 

 


- ‘친아버지가 죽었는데 이렇게 내버려둬도 되나? 죽었단 것도 제대로 안 가르쳐 준 거 아냐? 내가 여섯 살 때 죽는다는 걸 이해했었나?’ (15쪽)
- ‘이 회의의 주제는 린을 누가 맡아 주느냐……가 아니었나? 회의니 뭐니 하면서 그럴듯한 말들을 늘어놓고 있지만, 결국 이 사람들의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거 아냐?’ (23쪽)
- ‘엄마의 존재를 전혀 모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158쪽)


  아이들과 살아가는 나날이란 아이들과 몇 미터 안쪽에서 하루 내내 지내는 나날입니다. 아이들이 안 보이는 데로 가서 무얼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 또한 제 어버이가 안 보이는 데에 있으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 마주보거나 서로 느낄 만큼 가까운 데에서 숨결과 목소리 모두를 느끼며 함께 지냅니다.


  아이가 무얼 바라는지 아이가 말하지 않아도 헤아립니다. 아이가 입을 오물오물 꽁알꽁알 하는 소리를 다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짐짓 모르는 척합니다. 아이가 똑바로 말하도록 기다립니다. 아이한테 제대로 말하라고 이릅니다. 마음으로 알아들으니 말을 않더라도 얼마든지 아이가 입으로 털어놓기 앞서 찬찬히 이루어 줄 수 있지만, 이렇게 하는 일이란, 아이가 무럭무럭 씩씩하게 자라도록 이끄는 어버이 구실은 아니겠지요.


  때로는 심부름을 시키고, 때로는 나 혼자 말없이 집일을 하면서 아이가 곁에서 함께 하도록 부릅니다. 다 마른 빨래를 개면서, 자 여기 네 옷이니 네가 개렴, 하고 내밀기도 하고, 아이는 스스로, 이 옷 내 옷이야, 하면서 하나하나 집어 가서 조물딱거리며 갭니다.


  첫째 아이는 퍽 말끔히 빨래를 개기도 하지만, 어수룩하게 구기기도 합니다. 말끔히 갤 때에는 참 잘 갰다고 얘기합니다. 어수룩하게 구기면, 애써 빨아서 말렸는데 이렇게 구기면 어떡하니 하고 얘기합니다.


  둘째가 기저귀에 쉬를 해서 갈아야 할 때면 첫째 아이가 뽀르르 달려가서 새 기저귀 한 장을 가져옵니다. 첫째 아이가 딴청을 부리며 안 가져온다 싶어 아버지가 일어나서 가져올라치면 어느새 팩 일어나 휙 달려오면서, 내가 가져갈게, 하고 외칩니다. 오늘 아침에는 어머니가 둘째 기저귀를 벗기며 갈려 할 때에 첫째 아이가 말없이 기저귀 한 장을 가져옵니다. 따로 시키지 않았으나 아이가 으레 스스로 나서서 가져옵니다. 예쁜 아이요,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착한 아이요, 다부진 아이입니다.

 

 


- “린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하고 야무진 애예요. 적어도 당신들보다는 제대로 된 어른으로 클 겁니다. 린! 이런 삭막한 데는 애들이 있을 곳이 못 돼. 우리 집에 올래?” (25∼26쪽)
- 썰렁하기 그지없던 내 방은 먼지덩어리가 굴러다니는 일도 없어지고 잡지 나부랭이들이 구석으로 치워졌으며. (66쪽)
- “갈아입으면 그만이야.” “화 안 내?” “물론! 화낼 일도 아니고 비웃을 일도 아냐. 뭣보다 네가 안 그러면 이불도 잘 안 갖다 널고, 커버도 누레질 때까지 안 빨거든.” (125쪽)


  어느 집에서 태어나 자라는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모두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느낍니다. 어느 마을에서 동무를 사귀며 어느 고장말을 쓰는 아이라 하더라도 저마다 어여쁜 아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녀야 사회를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거쳐야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를 밟아야 아이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삶길을 찾아나서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이든 어린이집이든 학교이든 따로 안 다녀도 됩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사랑을 받아먹을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들은 더 똑똑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영어를 잘하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은 시험성적이 빼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자격증을 안 따도 되며, 아이들은 큰회사나 공공기관 일꾼으로 뽑히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누구보다 제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을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들은 이웃과 예쁘게 사귀고 동무랑 즐거이 어우러질 수 있으면 됩니다.


  책은 안 읽어도 돼요. 흙을 느끼고 바람을 마시며 물을 헤아릴 수 있으면 돼요. 학원은 몰라도 돼요. 햇살을 좋아하고 구름을 읽으며 별빛을 누릴 수 있으면 돼요. 사람들 복닥거리는 도시로 나아가야 하지 않아요. 스스로 먹는 밥과 스스로 입는 옷과 스스로 살아가는 집을 어떻게 건사하면서 어떻게 아낄 때에 좋은 삶인가를 깨달을 수 있으면 돼요.

 

 


- “애들은 어른들이 기분 안 좋으면 자기를 야단친다고 생각한다구.”(177쪽)
- “아빠가 된 게 아니라, 린에 대해서만 어찌어찌 맞춰 주게 된 거야. 다른 애들은 전혀 모르겠어.” (186쪽)


  우니타 유미 님 만화책 《토끼 드롭스》(애니북스,2007) 첫째 권을 읽습니다. 큰도시 여느 회사원으로 일하는 서른 살 아저씨가 갑작스레 만나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대여섯 살 어린이와 복닥이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서른 살 아저씨는 아이와 살아가는 나날이란 생각조차 한 일이 없습니다. 아이와 살아가기는커녕 아가씨와 사랑을 속삭이며 누리는 나날조차 생각을 못했다고 합니다.


  서른 살 아저씨는 보육원을 찾느라 애먹습니다. 바야흐로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하는 줄 헤아리지 못합니다. 집구석 치우느라 바쁘고, 아이한테 무엇을 먹이고, 아이한테 무엇을 보여주며, 아이한테 무슨 말을 들려주어야 하는가를 놓고 이리 부딪히고 저리 깨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맡아야 하는 아이라서가 아니라, 남녀가 사랑을 속삭여 낳은 아이를 놓고도, 오늘날 이 나라 여느 아저씨들은 이 아이들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좋은가를 좀처럼 생각하지 못하거나 아예 깨닫지 않으면서 지내지 않느냐 싶기도 해요. 아이들하고 어떤 밥을 먹고, 아이들하고 어떤 옷을 입으며, 아이들하고 어떤 집에서 살아야 서로 아름다우며 좋은가를 돌아보지 못해요. 아이를 낳기까지 어른으로서 어떤 삶을 꾸리며 어떤 넋으로 어떤 일을 했는가를 헤아리지 못해요.

 

 


- ‘허걱! 애 데리고 아침 지하철 타기도 참 못해먹을 짓이네.’ (52쪽)
- 엄마도 그런 말을 했었지.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희생해 왔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왠지 모르게 그 말이 가슴 한구석에 걸렸다. 곱씹어 보면 그건 엄마는 우리들을 건사하기 위해 희생을 감수했다는 뜻인데, 애 키우는 게 다 그런 건가? (87쪽)


  도시 한복판에서 아이를 데리고 전철을 타는 일이란 참 못해먹을 짓입니다. 겪어 보았으면 누구나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시 한복판에서 아이를 데리고 전철을 타는 일뿐 아니라, 어른으로서 도시 한복판에서 전철을 타는 일마저 참 못해먹을 짓이 아니랴 싶어요. 느긋하게 오가는 전철길이 아닌 끔찍하다 여기는 지옥철이 된다면,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참 슬픈 길이에요. 아이가 먹기에 나쁜 밥이라면 어른이 먹기에도 나쁜 밥입니다. 아이가 보거나 듣기에 안 좋은 이야기라면 어른이 보거나 듣기에도 안 좋은 이야기이기 마련입니다.


- “그렇구나. 할아버진 이 꽃을 제일 좋아했지.” (19쪽)


  만화책 《토끼 드롭스》 첫째 권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을 그린 분은 그림을 참 못 그리는구나 싶습니다. 어설프며 어수룩한 그림이 곳곳에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만화책을 즐겁게 읽습니다. 그림은 못 그려도 되니, 이야기를 담아 주면 되거든요. 이야기는 없으면서 그림만 예쁘장하대서 만화책을 즐거이 읽지는 못해요. 그림결은 삐뚤빼뚤하거나 엉망진창과 가깝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살가우면서 빛난다면 기쁘게 넘기는 만화책으로 삼을 수 있어요.


  초점이 어긋나거나 흔들린 사진이라 하더라도 이야기 예쁘게 담았으면 아주 아름답습니다. 초점이 잘 맞고 안 흔들린 사진이라 하더라도 이야기 하나 밍숭맹숭하거나 아예 없다면 조금도 볼 만하지 않습니다.


  삶은 빈틈이 하나 없는 나날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빠짐없이 갖추어야 어버이 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빠짐없이 잘 해내야 예쁜 아이가 아닙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면서 사랑을 물려주는 어버이입니다. 사랑을 받아먹으며 사랑스레 웃고 떠들며 노는 아이입니다.


  오줌을 싸 주니 이불을 빨아요. 낑낑거리니 한 번 더 안아요. 졸립다 하니 자장노래를 불러요.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니 내 배에 엎드리도록 한 뒤 토닥토닥 재워요. 배고프다고 울어대니 젖떼기밥을 먹이고 어머니젖을 물려요. 심심하다고 하니 함께 손을 맞잡고 춤도 추고 공놀이도 하고 달리기도 하며 들판을 누벼요.


  좋아하는 마음으로 서로 빙긋 웃으며 살아가는 좋은 삶벗인 살붙이예요. (4345.3.13.불.ㅎㄲㅅㄱ)


― 토끼 드롭스 1 (우니타 유미 글·그림,양수현 옮김,애니북스 펴냄,2007.12.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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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책 문지아이들 73
앨런 앨버그 지음, 자넷 앨버그 그림, 김서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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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공룡 책’이 재미없고 안 궁금해요
 [환경책 읽기 36] 앨런 앨버그·자넷 앨버그, 《지렁이 책》

 


- 책이름 : 지렁이 책
- 글 : 앨런 앨버그
- 그림 : 자넷 앨버그
- 옮긴이 : 김서정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2006.4.24.)
- 책값 : 7500원

 


  호미나 삽으로 땅을 파면 지렁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호미나 삽으로 땅을 파는데 지렁이가 나오지 않는다면, 퍽 무섭습니다. 지렁이가 살아가지 못하는 땅이란 사람 또한 살아갈 만하지 않은 데라 할 테니까요.


  몇 해 앞서부터 정부가 앞장서며 4대강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온나라 물줄기를 곧게 펴는 일을 벌입니다. 수많은 삽차가 땅을 파고 끝없는 짐차가 돌을 퍼붓다가는 시멘트를 어마어마하게 들이붓습니다. 작은 시골 냇물조차 이렇게 망가져요. 아마, 어느 누구도 땅속에서 살아가는 지렁이를 살피거나 들여다보거나 생각하지 않겠지요. 지렁이뿐 아니라, 쑥이든 억새이든 갈대이든 민들레이든 무어든 무어든 냇가나 물가나 냇둑에서 자라던 숱한 풀들이 뽑히거나 잘리거나 죽는 일은 아랑곳하지 않겠지요. 피라미 송사리 죽든 말든 생각조차 않겠지요.


  도시에서 재개발을 한다며 옛집 허물고 아파트를 올려세울 때에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예전에 아주 가끔 아파트 공사터를 멀찌감치 바라본 적 있는데, 몹시 깊이 파헤친 땅속은 되게 무서웠습니다. 도무지 어떠한 목숨이라고는 깃들지 못할 듯한 흙덩이만 보였어요. 시뻘겋거나 시커먼 흙덩이도 틀림없이 흙일 테지만, 이 흙덩이를 밑에 깔고 높이높이 올리는 시멘트 건물이란 사람들 몸에 얼마나 좋을는지 알쏭달쏭해요.

 

 


.. 지렁이들은 보통 걱정없이 태평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지렁이로 사는 일도 만만치 않답니다. 축구의 인기가 날로 높아 가는 것도 지렁이에게는 심각한 골칫거리예요 ..  (7쪽)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봄입니다. 예부터 봄이면, 꽃이 피고 새가 운다고 했어요. 우리 집 창호종이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을 느끼며 아침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이 빛살처럼 따사롭게 온 집안을 감도는 봄기운이 고맙습니다. 꽤 이른 새벽에는 참새가 재재거리며 날아다니고, 이윽고 참새보다 덩치 큰 새가 날아다닙니다. 얼마 앞서부터는 참새나 딱새나 박새를 잡아먹는 꽤 큰 새를 몇 마리 보았습니다. 아직 들판에는 누런 빛깔이 더 많은데, 하루가 다르게 푸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들새와 멧새 먹이가 될 벌레도 많이 깨어나겠지요.


  그러나, 이런 꽃 피고 새 우는 봄을 오늘날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느낄까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꽃송이나 새소리로 봄을 느끼던 일하고는 사뭇 동떨어진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달력을 보며 봄을 말할 뿐입니다.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며 봄을 들을 뿐입니다. 아가씨들 옷차림에서 봄을 본다 할 뿐입니다.


  참말 봄이란 ‘백화점 에누리’가 봄이 되어도 될까요. 참으로 봄이란 ‘초·중·고등학교 새학기’가 봄이 되어도 되나요.


  꽃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맞이하는 봄이란 얼마나 봄다운가요. 새를 느끼지 못하면서 맞아들이는 봄이란 얼마나 봄이라 할 만한가요.


  봄이 없는 데에 여름이 없습니다. 여름이 없는 데에 가을이 없습니다. 가을이 없는 데에 겨울이란 없습니다.

 


.. 지렁이야 세상 어디 가나 다 똑같지 않겠냐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건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  (18쪽)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찹니다. 봄바람이라고 마냥 따사롭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봄에도 찬바람이 붑니다. 아직 봄이니 살랑이는 따순바람과 함께 서늘한 찬바람이 함께 찾아듭니다. 그래도 봄인 만큼 햇살은 더 눈부시고 햇볕은 더 따뜻합니다. 후박나무 빨래줄 기저귀는 금세 마릅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햇살과 바람을 느끼며 마당에서 뒹굽니다. 더 따스해지고 더 포근히 바람이 불면, 이제 들판과 멧자락으로도 마실을 다니리라 생각합니다. 한 해 두 해 자라나면서 아이들 스스로 멧길을 타고 들판을 내달리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터전에서 좋은 살림을 일굽니다. 좋은 살림을 일구며 좋은 생각을 빚습니다. 좋은 생각을 바탕으로 좋은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어디에서나 언제나 좋은 하루입니다. 좋은 밥이고, 좋은 벗이며, 좋은 일입니다.


  좋게 어우러지면서 씨앗 하나 심습니다. 씨앗이 며칠쯤 지나 싹이 틀까 기다립니다. 싹이 튼 씨앗은 얼마나 씩씩하게 줄기를 올릴는지 다시 기다립니다. 줄기를 올릴 새싹이 언제쯤 새잎을 틔우며 씩씩하게 푸른 옷을 입을는지 거듭 기다립니다.


  꼭 모든 사람이 밭을 일구지 않아도 된다 여길 수 있지만, 다문 한 평이라도 스스로 밭을 일구지 못한다면 너무 슬픈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문 한 평조차 내 두 다리로 밟을 흙이 없고 만질 흙이 없으면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구나 싶습니다.


  흙에 뿌리내리는 풀을 보고 꽃을 볼 때에 내 마음속에서도 사랑이 자라고 믿음이 꽃피운다고 느껴요. 흙에 기대어 살아가는 지렁이를 보고 벌레를 보면서 내가 어디에 어떻게 기대며 삶을 누리는가를 돌아본다고 느껴요.

 


.. 지렁이는 태초에 시간이 시작될 때부터 이 땅 위에서, 아니지, 땅 속에서 살았습니다. 공룡들이 시끄럽게 쿵쾅거리고 다니면서 서로 치고받고 할 때, 지렁이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  (22쪽)


  앨런 앨버그 님과 자넷 앨버그 님이 함께 빚은 《지렁이 책》(문학과지성사,2006)을 읽습니다. 지렁이를 기르는 이야기라든지, 지렁이가 이 지구별에서 무슨 일을 한다는 이야기라든지, 지렁이 한 마리가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이야기는 없는 책입니다. 그저 ‘지렁이 책’입니다.


  지렁이 그림이라지만, 지렁이마디를 그리지 않습니다. 지렁이 눈을 사람 눈처럼 그립니다. 그래도, 이 《지렁이 책》에 나오는 지렁이들은 예쁘장합니다. 참말 예쁘장한 지렁이들이 나옵니다.


.. 지렁이는 우리가 이 땅에 살기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아마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여기 있을 거예요. 지렁이는 땅의 제왕이랍니다 ..  (34쪽)

 


  아마 지렁이 스스로 저희가 대단하게 무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지렁이는 지렁이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지렁이가 무얼 먹으며 지구별 쓰레기를 없애는가를 낱낱이 밝히지 않아도 돼요. 지렁이가 누는 똥 때문에 흙이 살아난다는 대목을 애써 드러내지 않아도 돼요. 지렁이는 그저 아주 오래오래 이 지구별에서 이름도 자취도 훈장도 도서관도 딱지도 재산도 토지문서도 아무것도 없이 슬기롭게 살아왔어요. 때로는 삽날에 찍혀 죽고, 때로는 두더쥐한테 잡아먹히고, 때로는 가뭄에 말라죽고, 때로는 큰물에 휩쓸려 죽으면서, 이들 지렁이는 지렁이대로 한삶을 누렸어요.


  찬찬히 돌아보면, ‘공룡 책’보다 놀랍다 여길 만한 ‘지렁이 책’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먼 옛날 말라비틀어 죽었다는 공룡들 모습을 되살리려고 용을 씁니다. 공룡 화석을 모으고 공룡 박물관을 만듭니다. 공룡 유전자를 살피고 공룡뼈가 어떻다는 둥 떠듭니다. 공룡 그림책을 만들고 공룡 영화를 찍어요.


  참 웃기지 않나요. 공룡이 지구별에서 무얼 했다고 공룡을 그렇게 떠들거나 섬기거나 노래하나요. 콩쾅거리며 시끄럽게 싸우며 살던 공룡은 몽땅 숨을 거두었다는데, 왜 이들 공룡을 그토록 찾고 살피며 그리려 하나요. 마치, 사라진 옛 문명을 되새기는 일하고 같지 않나 싶어요. 화산재를 맞고 사라졌다는 옛 문명을, 서로서로 끔찍하게 죽이고 죽으며 사라졌다는 옛 나라들을, 엄청나게 돈을 들이고 품을 들여 되살리려는 일하고 다 똑같구나 싶어요. 그저 전쟁으로 일삼던 옛날 사람들 이야기를 왜 자꾸 들먹이면서 되새기는데다가 ‘역사’라는 이름까지 붙여 아이들한테 가르치는지 모르겠어요. 서로 죽이고 죽던 일이 어떻게 역사가 되거나 학문이 될 수 있나요.


  나는 공룡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아요. 나는 오늘 아침 들은 새소리가 서로서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인가 하는 대목이 궁금해요. 나는 우리 뒤꼍 땅뙈기에서 지렁이가 몇이나 살아가는지 궁금해요. 땅이 조금 더 폭신폭신해질 무렵 밭갈이를 할 때에 지렁이가 얼마나 나올는지 궁금해요.


  고구려 아무개 임금님이 땅을 얼마나 넓혔는지 하는 이야기보다, 고구려 무렵에는 어떤 지렁이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발해라든지 옛조선 이야기보다 발해나 옛조선 무렵 지렁이는 어떠했을까 하는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공룡들이 서로 죽이고 물어뜯을 무렵 지렁이는 어떠했을까 하는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라는 마을에서 살던 지렁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땅 영광과 기장이라는 마을에서 살아갈 지렁이는 어떤 모습일는지 궁금합니다.


  서울에도 지렁이가 있을까요. 부산에도 지렁이가 사는가요. 도시에서 지렁이들은 어떻게 삶을 버티는가 궁금합니다. 헬리콥터로 온 들판과 멧자락에 농약을 뿌려대는데, 이런 판에 지렁이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4345.3.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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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3-1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둥이들도 이책 참 재밌어했어요.
손에 착 들어오는 책크기도 알맞구요.^^

숲노래 2012-03-13 18:15   좋아요 0 | URL
네, 참 재미나게 엮었어요.
그래도 어딘가 한 구석 아쉬운 대목이 있어요.
재미나게만 엮느라
막상 지렁이가 무언가 하는 이야기는
한 줄로도 밝히지 못했어요...
 
빨간 금붕어 난 책읽기가 좋아
스테파니 블레이크 지음, 심지원 옮김 / 비룡소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시험공부 때문에 망가지는 어린이
 [어린이책 읽는 삶 19] 스테파니 블레이크, 《빨간 금붕어》(비룡소,2008)

 


- 책이름 : 빨간 금붕어
- 글 : 스테파니 블레이크
- 옮긴이 : 심지원
- 펴낸곳 : 비룡소 (2008.1.18.)
- 책값 : 6500원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다니는 동안 시험을 참 많이 치렀습니다. 학교는 무엇인가 배우러 다니는 곳이라 하지만, 그때나 이때나 가만히 돌아보면, 학교는 시험을 치르는 곳이 아니랴 싶습니다. 늘 시험을 치르고, 언제나 시험문제를 외도록 내모는 곳이라고 느껴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배우는 즐거움’이나 ‘배운 무언가를 나누는 기쁨’을 맛볼 겨를이 없어요. 어쩌면, 처음부터 이러한 이야기하고는 동떨어진 데가 학교라 할 수 있어요. 배움도 가르침도 나눔도 없이, 시험문제와 성적표만 남는 데가 학교인지 몰라요.


.. 나는 알리스와 함께 교실에 들어갔어요. 곧 수학 시험이 시작되었지요.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어요. 옆을 슬쩍 보았더니 알리스는 거의 다 푼 거 있죠. 난 하나도 풀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나는 알리스의 시험지를 베끼려고 했어요. 그러자 알리스가 신경질을 내더니 큰 소리로 외쳤어요. “선생님! 잔이 내 걸 훔쳐봐요.” ..  (8∼9쪽)


  학교가 학교다움을 잃은 모습이 ‘한국땅다운 학교 모습’으로 뿌리내렸다고 느낍니다. 초·중·고등학교 모두 대학교만 바라보도록 이끌어요. 대학교를 바라보는 눈길은 내 꿈이나 뜻이나 사랑이 아닌 성적표 한 가지입니다. 막상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꿈이나 뜻이나 사랑은 아랑곳없이 학점과 자격증과 이력서만 살피고 맙니다. 학문도 자유도 생각과 사랑도 없는 톱니바퀴입니다.


  왜 학교에서는 삶을 가르치지 않을까요. 왜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어울려 즐거이 놀도록 놓아주지 않을까요.


  학교를 세우는 까닭은 모든 아이들 머리속에 틀에 박힌 지식조각을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학교를 보내는 까닭은 모든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도록 미리 담금질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외우는 교과서로 아이들 모두 똑같은 넋 똑같은 몸짓 똑같은 차림새로 닦달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동무를 만나고 언니 오빠 동생 누나 형하고 어울리려고 학교에 갑니다. 저마다 다른 보금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마을에서, 저마다 다른 어버이한테서, 그동안 차근차근 받으며 북돋운 꿈과 뜻과 사랑을 다 함께 예쁘게 나눌 뜻으로 한 자리로 모입니다.


  이야기가 있을 때에 학교입니다. 회초리가 있거나 출석부가 있거나 교과서가 있으면 학교가 아닙니다. 마음이 있을 때에 학교입니다. 시험지가 있거나 성적표가 있거나 행동발달사항을 따질 때에는 학교가 아닙니다. 흙이 있고 나무가 있으며 풀이 자랄 때에 학교입니다. 시멘트 건물에다가 플라스틱 잔디를 운동장에 깔고는 주차장이 자동차로 득시글거린다면 학교가 아닙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삶을 함께 나눌 때에 비로소 학교입니다. 아이들이 서로서로 생각을 주고받을 때에 바야흐로 학교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여러 해 먼저 더 살아온 나날을 슬기로이 빛내며 좋은 꿈을 들려줄 때에 시나브로 학교입니다.

 


.. 수학은 아무래도 모르겠는데 어쩌라고요 … “수학을 빵점 맞았어요. 아무것도 모르겠단 말이에요. 이제 학교에도 가기 싫어요!” “잔, 들어 보렴.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야. 넌 국어랑 체육, 음악, 미술을 아주 잘하잖니.” ..  (10, 13쪽)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던 일은 언제나 괴롭게 떠오릅니다. 수도 없이 치른 시험 가운데 즐거웠던 일은 한 차례조차 없습니다. 시험공부도 괴로울 뿐이요, 시험을 치르고 나서 온 학교가 몽둥이찜질 소리로 가득 퍼질 때에도 괴로울 뿐입니다. 가을이면 시골집마다 콩 터는 소리 가득하다지만, 시험을 치르고 나면 교실마다 교사란 이름을 단 어른들이 학생이란 꼬리표 붙은 아이들을 흠씬 두들겨패며 엉덩이 살점 떨어지도록 털어대는 소리만 맴돌았어요. 나로서는 이런 끔찍한 감옥살이를 학교라 느낄 수 없어요.


  문득 생각합니다. 왜 옆 짝꿍한테 답을 알려주면 안 될까요. 왜 나는 옆 짝꿍한테서 답을 들으면 안 될까요. 서로서로 잘 모르니, 서로서로 머리를 맞대어 문제 하나 풀 수 없는가요. 여럿이 모둠을 지어 어려운 길을 헤쳐 나가도록 할 수 없을까요. 조금 더 잘 하는 아이는 조금 더 못 하는 아이를 돕습니다. 조금 더 똑똑한 아이는 똑똑한 머리를 씁니다.


  몸이 재거나 튼튼한 아이만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던지며 놀아야 하지 않아요. 몸이 굼뜨거나 여린 아이도 함께 섞이고 얼크러지면서 즐거이 공놀이를 할 수 있어야 해요. 서로 돕고 서로 마음을 기울이며 웃음꽃이 피고 땀열매를 맺을 때에 ‘체육’이고 ‘교육’이며 ‘학교’예요.

 


.. 안느 아줌마는 예순 살이에요. 아줌마는 화가이기 때문에 자기 집에서 일해요. 아줌마는 여러 가지 색깔이 들어간 아주 크고 화려한 그림을 그려요. 나는 아줌마가 쓰는 색깔들을 무지무지 좋아하지요. 그 색깔들을 보고 있으면 빨래 집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져요. 안느 아줌마는 늘 즐거워 보여요. 자기 일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 같아요 ..  (18쪽)


  이 사회가 온통 돈 이야기로만 흐르는 까닭이 어디 한 가지 때문이겠습니까만, 아이들이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과외니 영어니 뭐니 뭐니 하면서 지식조각만 머리에 집어넣다가는 초등학교 들어서기 무섭게 입시지옥 굴레에 가두니까,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돈 아니고는 헤아리지 않으리라 느껴요.


  이 사회가 몸이 아프거나 힘든 이웃을 살피지 못하는 밑뿌리도, 이 사회가 서로서로 예쁘게 얼크러지는 길로 나아가지 않는 밑바탕도, 이 사회가 오직 도시를 키우고 불리며 먹여살리는 흐름에서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밑모습 또한, 하나같이 학교 때문이라고 느껴요. 시험만 치르는 학교, 성적표만 만드는 학교, 아이들 머리통만 커다랗게 부풀리는 학교, 이런 학교가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삶터를 망가뜨리는구나 싶어요.

 


.. 오늘은 아빠가 쉬는 날이에요. 아빠는 하루 종일 나와 함께 있었어요. 아빠는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방바닥에 커다란 천을 깔아 주었지요. 나는 온종일 그림을 그렸어요. 학교나 뱅상, 알리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죠 ..  (27쪽)


  스테파니 블레이크 님이 빚은 조그마한 이야기책 《빨간 금붕어》(비룡소,2008)를 읽습니다. 시험공부 때문에 망가지는 어린이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 슬픈 어린이 곁에는 지난날 똑같이 시험공부 때문에 망가질 뻔하다가 씩씩하게 살아난 ‘예순 살 그림쟁이 할머니’가 있습니다. 예순 살까지 살아오며 즐거이 그림을 빚는 할머니는 고작 열 살쯤 되었을까 싶을 어린 벗한테 슬기로운 꿈을 곱게 들려줍니다. 열 살쯤 되었을까 싶을 어린이는 예순 살 그림쟁이 할머니를 좋은 벗으로 삼아 ‘삶넋’을 맞아들입니다.


  학교에서는 한 마디조차 듣지 못하던 삶넋입니다. 동무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 아이한테 속삭이지 않던 삶넋이에요. 교사도 교장선생도 어느 누구도 이 가녀린 어린이한테 예쁜 꿈이나 멋진 뜻이나 좋은 사랑을 나누지 않았어요. 학교에서는 어른이나 어린이나 몽땅 삶넋하고는 동떨어지고 말았어요.


  《빨간 금붕어》에 나오는 어린이는 학교 따위 금세 때려치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이는 학교를 굳이 때려치우지 않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무 가운데 하나를 좋아하거든요. 이 어린이는 아프고 슬픈 마음을 스스로 달래고 북돋웁니다. 예순 살 할머니를 동무로 삼으며 삶넋을 찬찬히 받아들이면서 제 꿈을 살찌우고 사랑을 꽃피웁니다. 이리하여, 바보스러운 학교 바보스러운 교사 바보스러운 학급동무를 차근차근 바꾸어 내요. 살가운 손짓 하나로 바꿉니다. 따스한 눈짓 하나로 바꿉니다. 포근한 몸짓 하나로 바꿉니다.


  살아가는 밑힘은 사랑입니다. 살아가는 밑넋은 꿈입니다. 살아가는 밑앎은 슬기입니다. 이제라도 학교가 학교다움을 찾으려 한다면, 바로 사랑·꿈·슬기가 무엇인가를 헤아리면서 곱게 아낄 수 있어야 합니다. (4345.3.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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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다섯 인생 -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홍윤(물만두)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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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삶으로 좋은 이야기 피우는 좋은 책
 [책읽기 삶읽기 100] 물만두 홍윤, 《별 다섯 인생》(바다출판사,2011)

 


  스스로 짓고 싶은 삶을 지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키우는 덧없는 생각은 삶으로 짓지 못합니다. 가장 고우며 가장 빛나며 가장 착한 생각은 언제나 삶으로 지을 수 있습니다. 어리숙하거나 어리석거나 어설픈 생각은 삶으로 짓지 못합니다.


  좋은 삶이란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내가 좋아하는 삶은 있으나, 좋으니 나쁘니 하고 가를 만한 삶은 딱히 없다고 느낍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기에 내가 바라는 길로 꾸리는 삶이 있어요. 나 스스로 사랑하기에 내 온마음을 기울여 보살피는 삶이 있어요. 나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나머지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삶이 있어요. 나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기에 이냥저냥 흘리고 마는 삶이 있어요.


  삶을 가꾸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라는 말이 있는데, 스스로 제 삶을 좋아할 때에 글을 쓸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으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속뜻을 담아요. 삶을 담는 글이기에 앞서, 삶을 좋아할 때에 글을 쓰는 나날이 돼요. 글은 삶을 드러낸다고 말하기 앞서, 글을 쓰려면 스스로 제 삶을 사랑하며 아낄 수 있어야 해요.


.. 10억으로 무얼 하겠는가. 10억을 번 다음에도 행복하지 않다면 말이다 … 낙오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어쩌면 누군가의 등을 밟고 올라서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 내가 남긴 날들보다 나를 기다리는 날들이여, 내가 너희를 더 기쁘게 맞이하마. 이제야 그걸 알다니. 나이 든다는 건 좋은 거란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  (14, 33, 217쪽)


  좋아할 수 있는 매무새라면 누구나 내 삶을 글로 담습니다. 좋아할 수 있고 아낄 수 있을 때에는 누구나 내 삶을 글로 차곡차곡 담으며 갈무리해요. 그러나, 좋아할 수 있는 자리를 넘어, 사랑하며 빛내려 한다면 한결 거듭나야 합니다. 이렇게 나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삶을 어떻게 일구고 싶은가 하고 꿈꾸어야 해요. 나 스스로 좋아하며 누릴 삶을 어떻게 짓고 싶은지 생각해야 해요.


  도토리 예배당 종기기 아저씨로 살아가며 할아버지가 된 권정생 님은 언제나 당신 마음밭에 씨앗을 심었어요. 그림책으로도 나오고 만화영화로도 나온 《강아지똥》은 다른 누구도 아닌 권정생 님 스스로를 사랑하며 빚은 글이에요. 이리 구르고 저리 뒹굴며 쓸모없다고 버려진 당신 몸뚱이라 하지만, 이 당신 몸뚱이를 어떻게 아끼고 사랑하며 좋아해야 할까를 생각하고 꿈꾸며 ‘강아지똥’ 하나를 빚었어요. 이 강아지똥이 밑거름이 되어 동시를 쓰고 동화를 쓰며 수필을 썼어요.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을 쓰고 《몽실 언니》를 쓰며 《우리들의 하느님》을 썼어요. 권정생 님 책을 읽는 사람은 많아도 권정생 님 사랑이 무엇인가 하고 함께 읽는 사람은 퍽 드문데, 스스로 가장 사랑하고 싶은 삶을 생각하며 누린 나날이 고스란히 깃든 글줄이라고 읽을 때에 내 마음밭에도 내 손으로 씨앗 하나 심을 수 있어요.


  내가 심을 내 마음밭 씨앗 하나는 내 삶을 가장 예쁘게 빛낼 씨앗 한 알입니다. 때로는 두 알이 될 수 있고, 어쩌면 석 알이나 넉 알이 될 수 있어요. 한 알은 내 삶을 북돋우고 한 알은 들꽃을 빛내며 한 알은 들새를 살찌울 씨앗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석 알 모두 내 배를 불리는 쪽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든 좋아요. 맨 처음부터 가장 사랑스레 빛날 수 있고, 차츰차츰 고운 빛을 찾을 수 있으며, 느즈막하게 아리따이 빛나는 햇살을 나눌 수 있어요.


.. 안락사에 찬성한다. 아파 보지 않은 사람, 아픈 사람을 돌봐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 장애인을 배려한다고 하더니만 우리 구역 투표소는 계단이 많은 교회였다. 휠체어를 들고 가나, 업고 가나, 장애인은 사람도 아닌가. 장애인이 투표하는 곳에서는 비장애인도 투표할 수 있다. 장애인만 불편할까? 임산부, 노약자 모두 불편하다. 왜 모르는 걸까? … 다른 것보다 장애아 어머니의 마음만 갖는다면, 다리에 점점 힘이 빠져 가는 부모님 생각을 조금만 한다면 이건 분명 고치기 쉬운 일이다. 왜 모든 관공서와 은행 같은 편의 시설에 계단이 있는지 ..  (19, 26∼28쪽)


  날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든 삶자락인가 하는 이야기가 아주 짙게 드러나는 글을 쓴 미우라 아야코 님이 있어요. 한창 눈부시게 빛난다는 아가씨 나이에 그만 드러눕고 말아 일곱 해를 내리 침대살이만 했다던가요. 이제 죽나 저제 죽나 하고 기다려야 하던 눈부신 젊음이었다고 하는데, 당신을 침대에서 일으켜 꽤 기나긴 해를 살아가며 옆지기를 만나고 책을 내놓으며 문학을 일구고 편지를 쓰도록 이끈 힘은 병의원 처방이나 수많은 약품이 아니라고 했어요. 아픈 몸이건 안 아픈 몸이건,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나 이렇게 숨을 쉬고 햇살을 먹으며 바람을 느낄 수 있는 하루란, 얼마나 대단히 고마운 선물이며 아름다운 삶인가 하고 느끼며,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고 꿈꾸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다만, 미우라 아야코 님은 침대에서 일어나 걷고 밥먹으며 여행까지 다닐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움직이고 나면 며칠을 드러누우며 쉬어야 했답니다. 이레나 보름을 내리 쉬며 몸을 달래는 일이 잦았다고 해요. 아픈 몸으로 수필을 쓰고 소설을 씁니다. 아픈 몸으로 사랑을 노래하고 믿음을 꿈꿉니다.


  문득 돌아보면, 미우라 아야코 님은 당신 몸이 씻은 듯이 낫기까지는 바라지 않았구나 싶어요. 아픈 몸이든 튼튼한 몸이든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여겼으니까요. 아픈 몸이기 때문에 당신 몸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깨달았으니까요. 아픈 몸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아픈 동안 당신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더 사랑스레 헤아리며 어깨동무하는 길을 보았다고 하니까요.


  누구라도 몸이 아파 드러누워야 한다면 괴롭겠지요. 나도 몸이 아파 집일을 못하며 꼼짝없이 끙끙 앓아야 하면 괴롭고 힘듭니다. 누가 이 집일을 맡아서 하나 걱정스럽고, 아픈 몸을 쉰다며 드러눕는 일이 안 아픈 몸으로 온갖 집일을 맡아서 할 때보다 훨씬 짐스러우며 무겁다고 느껴요. 그런데, 이렇게 무겁고 짐스러우면서, 어느 한편으로는 몹시 홀가분하고 기뻐요. 내 곁에 좋은 사람이 있어 나를 보살펴 주고, 집일이나 집살림을 거느리니까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제 몫과 길과 삶을 예쁘게 건사하니까요.


  줄 수 있는 사랑은 참 좋은 사랑입니다. 받을 수 있는 사랑 또한 참 좋은 사랑입니다. 돈이 많아 돈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도 좋은 사랑이요, 돈이 없어 돈을 나누어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좋은 사랑이에요. 가난한 살림이란 얼마나 좋은 사랑인가요. 가멸차서 돈을 나누어 주고 싶은 사람이 기꺼이 돈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좋은 빛줄기이거든요. 가난한 살림인 탓에 둘레에서 돈이나 여러 가지를 기쁘게 얻는다면, 받으면서 사랑스럽고, 나한테 주는 사람도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낄 테니, 서로 즐거운 나날이 되리라 생각해요.


.. 내가 만든 서재는 내 얼굴이다. 내 얼굴에 남의 눈과 코를 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 우리 나라의 장애인 문제는 가정에서부터 생긴다. 장애인 자식을 귀하게 여기면 사회 또한 그들을 귀하게 여길 것이다 … 이사 오면서 옛날 집 사진을 제대로 찍어 놓지 못한 게 제일 안타까웠다. 철문이 나무문으로 바뀔 때도 못 찍고, 장독대도, 펌프가 있던 수돗가도, 아궁이도, 쪽마루도 못 찍었다 … 그동안 안 읽은 책이 얼마나 많을까. 그 많은 책 중에 얼마나 많은 보석이 숨어 있을까. 그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내지 못한 것이 가슴에 박혀 아프다.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싶다. 좋은 독자가 아니어서 죄송하다고. 그래도 제발 책을 쓰시라고 말씀드리면 너무 뻔뻔할까? ..  (25, 195, 226, 321쪽)


  창호종이 문살로 아침햇살을 느낍니다. 저 멀리 멧등성이 너머로 새벽마다 보얀 빛이 서립니다. 창호종이 바른 문을 안 열면 희뿌윰히 밝다가는 노랗게 되는 결을 살짝 느끼고, 이내 온 방이 환해지는 빛을 느껴요. 창호종이 바른 문을 열고 대청마루에 앉아 저 먼 멧등성이를 바라보면, 새까만 밤하늘이 보라빛으로 물들다가는 노르스름한 빛깔로 바뀝니다. 이내 발그스름해지다가는 새하얀 빛으로 젖어들고, 시나브로 파아란 하늘이 됩니다. 밤하늘에서는 똑같이 시커멓게만 보이던 구름이 하얀 솜빛이 되는 모양새를 느낍니다.


  밤이 있어 아침이 있습니다. 달이 있어 해가 있습니다. 풀싹이 있어 풀꽃이 있습니다. 열매가 있어 씨가 있습니다. 사내와 가시내는 서로 좋은 짝꿍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서로 예쁘게 어울립니다. 아이와 어른은 서로서로 사랑스러운 님입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따사로이 누리는 봄입니다. 후끈후끈 달아오른 여름을 지나 시원한 산들바람 보드라이 누리는 가을입니다.


  하루하루 기쁜 꿈입니다. 언제나 좋은 이야기밭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사랑입니다. 늘 빛나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모든 삶은 어여삐 책입니다.


.. 책 사는 돈은 아깝지 않은데, 나 혼자만 보는 게 아까울 때가 있다 …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제목도, 주인공도, 줄거리도 기억 못하게 될지언정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 냄새, 내 기억의 편린 한 조각만 남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내가 책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어떤 지식도 지혜도 경험도 아닌 나 자신과의 소통, 내 과거와의 만남이다 … 내가 바라는 건 좋은 작품뿐이다 … 책만으로도 좋았던 그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니까 ..  (44, 46, 265, 273쪽)


  물만두 홍윤 님이 쓴 글을 갈무리해 엮은 《별 다섯 인생》(바다출판사,2011)을 읽습니다. 아픈 몸으로 살아낸 마지막 발자국을 담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문득, 홍윤 님이 아프지 않은 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할 때에도 이렇게 글을 썼을까 궁금합니다. 아프지 않은 몸으로 글을 썼다면 어떠한 결로 어떠한 꽃을 피우는 삶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아픈 몸이요 아픈 삶이기에 마지막에 ‘안락사’로 느긋하게 쉬도록 해 줄 수 있는 일을 나쁘게 볼 수 없다는 글줄을 읽다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걷는 길’을 받아들여야겠지만, 나는 ‘안락사’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꿈을 꾸는 얼굴로 조용히 잠들어 숨을 거둘 생각이거든요. 내 곁 아픈 사람이 아파 괴롭다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힘들지 않습니다. 내가 아파 괴로울 때에 내 곁에 있는 사람이 힘들어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아플수록 하루하루가 더 고맙습니다. 힘들수록 한 시간 한 분 한 초가 더 애틋합니다.


  괴로운 몸이 되는 까닭은 하루라도 더 살고 싶기 때문이에요. 괴롭게 몸부림치는 까닭은 한 분 한 초라도 더 버티고 싶기 때문이에요. 나는 살 만큼 살고서 조용히 삶을 놓고 싶어요. 삶과 다른 누리로 새롭게 이어가고 싶어요. 내 곁 좋은 사람들을 오래오래 바라보며 마음으로 담고 싶어요. 아이들 똥오줌기저귀 빨래하는 일이란 수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종이기저귀를 쓸 수 없어요. 날마다 내 두 손과 몸뚱이는 아이들 똥오줌 냄새 짙게 배요. 첫째하고 네 해를 똥오줌 냄새를 맡았고, 둘째하고 앞으로 세 해 더 똥오줌 냄새를 맡겠지요.


  좋은 삶을 좋은 사랑으로 빛내고 싶어요.


.. 다른 건 다 지나쳐도 아버지 생신만은 챙겨야 한다. 왜냐하면 울 아버지가 삐지면 무섭기 때문이다 … 아침부터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던 엄마는 활짝 핀 꽃이 눈에 띄어 집에만 있는 내게 보여준다며 사진을 잔뜩 찍어 오셨다 … 내가 안 봐도 감나무에는 감이 열린다 ..  (78, 184, 264쪽)


  수필책이라 할 《별 다섯 인생》을 가만히 덮으며 생각합니다. 홍윤 님은 어떤 꿈을 꾸며 살았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합니다. 아마, 대단하다 싶은, 또는 거룩하다 싶은, 아니면 놀랍다 싶은 꿈을 꾸었을까 안 꾸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다를 테지만, 삐지는 아버지를 생각하는 삶은 ‘보잘것없’거나 ‘수수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삐짐쟁이 아버지를 생각하는 삶이 참 대단하고 거룩하며 놀랍다고 느껴요. 아침에 쓰레기 버리러 나간 어머니가 꽃 사진 찍어 오는 모습을 생각하는 삶은 ‘하찮’거나 ‘흔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꽃송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삶이 참 예쁘고 사랑스러우며 믿음직하다고 느껴요.


  홍윤 님이 애써 들여다보지 않아도 감나무에는 감꽃이 피고 감잎이 흐드러지며 감열매가 맺습니다. 홍윤 님이 모르는 봄꽃이 온 들판과 멧자락에 가득합니다. 홍윤 님이 굳이 봄들을 누비며 냉이와 달래와 쑥과 씀바귀를 캐거나 뜯지 않더라도, 훙윤 님 어머님이 저잣거리에서 소담스레 장만해서 소담스레 된장국 끓여 내놓을 수 있어요.


  좋은 삶이고, 좋은 사랑이며, 좋은 글입니다. 좋은 사람이며, 좋은 이야기이고, 좋은 책입니다. (4345.3.12.달.ㅎㄲㅅㄱ)


― 별 다섯 인생 (물만두 홍윤 글,바다출판사 펴냄,2011.12.13./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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