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빛과 그림자의 예술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18
캉탱 바작 지음, 송기형 옮김 / 시공사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서양에서 사진을 만들어 걸어온 길
 [찾아 읽는 사진책 82] 캉탱 바작, 《사진》(시공사,2004)

 


  사진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면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야구를 하며 살아가는 이라 한다면, 스스로 야구가 무엇인가 하고 갈피를 잡지 않을 때에 흔들리거나 샛길로 빠집니다. 과학을 하든 문학을 하든, 예술을 하든 여느 공무원으로 일하든 늘 매한가지입니다. 시골 면사무소 일꾼으로 일할 때에는 시골사람다운 넋에 면사무소 일꾼다운 땀방울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늘 제 삶자리를 옳게 바라보며 사랑스레 보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 할 때에는, 어버이다운 꿈과 사랑을 짓는 나날이어야 합니다. 이래저래 아이가 태어났으니 어버이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살가이 꾸리는 좋은 살림을 빚을 때에 비로소 어버이라 할 만합니다. 나이를 먹기에 어른이 아니에요. 어른다이 살아갈 때에 바야흐로 어른입니다. 아이들 가운데 너무 이른 나이에 생채기를 많이 받거나 아픔이 잦은 나머지 ‘애늙은이’가 되는 슬픈 목숨이 있어요. 이 아이들은 스스로 얼마나 사랑스러운 나날이요 어린이다운 꿈인가를 생각하지 못해요. 그래서 겉으로는 아이들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까맣게 타들어 간 외로운 넋이에요.


  사진은 한국사람이 빚지 않았습니다. 사진은 한국사람이 누리지 않았습니다. 사진기는 한국사람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람처럼 거의 누구나 아무렇지 않게 마음껏 사진을 찍는 지구별 사람도 없으리라 느낍니다. 참말, 한국사람은 사진 없이는 죽을 사람 같습니다.


  필름이나 메모리카드를 쓰는 사진기 말고, 손전화로 찍는 사진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합니다. 어린이부터 할멈 할아범까지 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지만, 막상 ‘사진을 누가 만들었을까’라든지 ‘사진을 왜 만들었을까’라든지 ‘사진이 어떻게 이 나라로까지 흘러들어 널리 퍼졌을까’ 같은 대목을 헤아리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서양사람 캉탱 바작 님이 엮은 《사진》(시공사,2004)이라 하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은 더도 덜도 아닌 ‘사진’입니다. 오직 사진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따지고, 오로지 사진이 어떻게 흘러왔는가 하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이 기념할 만한 회의가 있고 며칠이 지나자 벌써 “광학 기계 상점들은 다게레오타입 애호가들로 붐비게 되었다. 역사적 기념물과 각종 건물 및 조각품 들에 사진기를 들이대는 사람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누구나 자기 집 창가에서 보이는 전망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했다. 가장 형편없는 사진조차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낳을 정도로 이 기법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것이었고 당연히 경이롭게 받아들여졌다(24∼25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프랑스이든 영국이든 독일이든 어디이든, 유럽에서 처음 사진기계를 만들어 특허를 내놓을 무렵, 이들은 너나없이 온갖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건사하고 싶었다 합니다. 그러면 이무렵, 이른바 1800년대 끝무렵 즈음 한국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한겨레 사람들은 어떤 삶을 누리고, 어떤 넋을 빛내며, 어떤 나날을 보냈을까요.

  사진이 처음으로 한국땅에 들어올 무렵, 사진기를 쓰는 한국사람도 나타날 무렵, 여러모로 서양사람이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무렵, 일본사람조차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 한국땅 골골샅샅 사진으로 담을 무렵, 한국사람은 이 사진을 어떻게 느끼거나 바라보았을까요.


  오늘날 한국사람은 1800년대 끝무렵과 1900년대 첫무렵에 서양과 일본에서 한국땅 골골샅샅 누비며 한겨레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듯, 아프리카나 중남미나 인도나 네팔이나 티벳이나 몽골이나 베트남이나 동남아시아나 여기저기로 찾아다니면서 온갖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라밖 가난한 사람들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가난을 얘기하고, 나라밖 해맑은 자연을 사진으로 찍으며 자연을 노래하며, 나라밖 여느 사람을 사진으로 옮기며 삶과 꿈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미국에서는 대개 이름없는 떠돌이 사진사들이 사진 제작의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37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해마다 모든 초·중·고등학교에다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까지 졸업사진책을 내놓습니다. 혼인사진이나 돌사진은 으레 사진첩 한 권으로 두툼하게 묶입니다. 졸업사진책이든 혼안사진책이든, 이러한 사진책에 사진쟁이 이름이 박히는 일은 없습니다. 갓 태어난 사랑스러운 아이를 찍는 어버이는 제 아이들 사진에 제 이름을 새기지 않습니다.


  “초기의 영국 칼로타입 사진가들은 사회학적으로 상당히 동질적인 부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교양을 갖춘 그들은 과학만이 아니라 예술에도 관심이 있었고, 돈과 시간이 충분하여 오락과 취미에 탐닉할 수 있었다(40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사진은 틀림없이 어떤 모습을 꾸밈없이 담는다 합니다. 사진은 참말 어떤 모습을 내가 바라보는 대로 옮긴다 합니다.


  그러면, 내가 바라보는 어떤 모습을 고스란히 옮기는 일은 어떤 값을 하나요. 사진기가 1/100초이든 1/1000초이든 시간을 잘라내어 어떤 모습을 간직할 수 있다 하는 일이란 어떤 뜻을 담나요.


  사진을 찍는 일이란 내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 일이 될까요. 사진으로 찍어 어느 모습 하나를 되새기는 일이란 내 삶을 얼마나 좋아하는 일이 되나요. 사진으로 찍힌 삶과 사진으로 안 찍힌 삶은 서로 얼마나 다를까요.


  “부유한 부르주아지를 겨냥한 초호화판 사진관들은 대도시의 중심가에 자리를 잡았다 … 로열층에 위치한 사진관은 대리석과 수정으로 치장되었다. 사진관에 들어서면 치과병원의 대기실보다는 응접실에 더 가까운 방이 손님을 맞이했다(59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사진책 《사진》을 읽는 내내, 돈이 없고 이름이 없으며 힘이 없는 사람들이 누렸음직한 사진 이야기는 한 줄로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사진이 없고, 고단한 사람들한테는 사진이 멀며, 아프거나 슬프거나 힘든 사람들 둘레에는 사진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술을 하거나 신문기자 일을 하는 사람 가운데 몇몇이 뒷골목을 드나들며 사진 몇 장 찍곤 한다지만, 막상 뒷골목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 제 삶자리를 사진으로 옮기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에는 뒷골목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옮기는 이가 더러 나타납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 가운데에도 제 어둡거나 슬프거나 힘겹던 지난 삶자락을 낱낱이 옮기는 이가 드문드문 나타납니다. 그런데, 삶이든 무엇이든 꾸밈없이 담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는 사진 갈래에서만큼은, 좀처럼 여느 자리 여느 삶 여느 이야기 여느 꿈 여느 사랑을 들려주는 사진쟁이를 만나기 어려워요.


  “남북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철도 회사들은 사진가들을 고용하여 그들에게 한창 진행중인 철로 건설 사업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기차가 통과하게 되면서 펼쳐지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도록 했다(79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참 옳구나 싶으면서 참 슬프네 하고 느낍니다. 무언가 먹고살 길을 찾자면, 돈이 있는 사람이 시키는 일거리를 얻어야 한답니다. 어찌저찌 살림을 꾸릴 길을 걷자면, 돈이 될 사진을 찍고, 돈을 거머쥔 사람한테 가까이 다가서야 한답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다면, 참으로 이와 같다면, 내 좋은 보금자리에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빚으면서 내 좋은 꿈과 사랑을 살가운 이야기로 빚는 사진길을 걸으면 될 노릇 아니랴 생각합니다. 사진으로 돈을 버는 삶이 아닌, 내 삶을 사랑하며 누리는 나날 그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 그지없이 아름다운 모습 아니랴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진이란 고스란히 드러내는 빛살이요, 삶이란 고스란히 누리며 어깨동무하는 빛줄기일 테니까요.


  오늘날 한국땅에서 사진을 배우고 싶다 말하는 푸름이와 젊은이는 으레 서양 학문을 배우고 서양 문화흐름을 좇으며 서양으로 몸소 찾아가 사진학교를 다닙니다. 아무래도 사진이 태어나고 널리 퍼진 데는 서양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기 때문이고 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좀 달리 느낍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꼭 에스파냐라든지 덴마크로 글배움을 하러 가야 할까 궁금합니다. 시를 쓰거나 동화를 쓰거나 희곡을 쓰는 사람이 애써 칠레나 스웨덴이나 독일로 글배움을 하러 떠나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림을 그리고픈 이가 네덜란드나 벨기에나 영국으로 그림배움을 하러 찾아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내 곁 좋은 삶을 깨닫고 내 둘레 좋은 사람을 느끼며 내 자리 내 모습과 내 꿈과 내 사랑을 헤아리면서 사진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면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 스스로 내 자그마한 사진기 하나로 ‘내 새로운 사진길’을 열면서 ‘내 고운 꿈 실은 사진역사’를 이루면 어떠한 그림이 될까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특허가 될 수 없던 사진입니다. 처음부터 누구한테서 배우지 못하는 사진입니다. 고스란히 담는 사진이라는 빛깔이기 앞서, 내 눈길은 내 삶을 얼마나 고스란히 바라보며 고스란히 맞아들이고 고스란히 즐길 줄 아는가를 스스로 찾을 때에 사진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노래이든 영화이든 춤이든 만화이든 시나브로 예쁘게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서양사람은 서양나라에서 서양물결대로 사진을 이룹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한국결대로 사진을 일굽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사람대로, 시골사람은 시골사람대로,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누구나 제 삶을 사랑하는 결대로 사진을 보듬습니다. (4345.3.14.물.ㅎㄲㅅㄱ)


― 사진 (캉탱 바작 글,시공사 펴냄,2004.2.28./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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