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과 ‘시체 장사’



  어찌어찌하다가 ㄴ포털 누리편지만 쓰고 ㄷ포털 누리편지는 쓰지 않는다.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를 어찌어찌 시골에서 인터넷으로 살필 적에 ㄴ포털로만 훑곤 했는데, 누군가 ㄴ과 ㄷ에 올라오는 이야기가 다르다고 해서, 얼마나 다르겠는가 싶었다가, 막상 둘을 견주니 다르기도 참 많이 다르다. 같은 일을 다루더라도 사람들 눈에 뜨이도록 띄운 글을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매우 크게 달라진다고 새삼 깨닫는다.


  지만원이라는 분이 이녁 누리집에 ‘세월호 참사’로 아픈 사람들을 겨냥해 ‘시체 장사’를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글을 썼다. 경찰에서 지만원이라는 분을 수사하겠다고 밝혔다는데, 지만원은 경찰과 언론을 고발하겠다고 한술 더 뜬단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조차 ㄴ포털과 ㄷ포털에서 다루는 모양새가 크게 다르다. ㄴ포털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찾아보기 몹시 어렵다.


  인터넷포탈만 하더라도 ㄴ과 ㄷ이 크게 다르고, 정치를 바라보는 눈길을 놓고도 사람마다 다 다를 만하다 싶으면서,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다. 지만원이라는 분 나이가 일흔둘이라 하니, 할배 나이로 이 땅에서 살면서 아이들한테 어떤 넋이 되려는지 궁금하다. 아이들 앞에서 창피나 부끄러움을 모르나.


  주검을 앞에 놓고 막말을 하는 마음결이란 무엇일까.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삿대질을 하는 마음씨는 또 무엇인가. 부디 따사로운 마음과 착한 넋을 찾기를 빈다. 이 지구별에 우리가 태어난 까닭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아가려는 뜻 때문이다. 4347.4.2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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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 기름진 밥



  예전에는 조금만 느끼다가 언제부터인가 아주 크게 느낀다. 중국집에서 나오는 짜장면이나 탕수육 같은 밥은 너무 기름지도 너무 달다. 지난달에 일산마실을 하며 곁님 식구들과 찾아간 일산 중국집에서 기름지고 달디단 중국집 밥을 먹으며 속이 많이 더부룩했다. 어제 무척 오랜만에 면소재지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서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로 집으로 날라서 먹는데, 시골 중국집도 도시 못지않게 기름지고 달구나 하고 느낀다.


  사람들은 이런 밥을 어떻게 먹을까. 시켜서 먹는 밥이니 그냥 먹을까. 요즈음은 어디에서나 기름지고 달고 맵고 짜게 먹는 흐름이니 아무렇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나도 곁님도 밥을 차릴 적에 기름을 쓰는 일이 매우 드물다. 고기를 아예 안 먹지는 않으나 참 드물게 먹는다. 우리들은 왜 달고 기름진 밥을 먹을까. 굳이 달고 기름진 밥을 먹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 현대 도시문명과 사회에서는 달고 기름진 밥을 먹지 않으면 짜증과 고단함과 힘겨움과 시끄러움과 바쁨 따위를 풀 길이 없을까. 4347.4.2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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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기름나물 잎에 빗방울 톡톡



  지난해에는 우리 집 뒤꼍 갯기름나물을 거의 안 뜯었다. 더 널리 퍼지기를 바라면서 기다렸다. 올해에는 갯기름나물이 지난해보다 크게 자라고 곳곳에 퍼진다. 다만, 좀 더디다. 그래도 틈틈이 몇 잎씩 톡톡 끊는다. 살근살근 씹으면 보드라우면서 푸른 잎맛이 감돈다.


  지난달에 통영마실을 할 적에 곳곳에서 갯기름나물 파는 모습을 보았다. 다른 데에서는 으레 ‘방풍나물’이라는 한자말을 쓴다. ‘갯기름나물’이라는 한국말 이름을 쓰면 못 알아듣는 분이 더 많다. 아무튼, 통영시 저잣거리에서 갯기름나물 한 꾸러미를 사서 틈틈이 살근살근 씹어서 먹는데, 비닐집에서 키운 풀인지 들에서 자란 풀인지 알 길은 없으나, 몸에서 무척 좋아하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길에서 장만한 갯기름나물과 뒤꼍에서 뜯는 갯기름나물은 맛과 내음이 다르다. 몸으로 퍼지는 기운이 다르다.


  아무래도 길에서 사다 먹는 풀은 물맛이 짙다. 집에서 뜯는 풀은 물맛이 옅다. 길에서 사다 먹는 풀은 바깥에 두어도 여러 날 그대로 간다. 집에서 뜯는 풀은 한나절만 지나도 시들시들하다. 살이 통통한 돌나물과 갯기름나물은 하루를 지나도 시들시들하지 않지만, 민들레잎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시들시들하기 일쑤이다. 뜯자마자 먹어야 하는 집풀이다.


  길에서 사다 먹는 풀은 물만 잔뜩 먹이니 제법 오랫동안 시들지 않을까. 집에서 뜯는 풀은 흙과 바람과 볕으로 살아가니 곧바로 먹지 않으면 물기가 사라져 시들거릴까.


  빗방울 톡톡 떨어지면서 푸른 빛깔이 더욱 싱그러운 갯기름나물을 바라본다. 살며시 손가락을 톡 대어 인사한다. 반가우며 고마운 풀아, 우리 집 뒤뜰에서 씩씩하게 널리 퍼지렴. 4347.4.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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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옛이야기, 설화



  새로운 번역이 예전보다 나은지 어떤지는 알 수 없기 마련입니다. 다만, 처음 번역한 책과 꾸준히 다시 번역하는 책들이 있기에 나중에 번역하는 이들은 앞선 이들 열매를 받아먹으면서 다시금 새로운 번역을 할 수 있어요.


  앞선 번역이 없었으면 ‘새로운 번역’이란 없겠지요. 앞선 번역이 있기에, 나중에 번역하는 이들은 어려운 길을 수월하게 헤칠 수 있고, 앞선 이들이 놓치거나 미처 못 건드린 대목을 더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비판에 앞서 존경과 고마움을 내비치면서 즐겁게 ‘새 번역’을 우리한테 선물하려는 마음이면 오래도록 사랑받는 실마리를 열리라 느낍니다. 번역은 ‘읽어서 풀어내는 이야기꾼’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옛이야기도 ‘구술자마다 다 다른 입맛’에 맞추어 새로운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설화와 신화와 민담에 ‘정답이 하나’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빚은 문학은 ‘창작자가 하나’라 할 테지만, 이를테면 개구리 이야기라든지 꼬마 곡예사 이야기라든지,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목소리와 손길로 다 다른 빛을 담아 다 다른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정답이 하나이기를 바란다면 외국말을 배워서 외국책으로 읽어야겠지요. 정답이 하나뿐이라면, 번역이란 있을 수 없겠지요. 정답이 없는 이야기이기에 번역이 있고, 새롭게 번역하려는 사람이 태어나며, 앞으로도 새로운 번역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방인》뿐 아니라 《모비딕》도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사람이 새롭게 번역해서 아름다운 이야기빛을 베풀 수 있습니다. 4347.4.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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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있는 책



  책방에는 팔려고 하는 책을 꽂는다. 책방은 책방이지 도서관이 아니다. 그런데, 책방을 찾는 발길이 차츰 줄면서, 책방은 책방이면서 도서관 같은 꼴로 달라진다. 아름다운 책손이 즐거이 알아보며 고르기를 기다리는 책들이 하나둘 모이니, 이 책들은 어느새 새로운 ‘도서관 책빛’을 뽐낸다.


  오랜 나날을 아로새기는 책들이 차곡차곡 꽂힌 헌책방 책꽂이를 보며 생각한다. 헌책방 책꽂이를 고스란히 옮기면 도서관 책꽂이가 되지 않을까. 요즈음 책과 묵은 책이 골고루 섞인 이 책들은 도서관이 할 몫을 맡은 모습이라고 할 만하지 않나. 거꾸로, 오늘날 도서관 책꽂이는 도서관 모습이라기보다 대여점 책꽂이 모습은 아닌가. 도서관이 도서관 구실보다는 대여점 구실만 하지 않는가.


  책방마실을 할 때마다 생각한다.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알차게 갖춘 책방은 책방이면서 도서관 같다. 아니, 도서관은 바로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이 책도 읽고 싶도록 이끌면서 저 책도 읽고 싶도록 이끌 때에 도서관이지 싶다. 이 책에 깃든 이야기로 마음을 살찌우고 저 책에 서린 이야기로 사랑을 북돋울 수 있으면 도서관이요 책방이며 책터이자 보금자리가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4347.4.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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