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글샘님의 "외래어와 외국어는 구별되어 쓰일 수 있나?"

'텍스트'가 언제부터 전문용어였을까를 헤아려 보면,

이 말을 '번역'하지 못하는 한국은 '전문가'가 없다고

스스로 밝히는 셈이 될 테지요.

 

이렇게 보면,

아마 '글'을 세계 어느 나라 사람도 '번역'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글'은 '글'만 가리키지 않으니까요.

 

국어사전에는 '글' 뜻풀이로 세 가지만 실리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쓰는 '글'은

국어사전 뜻풀이 세 가지로 끝나지 않고 아주 넓거든요.

 

"편협된 사고"란 스스로 좁게 생각하기에 좁을 뿐이지,

'쓰는 낱말 숫자와 갈래' 때문에 좁아질 수 없습니다.

 

5살 어린이가 쓰는 낱말이

7살 어린이보다 적다 해서

5살 어린이는 편협하지 않습니다.

 

10살 어린이가 쓰는 낱말이

12살 어린이보다 적다 해서

10살 어린이는 편협하지 않습니다.

 

지식인이나 학자가 쓰는 낱말이

농부나 노동자보다 많다 해서

농민이나 노동자가 편협하지 않습니다.

 

..

 

나는 사람들이 내 책을 '읽어' 준대서 반갑지 않다.

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삶을 사랑할 길을 찾'아야 반갑다.

내 책을 한낱 지식이나 정보로 삼는다면

아무것도 배우지도 느끼지도 얻지도 못한다.

 

<뿌리깊은 글쓰기>라고 하는 책은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를 사랑스레 생각하기"가 '주제'이고 '줄거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악마와 러브송 1
토모리 미요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어떻게 스스로 사랑하고 싶은가
 [만화책 즐겨읽기 159] 토모리 미요시, 《악마와 러브송 (1)》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때에라야 비로소 다른 사람도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얼굴이 예쁘장해야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머리가 좋다거나 돈이 많대서 내가 나를 사랑할 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리는 하루를 마음껏 좋아하면서 기쁘게 꿈꿀 때에 내가 사랑할 내 참모습을 느낍니다.


  내가 할 일이란 내가 참으로 사랑할 내 삶이 무엇인가 하고 깨닫는 일입니다. 내 삶이 어떻게 생겼고, 내 삶을 어떻게 꾸미고 싶으며, 내 삶을 어떻게 꽃피우고 싶은가 하는 그림을 그릴 노릇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고, 즐기고 싶은 놀이를 생각하며, 만나고 싶은 사람을 떠올립니다. 보금자리와 숲과 들과 내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풀과 나무와 짐승과 벌레를 곰곰이 생각합니다. 어떻게 어우러져서 어떻게 이웃이 되는 좋은 삶일 때에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 ‘말은 ‘예쁘게 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아.’ (20∼21쪽)
- “뭐야, 제대로 화낼 줄도 알잖아. 화를 참으니까 행동이 가식적이 되는 거야.” (26쪽)
- ‘우리는 단 하나의 계기만으로 한 발을 내디딜 용기를 얻곤 한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144∼145쪽)

 

 


  내가 나 스스로 사랑할 때에 내 삶이 사랑스럽습니다. 어떤 옷을 입거나 어떤 자가용을 굴린대서 내 모습이 사랑스러울 수 없습니다. 어떤 자격증을 따거나 어떤 졸업장을 거머쥔대서 내 모습이 믿음직할 수 없습니다. 앎은 학교나 책에 없어요. 앎은 모두 내 생각에 있어요. 나라 안팎에서 첫손 꼽는 대학교를 마쳤다 하기에 똑똑하거나 슬기롭지 않아요. 그동안 배운 여러 가지를 내 생각에서 알맞고 알차게 엮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똑똑하거나 슬기로운 사람이에요. 지식이나 정보를 두루 꿰는 사람은 그저 지식쟁이나 정보쟁이일 뿐이에요. 지식으로는 밥을 먹지 못하고, 정보로는 숨을 쉬지 못해요. 오직 내 목숨을 아끼려는 사랑으로 밥을 먹을 수 있어요. 오로지 내 마음을 보살피려는 사랑으로 숨을 쉴 수 있어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제비가 얼마만 한 크기에다가 얼마만 한 빠르기여야 어여쁘지 않습니다. 제비알 크기가 얼마만 해야 예쁘지 않습니다. 하늘이 얼마나 짙은 파랑이어야 예쁘지 않습니다. 제비는 제비이기에 어여쁘고, 하늘은 하늘이기에 파래요. 사람은 사람다움을 건사하기에 사람이라 할 만하고, 어버이는 어버이 삶을 사랑스레 꾸릴 때에 어버이라 할 만합니다.


  교사도 학생도 이와 같아요. 공무원이든 기자이든 회사원이든 이와 같아요. 스스로 ‘나다움’을 찾고 ‘나다움’을 생각하면서 ‘나다움’을 사랑스럽게 누릴 때에 삶을 이루고 꿈을 꽃피울 만해요.


- “공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바뀌지 않는 건 바뀌지 않으니까 그냥 포기해. 정 변하고 싶으면 누군가 바꿔 주길 기다리지 말고, 네 스스로 변하든가.” (28쪽)
- “그럼 말해 봐, 칸다 유스케. 이럴 때 어떻게 하면 러블리 변환을 할 수 있지? 어떻게 하면 이 왜소한 선생을 사랑스럽게 볼 수가 있어? 사랑스럽게 보이고 싶은 마음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한테 어떻게 하면 그런 마음이 들 수 있냐고!” (52∼53쪽)

 

 


  토모리 미요시 님 만화책 《악마와 러브송》(대원씨아이,2008) 첫째 권을 읽습니다. 이제 첫째 권이기에 주인공을 둘러싼 여러 밑이야기는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만, 《악마와 러브송》을 이루는 주인공 고등학생들은 스스로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를 놓고 갈팡질팡합니다.


  어느 아이는 아주 이른 나이부터 ‘내가 나를 어떻게 사랑해야 좋을까’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도록 ‘내가 나를 어떻게 사랑해야 좋을까’를 생각한 적 없습니다. 꽤 많은 아이들은 둘레 어버이나 교사나 이웃 어른 가운데 ‘스스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어, 이 아이들 또한 그만 스스로 사랑하는 길을 생각하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 “작작 좀 하지 그래? 코우사카 토모요가 학교 온 이유를 그런 시시한 일로 깎아내리지 마. 얼토당토 않은 질투도 정도가 지나치면 보기 흉한 법이야.” (43쪽)
- “너한텐 사람의 본질을 꿰뚫는 감은 있을지 몰라도, 이렇게 말하면 상대가 이렇게 생각하겠구나 하는 상상력은 손톱만큼도 없어!” (178쪽)

 


  빨강은 빨강입니다. 빨강이니까 빨강은 빨강일 테지요. 그런데 빨강은 그냥 빨강이 아닙니다. 빨강을 닮은 다른 무엇이 있고, 다른 무엇이 빨강이라는 빛깔을 띠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딸기가 빨강이고 수박 속살이 빨강입니다. 장미꽃이나 동백꽃도 빨강입니다. 장미꽃이나 동백꽃 가운데에는 분홍도 있어요. 꼭 어느 한 가지라고만 할 수 없기도 합니다. 그래서, 딸기라든지 또는 앵두라든지 또는 잘 익은 고추를 떠올릴 수 있어요. 누군가는 그저 ‘빨강’이라고만 말할 테지만, 누군가는 ‘딸기빛’이라고 말할 테고, 누군가는 ‘앵두빛’이라 말할 만해요. 어느 누군가는 ‘핏빛’이라든지 ‘수박 속살 빛깔’이라 말할 수 있어요.


  저마다 어떤 사랑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빛깔 한 가지는 늘 새롭고 새삼스럽게 거듭납니다. 저마다 어떤 꿈으로 마주하느냐에 따라 빛깔뿐 아니라 이야기와 책과 글과 노래가 모두 싱그러이 빛납니다.


  슬픈 노래란 없어요. 스스로 슬프기에 슬픈 노래가 돼요. 기쁜 노래도 따로 없어요. 스스로 기쁘기에 기쁜 노래가 돼요.


- “사실은 우리가 마리아를 악마로 만들고 싶은 거잖아. 왜냐면 그 편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으니까.” (45쪽)
- ‘그 애들처럼 되고 싶어. 부드럽고 강하게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180쪽)
- “칸다 유스케, 그런 얼굴은 너답지 않아. 다들 얼마나 러블리해. 나한테는 골탕 먹이고 무시하고 조롱이나 하더니, 너한텐 진심으로 부딪쳐 오잖아.” (185쪽)

 


  어떻게 스스로 사랑하고 싶은가요. 어떻게 스스로 즐겁고 싶은가요. 어떻게 스스로 예쁘고 싶은가요. 어떻게 스스로 신나게 책을 읽고, 밥을 먹으며, 노래하는 하루를 누리고 싶은가요.


  왜가리가 논마다 내려앉아 개구리를 잡아먹습니다. 도룡뇽도 잡아먹고 올챙이도 잡아먹습니다. 왜가리는 마음껏 배를 채운 다음 가뿐하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높이 올라갑니다. 이제 한국땅에서 왜가리 한 마리 홀가분하게 살아갈 만한 터는 차츰차츰 줄지만, 그래도 왜가리는 스스로 씩씩하고 기운차게 먹이를 찾으며 살아갑니다. 개구리는 조그마한 논에서 틈틈이 목숨을 빼앗기지만 새로 알을 낳고 새로 태어나며 새로 삶을 일굽니다.


  만화책 《악마와 러브송》에 나오는 아이들은 스스로 사랑을 찾으려 합니다. 안타깝지만, 또는 안 안타깝지만, 이 아이들을 둘러싼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사랑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사랑을 빛내는 길을 이끌지 못합니다. 어른들부터 스스로 사랑스럽다 싶은 삶을 누리지 못해요.


  그래도 아이들은 ‘늘 바라보아야 하는 여느 어른’들처럼 ‘사랑 없이 살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부딪히고 저렇게 부대끼며 사랑을 찾습니다. 참으로 즐거울 사랑을 생각하고, 더없이 빛날 사랑을 헤아립니다. (4345.6.28.나무.ㅎㄲㅅㄱ)

 


― 악마와 러브송 1 (토모리 미요시 글·그림,서수진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08.12.15./42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들보라 누워서 놀기에 빠져

 


  한창 기어다닐 때에는 누워놀기를 안 하더니,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를 하는 돌 지난 때에 갑작스레 누워놀기를 하는 산들보라. 걸어다니느라 다리가 아프고 힘들어, 틈틈이 누워서 발가락 잡고 노니. 이제는 등짝 방바닥에 붙이고 놀 때에 몸이 개운해지니까, 이렇게 놀다가 다시 일어서서 걷고 하니. (4345.6.28.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실뜨기놀이 좋아 어린이

 


  손가락을 마음껏 놀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연필도 꼭 쥐고 사진기도 튼튼히 잡을 줄 아는 어린이는 실뜨기놀이도 좋아한다. 이것저것 실을 꿰고 돌리면서 빗자루이니 보자기이니 하고 말한다. 차츰차츰 실뜨기 가짓수를 늘려 더 많은 꿈과 사랑을 담아 보렴. (4345.6.28.나무.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2-06-28 08:04   좋아요 0 | URL
소근육 발달에도 좋고, 손가락을 쓰는 놀이를 많이 할수록 두뇌 발달에도 좋다고 하니 실뜨기 놀이 맘껏 하게 하세요.

파란놀 2012-06-28 08:38   좋아요 0 | URL
음, 그렇기도 하겠군요.
그나저나 저도 곁에서 같이 해야 할 텐데요 @.@
 
감시사회 - 벌거벗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한홍구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권력을 놓아야 할 정부와 시민
 [책읽기 삶읽기 111] 한홍구·최철웅·엄기호·홍성수·한상희, 《감시사회》(철수와영희,2012)

 


  한홍구·최철웅·엄기호·홍성수·한상희, 이렇게 다섯 사람이 펼친 강의를 담은 이야기책 《감시사회》(철수와영희,201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정부가 시민을 감시하는 일은 옳지 않고, 시민이 정부를 감시해야 옳다 하는데, ‘정부’와 ‘시민’이 따로 있을까 궁금합니다. ‘시민(市民)’이라는 말은 ‘도시사람’이라기보다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공민(公民)’을 가리킨다 할 테지만, 아무래도 도시 아니고는 이 이름을 쓰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 어르신들 누구나 스스로 ‘농민’이라 말하지 ‘시민’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이름을 따지느냐 하면, 정부를 이루는 공무원이고 국회의원이고 대통령이고 장관이고 누구이고를 떠나, 도시에서 태어나 중앙정부나 지역자치정부 일꾼이 되기도 하지만,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들어가서 ‘정부 행정 일꾼’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농민에서 시민이 되었다가 정부가 됩니다. 그런데, 예순 살 즈음 지나면 정년퇴직을 할 테니 다시 시민이 되거나 농민이 됩니다. 참말 ‘정부’란 얼굴이 있을까요. 정부란 무엇일까요. 시민이 감시해야 한다는 정부란 무엇인가요.


.. 저는 감시는 원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누구를 감시하죠? 시민이 정부를 감시해야죠. 시민이 권력을 감시해야 합니다. 왜? 권력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가만히 놔두면 건방져져요. 방자해집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원리 자체에 견제와 감시가 있죠.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거꾸로 되어 있어요. 권력이 국민을 감시합니다 … 자신감 있는 사회는 감시를 잘 안 하죠. 그런데 이북은 어때요? 소련 무너졌지, 동유럽 무너졌지, 중국은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사실상 자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렸죠. 불안합니다. 탈북자는 늘어나지, 대북전단은 계속 날아오지, 감시를 많이 할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남쪽과 북쪽 중에 어느 편이 더 국민 감시를 잘할까요? ..  (13, 18쪽)


  민주주의 얼거리이기 때문에 정부가 비뚤어지거나 비틀리지 않게끔 ‘지켜보’거나 ‘살펴보’아야 한다는데, 정부에서 행정 일꾼으로 일하는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에요. 적어도 스물대여섯 살은 먹었을 테며, 웬만한 간부 자리에 있다면 마흔이나 쉰 즈음 될 테지요. 한창 ‘나이를 먹은’ 사람이 정부 행정 얼거리를 이룹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는 이들도 예순이나 일흔을 넘기 일쑤입니다. ‘어린’ 사람이 아니에요. 곧, 누가 지켜보거나 살펴본대서 어느 일을 더 잘 하거나 더 못 할 만한 철부지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철부지 아닌 ‘어른’이라 할 사람들이 정부 행정 얼거리에 깃들 때에는 뜻밖에도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일쑤예요. 참말 어른스럽게 일하면서 참으로 어른답게 아름다운 길을 걸어야 할 텐데, 뚱딴지 같거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자꾸 일삼아요.


  이를테면, 나라돈을 빼돌리는 일도 뚱딴지 같은데, 덧없는 막개발과 막공사를 밀어붙이는 일도 뚱딴지 같습니다. 전쟁무기 만들거나 사들이는 데에 어마어마하게 돈을 퍼붓는 일도 뚱딴지 같습니다. 관공서나 공공기관 건물을 크고 우람하며 멋들어지게 짓는 일도 뚱딴지 같습니다.


  즐거이 살아갈 터전이 되도록 애쓸 어른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사이좋게 어깨동무할 터전이 되게끔 힘쓸 어른일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정부가 시민을 감시하든, 시민이 정부를 감시하든,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 사회일 때에는 하나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못 믿으면서 지켜보거나 살펴보아야 할 때에는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 부유층이 민간경비로 보안시설을 세우고 자기들만의 주거공간을 세워요. 어쩌면 새로운 봉건사회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 봉건시대 영주들이 자기 성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았듯, 이제는 부르주아들이 하층민과 더 이상 어울려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천명하는 것이죠 … 유시티라는 것도 돈 많은 사람들이 가서 사는 곳이지, 하층민들이 사는 동네가 아닌 거잖아요 …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아이’들은 재수 없어 했잖아요. 쟤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앉아 있는 ‘똘마니’, ‘꼬봉’이라고 놀렸던 이유 중 하나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었죠..  (77∼78, 97쪽)


  나는 ‘권력이 되라’는 뜻으로 만드는 정부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오늘날 정부 행정 일꾼은 스스로 ‘권력이 되려’고 합니다. 금으로 빚은 무언가를 가슴에 차든, 법전을 다루는 일을 하든, 경찰이나 군인이 되든, 여느 교사나 여느 공무원이 되든, 모두 ‘남다른 권리(특권)’를 누립니다. 여느 사람들은 누리지 못하는 숱한 권리가 이들 공무원한테 주어져요.


  공무원이 누리는 권리는 시민한테서 나왔을까요. 아마 시민은 세금을 많이 물어야 할 테고, 작은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간접세가 따라붙으니 언제나 세금을 많이 낼 테며, 이렁저렁 모이는 돈으로 공무원 특권이 더 커지리라 봅니다. 그런데 시민이 돈을 벌어 돈을 쓰며 세금을 내자면, 시골에서 농민이 먹을거리를 일구어야 합니다. 농민이 시민을 먹여살리고, 시민이 돈벌이를 해서 정부를 뒷받침합니다. 정부는 시민 앞에서 권력을 뽐내고, 시민은 농민 앞에서 생각이 없습니다.


  보기 하나를 들자면, 한여름을 맞이해, 도시사람(시민)은 너나없이 물 좋고 시원하며 바람 좋은 데로 나들이를 떠납니다. 도시사람이 찾아가는 바다나 들이나 멧자락은 모두 시골입니다. 시민들이 농민 삶터에서 한여름 더위를 긋습니다. 시민들이 농민 일터에서 한여름 말미를 즐깁니다. 그런데, 시민들은 농민들 삶터에 쓰레기를 잔뜩 남깁니다.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린 쓰레기를 도로 이녁 시민들 자동차에 담아 집으로 가져가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여름 휴가철이 지나면 농민들 삶터이자 일터인 들판과 바다와 멧자락은 온통 쓰레기투성이입니다. 시민들은 정부가 권력을 뽐내며 시민을 휘어잡는다고 말하지만, 막상 시민은 농민을 바보처럼 여깁니다.


..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아시죠? 거기 보면 초등학교에 가서 생활기록부를 열람하는 장면이 꼭 나옵니다. 교감선생님이 나오셔서 근엄한 얼굴로 생활기록부를 펼치는 장면은 그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죠. 출연자의 행동발달 상황 등을 들춰보면서 다들 깔깔거리며 웃곤 하는데, 저는 아주 섬뜩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출연자의 동의를 받겠지만, 개인의 생활기록부를 보고 싶어 하는 궁금증 자체가 문제입니다. 생활기록부는 학생에 대한 사적인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생님과 학생, 선생님과 학부모 사이에서만 교육적인 목적으로 활용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그것이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된다는 것은 생활기록부의 목적에 전혀 맞지 않죠 … 저도 학교에서 종종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 추천서를 써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의 경제적 처지를 모르면 써 줄 수가 없습니다. 저소득층 학생을 위해 장학금을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일이지만, 그러려면 그 학생은 민감한 개인정보를 저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  (138, 146쪽)


  이야기책 《감시사회》에 좋은 말이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정교한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보는 눈입니다(201쪽).”라고. 이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정부는 ‘데이터베이스’, 곧 ‘숫자’로 시민을 재거나 따져서는 안 됩니다. 학교는 학생을 숫자, 곧 성적이나 시험으로 재거나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시민은 농민을 숫자, 곧 ‘곡식 값’이나 ‘푸성귀 값’이나 ‘열매 값’이나 ‘고기(물고기와 뭍고기 모두) 값’으로 재거나 따져서는 안 됩니다.


  정부는 시민을 사랑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민은 농민을 사랑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정부는 곧 시민입니다. 시민은 곧 농민입니다. 서로 다른 얼거리가 아니라, 서로 같은 사람입니다. 하늘 높은 정부가 아니요, 도시에서 돈만 벌면 되는 시민이 아닙니다. 모두들 똑같이 밥을 먹고 물을 마십니다. 모두들 똑같이 햇살을 누리고 바람을 쐽니다. 모두들 똑같이 지구별이라는 데에서 흙에 집을 짓고 흙을 밟으면서 목숨을 잇습니다.


  서로서로 “사람살이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길”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우리들 살림살이를 따스히 바라볼 때에 호젓하고 홀가분합니다. 즐겁게 살아갈 길을 찾을 노릇이지, 이웃나라에는 없는 높은 건물을 세운다거나 커다란 절집을 짓는다거나 냇둑에 시멘트를 퍼붓는다거나 하는 바보스러운 짓은 그칠 노릇이에요. 소비와 경제성장과 개발이 아니라, 자립과 독립과 공동체, 그러니까 스스로 살고 스스로 생각하며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두레를 깨달을 노릇이에요.


.. 일제가 왜 조선사람을 교육시켰겠어요? 충실한 일제의 군인으로 키우기 위해서였잖아요. 여러분 처음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했던 것이 뭡니까? 운동장에서 ‘앞으로나란히’부터 배우잖아요. 일종의 제식 훈련을 한 거죠 ..  (22∼23쪽)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몸과 마음을 바치라며 ‘국민학교’를 세웠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초등교육과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으로 아이들을 어떤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가 헤아려 봅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이끄는 대한민국 교육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서울 고등학교, 부산 고등학교, 밀양 고등학교, 속초 고등학교, 원주 고등학교 들에서는 참말 지역빛을 살리면서 마을 일꾼이 될 만한 씩씩하고 튼튼한 아이를 가르치는가요.


  중학교 아이들은 시를 배우는가요. 중학교 아이들은 평론이나 비평이나 논술이 아니라 시를 시답게 읽고 즐기거나 누릴 수 있는가요. 초등학교 아이들은 책을 읽는가요. 독후감이나 ‘대입 논술 대비’로 여기는 독후활동 따위에 시달리지 않나요.


  삶을 다루지 않는 책이라면 어느 책이든 부질없습니다. 지식을 다루는 책이라면 인문책이든 예술책이든 부질없습니다. 네덜란드 그림쟁이 고흐는 지식이 아닌 삶을 그렸습니다. 한국 그림쟁이 박수근이든 이중섭이든 천경자이든 지식을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어요. 언제나 이녁 삶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황순원이나 박경리나 김남주나 고정희가 지식을 문학으로 빚었을까요. 이들 또한 하나같이 삶을 문학으로 빚었을 뿐입니다.


  정부가 할 몫이란 삶을 북돋우는 일입니다. 시민이 할 몫이란 스스로 삶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농민이 할 몫이란 한결같이 흙과 풀을 보살피는 일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지식 다루는 책이 아닌 삶을 밝히는 책을 읽을 노릇입니다. 지식을 부풀리지 말고, 삶을 살찌우면서 스스로 아름답게 꿈을 꿀 노릇입니다.


  따지고 보면, 정부에서 시민을 감시하거나 말거나 아랑곳할 까닭이 없어요. 감시하고프면 감시하라지요. 내가 텃밭 흙을 일구고 풀을 뽑는 하루살이를 지켜보라지요. 내가 아이들과 뒹굴며 밥하고 빨래하며 누리는 하루살림을 살펴보라지요. (4345.6.28.나무.ㅎㄲㅅㄱ)

 


― 감시사회 (한홍구·최철웅·엄기호·홍성수·한상희 글,철수와영희 펴냄,2012.6.30./13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