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사회 - 벌거벗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한홍구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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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을 놓아야 할 정부와 시민
 [책읽기 삶읽기 111] 한홍구·최철웅·엄기호·홍성수·한상희, 《감시사회》(철수와영희,2012)

 


  한홍구·최철웅·엄기호·홍성수·한상희, 이렇게 다섯 사람이 펼친 강의를 담은 이야기책 《감시사회》(철수와영희,201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정부가 시민을 감시하는 일은 옳지 않고, 시민이 정부를 감시해야 옳다 하는데, ‘정부’와 ‘시민’이 따로 있을까 궁금합니다. ‘시민(市民)’이라는 말은 ‘도시사람’이라기보다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공민(公民)’을 가리킨다 할 테지만, 아무래도 도시 아니고는 이 이름을 쓰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 어르신들 누구나 스스로 ‘농민’이라 말하지 ‘시민’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이름을 따지느냐 하면, 정부를 이루는 공무원이고 국회의원이고 대통령이고 장관이고 누구이고를 떠나, 도시에서 태어나 중앙정부나 지역자치정부 일꾼이 되기도 하지만,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들어가서 ‘정부 행정 일꾼’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농민에서 시민이 되었다가 정부가 됩니다. 그런데, 예순 살 즈음 지나면 정년퇴직을 할 테니 다시 시민이 되거나 농민이 됩니다. 참말 ‘정부’란 얼굴이 있을까요. 정부란 무엇일까요. 시민이 감시해야 한다는 정부란 무엇인가요.


.. 저는 감시는 원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누구를 감시하죠? 시민이 정부를 감시해야죠. 시민이 권력을 감시해야 합니다. 왜? 권력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가만히 놔두면 건방져져요. 방자해집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원리 자체에 견제와 감시가 있죠.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거꾸로 되어 있어요. 권력이 국민을 감시합니다 … 자신감 있는 사회는 감시를 잘 안 하죠. 그런데 이북은 어때요? 소련 무너졌지, 동유럽 무너졌지, 중국은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사실상 자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렸죠. 불안합니다. 탈북자는 늘어나지, 대북전단은 계속 날아오지, 감시를 많이 할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남쪽과 북쪽 중에 어느 편이 더 국민 감시를 잘할까요? ..  (13, 18쪽)


  민주주의 얼거리이기 때문에 정부가 비뚤어지거나 비틀리지 않게끔 ‘지켜보’거나 ‘살펴보’아야 한다는데, 정부에서 행정 일꾼으로 일하는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에요. 적어도 스물대여섯 살은 먹었을 테며, 웬만한 간부 자리에 있다면 마흔이나 쉰 즈음 될 테지요. 한창 ‘나이를 먹은’ 사람이 정부 행정 얼거리를 이룹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는 이들도 예순이나 일흔을 넘기 일쑤입니다. ‘어린’ 사람이 아니에요. 곧, 누가 지켜보거나 살펴본대서 어느 일을 더 잘 하거나 더 못 할 만한 철부지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철부지 아닌 ‘어른’이라 할 사람들이 정부 행정 얼거리에 깃들 때에는 뜻밖에도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일쑤예요. 참말 어른스럽게 일하면서 참으로 어른답게 아름다운 길을 걸어야 할 텐데, 뚱딴지 같거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자꾸 일삼아요.


  이를테면, 나라돈을 빼돌리는 일도 뚱딴지 같은데, 덧없는 막개발과 막공사를 밀어붙이는 일도 뚱딴지 같습니다. 전쟁무기 만들거나 사들이는 데에 어마어마하게 돈을 퍼붓는 일도 뚱딴지 같습니다. 관공서나 공공기관 건물을 크고 우람하며 멋들어지게 짓는 일도 뚱딴지 같습니다.


  즐거이 살아갈 터전이 되도록 애쓸 어른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사이좋게 어깨동무할 터전이 되게끔 힘쓸 어른일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정부가 시민을 감시하든, 시민이 정부를 감시하든,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 사회일 때에는 하나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못 믿으면서 지켜보거나 살펴보아야 할 때에는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 부유층이 민간경비로 보안시설을 세우고 자기들만의 주거공간을 세워요. 어쩌면 새로운 봉건사회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 봉건시대 영주들이 자기 성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았듯, 이제는 부르주아들이 하층민과 더 이상 어울려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천명하는 것이죠 … 유시티라는 것도 돈 많은 사람들이 가서 사는 곳이지, 하층민들이 사는 동네가 아닌 거잖아요 …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아이’들은 재수 없어 했잖아요. 쟤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앉아 있는 ‘똘마니’, ‘꼬봉’이라고 놀렸던 이유 중 하나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었죠..  (77∼78, 97쪽)


  나는 ‘권력이 되라’는 뜻으로 만드는 정부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오늘날 정부 행정 일꾼은 스스로 ‘권력이 되려’고 합니다. 금으로 빚은 무언가를 가슴에 차든, 법전을 다루는 일을 하든, 경찰이나 군인이 되든, 여느 교사나 여느 공무원이 되든, 모두 ‘남다른 권리(특권)’를 누립니다. 여느 사람들은 누리지 못하는 숱한 권리가 이들 공무원한테 주어져요.


  공무원이 누리는 권리는 시민한테서 나왔을까요. 아마 시민은 세금을 많이 물어야 할 테고, 작은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간접세가 따라붙으니 언제나 세금을 많이 낼 테며, 이렁저렁 모이는 돈으로 공무원 특권이 더 커지리라 봅니다. 그런데 시민이 돈을 벌어 돈을 쓰며 세금을 내자면, 시골에서 농민이 먹을거리를 일구어야 합니다. 농민이 시민을 먹여살리고, 시민이 돈벌이를 해서 정부를 뒷받침합니다. 정부는 시민 앞에서 권력을 뽐내고, 시민은 농민 앞에서 생각이 없습니다.


  보기 하나를 들자면, 한여름을 맞이해, 도시사람(시민)은 너나없이 물 좋고 시원하며 바람 좋은 데로 나들이를 떠납니다. 도시사람이 찾아가는 바다나 들이나 멧자락은 모두 시골입니다. 시민들이 농민 삶터에서 한여름 더위를 긋습니다. 시민들이 농민 일터에서 한여름 말미를 즐깁니다. 그런데, 시민들은 농민들 삶터에 쓰레기를 잔뜩 남깁니다.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린 쓰레기를 도로 이녁 시민들 자동차에 담아 집으로 가져가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여름 휴가철이 지나면 농민들 삶터이자 일터인 들판과 바다와 멧자락은 온통 쓰레기투성이입니다. 시민들은 정부가 권력을 뽐내며 시민을 휘어잡는다고 말하지만, 막상 시민은 농민을 바보처럼 여깁니다.


..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아시죠? 거기 보면 초등학교에 가서 생활기록부를 열람하는 장면이 꼭 나옵니다. 교감선생님이 나오셔서 근엄한 얼굴로 생활기록부를 펼치는 장면은 그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죠. 출연자의 행동발달 상황 등을 들춰보면서 다들 깔깔거리며 웃곤 하는데, 저는 아주 섬뜩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출연자의 동의를 받겠지만, 개인의 생활기록부를 보고 싶어 하는 궁금증 자체가 문제입니다. 생활기록부는 학생에 대한 사적인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생님과 학생, 선생님과 학부모 사이에서만 교육적인 목적으로 활용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그것이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된다는 것은 생활기록부의 목적에 전혀 맞지 않죠 … 저도 학교에서 종종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 추천서를 써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의 경제적 처지를 모르면 써 줄 수가 없습니다. 저소득층 학생을 위해 장학금을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일이지만, 그러려면 그 학생은 민감한 개인정보를 저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  (138, 146쪽)


  이야기책 《감시사회》에 좋은 말이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정교한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보는 눈입니다(201쪽).”라고. 이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정부는 ‘데이터베이스’, 곧 ‘숫자’로 시민을 재거나 따져서는 안 됩니다. 학교는 학생을 숫자, 곧 성적이나 시험으로 재거나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시민은 농민을 숫자, 곧 ‘곡식 값’이나 ‘푸성귀 값’이나 ‘열매 값’이나 ‘고기(물고기와 뭍고기 모두) 값’으로 재거나 따져서는 안 됩니다.


  정부는 시민을 사랑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민은 농민을 사랑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정부는 곧 시민입니다. 시민은 곧 농민입니다. 서로 다른 얼거리가 아니라, 서로 같은 사람입니다. 하늘 높은 정부가 아니요, 도시에서 돈만 벌면 되는 시민이 아닙니다. 모두들 똑같이 밥을 먹고 물을 마십니다. 모두들 똑같이 햇살을 누리고 바람을 쐽니다. 모두들 똑같이 지구별이라는 데에서 흙에 집을 짓고 흙을 밟으면서 목숨을 잇습니다.


  서로서로 “사람살이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길”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우리들 살림살이를 따스히 바라볼 때에 호젓하고 홀가분합니다. 즐겁게 살아갈 길을 찾을 노릇이지, 이웃나라에는 없는 높은 건물을 세운다거나 커다란 절집을 짓는다거나 냇둑에 시멘트를 퍼붓는다거나 하는 바보스러운 짓은 그칠 노릇이에요. 소비와 경제성장과 개발이 아니라, 자립과 독립과 공동체, 그러니까 스스로 살고 스스로 생각하며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두레를 깨달을 노릇이에요.


.. 일제가 왜 조선사람을 교육시켰겠어요? 충실한 일제의 군인으로 키우기 위해서였잖아요. 여러분 처음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했던 것이 뭡니까? 운동장에서 ‘앞으로나란히’부터 배우잖아요. 일종의 제식 훈련을 한 거죠 ..  (22∼23쪽)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몸과 마음을 바치라며 ‘국민학교’를 세웠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초등교육과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으로 아이들을 어떤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가 헤아려 봅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이끄는 대한민국 교육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서울 고등학교, 부산 고등학교, 밀양 고등학교, 속초 고등학교, 원주 고등학교 들에서는 참말 지역빛을 살리면서 마을 일꾼이 될 만한 씩씩하고 튼튼한 아이를 가르치는가요.


  중학교 아이들은 시를 배우는가요. 중학교 아이들은 평론이나 비평이나 논술이 아니라 시를 시답게 읽고 즐기거나 누릴 수 있는가요. 초등학교 아이들은 책을 읽는가요. 독후감이나 ‘대입 논술 대비’로 여기는 독후활동 따위에 시달리지 않나요.


  삶을 다루지 않는 책이라면 어느 책이든 부질없습니다. 지식을 다루는 책이라면 인문책이든 예술책이든 부질없습니다. 네덜란드 그림쟁이 고흐는 지식이 아닌 삶을 그렸습니다. 한국 그림쟁이 박수근이든 이중섭이든 천경자이든 지식을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어요. 언제나 이녁 삶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황순원이나 박경리나 김남주나 고정희가 지식을 문학으로 빚었을까요. 이들 또한 하나같이 삶을 문학으로 빚었을 뿐입니다.


  정부가 할 몫이란 삶을 북돋우는 일입니다. 시민이 할 몫이란 스스로 삶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농민이 할 몫이란 한결같이 흙과 풀을 보살피는 일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지식 다루는 책이 아닌 삶을 밝히는 책을 읽을 노릇입니다. 지식을 부풀리지 말고, 삶을 살찌우면서 스스로 아름답게 꿈을 꿀 노릇입니다.


  따지고 보면, 정부에서 시민을 감시하거나 말거나 아랑곳할 까닭이 없어요. 감시하고프면 감시하라지요. 내가 텃밭 흙을 일구고 풀을 뽑는 하루살이를 지켜보라지요. 내가 아이들과 뒹굴며 밥하고 빨래하며 누리는 하루살림을 살펴보라지요. (4345.6.28.나무.ㅎㄲㅅㄱ)

 


― 감시사회 (한홍구·최철웅·엄기호·홍성수·한상희 글,철수와영희 펴냄,2012.6.30./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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