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책

 


  밥을 차린다. 식구들 함께 먹을 밥을 차린다. 아이는 밥을 한 술 뜨고는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다른 데에 가서 논다. 책을 본다든지 인형을 만지작거린다든지 동생이랑 엉겨붙는다든지 한다. 나는 이른아침부터 밥을 차리느라 부산을 떤다. 밥을 차리고 나서는 빨래에 마음이 간다. 그리고 이것저것 손 가는 일이 많다. 가만히 보면 나도 밥자리에서 느긋하게 앉아서 밥을 먹지는 못하는 몸이 아닌가 싶다. 아이더러 혼자 밥상 앞에 얌전히 앉아서 냠냠짭짭 하기를 바랄 수 없는 셈이리라 본다. 아이가 밥을 제대로 다 먹고 나서 한갓지게 책을 보든 다른 놀이를 하든 한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4345.7.1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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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있는 곳 (도서관일기 2012.7.14.)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책이 있는 곳에는 물기도 불기도 가까이 있으면 안 됩니다. 물기가 너무 많으면 책이 눅눅해지고, 불기가 가까이 있으면 그만 책이 타거나 바랩니다. 가만히 헤아리면, 책이 아닌 나무가 우거진 숲도, 물이 너무 넘치면 나무가 살기 힘들어요. 숲에 불씨가 있으면 그만 숲이 홀랑 타서 사라져요. 숲이 숲답게 있을 수 있는 곳이 책이 책답게 있을 수 있는 곳이로구나 싶어요. 그러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되겠지요.


  사람이 살아갈 보금자리를 좋고 예쁘며 알맞게 돌볼 수 있다면, 책이 있을 자리가 되든 다른 무엇이 있을 자리가 되든 좋고 예쁘게 알맞게 돌볼 수 있겠지요.


  오늘날 사람들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가지만, 정작 사람됨을 빛내거나 밝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을 놓치거나 놓거나 등진 채 엉뚱하거나 얄궂은 쪽으로 기울어졌지 싶어요. 참답게 살아갈 길을 찾아야 비로소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책씨를 퍼뜨리며 사랑꿈을 이룰 수 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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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의 모험 꼬맹이 마음 27
고티에 다비드 지음, 마리 코드리 그림 / 어린이작가정신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날마다 새로운 잔치·즐거운 노래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81] 마리 코드리·고티에 다비드, 《막스의 모험》(어린이작가정신,2008)

 


  둘째 아이를 품에 안고 마당으로 나옵니다. 후박나무 밑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은 온통 하얀 구름으로 가득합니다. 비가 퍼붓기도 하다가 비가 그치기도 하다가, 살짝 해가 비칠 듯하다가, 바람이 잔잔히 불다가, 하루에도 숱하게 바뀌는 날씨를 느낍니다. 빗물을 머금은 구름이 있고, 빗물을 안 뿌리며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이 있습니다.


  아기 옆구리를 두 손바닥으로 감싸쥐고는 하늘로 휙 던집니다. 아이가 까르르 웃습니다. 하늘로 올라갔다가 내려온 아이를 두 손바닥으로 착 받고는 다시 하늘로 휙 던집니다. 아이는 또 까르르 웃습니다. 첫째 아이가 둘째 아이처럼 무척 어렸을 적, 이렇게 하늘로 휙휙 던지며 같이 놀곤 했습니다. 첫째 아이도 둘째 아이도 하늘로 휙휙 던져지는 일을 퍽 좋아하며 웃습니다.


  어쩌면, 나도 이 아이들처럼 어린 어느 날, 내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휙휙 하늘로 던지며 놀았을까요. 내 형도 이렇게 하늘로 휙휙 던져지면서 시원한 하늘바람을 마음껏 누렸을까요.


  아이들은 나무 냄새를 맡습니다. 아이 곁에 선 어버이도 나무 냄새를 맡습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볏포기 냄새를 맡습니다. 아이 곁에 선 어버이도 무럭무럭 자라나는 볏포기 냄새를 맡습니다. 아이들은 멧새와 들새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개구리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이 곁에 선 어버이도 멧새와 들새 노랫소리를 듣고, 개구리 노랫소리를 들으며,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제비가 들판을 낮게 날며 먹이를 찾는 모습을 서로 바라봅니다. 빗방울 머금은 구름이 흐르며 들판을 간질이는 바람을 나란히 맞아들입니다. 햇살은 구름에 가리지만, 구름 위로 내리쬐는 햇볕은 온 들판을 포근히 감쌉니다. 아이들과 어버이는 고운 빛과 볕을 찬찬히 받아들이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 여우가 한 주 내내 얼씬도 하지 않고, 이웃사촌 곰은 여름 내내 벌집을 건드리지 않았어. 덕분에 닭들은 안심하고 지낼 테고, 나는 앞으로 몇 달 간 달콤한 꿀을 빵에 발라 먹을 수 있을 거야. 좀 있다가 숲속으로 버섯을 따러 가야겠어. 어제는 숫사슴이 와서 내 창문 아래 풀을 뜯어 먹었는데 아마 사슴떼가 가까이 있는 모양이야. 버슷을 딴 다음에 숨어서 사슴들이 나타나길 기다려야지 ..  (2쪽)


  밥을 차리며 생각합니다. 날마다 차리는 밥은 잔치밥입니다. 날마다 좋은 잔치를 누린다 할 만하니까 언제나 잔치밥입니다. 마을잔치나 생일잔치가 있어야 잔치밥은 아닙니다. 좋은 하루를 예쁘게 누리는 눈빛으로 맑게 웃으니까 늘 잔치밥입니다.


  아이들 달래며 노래를 부르다가, 아이가 부르는 노래를 옆에서 함께 부르다가, 아이들 재우며 노래를 부르다가, 늘 부르는 이 노래는 잔치노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누리는 하루일 때에는, 눈짓이고 손짓이고 몸짓이고 모두 잔치입니다. 기쁘게 누리는 삶일 때에는, 말이고 글이고 그림이고 모두 노래입니다.


  찰랑찰랑 논물에서 동동 떠다니는 개구리밥을 들여다봅니다. 개구리밥 사이에서 헤엄을 치고 노래를 하는 개구리를 바라봅니다. 바람에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볏잎을 바라봅니다. 마당 한켠 후박나무 가지에 앉아 열매를 따먹는 멧새를 올려다봅니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 한 마리 부산히 날갯짓을 하는데, 거미줄에서 톡 떨어져 다시 홀가분하게 날아갑니다.


  내가 보는 오늘 이 모습은 나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모습들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살붙이와 주고받는 이야기는 나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나누는 말들입니다. 날마다 똑같은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밥차림은 같다 하더라도 날마다 다른 밥입니다. 날마다 같은 낱말과 말투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날마다 다른 말입니다. 하루하루 생각이 자랍니다. 조금씩 마음이 큽니다. 사랑은 나날이 곱게 거듭납니다. 꿈은 시나브로 예쁘게 빛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좋은 꿈을 꾸면서 생각을 짓겠지요. 아이들을 낳아 보살피는 어버이는 어버이 나름대로 좋은 사랑을 다스리면서 생각을 빚겠지요.

 

 

 


  마리 코드리 님 그림과 고티에 다비드 님 글이 어우러진 그림책 《막스의 모험》(어린이작가정신,2008)을 읽습니다. ‘어린’ 막스는 숲속에서 혼자 살아갑니다. 틈틈이 일기를 쓰며 그날그날 누린 ‘새 이야기(모험)’를 찬찬히 적바림합니다.


  즐겁게 밥을 차려서 먹습니다. 즐겁게 숲속을 돌아봅니다. 즐겁게 구름을 타고 날아갑니다. 즐겁게 바느질을 하고, 즐겁게 잠을 자며, 즐겁게 노래합니다.


  막스는 언제나 새 이야기를 빚는 하루입니다. 막스는 늘 새 꿈을 꾸는 하루입니다. 막스는 노상 새 사랑을 노래하는 하루입니다.


  막스는 누구한테서 새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막스는 누구한테서 새 꿈을 물려받았을까요. 막스는 누구한테서 새 사랑을 배웠을까요. 어린 막스 가슴속에 언제나 자리하던 이야기와 꿈과 사랑인가요. 어린 막스는 차츰 어른으로 크면서 가슴속에 고이 모신 이야기와 꿈과 사랑을 한결 아리땁게 북돋울까요. 뒷날 어른이 된 막스는 스스로 누린 이야기와 꿈과 사랑을 막스가 낳을 아이한테 예쁘게 물려주면서 또다른 이야기와 꿈과 사랑을 누릴까요.


  누구나 오늘 하루 잔치이면서 이야기(모험)입니다. 누구나 오늘 하루 노래이면서 꿈입니다. 누구나 오늘 하루 맑은 빛이면서 사랑입니다. (4345.7.17.불.ㅎㄲㅅㄱ)

 


― 막스의 모험 (마리 코드리 그림,고티에 다비드 글,어린이작가정신 펴냄,2008.5.10./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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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텍스트
[말사랑·글꽃·삶빛 21] 한국사람이 쓰는 ‘전문 낱말’

 


  신발 파는 가게는 ‘신집’입니다. 그러나 신발을 파는 어느 가게는 ‘신집’이라는 이름을 달지 않았습니다. ‘제화점(製靴店)’이라는 한자를 써서 이름을 달았습니다. 요즈음에는 ‘슈샵(shoe shop)’이나 ‘슈스토어(shoe store)’라는 영어를 써서 이름을 붙이는 곳이 꽤 많다 합니다.


  밥을 마련해 주기에 ‘밥집’입니다. 그러나 웬만한 여느 가게는 ‘식당(食堂)’이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어느 가게는 ‘요리점(料理店)’이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어느 가게는 ‘레스토랑(restaurant)’이나 ‘패밀리 레스토랑(family restaurant)’이라는 영어를 씁니다. 구실은 밥을 파는 가게이지만, 애써 한자말이나 영어를 빌어 무언가 전문스럽다 하는 대목을 가르곤 합니다.


  자동차는 ‘자동차’라 하지만, 날쌔고 갸름하게 만들었다는 자동차는 ‘스포츠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자동차를 한국 아닌 서양에서 만들었으니, 어딘가 다른 자동차라 할 때에, 서양에서는 서양말로 다른 이름을 붙였겠지요. 그런데,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붙인 ‘스포츠카(sports car)’라는 이름은 하나도 전문스럽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는 영국이든 미국이든 ‘스포츠’나 ‘카’라는 낱말은 아주 흔하며 너른 쉬운 낱말입니다.


  옷집에서 옷을 따로 맞춘다 할 때에는 내 몸 크기를 요리조리 줄자로 잽니다. 이른바 허리·가슴·엉덩이 크기를 잽니다. 그런데, 옷을 짓든 무언가 남다르다 하는 일을 하든, 스스로 전문 직업에 몸담았다 하는 이들은 ‘허리·가슴·엉덩이’ 같은 낱말을 안 씁니다. ‘웨이스트·바스트·히프(waist·bust·hip)’라는 영어를 씁니다. ‘웨이스트·바스트·히프’는 전문 낱말이 아닌 그저 영어일 뿐이나, 이 영어 낱말을 쓰는 이들은 ‘웨이스트·바스트·히프’를 꼭 전문 낱말처럼 삼습니다. 한국말 ‘허리·가슴·엉덩이’는 전문 낱말로 여기지 않습니다.


  《손석춘-10대와 통하는 미디어》(철수와영희,2012)라는 책을 읽다가 131쪽에서 “광고는 이미지와 글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행복 또는 이익을 약속하고”와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을 한동안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글을 쓰신 분은 ‘이미지·글’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한 가지 낱말은 영어로 ‘이미지(image)’로 적고, 다른 한 가지 낱말은 한국말로 ‘글’이라 적습니다.


  어떤 분은 이 같은 대목에 ‘텍스트(text)’라는 영어를 쓰곤 합니다. ‘이미지·텍스트’처럼 적으면서, 두 낱말은 영어라기보다 전문 낱말이기 때문에, 딱히 번역할 만한 낱말이 없기도 하고, 따로 번역할 수도 없다고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야 아주 스스럼없이 ‘이미지·텍스트’처럼 쓸 테지만, 러시아말을 쓰거나 독일말을 쓰거나 네덜란드말을 쓰는 나라에서는 어떤 낱말을 쓸까요. 이들 나라에서도 영어로 생각과 마음을 나타낼까요.


  저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국말로 생각과 마음을 나타내고 싶습니다. 저는 ‘그림·글’이라는 한국말을 쓰고 싶습니다. 영국사람이나 미국사람이 ‘이미지·텍스트’라고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 저는 ‘그림·글’로 옮겨서 받아들입니다. 제가 쓰는 ‘그림·글’이라는 낱말은 영어로 옮기며 ‘이미지·텍스트’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이라는 낱말이나 ‘글’이라는 낱말은 무척 쉽고 널리 쓰는 낱말이면서, 어느 한 가지를 깊고 넓게 담는 낱말이기도 해요.


  종이에 붓으로 무언가를 그릴 때에 그림이 됩니다. 머리로 어떤 모습을 떠올릴 때에 그림이 됩니다. 앞으로 하고프거나 이루고픈 어떤 일을 가만히 살피면서 그림이 나타납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여러 가지 모습은 그림이라 할 만합니다. 더없이 보기 좋아 그림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종이에 연필로 무언가를 적을 때에 글이 됩니다. 글이 모여 책이 됩니다. 책은 글이 모인 이야기꾸러미이기에, ‘책 = 글’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글은 글씨를 가리키기도 하고 글발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말을 담아서 글이기도 하지만, 온누리에서 살아가며 배우거나 깨달은 여러 생각이나 슬기를 일컬어 글이라고도 합니다.


  무척 쉽게 쓰는 ‘그림·글’이지만, 영어 ‘이미지·텍스트’로는 이 한국말 두 가지를 오롯이 담아내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인데, 영어 ‘이미지·텍스트’가 나타내거나 가리키려는 테두리를 한국말 ‘그림·글’로는 살뜰히 담아내지 못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한국사람과 외국사람이 서로 뜻과 마음을 주고받으려고 ‘번역’을 합니다. ‘그림’을 ‘이미지’로 옮기고, ‘텍스트’를 ‘글’로 옮깁니다. 서로서로 뜻을 나눕니다. 서로서로 가장 알맞고 바르게 쓸 낱말을 살펴 마음을 나눕니다. 어느 갈래에서만 쓴다는 전문 낱말이라 하더라도, 서로서로 뜻과 마음을 나누고 싶으니 번역을 합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나날을 글로 빚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하루를 말로 엮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번역(飜譯)’이라는 한자말하고 ‘옮기다’라는 한국말을 나란히 썼는데, 일찍이 생각있는 한겨레 옛사람은 ‘옮긴이’라는 새 낱말을 빚어 책에 밝혀 적습니다. ‘지은이·글쓴이·그린이·엮은이·펴낸이’ 같은 새 낱말이 태어났어요. 이 결과 흐름에 맞추어 ‘꾸민이·도운이·만든이·힘쓴이(애쓴이)·부른이·찍은이’ 같은 낱말을 새롭게 지을 수 있어요. ‘밝힌이·찾은이·이룬이·멋진이·좋은이’처럼 말나무 가지를 쑥쑥 뻗을 수 있습니다.


  전문 낱말은 하늘에서 똑 하고 떨어지지 않습니다. 전문 낱말은 사람들이 여느 자리에서 흔히 쓰는 낱말을 알맞게 엮거나 짜거나 이어서 빚습니다. 무언가를 찾으면서 ‘찾기’라 하고, 더 깊이 찾고 싶을 때에는 ‘깊이찾기’나 ‘꼼꼼찾기’나 ‘낱낱찾기’를 할 수 있어요. 더 찾겠다 할 때에는 ‘더찾기’를 할 수 있겠지요. ‘다시찾기’도 있을 테며, 오늘날 인터넷에서 흔히 쓰는 ‘즐겨찾기’도 있어요. 여럿이 힘을 모아서 찾는다면 ‘함께찾기’가 돼요. 비슷하게 ‘서로찾기’나 ‘나란히찾기’나 ‘여럿이찾기’처럼 쓸 수 있어요. 어느 때에는 ‘한꺼번에찾기’라든지 ‘모두찾기’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새로찾기’라든지 ‘모아찾기’를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생각할 때에 전문 낱말이 태어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북돋울 때에 여느 자리 살림말, 곧 삶말이 환하게 빛납니다. (4345.7.1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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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이라는 이름

 


  정부통계로는 2011년에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91.1퍼센트라던가 하는데, 나는 이 숫자가 그다지 놀랍다고 느끼지 않는다. 진작부터 시골사람 숫자는 아주 줄었다고 느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랍다 싶은 대목은 왜 아직도 도시사람 숫자가 91퍼센트밖에 안 되나였다. 이제 한국에서 도시사람은 99퍼센트나 99.9퍼센트라고 해도 맞지 않을까.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온 우리 식구는 그예 시골사람이다. 시골로 주소와 주민등록을 옮기고 ‘내 집’을 마련하면서 마을 어르신들 말씀을 듣는데, 또 앞으로 몇 차례 더 나가야 끝나는 민방위훈련을 나가며 이런저런 말을 듣는데, 막상 도시에서 살지만 주소와 주민등록은 시골로 둔 사람이 꽤 있다. 더욱이, 대학생으로 지내는 젊은이는 주소나 주민등록은 시골이라지만, 살아가기로는 도시에서 살아간다. 이래저래 따지면, 참말 시골에서 살아가는 ‘시골사람’은 매우 적다. 군대에 간 사내들 빼고, 부재자투표를 하는 사람은 모두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인구통계에서는 시골사람 숫자로 잡히는’ 셈 아닌가.


  우리 마을 이웃집에 여름휴가로 찾아온 분들이 있다. 그 집 아들이 고흥사람으로 고흥에서 나고 자랐으나, 이제 서울에서 혼인하고 아이 둘을 낳아 살아간다. 올해에 경기도 의정부인가 집을 옮겨 지내신다고 들었는데, 이제 이분들은 시골사람 아닌 도시사람이다. 명절이나 휴가나 제사 때를 맞이해 시골로 찾아오지만, 말 그대로 ‘시골 나들이’를 할 뿐, 시골에서 일을 하거나 살지 않는다. 이 집 첫째 아이하고 우리 집 첫째 아이랑 동갑이라, 둘을 내 자전거수레에 함께 태우고 면소재지까지 한 바퀴 도는데, 수레에 앉아 둘이 조잘거리다가 이웃집 아이가 문득 읊는 ‘시골’이라는 낱말이 퍽 낯설다고 느낀다. 그래, 이 아이는 도시 아이야. 우리 아이는 시골 아이야.


  그런데 시골에서 살아가면서 군이나 읍이나 면이라 해서 모두 시골이 되지는 않는다고 느낀다. 군에서 읍내나 면내는 도시하고 똑같다. 읍내와 면내는 도시를 닮으려 한다. 읍내와 면내에서 일하는 분들은 도시에서 일하는 모습하고 똑같다. 곧, 시골로 치는 군·읍·면이라 하지만, 흙을 일구거나 고기를 잡는 시골마을에 깃들어 살아가지 않는다면 ‘시골사람’이라 할 수 없겠구나 싶다. 읍내 피자집이나 통닭집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시골사람인가? 면내 동사무소 아저씨와 면내 우체국 아줌마는 시골사람인가? 읍내 고등학교 교사는 시골사람인가? 면내 초등학교 교사는 시골사람인가?


  99.9퍼센트, 또는 99.99퍼센트는 도시나 ‘도시가 된 땅’에서 살아간달 수 있다. 도시나 ‘도시가 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도시사람’, 곧 ‘시민’이라 할 수 있다.


  도시사람과 시골사람을 나란히 놓고서, 누가 좋거나 누가 아름답다거나 하며 가리거나 따질 수 없다. 다만, 오늘날 이 나라 목소리를 곰곰이 살피자면, 99.9퍼센트나 99.99퍼센트는 참말 ‘도시사람 목소리’일 뿐이라고 느낀다. 아니, 99.999퍼센트나 99.9999퍼센트는 온통 ‘도시사람 목소리’로 가득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바야흐로 ‘시골’이라는 이름은 으레 등 굽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떠올리는 모습이 되고 보니, 우리 식구 같은 시골사람으로서는 ‘시골’이라는 낱말을 누군가 입에 올리면 귀가 참 간지럽다. 시골이 뭔데. (4345.7.1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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