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실 책읽기

 


  털실로 뜨개옷을 짤 수 있다. 털실을 길게 한 가닥 풀어 잡기놀이를 할 수 있고, 한 가닥을 세발자전거 손잡이에 이어 당기기놀이를 할 수 있다. 털실뭉치를 공으로 삼아 받기놀이를 할 수 있고, 알맞게 끊어 바닥에 그림놀이를 할 수 있다. 내 생각에 따라 털실은 좋은 놀잇감이 되고 좋은 놀이벗이 된다. 내 마음에 따라 털실은 새 모습으로 태어나고, 새 빛깔을 곱게 입는다.


  책이란 무엇인가. 책 하나는 나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책을 읽은 나는 스스로 내 삶을 얼마나 가다듬으면서 새롭게 태어나려 하는가. 책을 빚은 사람들은 책을 빚는 동안 얼마나 산뜻하며 아리땁게 거듭나려 하는가. 책은 삶에 빛이 되는가. 책은 삶에 길이 되는가. 책은 어디에 있을까. 책은 무엇을 이루는가. 책을 손에 쥔 사람들은 하루하루 얼마나 재미난 꿈을 꾸는가. 책은 어디에서 만들어 어디에서 읽히는가.


  아이가 털실을 갖고 논다. 어른도 털실을 갖고 논다. 털실은 누가 빚었을까. 털실은 숲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털실로 짠 옷이 낡으면 이 실올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실로 옷을 짜서 입으려는 생각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을까. 몸을 덮는 세포처럼 옷을 이루는 실을 생각하고, 머리를 덮는 머리카락처럼 모시나 누에한테서 실을 얻는 길을 생각하던 마음은 어떠한 빛이었을까.


  책은 날마다 태어난다. 오늘 새로 나온 책은 모레에는 지나간 책이 되고, 모레에 새로 나올 책은 글피에 흘러간 책이 된다. 같은 이야기 담은 책이 꾸준하게 새로운 옷을 입으며 태어나기도 하고, 같은 이야기 담은 책을 되풀이해서 읽기도 한다. 얼마나 다른 삶을 얼마나 다른 손길로 엮은 책일까. 얼마나 오래도록 이어갈 꿈과 사랑을 담으려 하는 책일까. 사람들은 책 하나로 어떤 실타래를 엮어 서로서로 아름답게 살아갈 지구별을 보살피려 하는가. (4345.7.2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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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7-27 09:09   좋아요 0 | URL
옆지기님이신가요?
그 솜씨 좋으신?
미인이셔요

파란놀 2012-07-27 09:22   좋아요 0 | URL
옆지기는 아니고,
저희 시골집에 나들이를 오신 '호주에 사는 이웃' 님입니다~ ^^
 

 

 산들보라 울지 말아

 


  나들이 가며 산들보라를 품에 안다가 마을 할머니들 사이에 내려놓았더니, 다시 안아 달라며 운다. 산들보라야, 울지 말아, 할머니들 모두 너를 예뻐 하는데, 예쁘게 웃으며 씩씩하게 걸어야지. (4345.7.2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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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7-27 07:35   좋아요 0 | URL
그런데 우는 게 귀여운데요
우는 게 이쁜 건 아이때뿐인것 같아요
으앙 소리가 들리는 것같아요

파란놀 2012-07-27 23:28   좋아요 0 | URL
음... 뭐 늘 이쁘지요~ ^^;;;
 


 자전거 붙잡는 어린이

 


  나들이를 다녀오며 동생이 잠들다. 누나가 수레에서 먼저 내려 자전거를 붙잡아 준다. 아버지는 문을 열어 자전거를 들여놓는다. 예쁜 아이들이 예쁜 하루를 마감한다. (4345.7.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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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Kitchien 1
조주희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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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에 아로새기는 맛
 [만화책 즐겨읽기 169] 조주희, 《키친 (1)》

 


  내가 차린 밥을 내가 맛있게 먹습니다. 내가 차린 밥으로 아이들이 맛있게 먹습니다. 나는 좋은 마음이 되어 밥을 차립니다. 나 스스로 안 좋은 마음일 때에는 밥을 차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몸으로 안 좋은 기운을 넣고 싶지는 않거든요. 가장 좋은 마음이 되어 가장 좋은 밥을 차려서 먹고 싶습니다. 가장 좋은 생각을 빛내어 차린 밥으로 아이들이 좋은 숨결을 받아들일 때에 즐겁습니다.


  내가 걷는 들길은 푸르고 싱그럽습니다. 내가 보는 하늘은 맑고 파랗습니다. 내가 마시는 바람은 상큼하고 시원합니다. 내가 쬐는 햇살은 따스하고 포근합니다. 좋은 들길을 걷고 싶고, 좋은 하늘을 누리고 싶으며, 좋은 바람을 맞이하고 싶고, 좋은 햇살하고 인사하고 싶습니다.


- “그런데, 어느 주말, 미니오븐을 구해서 저에게 빵을 구워 주셨죠. 그 빵은 오랫동안 반죽을 쳐대야 하는 투박한 단팥빵이었는데, 처음이어서 그런지, 빵은 질기고 딱딱한 데다 맛도 별로였죠. 그 뒤 난, 다시는 엄마의 빵을 맛볼 수 없었어요. 그 빵을 마지막으로, 엄마는 절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때, 움켜쥔 빵의 말랑한 촉감과 따뜻함, 달콤한 향기, 그건 분명, 엄마의 살처럽 형체가 있는 사랑이었어요.” (80∼82쪽)

 


  늘 먹는 밥은 내 몸입니다. 늘 바라보는 곳은 내 마음입니다. 내가 마련하는 먹을거리는 내 몸을 이룹니다. 내가 돌보는 보금자리는 내 마음을 이룹니다. 어떤 먹을거리를 살펴 건사하느냐에 따라 내 몸을 다스리는 삶이 달라집니다. 어떤 보금자리를 찾아 보듬느냐에 따라 내 마음을 추스르는 삶이 달라집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어디인가는 퍽 대단한 일이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 삶터는 곧 오늘날 사람들 마음이거든요. 오늘날 사람들이 으레 먹는 밥과 오늘날 사람들이 바깥에서 사다 먹는 밥도 무척 대단한 일이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 먹을거리와 바깥밥은 고스란히 오늘날 사람들 몸이에요.


  좋은 몸이 되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기울어지지 않도록 알맞게 어루만집니다. 좋은 마음이 되면서 몸이 무너지거나 갈팡질팡하지 않게끔 슬기롭게 보살핍니다. 좋은 밥을 마련해서 나누는 삶은 서로서로 아름다운 꿈을 키우는 밑거름이 됩니다. 좋은 집을 가꾸며 함께하는 살림은 나부터 따스한 사랑을 나누는 밑바탕이 됩니다.


  다만, 좋은 밥은 비싼 밥이 아닙니다. 좋은 생각을 키우는 손길로 거둔 좋은 먹을거리를 좋은 사랑으로 손질하며 빚는 밥일 때에 좋은 밥입니다. 좋은 집은 비싼 집이 아닙니다. 좋은 생각을 북돋우는 몸짓으로 일구어 좋은 사랑이 샘솟도록 아낄 때에 좋은 집입니다.


- “‘그래도 배고픈 오빠야들을 위로해 줄 소중한 컵라면이겄제. 아, 참, 컵라면 맛은 어디든 똑같은 것 같데이. 울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서울에서나, 글꼬 내 거나 오빠들 거나, 참 맛있다카이.’ (104쪽)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멧길을 오르내리며 생각합니다. 아이들과 아버지는 땡볕을 뜨겁게 받으면서 시골길을 달립니다. 오르막에서는 후끈후끈하구나 하고 느낍니다. 내리막에서는 시원한 바람을 쐬며 땀을 식힙니다. 우리 둘레는 논밭이거나 숲입니다. 우리 앞으로도 논밭이거나 숲입니다. 아이들과 아버지는 더운 바람도 시원한 바람도 모두 맞아들입니다. 멧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나뭇잎 흔드는 소리를 들으며, 한여름을 맞아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멧새는 무얼 먹으며 나무숲에서 살까 궁금합니다. 풀벌레는 무얼 먹으며 풀숲에서 살까 궁금합니다. 멧새와 풀벌레는 저마다 제 삶터에서 저희한테 가장 좋은 밥을 먹을 테지요. 멧새와 풀벌레는 스스로 가장 좋아할 만한 보금자리를 이루어 가장 좋은 노래를 들려줄 테지요.


  바람은 온누리 어디에서나 붑니다. 싱싱 불기도 하고 산들산들 불기도 하지만, 때때로 아주 고즈넉하게 잠들기도 합니다. 포근한 바람이면서 싱그러운 바람입니다. 보드라운 바람이면서 살가운 바람입니다.


  햇살은 지구별 곳곳을 감쌉니다. 후끈후끈 내리쬐기도 하지만 살그마니 간질이기도 합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알맞게 나누어 베풉니다. 어느 곳은 여름이 짧고 어느 곳은 겨울이 없다시피 하지만, 햇살은 언제나 지구별 어디에나 따사로이 깃듭니다.


- ‘지금 넌 살아 있지 않냐고, 정신 번쩍 차리게 만들어 주는 회초리 같은 음식. 그래, 살아 있었다면 우린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고통없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사진 속 그 애는 내게 말했다.’ (136쪽)

 


  조주희 님 만화책 《키친》(마녀의책장,2009) 첫째 권을 읽습니다. 밥 한 그릇에 서린 이야기를 조물딱조물딱 엮습니다. 사랑스러운 꿈이 서린 밥 이야기가 있고, 서러운 생채기가 서린 밥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스로 느끼기 나름인데, 스스로 사랑스럽다고 느끼면 사랑스럽습니다. 스스로 서럽다고 느끼면 서럽습니다. 어느 쪽이 되든, 내가 먹는 모든 밥은 내 가슴에 아로새기는 맛입니다. 내 가슴에 아로새기는 맛은 내 몸에 아로새기는 삶입니다.


  밥을 차리는 손길은 마음에 아로새기는 꿈입니다. 밥을 기다리는 눈길은 마음에 아로새기는 빛입니다. 밥을 차리며 꿈을 먹고, 밥을 기다리며 빛을 먹습니다. 밥을 먹는 이야기는 삶을 먹는 이야기요, 밥을 빚는 이야기는 삶을 빚는 이야기입니다. (4345.7.26.나무.ㅎㄲㅅㄱ)

 


― 키친 1 (조주희 글·그림,마녀의책장 펴냄,2009.10.20./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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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로 적는 길
[말사랑·글꽃·삶빛 22] 외국말을 옮길 때에는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말을 합니다. 스스로 살지 않는 모습으로 말을 하지 못합니다. 몸소 겪고, 몸소 들으며, 몸소 생각한 그대로 말을 합니다. 누구라도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말을 하는 만큼, 더 잘난 말이란 없고 덜 좋은 말 또한 없습니다. 언제나 내 삶자리에 맞추어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은 이러한 말대로 이러한 삶을 보여주고, 저러한 말은 저러한 말대로 저러한 삶을 보여줍니다.


  삶을 보여주거나 드러내는 말이기에, 말 한 마디를 듣거나 말 두 마디를 들으면서 ‘나한테 말을 거는 사람’이 살아온 발자국을 더듬습니다. 이녁 스스로 사랑하면서 일구는 삶을 헤아립니다. 누군가는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나는 마음을 읽으면 되지 ‘맞춤법’이나 ‘표준말’이나 ‘바로쓰기’나 ‘글다듬기’를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뜨거운 감자’라느니 ‘졸라’라느니 ‘레알’이라느니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괜찮아요. 이러한 말마디를 섞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 넋인가 하고 읽으면 될 뿐, 이 말은 이렇게 다듬고 저 말은 저렇게 고치라 할 까닭이 없어요. 다듬을 말이란 스스로 깨달을 때에 다듬을 수 있고, 고칠 말 또한 스스로 느낄 때에 고칠 수 있어요.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습니다. 배고프지 않은 사람은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느낄 때에 비로소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밥을 찾습니다. 마음으로 느끼는 말이 될 때에,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가장 빛나고 가장 즐겁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못 느낄 때에는 그저 못 느끼는 대로 이 말이든 저 말이든 끌어들여 쓰기 마련입니다.


  일본사람 구도 나오코 님이 쓰고 한국사람 고향옥 님이 옮긴 푸른문학 《친구는 초록 냄새》(청어람미디어,2008)를 읽다가 100쪽에서 “당나귀는 ‘천천히 걷기’를 시작했다. 해 보니, 꽤 어렵다. 금세 ‘종종걸음’으로 바뀐다. 이러다가는 순식간에 사자에게 도착할 것이다.”와 같은 글월을 봅니다. 한국말로 옮긴 문학인데, ‘시작(始作)’이나 ‘도착(到着)’ 같은 낱말을 한국말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소리값만 ‘한자를 한글로 옮기’고 끝냈습니다.


  한국말로 적는 길을 생각해 봅니다. 이 글월을 살피면 “천천히 걷기”라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걷기’를 일본사람은 일본말로 ‘い(行)く’라 적었을 수 있고, ‘보행(步行)’이나 ‘산보(散步)’라 적었을 수 있어요. 이 대목에서는 ‘걷기’라고 옮겼어요. 그러니까, 일본사람이 일본말로 ‘行’을 쓰든 ‘步行’을 쓰든 ‘散步’를 쓰든,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걷다’라 적으면 넉넉하다는 뜻입니다. 글흐름에 맞추어 ‘가다’라 적을 수 있고 ‘마실하다’나 ‘나들이하다’라 적을 수 있어요. 보기글을 다시 들여다보면 “천천히 걷기를 시작했다. 해 보니, 꽤 어렵다.”라 나오는데, ‘시작했다’ 다음에 ‘해 보니’라고만 적습니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천천히 걷기를 했다. 해 보니, 꽤 어렵다.”처럼 적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작’이라는 한자말은 군말인 셈입니다. 한국사람은 ‘시작’이라는 낱말을 무척 널리 쓰기는 하지만, 곰곰이 살피면, 한국사람한테 ‘시작’ 같은 낱말은 그리 쓸모없다고 할 수 있어요. 아니, 한국말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어요.


  왜 그럴까요. 왜 ‘始作’과 같은 한자말은 ‘한자말’일 뿐이면서 ‘한국말’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도 푸름이도 스스로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서른 살 어른도 예순 살 어른도 스스로 헤아려 보면 좋겠어요.


  “시작과 종료(終了)”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처음과 끝”입니다. “자, 시작하자!”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자, 해 보자!”나 “자, 하자!”입니다. “시작이 안 좋았어.”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처음이 안 좋았어.”나 “마수(마수걸이)가 안 좋았어.”입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예요. “휴가철이 시작되면서”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휴가철이 되면서”이고요. 국어사전에는 “짐을 싣기 시작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같은 글월을 싣는데, “짐을 싣자 빗방울이 떨어진다”처럼 바로잡아야 알맞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한국사람이 보는 한국어사전은 한국말을 슬기롭게 가다듬어야 알맞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으나” 같은 글월은 엉터리입니다. 한자말 ‘시작’은 ‘처음’을 가리키니까, 이 글월 첫머리에 ‘처음에는’처럼 적었으면 “처음에는 기자로 사회생활을 하였으나”라 적어야 앞뒤가 올바르게 이어져요.


  아마, 누군가 이런 글월은 이렇게 풀어내고 저런 글월은 저렇게 풀어내 보셔요,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아하 그렇네, 하고 깨달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서 알아차리거나 알아듣는 한국말은 아니에요.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해요. 말결과 말무늬와 말투와 말씨는 스스로 가다듬거나 갈고닦아야 해요. 내 목숨을 잇거나 살찌우는 밥은 내 몸으로 받아들여요. 옆사람이 밥을 먹어 주었기에 내 배가 부르지 않아요. 내가 밥을 먹으며 내 배가 불러요. 내가 하는 말은 내가 스스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하는 말이에요. 누가 옆에서 지식이나 정보를 알려주었기에 내가 받아들이지 못해요. 스스로 찾고 스스로 익혀 스스로 삶이 되어야 비로소 내 말이 돼요.


  푸른문학 《친구는 초록 냄새》를 읽다가 본 글월에는 “이러다가는 순식간에 사자에게 도착할 것이다” 같은 대목도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도착’ 말풀이를 찾으면 “목적한 곳에 다다름”이라 나와요. 곧, 한자말은 ‘到着’이요 한국말은 ‘다다르다’란 뜻이에요. 한국사람이 이웃이나 동무를 사귀며 주고받을 한국말은 ‘다다르다’란 소리예요.


  ‘다다르다’를 혀로 또르르 굴릴 수 있으면, 이 낱말 하나에서 비롯하여 ‘닿다’랑 ‘이르다’랑 ‘가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디를 하면서 말 두세 마디가 이어져요. 말 한 마디를 생각하면서 말 서너 마디를 꿈꾸어요.


  그리고, 이 글월에 나오는 ‘순식간(瞬息間)에’와 ‘금세’는 같은 낱말이에요. 말고리를 살피면 ‘바로’와 ‘곧장’과 ‘곧바로’와 ‘곧’을 떠올릴 수 있고, 말가지를 넓혀서 ‘눈 깜짝할 새’라든지 ‘눈 깜빡할 새’를 되새길 수 있어요. 말느낌을 살리면 ‘끔뻑하다’라든지 ‘금벅하다’라든지 ‘굼벅하다’라든지 ‘꿈뻑하다’처럼 적어도 돼요. 왜냐하면, 한국말이기 때문입니다. 느낌과 결을 살리면서 흐름과 무늬를 빛내는 한국말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새롭게 생각해 봅니다. “이러다가는 눈 끔뻑할 새에 사자에게 닿겠네”하고 “이러다가는 곧장 사자한테 가겠네”를 일본말이나 영어로 옮긴다고 하면, 어떻게 적을 만할까요. (4345.7.2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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