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로 적는 길
[말사랑·글꽃·삶빛 22] 외국말을 옮길 때에는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말을 합니다. 스스로 살지 않는 모습으로 말을 하지 못합니다. 몸소 겪고, 몸소 들으며, 몸소 생각한 그대로 말을 합니다. 누구라도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말을 하는 만큼, 더 잘난 말이란 없고 덜 좋은 말 또한 없습니다. 언제나 내 삶자리에 맞추어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은 이러한 말대로 이러한 삶을 보여주고, 저러한 말은 저러한 말대로 저러한 삶을 보여줍니다.
삶을 보여주거나 드러내는 말이기에, 말 한 마디를 듣거나 말 두 마디를 들으면서 ‘나한테 말을 거는 사람’이 살아온 발자국을 더듬습니다. 이녁 스스로 사랑하면서 일구는 삶을 헤아립니다. 누군가는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나는 마음을 읽으면 되지 ‘맞춤법’이나 ‘표준말’이나 ‘바로쓰기’나 ‘글다듬기’를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뜨거운 감자’라느니 ‘졸라’라느니 ‘레알’이라느니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괜찮아요. 이러한 말마디를 섞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 넋인가 하고 읽으면 될 뿐, 이 말은 이렇게 다듬고 저 말은 저렇게 고치라 할 까닭이 없어요. 다듬을 말이란 스스로 깨달을 때에 다듬을 수 있고, 고칠 말 또한 스스로 느낄 때에 고칠 수 있어요.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습니다. 배고프지 않은 사람은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느낄 때에 비로소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밥을 찾습니다. 마음으로 느끼는 말이 될 때에,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가장 빛나고 가장 즐겁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못 느낄 때에는 그저 못 느끼는 대로 이 말이든 저 말이든 끌어들여 쓰기 마련입니다.
일본사람 구도 나오코 님이 쓰고 한국사람 고향옥 님이 옮긴 푸른문학 《친구는 초록 냄새》(청어람미디어,2008)를 읽다가 100쪽에서 “당나귀는 ‘천천히 걷기’를 시작했다. 해 보니, 꽤 어렵다. 금세 ‘종종걸음’으로 바뀐다. 이러다가는 순식간에 사자에게 도착할 것이다.”와 같은 글월을 봅니다. 한국말로 옮긴 문학인데, ‘시작(始作)’이나 ‘도착(到着)’ 같은 낱말을 한국말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소리값만 ‘한자를 한글로 옮기’고 끝냈습니다.
한국말로 적는 길을 생각해 봅니다. 이 글월을 살피면 “천천히 걷기”라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걷기’를 일본사람은 일본말로 ‘い(行)く’라 적었을 수 있고, ‘보행(步行)’이나 ‘산보(散步)’라 적었을 수 있어요. 이 대목에서는 ‘걷기’라고 옮겼어요. 그러니까, 일본사람이 일본말로 ‘行’을 쓰든 ‘步行’을 쓰든 ‘散步’를 쓰든,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걷다’라 적으면 넉넉하다는 뜻입니다. 글흐름에 맞추어 ‘가다’라 적을 수 있고 ‘마실하다’나 ‘나들이하다’라 적을 수 있어요. 보기글을 다시 들여다보면 “천천히 걷기를 시작했다. 해 보니, 꽤 어렵다.”라 나오는데, ‘시작했다’ 다음에 ‘해 보니’라고만 적습니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천천히 걷기를 했다. 해 보니, 꽤 어렵다.”처럼 적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작’이라는 한자말은 군말인 셈입니다. 한국사람은 ‘시작’이라는 낱말을 무척 널리 쓰기는 하지만, 곰곰이 살피면, 한국사람한테 ‘시작’ 같은 낱말은 그리 쓸모없다고 할 수 있어요. 아니, 한국말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어요.
왜 그럴까요. 왜 ‘始作’과 같은 한자말은 ‘한자말’일 뿐이면서 ‘한국말’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도 푸름이도 스스로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서른 살 어른도 예순 살 어른도 스스로 헤아려 보면 좋겠어요.
“시작과 종료(終了)”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처음과 끝”입니다. “자, 시작하자!”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자, 해 보자!”나 “자, 하자!”입니다. “시작이 안 좋았어.”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처음이 안 좋았어.”나 “마수(마수걸이)가 안 좋았어.”입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예요. “휴가철이 시작되면서”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휴가철이 되면서”이고요. 국어사전에는 “짐을 싣기 시작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같은 글월을 싣는데, “짐을 싣자 빗방울이 떨어진다”처럼 바로잡아야 알맞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한국사람이 보는 한국어사전은 한국말을 슬기롭게 가다듬어야 알맞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으나” 같은 글월은 엉터리입니다. 한자말 ‘시작’은 ‘처음’을 가리키니까, 이 글월 첫머리에 ‘처음에는’처럼 적었으면 “처음에는 기자로 사회생활을 하였으나”라 적어야 앞뒤가 올바르게 이어져요.
아마, 누군가 이런 글월은 이렇게 풀어내고 저런 글월은 저렇게 풀어내 보셔요,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아하 그렇네, 하고 깨달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서 알아차리거나 알아듣는 한국말은 아니에요.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해요. 말결과 말무늬와 말투와 말씨는 스스로 가다듬거나 갈고닦아야 해요. 내 목숨을 잇거나 살찌우는 밥은 내 몸으로 받아들여요. 옆사람이 밥을 먹어 주었기에 내 배가 부르지 않아요. 내가 밥을 먹으며 내 배가 불러요. 내가 하는 말은 내가 스스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하는 말이에요. 누가 옆에서 지식이나 정보를 알려주었기에 내가 받아들이지 못해요. 스스로 찾고 스스로 익혀 스스로 삶이 되어야 비로소 내 말이 돼요.
푸른문학 《친구는 초록 냄새》를 읽다가 본 글월에는 “이러다가는 순식간에 사자에게 도착할 것이다” 같은 대목도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도착’ 말풀이를 찾으면 “목적한 곳에 다다름”이라 나와요. 곧, 한자말은 ‘到着’이요 한국말은 ‘다다르다’란 뜻이에요. 한국사람이 이웃이나 동무를 사귀며 주고받을 한국말은 ‘다다르다’란 소리예요.
‘다다르다’를 혀로 또르르 굴릴 수 있으면, 이 낱말 하나에서 비롯하여 ‘닿다’랑 ‘이르다’랑 ‘가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디를 하면서 말 두세 마디가 이어져요. 말 한 마디를 생각하면서 말 서너 마디를 꿈꾸어요.
그리고, 이 글월에 나오는 ‘순식간(瞬息間)에’와 ‘금세’는 같은 낱말이에요. 말고리를 살피면 ‘바로’와 ‘곧장’과 ‘곧바로’와 ‘곧’을 떠올릴 수 있고, 말가지를 넓혀서 ‘눈 깜짝할 새’라든지 ‘눈 깜빡할 새’를 되새길 수 있어요. 말느낌을 살리면 ‘끔뻑하다’라든지 ‘금벅하다’라든지 ‘굼벅하다’라든지 ‘꿈뻑하다’처럼 적어도 돼요. 왜냐하면, 한국말이기 때문입니다. 느낌과 결을 살리면서 흐름과 무늬를 빛내는 한국말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새롭게 생각해 봅니다. “이러다가는 눈 끔뻑할 새에 사자에게 닿겠네”하고 “이러다가는 곧장 사자한테 가겠네”를 일본말이나 영어로 옮긴다고 하면, 어떻게 적을 만할까요. (4345.7.26.나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