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뉴튼 - 관음과 욕망의 연금술사 현대 예술의 거장
헬무트 뉴튼 지음, 이종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사진과 섹스 두 가지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6] 헬무트 뉴튼, 《헬무트 뉴튼, 관음과 욕망의 연금술사》(을유문화사,2004)

 


- 책이름 : 헬무트 뉴튼, 관음과 욕망의 연금술사
- 글 : 헬무트 뉴튼
- 옮긴이 : 이종인
- 펴낸곳 : 을유문화사 (2004.11.25.)
- 책값 : 2만 원

 


  (1) 가슴에 아로새기는 한 가지


  1920년에 태어나 2004년에 숨을 거둔 사진쟁이 헬무트 뉴튼 님 스스로 이녁 삶을 적바림한 책 《헬무트 뉴튼, 관음과 욕망의 연금술사》(을유문화사,2004)를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섹스’라는 낱말이 ‘사진’이라는 낱말보다 훨씬 자주 많이 나옵니다. 한국말로 옮긴 책에 붙인 이름은 “관음과 욕망의 연금술사”이지만, 헬무트 뉴튼 님은 “AUTOBIOGRAPHY”라는 이름만 붙여서 이녁 이야기를 펼칩니다. 스스로 살아온 이야기를 적바림한 책이고, 스스로 생각한 이야기를 아로새긴 책이며, 스스로 사랑한 이야기를 읊은 책입니다.


  그러니까, 헬무트 뉴튼 님으로서는 이녁이 ‘살’고 ‘생각’하며 ‘사랑’한 이야기를 적은 책이기에, 스스로 마음에 오래도록 품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누구이든 스스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누구라도 스스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사진으로 찍으며 노래로 부릅니다.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고 싶은 길을 말하며 차근차근 이룹니다. 헬무트 뉴튼 님은 이녁 삶에 두 가지를 나란히 놓습니다. 하나는 살섞기(섹스)이고, 하나는 사진입니다.


.. 나는 싱가포르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도서관에 죽치고 눌러앉은 시간이 많아졌다. 책과 잡지에 끌렸고, 브로샤이와 조지 허렐(Geoge Hurrell) 같은 훌륭한 사진작가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진작가가 되겠다는 욕구가 내 마음속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나의 스승 이바가 생각났고, 그녀의 스튜디오에서 얼마나 기쁨에 넘쳐 일했는지 회상하게 되었다. 나는 싱가포르에 있는 동안 전문직에 대한 야망을 잊어버렸고 장래를 완전히 망각했다 … 나는 (2차 세계대전 포로수용소에서) 화장실 청소 팀에 들어갔는데, 일은 불쾌해도 하루에 2시간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만 끝내 놓으면 나머지 시간은 무슨 짓을 하던 자유였다. 드러누워서 일광욕을 하든지, 독서(수용소 내에 아주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다(를 하든 자유시간을 즐겼다 ..  (127, 135쪽)


  내가 살아가는 나날을 돌아봅니다. 사진을 찍는 내 삶을 헤아립니다. 내가 스스로 내 사진을 말하는 자리에서는 어느 낱말을 골라 얼마나 자주 들먹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나는 내 사진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삶’이라는 낱말을 틈틈이 들먹이리라 봅니다. ‘삶사진’을 말하다가 ‘사진삶’을 말할 테고, ‘삶찍기’와 ‘삶읽기’를 말하리라 봅니다.


  나는 사진찍기뿐 아니라 글쓰기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도 ‘삶’을 으레 들먹입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삶쓰기’요, ‘책읽기’는 ‘삶읽기’가 된다고 곧잘 이야기합니다.


  내가 내 사진밭을 이야기하면서 ‘삶’이라는 낱말을 읊는 횟수만큼, 헬무트 뉴튼 님은 ‘살섞기’라는 낱말을 읊겠지요. 내가 내 사진길을 되짚으면서 ‘삶’이라는 낱말을 노래하는 만큼, 헬무트 뉴튼 님은 ‘살섞기’라는 낱말을 노래하리라 느낍니다.


.. 그녀(아내가 된 준)는 내가 여태껏 알아 온 여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다른 여자들은 오로지 섹스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섹스 이외의 차원이 있었다 … 이런 점에서 준은 내게 힘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밖에 나가서 양식을 살 돈을 벌어 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위대한 패션 사진작가가 되고 싶은 나의 욕구와 야망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듯이 사진을 선택한 것은 사진이 좋아서 그런 것이지, 큰돈을 벌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  (179, 212쪽)


  사진을 찍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예 좋아서 사진을 찍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나날이 온통 사진이기에 아주 홀가분하게 사진을 찍습니다. 날마다 좋은 꿈을 꾸면서 예쁜 사랑을 빚으니 가없이 마땅하게 사진을 찍습니다. 어느 한 가지 뜻을 이루고자 차근차근 사진을 찍습니다. 1등이 되고픈 사람이 있고, 돈을 벌고픈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교수를 바라는 이가 있을 테며, 사진작품으로 책을 내거나 잔치를 열고픈 이가 있어요.


  어떠한 뜻이든 다 좋습니다. 어떠한 뜻이든 스스로 생각을 슬기롭게 품으면 모두 이룰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삶을 빛낼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사랑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사진찍기를 즐기며 살섞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사진찍기로 돈벌이를 삼을 수 있습니다. 사진누리에서 1등이 될 수 있을 테고, 사진역사에 이름을 아로새길 수 있어요. 사진책을 수십 수백 권 내놓을 수 있고, 대학교 사진학과 교수가 될 수 있어요.


  다만, 이 길을 이루거나 저 뜻을 펼치는 모습이 ‘내 삶’에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돌아보면 됩니다. 이 길을 이루거나 저 뜻을 펼치는 보람과 재미를 스스로 깨달으면 됩니다.


  높직한 멧봉우리에 올랐으니 내려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8000미터가 넘는 멧봉우리를 오른 이들은 멧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고 사진을 찍은 다음 바지런히 내려옵니다. 매서운 칼바람 부는 눈밭에서 먹고살 만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곧, 어떤 길이나 뜻을 이루려는 사람은 어떤 길이나 뜻을 이루고는 ‘다른 새로운 길이나 뜻’을 곧장 세우거나 천천히 또는 빠르게 ‘내려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사진누리에서 1등 자리에 올라서다가 아무것 아닌 자리에 내려오는 일은 부질없는지 모릅니다. 내가 1등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다른 누군가가 1등 자리에 있었을 테고, 내가 1등 자리에서 내려올 때에는 다른 누군가가 1등 자리에 올라서겠지요. 그런데,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1등 자리에 서는 사람들은 무엇을 누리거나 겪거나 느끼거나 즐길 만할까요.


.. 그 후 나는 누가 나에게 너는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해라, 이런 식으로 해서 돈을 벌어라 하고 말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 싫어하는 곳에 대해서는 타고난 저항심이 발휘되었다. 좋아하는 곳이라면 마치 택시 운전사가 된 듯 그곳의 지리를 훤하게 파악했다. 사실 파리에서 길을 익히는 데에는 몇 주밖에 걸리지 않았고 … 나는 편집자들의 사진 선택에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여러 해 전부터 사정은 나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나는 요사이 일을 주문해 온 잡지사에 내 마음에 드는 몇 장의 사진만 제공한다 … 나는 이렇게 주장하곤 했다. “잡지사는 우리 작가들을 들개처럼 파리 시내에 풀어놓고 아주 파격적인 사진을 찍어 오도록 해야 한다. 프랑스의 《보그》만이 발표할 용기가 있는 그런 사진을 찍어 오라고 요구해야 한다.” ..  (189, 203, 237쪽)


  마음이 따사로운 사람은 무엇을 해도 따사로운 기운을 누립니다. 마음이 가벼운 사람은 무엇을 해도 가볍게 누립니다.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넉넉히 생각하고 품으며 어루만집니다.


  사진찍기라고 대수롭지 않습니다. 글쓰기라고, 흙일이라고, 대통령 노릇이라고, 도지사나 시의원 구실이라고 더 대수롭지 않습니다.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일일 때에 스스로 삶이 됩니다. 스스로 좋아하며 받아들일 때에 바야흐로 삶으로 누립니다.


  사진쟁이 헬무트 뉴튼 님은 ‘살섞기와 사진’입니다. 다른 누군가는 ‘나들이(여행)와 사진’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린 두 아이와 살아가는 나는 ‘아이들과 사진’이 될 수 있습니다(2012년에 다섯 살 큰아이와 두 살 작은아이가 있습니다). 아마, 나처럼 ‘아이들과 사진’으로 살아가는 사진쟁이가 꽤 있으리라 봅니다. 어느 사람은 ‘책과 사진’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은 ‘전쟁터와 사진’이 될 만하고, 어느 사람은 ‘사회와 사진’이 될 만해요. ‘노래와 사진’이라든지 ‘바다와 사진’이라든지 ‘예술과 사진’이라든지, 스스로 빚는 결대로 사진을 즐깁니다. 스스로 바라는 길을 스스로 찾아 스스로 빛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는 어느 회사 어느 사진기로 사진을 찍느냐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림자(흑백)인지 무지개(칼라)인지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진이면 됩니다. 얼굴이 예쁘건 몸매가 잘빠지건, 살섞기를 하는 사람은 살섞기를 할 뿐이에요. 나무가 우거지든 나무가 없든, 멧봉우리를 타려는 사람은 멧봉우리를 탈 뿐이에요. 빠르건 느리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노래를 부를 뿐이에요.


  가슴으로 담는 한 가지를 생각합니다. 내 가슴에 담아 내 몸으로 살아내는 한삶을 생각합니다. 가슴으로 스미면서 늘 되돌아보는 한길을 생각합니다.


.. 몇 년 전, 나는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잡지사나 광고주가 가지고 있으면서 사진작가에게 돌려주지 않은 사진은 크기와 관계없이 엄청난 가격, 가령 한 장당 4000∼5000달러를 지불하도록 청구한다는 생각이었다 … 나의 사진 기술은 소년 시절에 익혔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빛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때 과다노출이 될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  (239, 272, 297쪽)


  운동선수가 되거나 과학자가 되거나 스스로 되고 싶으면 될 수 있습니다. 가정주부 일을 하거나 회사원 일을 하거나 스스로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을 누리며 물놀이를 하고 싶다면 따사로운 햇살을 누리며 물놀이를 할 수 있어요. 시원한 바람을 쐬며 나무그늘에서 쉬고 싶으면 시원한 바람을 쐬며 나무그늘에서 쉴 수 있어요.


  기쁜 생각은 기쁜 삶을 부릅니다. 걱정어린 생각은 걱정어린 삶을 부릅니다. 사진쟁이 헬무트 뉴튼 님은 언제나 이녁한테 가장 기쁠 삶을 생각합니다. 사진쟁이 헬무트 뉴튼 님은 이녁한테 걱정스러울 삶은 굳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녁 스스로 살아온 이야기를 펼친 책 《헬무트 뉴튼》은 헬무트 뉴튼 님 스스로 아주 좋아하고 아주 즐기며 아주 누린 한 가지 이야기만 신나게 담습니다. 그렇겠지요? 좋아해서 즐긴 이야기를 적을 ‘내 이야기(자서전)’예요. 어떤 일을 이루거나 못 이룬 이야기는 애써 적을 일이 없어요. 헬무트 뉴튼처럼 ‘사진을 찍어 이름을 얻’거나 ‘패션사진을 찍어 돈을 벌’거나 하는 이야기는 부질없어요. 헬무트 뉴튼은 이녁 스스로 생각을 어떻게 가다듬으면서 삶을 어떻게 누렸는가 하는 대목이 값있어요. 그래서 사진책 《헬무트 뉴튼》을 읽으면, 2/3는 ‘살섞기를 하며 지낸 옛이야기’요, 1/3은 ‘사진을 바라보는 짧은 글’이라 하는데, 사진을 바라보는 짧은 글조차 사진을 말하기보다는 살섞기를 말한다 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사진을 말할 때에 ‘삶’이 어떠한가를 밝힐 때에 내 사진이 환하게 드러나고, 헬무트 뉴튼 님은 ‘살섞기’가 어떠한가를 다룰 때에 이녁 사진이 밝게 드러나거든요.

 


  (2) 사진에 아로새기는 한 가지


  사진책 《헬무트 뉴튼》을 읽으면서, 이 사진책이나 다른 사진책에 실린 헬무트 뉴튼 님 사진을 읽으면서, ‘관음’도 ‘욕망’도 ‘외설’도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마땅한 소리인데, 헬무트 뉴튼 님 생각은 오직 하나입니다. ‘살섞기’입니다. 좋아하는 짝꿍하고 살을 섞는 일은 관음도 욕망도 외설도 아니에요. 오로지 살섞기입니다.


  아이들하고 먹을 밥을 차리는 일은 밥하기입니다. 오로지 ‘밥하기’입니다. 요리도 영양도 과학도 의무도 부업도 전업도 아닙니다. 그예 밥하기예요.


  누군가는 요리를 하겠지요. 누군가는 영양사 자격증을 따고는 영양을 이루겠지요. 누군가는 과학을 하고, 누군가는 의무를 하며, 누군가는 부업으로 밥하기를 하고, 누군가는 전업으로 밥하기를 할 테지요.


  누군가는 ‘관음’을 노리며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누군가는 ‘욕망’을 품으며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외설’과 ‘예술’은 어떻게 다를까요?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어떤 마음이 되어 사진기를 쥐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 나는 이미 사진작가는 그 나라의 언어를 할 줄 몰라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진작가는 독특한 세계관과 열성 팬이 있다면 그의 작품은 높은 보수를 받고 세계 어디에서나 팔리는 것이다 … 사진작가인 내가 이런 생활 풍경을 둘러본다는 것은 사진 작업에도 유익했다. 나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세계에서 살았다 … 파리 생활의 모든 단편들이 내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나는 프랑스사람에게서 패션을 배웠다. 그들이 어떻게 패션 감각을 가지고 태어나는지, 그들이 어떻게 옷을 입는지, 옷으로 어떻게 분위기를 바꾸는지 따위를 배웠다 … 나는 사진을 찍게 되면 그게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서랍 속에 집어넣지 않는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진을 보아주길 바란다 ..  (86, 206∼207, 348쪽)


  ‘외설’을 바라는 사람은 나무줄기나 나무뿌리를 바라보면서도 ‘외설’답다 싶은 사진을 찍습니다. ‘관음’을 꾀하는 사람은 돌멩이나 꽃잎을 바라보면서도 ‘관음’답다 싶은 사진을 찍어요. ‘예술’을 이루고 싶은 사람은 옷을 벗은 몸뚱이를 바라보면서도 ‘예술’이라 할 만한 사진을 찍습니다. ‘삶’이라 여기는 사람은 옷을 벗은 몸뚱이를 바라보든 아이들을 바라보든 어디에 서서 무엇을 바라보든 늘 ‘삶’이라 여길 만한 사진을 찍습니다.


.. 나는 내일을 기대하고 어제를 되돌아보지 않는다. 오늘이 상당히 좋았다면 내일은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1946년 나는 유명한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는 야망에 다시 사로잡혀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노이슈테터라는 고리타분한 독일식 이름은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새로운 인물과 맞지 않았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는 것이었고 … 종군 사진기자들은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전쟁의 참상과 자신 사이에 카메라가 없었다면 과연 그 유혈 사태와 전쟁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 … 좋은 인물사진을 찍으려면 먼저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인물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진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유혹의 행위이다 ..  (140, 169, 264, 339쪽)


  헬무트 뉴튼 님은 ‘스스로 좋아해서 기쁘게 찍’은 사진을, ‘내 둘레 사람들 누구나 좋아하며 기쁘게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인물사진’을 찍을 마음이 없는 헬무트 뉴튼 님입니다.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사진을 찍고, 이렇게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사진이 된 다음에는, 이녁 둘레에 있는 사람들도 좋아할 만한 사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바람이 차츰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헬무트 뉴튼 님 사진은 지구별 곳곳으로 퍼졌습니다. 이 바람이 찬찬히 튼튼해지고 씩씩해지면서 헬무트 뉴튼 님 사진은 사진밭을 한결 예쁘게 일구는 밑거름이 되었고, 어리거나 젊은 사진쟁이한테 좋은 넋을 불어넣어 주었어요.


  스스로 껍질을 만들지 않기에 겉치레 같은 사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껍데기를 뒤집어쓰려 하지 않으니 겉발림 같은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큰 알몸’이든 ‘작은 알몸’이든 아무것 아니에요. 그저 사진입니다. ‘큰 포도’와 ‘작은 포도’는 어떻게 다를까요. ‘큰 얼굴’과 ‘작은 얼굴’은 얼마나 다를까요.


  마음과 마음이 만나서 사랑이 싹틉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기에 ‘사진기를 쥐어 사진을 찍는’ 사람이랑 ‘사진기를 마주하며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랑 흐뭇하게 웃을 수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지 못하면 사랑이 자라지 못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지 못하기에, 한국땅에서도 패션사진이든 알몸사진이든 벗긴사진이든 찍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헬무트 뉴튼 님처럼 널리 읽히지 못합니다. 헬무트 뉴튼 님은 처음부터 ‘생각’이 달랐고 ‘마음’이 달랐어요. 스스로 품은 생각을 좋아하면서 삶을 좋아했어요. 스스로 품은 마음을 곱게 보살피려고 ‘돈이나 이름이나 주먹힘’ 같은 울타리하고는 등을 졌어요. 사진책 《헬무트 뉴튼》에서 ‘사진’을 말하는 이야기는 콩알만큼 조금 다루고 ‘살섞기’를 말하는 이야기는 수박알만큼 길게 다룰 만한 까닭이 있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대단한 이론이나 지식이나 정보를 얻을 일이란 없거든요. 이 책을 읽으면서 ‘삶을 사랑하고 마음을 좋아하는 꿈’을 느낄 수 있거든요.


.. 밥술이나 먹고 집세를 내려면 나는 인물사진과 결혼사진을 찍어야 했다. 결혼사진은 정말 지겨운 일이었다 … 창녀들이 옷을 입는 방식은 특이했다. 그들도 손님을 끌기 위해 타고난 패션 감각을 발휘해야 했다. 패션의 언어로 자신의 주특기를 보여주었다 … 나는 스튜디오 작업을 거부했는데, 스튜디오에서 일을 하면 별로 신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만약 그렇게 해야 한다면 나는 사진을 아예 찍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에게 영합하다니, 절대 그렇지 않다. 모델이 내 마음에 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  (184, 209, 212, 300쪽)


  사진에 아로새기는 한 가지는 누구한테나 한 가지입니다. 사진에 아로새기는 한 가지는 이 사람이라 해서 더 뛰어나거나 저 사람이라 해서 덜 뛰어나지 않습니다. 가장 뛰어날 만한 사진감은 없습니다. 초라하거나 보잘것없는 사진감은 없습니다. 다큐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더 높거나 더 낮지 않습니다. 전쟁터에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찍은 사진이기에 더 값어치가 생기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며 찍은 사진이기에 값어치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어떠한 생각으로 살아가면서 사진기를 쥐느냐를 느껴야 합니다. 스스로 어떠한 마음이 되어 살아가는 나날인가를 느껴야 합니다. 사진은 저기에도 없고 여기에도 없습니다. 사진은 늘 내 가슴속에 있습니다. 사진은 바로 내 삶이고, 내 삶은 곧 사진이 됩니다. 사진으로 펼치는 내 꿈이고, 내 꿈을 드러내는 사진입니다. 사진과 함께 웃는 삶이며, 웃는 삶은 시나브로 사진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 나는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자신을 먼저 생각한다. 준이 파리에서 헐레벌떡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의사는 그녀를 데리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당신의 최고 귀중품이 도착했습니다.” “뭐라고요? 이게 나의 최고 귀중품이오.” 나는 나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은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준은 섭섭했는지, 그 말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 지중해의 일몰 광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한없이 마음이 포근해졌다. 햇빛은 오랫동안 대기 중에 남아 있었고, 황금빛 노을이 이탈리아의 해안과 우리가 여행하는 작은 마을 위로 퍼졌다. 몬테카를로를 떠나 약 30분이 지나자 기차는 보르디게라 역에 섰고, 나는 그 순간 그 마을과 역을 좋아하게 되었다 ..  (253, 268쪽)


  패션사진을 하고 싶으면 ‘패션’과 ‘사진’과 ‘패션사진’에 온마음을 쏟으며 살아가면 됩니다. 다큐사진을 하고 싶으면 ‘다큐’와 ‘사진’과 ‘다큐사진’에 온마음을 기울이며 살아가면 됩니다.


  언제나 한 가지입니다. 사진에 새기는 이야기도 한 가지요, 내 삶도 한 가지입니다. 스스로 아름답다 느낄 꿈누리에서 날갯짓을 펼치는 길도 한 가지요, 아이들과 좋은 사랑을 빚는 길도 한 가지입니다.


  헬무트 뉴튼 님에 앞서 패션과 사진과 패션사진을 한 사람들이 있었듯, 이제는 누군가 새로운 생각과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누리는 사람들이 패션과 사진과 패션사진을 즐기며 하루를 빛내겠지요. (4345.8.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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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8-0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입할 수 있는 좋아하는 일과, 그 일을 지지해 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걸 줄이면 '일과 사랑'을 다 갖다,가 되겠네요.
예전에 을유문화사의 책을 많이 봤는데, 그래서 신간 안내의 홍보물도 받곤 했는데,
좋은 책만 선별해서 출판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오랜 만에 보니 반갑네요.
검색해 봐야겠어요.

파란놀 2012-08-09 07:34   좋아요 0 | URL
좋아하는 일은 스스로 좋아하니까
곁에 누가 지지하지 않아도 스스로 기운을 낼 수 있어요.
다만, 일 한 가지에만 빠지는 삶이 아니라,
일이 내 삶에서 어떤 사랑인가를 잘 느낄 수 있어야겠지요~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2) 일루의 1 : 일루의 희망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아버지는 아직도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헬무트 뉴튼/이종인 옮김-헬무트 뉴튼, 관음과 욕망의 연금술사》(을유문화사,2004) 85쪽

 

  “이런 상황(狀況)이었는데도”는 “이러했는데도”나 “이런 모습이었는데도”나 “이런 흐름이었는데도”로 손볼 수 있어요. “못하고 있었다”는 “못했다”로 손봅니다. ‘희망(希望)’은 그대로 써도 되고 ‘꿈’이나 ‘바람’으로 다듬을 수 있어요.


  흔히 ‘꿈’과 ‘희망’은 다른 낱말로 여겨 버릇합니다만, 둘은 아주 다른 낱말은 아닙니다. ‘꿈’은 한국말이고 ‘희망’은 한자말이에요. ‘희망’ 말뜻은 “앞일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람”입니다. ‘꿈’ 말뜻은 “(1)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 (2)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3)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꿈 (2) = 희망’이에요. 한국말 ‘꿈’은 한결 깊으면서 넓은 낱말이라 할 수 있어요. 보기글에서는 ‘꿈’으로 적을 만할 뿐 아니라, 이 대목에서는 ‘꿈 (3)’으로 보아야 한결 알맞으리라 느껴요.


  “일루의 희망”을 살펴봅니다. ‘일루(一縷)’ 뜻풀이를 찾아보면 “한 오리의 실이라는 뜻으로, 몹시 미약하거나 불확실하게 유지되는 상태를 이르는 말. ‘한 올’로 순화”라 나옵니다. ‘한 올’로 고쳐써야 할 낱말이라는 소리인데, 가만히 생각하면, 한국사람이 쓸 만하지 않은 낱말이라는 뜻이고, ‘한 올’ 아닌 ‘일루’처럼 적바림하는 일은 올바르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 한 가닥 꿈을 버리지 못하고
→ 가느다란 꿈을 버리지 못하고
→ 가느다란 줄을 버리지 못하고
 …

 

  국어사전을 살피면 “일루의 광명”이나 “일루의 잔명”이나 “현재로서 우리에게는 일루의 희망도 없다” 같은 보기글이 실립니다. 한국말로 알맞게 가다듬으면, “한 줄기 빛”과 “얼마 안 남은 목숨”이나 “이제 우리한테는 꿈이 조금도 없다”처럼 쓸 수 있어요. 국어사전에 실린 보기글이기는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하고 두 번 거듭 헤아리면서 뜻과 느낌을 살릴 때에 슬기롭게 쓸 수 있습니다. 꿈이나 희망이 한 올조차 없다 하는 만큼, “한 줄기”조차 없거나 “한 가닥”조차 없습니다. 한 줄기나 한 가닥조차 없으니 “거의” 없거나 “제대로” 없거나 “조금도” 없는 셈입니다.

 

 보이지 않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잡을 수 없는 꿈을 잡으려 하고
 사라지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사라진 꿈을 붙잡으려 하고

 

  내 삶에 드리울 빛줄기를 생각합니다. 고운 삶줄기는 스스로 생각하며 빚습니다. 내 말에 비칠 빛줄기를 헤아립니다. 고운 말줄기는 스스로 헤아리며 이룹니다.


  덧없는 꿈이 아닌 맑은 꿈을 꿉니다. 부질없는 꿈이 아닌 사랑스러운 꿈을 꿉니다. 덧없는 말이 아닌 맑은 말을 바랍니다. 부질없는 말이 아닌 사랑스러운 말을 기다립니다. (4346.8.8.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런 흐름이었는데도 아버지는 아직도 한 줄기 꿈을 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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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마실 나가기

 


  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침 마실을 나간다. 아침이라 하지만 새벽 여섯 시 반 무렵이다. 마을 어르신들 누구나 새벽 네 시 무렵이면 일어나 새벽일을 하고, 아침밥 지어 먹은 다음, 마실 나갈 일이 있으면 바지런히 움직인다. 새벽일을 할 때에는 일옷을 입고, 마실을 나갈 적에는 곱게 차려입는다. 할아버지는 경운기를 몰고 할머니는 경운기 뒷자리에 앉는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 맞으며 시원한 바람을 쐰다. 할머니는 우산을 펼쳐 해를 가린다. 푸르게 빛나는 들판 사이를 경운기가 천천히 조용히 달린다. (4345.8.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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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일홍 마을

 


  마을회관 둘레에서 자라는 여러 나무는 철 따라 새 옷을 입는다. 시골마을 모든 집 또한 철마다 새삼스레 옷을 갈아입는다. 들풀은 들꽃이 되었다가 들풀로 돌아간다. 온통 푸른 빛이 가득한 시골마을은 아침 햇살이 곱게 펼쳐지면서 골골샅샅 새로운 빛무리를 펼친다. 마을회관 선 빨래터 옆 백일홍 꽃잎을 건드리는 햇볕과 바람이 곱다. (4345.8.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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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똥풀 우리시대 교사시선 1
김광철 / 고인돌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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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목소리
[시를 말하는 시 1] 김광철, 《애기똥풀》

 


- 책이름 : 애기똥풀
- 글 : 김광철
- 펴낸곳 : 고인돌 (2011.12.1.)
- 책값 : 1만 원

 


  시는 노래입니다. 시를 쓴 사람은 노래를 부르듯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사람은 노래를 듣듯 시를 듣습니다.


  노래는 시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시를 쓰듯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듣는 사람은 시를 듣듯 노래를 듣습니다.


  교사가 시를 쓸 때에는 교사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삶을 시로 들려줍니다. 교사가 아이들과 얼크러지며 빚는 삶을 차분하거나 우렁차게 노래할 때에 시가 태어납니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노래하는 삶일 때에 시가 태어나고, 교사와 학생이라는 옷을 벗고 ‘한 사람으로 만나는 삶’이 있을 때에 시와 같은 노래를 즐겁게 부릅니다.


  교사인 김광철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애기똥풀》(고인돌,2011)을 읽습니다. 참다이 이루는 교육을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하는 김광철 님은, 당신이 쓴 시에서 당신 목소리를 낱낱이 담습니다. 이 나라 교육이 나아가기를 바라는 곧은 길을 생각하며 시를 씁니다. 김광철 님 스스로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돌아보면서 시를 씁니다.


  교육은 더 좋은 교육이나 더 나쁜 교육이 없습니다. 사람은 더 좋은 사람이나 더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날씨는 더 좋은 날씨나 더 나쁜 날씨가 없습니다. 그저 교육이고, 그저 사람이며, 그저 날씨입니다. 받아들이는 가슴에 따라 이 교육을 스스로 좋게 여길 수 있고, 저 교육을 스스로 나쁘게 삼을 수 있습니다. 맞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이 사람은 반가이 어깨동무할 수 있고, 저 사람은 얄궂게 등돌릴 수 있어요. 마주하는 삶에 따라 이 날씨는 나한테 좋다 느낄 수 있고, 저 날씨는 나한테 궂다 여길 수 있어요.


.. 여름날 조밭을 온통 뒤덮던 넌 철천지 원수였다 / 뽑고 또 뽑아도 끝이 없는 너와의 씨름 / 바다로 골짜기로 / 다른 애들처럼 물놀이 가고 싶은 소년의 꿈도 / 여지없이 짓밟은 너였지 / 해도 해도 끝이 없던 농사일에 / 시골 소년의 여름날은 / 차코 없는 사슬로 묶인 교소도 ..  (바랭이)


  교사 김광철 아닌 어린이 김광철한테 ‘어린 날 조밭’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조밭을 둘러싼 바랭이풀에 허덕이느라 바랭이풀이 끔찍하게 싫다는 생각만 불러일으키는 곳이었을까요. 조밭에서 낫으로 조를 꺾으면서 흘리던 땀이나 올려다보던 하늘이나 내려다보던 흙은 어떻게 느꼈을까요. 한 사람이 흙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조밭에는 조와 바랭이풀만 자라지는 않았겠지요. 다른 들풀이 자랐을 테지요. 때로는 들풀에서 들꽃이 피었을 테고요. 밭뙈기는 조밭만 있지 않았겠지요. 무와 배추를 심은 밭이 있었을 테고, 감자와 고구마를 심은 밭이 있었겠지요.


  조밭은 지구별에서 어떤 흙땅이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시골마을 조밭은 온누리에서 어떤 삶터였을까 곱씹어 봅니다. 조밭을 일구던 손길은 어떠한 꿈을 꾸던 손길이었고, 이 조밭에서 거둔 곡식을 먹는 사람은 어떠한 마음밭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올해에도 팔당대교 아래에서 고니들을 만났다 / 저 고니들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장소에서 만났다 / 쟤들은 그 먼 길 / 만 리 먼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도 찾아온다 // 나는 그저께 차 몰고 찾아갔던 친구 집을 다시 찾았다 / 분명 저 골목 같은데, 그리 들었더니 그 길이 아니더라 / 또 다른 골목길을 더듬는다 / 그러기를 수차례, 결국은 친구를 전화로 불러내고야 말았다 ..  (철새)


  하나를 보려고 하면 언제나 하나를 봅니다. 하나를 보려고 하니까 하나를 보는데, 하나를 보느라 막상 하나를 둘러싼 여럿이나 다른 하나를 못 보곤 합니다. 하나를 바라보면서 하나를 마음껏 바라보고, 하나를 둘러싼 모두를 살가이 쓰다듬는다면, 내 삶을 이루는 모든 사랑을 아름다이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시를 쓰는 교사 한 사람한테는 ‘고니’ 한 마리나 열 마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본 고니가 올해에 보는 그 고니일까요. 지난해에 본 고니는 지지난해에 본 그 고니일까요.

  사람은 고니를 바라보며 ‘고니’라고만 말합니다. ‘고니 아무개’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참새를 바라볼 때에도, 직박구리나 제비를 바라볼 때에도, 메뚜기나 개구리를 바라볼 때에도 ‘참새 아무개’나 ‘개구리 아무개’라고 말하지 못해요.


  어쩌면, 사마귀가 사람을 바라볼 때에 ‘그저 다 같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마귀를 바라보는 사람이 ‘그저 다 같은 사마귀’라고 여기면, 사마귀도 사람을 그저 다 같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보리밭 보리를 바라보며 다 같은 보리가 아니라, 다 다른 목숨인 보리씨앗이 다 다른 목숨인 보리알을 맺는다고 느낀다면, 보리밭을 가득 메운 어여쁜 보리들은 사람을 바라보며 다 다른 사람들하고 어깨동무하는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매미 노랫소리를 듣고, 풀벌레 노랫소리를 들으며,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며 듣는 노랫소리는 늘 다릅니다. 무논 앞에 서서 개구리들 노랫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개구리마다 목소리가 달라요. 다 다른 목소리는 다 다른 바람결에 실려 내 귓결로 곱게 얼크러지며 스며들어요.


.. 참다못해 기어이 그 녀석의 숟가락을 뺏어 들고 / 밥 한 술 뜨고 그 위에 김치 한 조각 얹어 놓고는 / 기어이 고 녀석 입 속에 밀어 넣고야 만다 / 억지로 받아물기는 하지만 / 여전히 꼭 다문 입술 / 내리깔고 있는 눈길 / 얼르고 달래 보며 / 구슬려도 보고 협박도 해본다 / “얼른 먹으면 놀이터에서 10분 동안 놀다 오게 해 줄게.” / “이거 얼른 먹지 않으면 내일은 굶긴다.” / “한국 사람은 김치를 먹어야지. 너흰 미국 사람 아니잖아.” / 그래도 아랑곳없다 ..  (병아리들의 점심)


  나는 시를 즐겁게 읽고 싶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높이는 시가 아니라, 사랑을 나누려는 시를 읽고 싶습니다.


  목소리를 높인들 시가 되지 않습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른대서 노래가 되지 않습니다. 옥타브가 높아야 듣기 좋은 노래나 멋진 노래가 되지 않습니다. 악기를 많이 타야 놀라운 노래가 뛰어난 노래가 되지 않습니다. 노래는 노래다울 때에 노래입니다. 노래는 결을 살리고 무늬를 빛낼 때에 노래입니다. 곧, 시는 시다울 때에 시입니다. 시다운 결을 살리고 시다운 무늬를 빛낼 때에 시입니다. 이렇게 가야 하거나 저렇게 가야 한다고 목청을 외친다고 시가 되지 않습니다.


  왜 아이한테 밥을 억지로 먹여야 할까요. 왜 아이를 윽박질러야 할까요. 한국사람이 김치를 꼭 먹어야 할까요. 한국사람이 김치를 못 먹을 수 없을까요.


  한겨레가 김치를 먹은 지는 얼마 안 되었습니다. 한겨레는 이천 해나 오천 해 앞서에도 김치를 먹지는 않았습니다. 일만 해나 오만 해 앞서 한겨레는 무엇을 먹었을까요. 일만 해나 오만 해 앞서 먹던 무언가를 오늘날 먹어야 비로소 한겨레다울까요. 오백 해나 백 해 앞서 널리 먹던 무언가를 오늘날 먹어야 바야흐로 한겨레다울까요.


  이주노동자가 낳은 아이도 한국사람이고 한겨레입니다. 한국땅에서 태어나지 않고, 중국이나 러시아나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도 한국사람이고 한겨레입니다. 어느 사람은 김치 같은 먹을거리를 잘 먹지만, 어느 사람은 김치 같은 먹을거리가 몸에서 안 받습니다. 어느 사람은 소젖을 잘 마시지만, 어느 사람은 소젖이 몸에서 안 받습니다. 밀가루가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찬것이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달걀이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다 다른 사람은 다 다른 밥으로 다 다른 삶을 이룹니다.


  아이가 김치 한 조각을 먹고 나서 ‘놀이터에서 고작 10분 놀’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즐거울까요. 아이는 혼자 또는 여럿이서 놀이터에서 어떤 놀이를 10분 동안 할 만한가요. 오늘날 아이들은 공차기나 줄넘기를 빼고, 흙놀이나 고무줄놀이나 뜀뛰기놀이 들을 얼마나 즐거이 누리는가요. 학교는 아이들한테 어떠한 터전일까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삶을 얼마나 바라보거나 느끼면서 제 삶을 씩씩하거나 튼튼하거나 싱그럽거나 해맑게 북돋우는가요.


  아이들이 따르거나 다가오도록 하자면, 교사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 됩니다. 아이들이 믿거나 찾아오도록 하자면, 교사 스스로 사랑스럽게 살아가면 됩니다.


  목소리 높이는 교사는 아이들한테 알맞지 않습니다. 지식과 정보를 주워섬기는 교사는 아이들한테 걸맞지 않습니다. 이론과 비평을 잘 할 줄 아는 교사는 아이들한테 반갑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함께 놀고 함께 먹으며 함께 누릴 수 있는 어버이와 교사가 반갑습니다. 아이들은 함께 사랑하고 함께 꿈꾸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어버이와 교사가 즐겁습니다.


.. 아니다 / 그 길은 정의가 아니기 때문에 아니다 / 진정으로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 그들 욕심의 반은 내려놓아야 한다 / 그 엄혹한 자유당, 공화당 치하에서도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 / 그 개천 자체를 송두리째 메워버리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 물길은 터야 한다 / 누구나 노력하면 할 수 있느는 희망을 줘야 한다 ..  (곽교육감에게도 비추고 있을 팔월 열나흘 달)


  교사 김광철 님은 《애기똥풀》이라는 시집을 내놓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는지 궁금합니다. 교사 김광철 님은 ‘목소리 높이기’ 아닌 ‘삶을 사랑하기’로 시를 쓰는 길을 듣거나 배우거나 마주하거나 찾아나선 적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교사한테서 지식을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교사한테서 삶을 배웁니다. 일그러진 삶을 배우든 아름다운 삶을 배우든,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교사한테서 삶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집에서 제 어버이와 살아가며 삶을 배웁니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아이들은 삶을 배웁니다. 삶 아닌 다른 무엇을 배우지 않아요.


  곧, 삶을 나누는 학교요 집이고 마을입니다. 그러니까, 삶을 쓰는 시요 소설이며 수필입니다. 삶을 노래합니다. 삶을 춤춥니다. 삶을 그립니다. 삶을 찍습니다.


  어떤 삶을 사랑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어떤 삶을 사랑하면서 춤을 추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고 싶은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교사이자 시인으로 살아가려 한다면, 무엇보다 어떤 삶을 사랑하면서 시를 쓰고 아이들 앞에 서고 싶은가를 생각할 노릇입니다.


  시집 《애기똥풀》에서는 바로 이 대목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틀은 시집이지만, 정작 시집이 시집다울 몫인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김광철 님은 교사로 지내는 나날을 시로 썼다고 생각할 테지만, 그야말로 시는 ‘목소리’ 한 가지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글은 목소리예요. 모든 말은 목소리예요. 어떤 글이거나 말이거나 모두 목소리예요. 나는 늘 내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가요. 굳이 ‘나는 이런 목소리를 낸다구!’ 하고 힘주어 되풀이할 까닭이 없어요. 내 살아가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면 이 이야기에서 목소리를 살피고 느끼면서 삶과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려 하지 않고, 온통 목소리로만 꽉 눌러채워 시라는 옷을 입힌다 한다면, 겉보기로는 시라 할는지 모르나, 싯말은 하나도 태어나지 않고 말아요.


  《애기똥풀》은 시집이 되지 못해요. 꼴은 시집이라 하지만, 시집다운 목소리가 없어요. 모양새는 시집이라 할 터이나, 시집으로서 삶을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지 못해요. 겉모습은 시집이 되겠지만, 참교육이든 참교사이든 참배움이든 참꿈이든 참지식이든 참얘기이든,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 되는가 하는 갈래조차 들려주지 못해요.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리는 기쁜 사랑을 시로 적을 수 있기를 빌어요. 맑게 빛나는 냇물을 손으로 떠서 달콤하게 마시는 예쁜 꿈을 시로 노래할 수 있기를 빌어요. (4345.8.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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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2-08-07 18:26   좋아요 0 | URL
어려운 얘기이지만,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할 얘기이네요.

시를 그냥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시의 품격과 시를 읽는 사람의 품격을 생각해보게 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꾸벅(__)

파란놀 2012-08-07 19:33   좋아요 0 | URL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지만,
어렵지 않고 쉽다고 생각하면 쉽구나 싶어요.

'시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부터
스스로 잘 갈무리하고 나서
시를 쓸 때에
삶이 빛나는 노래가 되리라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