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그릇



  작은아이가 밥그릇을 들고 마루를 돌아다니다가 그만 툭 떨어뜨려서 퍽 깨진다. 두꺼운 그릇이기에 꽤 무거운 만큼 밥상에 놓고 먹어야 하는데, 작은아이가 이 장난 저 장난을 하다가 떨어뜨려 깨뜨린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그릇과 잔을 수없이 깨먹는다. 나도 어릴 적에 곧잘 그릇과 잔을 깨먹었다. 물이든 밥이든 밥상 언저리에서만 마시고 먹은 뒤 갖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소리를 참 징하게 안 들었다. 이런 내 어린 나날 모습이 우리 아이들한테 똑같이 이어졌을까. 왜 아이들은 잔이고 밥그릇이고 자꾸 들고 다니면서 놀려 할까. 손에서 안 미끄러지도록 잘 붙잡고 돌아다닐 수 있다는 모습을 어른한테 보여주고 싶을까. 나 이렇게 잘 들고 돌아다닌다고 자랑하고 싶을까.


  깨진 그릇은 어찌해야 할까. 어쩔 길 있나. 돌담에 얹어야지. 또는 밭자락 끝에 얹어야지. 4347.5.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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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찾는 아이한테 노래 한 가락



  곁님이 오늘 아침 일찍 시골집을 나선다. 강화섬에서 하는 람타학교 강의를 들으러 간다. 내가 갈까 싶었으나 어제그제 곁님이 끙끙 앓아누운 모습을 보자니, 내가 집을 비울 수 없다. 아프더라도 배우면서 아프면서 천천히 나을 노릇이요, 집에서 아이들과 조용히 지내면서 살림을 매만져야겠다고 느낀다.


  아직 아이들이 일어나기 앞서 일찍 길을 나서는데 큰아이가 눈치를 채고 일어나서 인사를 한다. 큰아이가 깬 김에 인사를 하다 보니 아직 자는 작은아이한테도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서려니, 작은아이가 어머니 집을 나간다고 한참 운다. 입으로 인사를 하지 말고 마음으로만 인사를 하고 가야지, 이러면 어떡하나. 며칠 동안 내내 울보가 될 텐데.


  저녁이 되어 두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는, 천천히 재운다. 작은아이는 오늘 많이 뛰놀아 고단했는지 일찍 잠든다. 그런데, 잠든 지 한 시간쯤 지나 갑자기 운다. 아침에 집을 나선 어머니가 떠올랐는가 보다. 눕힌 채 가슴을 토닥이다가 울음이 잦아들 무렵 부엌으로 가서 쌀을 씻는다. 이튿날 아침에 먹을 쌀이다. 쌀을 씻자니 다시 운다. 아이를 안아서 등과 궁둥이를 토닥인다. 울먹울먹하다가 천천히 그친다. 자리에 누이고 이불깃 여민 뒤 노래를 부른다. 두 아이 사이에 누워서 나긋나긋 노래를 부른다. 이제 작은아이는 고요히 꿈나라로 간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웃고 잘 노래하다 보면 어머니가 돌아오지. 너희는 너희대로 너희 웃음과 놀이와 노래를 스스로 배우렴. 4347.5.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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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차리면서



  늦게 잔 아이들이 일찍 일어난다. 좀 더 자야 하지 않겠니? 그러나, 아이들은 잠에서 깨면 일어나려 하지, 더 누우려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리는 놀이는 억지스러운 놀이가 아니고 학습이나 교육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억지로 학교에 가야 하고, 때 맞춰 학교에 가야 하며, 수업 진도에 따라 교과서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한다면, 이렇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리라 느낀다. 아침에 회사로 가는 수많은 어른들도 이녁 일터가 즐겁다면 누구라도 아침에 번쩍 눈을 뜨고 곧바로 몸을 일으킬 만하리라 느낀다. 즐겁지 않으면 일하지 못하고 놀지 못하며 배우지 못한다.


  즐겁게 밥을 차리면 즐겁게 먹겠지. 노래하면서 밥을 차리면 노래하면서 먹겠지. 웃으면서 밥을 차리면 웃으면서 먹겠지. 사랑스레 밥을 차리면 사랑스레 먹겠지. 4347.5.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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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32] 어른읽기

―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치는가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나옵니다. 햇볕이 따사로운 날, 이웃마을과 논둑길을 천천히 달리다가 면소재지로 옵니다. 면사무소에 살짝 들르는데, 큰아이가 면내 초등학교를 보더니 “놀이터 가자!” 하고 외칩니다. 갈까? 큰아이는 혼자 외치고는 혼자 씩씩하게 초등학교 쪽으로 달립니다. 초등학교 울타리를 따라 놀이터가 있거든요. 큰아이가 앞서 달리고 작은아이가 뒤따릅니다. 미끄럼틀을 타고 시소를 탑니다. 너희는 참 잘 노는구나 하고 속으로 말합니다. 아이들 놀이터이기에 나는 아무것도 타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여럿 한꺼번에 올라가도 무너지지 않으니 어른도 올라가서 놀아도 되겠지 싶으나, 그래도 아이들 놀잇감을 어른이 건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끄러미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놀이터와 시골 초등학교를 둘러싼 나무를 살펴봅니다.


  하늘 높이 쭉쭉 뻗은 나무가 있습니다. 정원사가 했을는지 교사가 했을는지 학교지기가 했을는지, 반듯반듯하게 가지치기를 한 나무가 있습니다. 남쪽 바다 가까이 있는 시골에서 흔히 보는 가시나무가 이곳에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가시나무답지 않습니다. 둥그스름하게 가지치기를 했고, 위와 아래에 동그라미를 둘 만든다면서 억지로 가지를 베고 없앤 티가 또렷합니다.


  내 어린 날 다닌 국민학교를 문득 떠올립니다. 그래요, 1980년대에 내가 다닌 국민학교에서도 이처럼 ‘동그랗게 깎은 나무’를 늘 보았습니다. 학교나 관청 같은 건물에 으레 이런 ‘동그랗게 깎은 나무’가 있습니다. 늘 이런 나무를 쳐다보면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나무는 이렇게 동그스름하게 생긴’ 줄 알았습니다. 어릴 적에는 ‘동그란 나무’가 끔찍하게 가위질을 받은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가까이에서 가시나무를 들여다보니, 잎이며 꽃망울이며 가지이며 생채기투성이입니다.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볼 적에 ‘동그스름한 모양새가 예뻐 보이도’록 하자니, 이렇게 잎과 꽃망울과 가지 모두 다칠밖에 없습니다. 마치 다 다른 아이들을 똑같은 교실에 집어넣고 똑같은 교과서만 가르치면서 틀에 따라 자르고 늘리고 하는 꼴이랑 같습니다.


  학교에서는 늘 평균을 말합니다. 더도 덜도 아닌 평균만큼 하라고 말합니다. 잘나지도 못나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도 어른들도 잘나지 않고 못나지 않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제 결대로 살아갑니다. 잘 달리는 아이가 있고, 잘 걷는 아이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호미질을 잘 할 테고, 누군가는 낫질을 잘 할 테지요. 누군가는 글을 잘 쓸 테고, 누군가는 밥을 잘 지을 테지요. 누군가는 손놀림이 좋고, 누군가는 발놀림이 좋습니다. 누군가는 키가 작고, 누군가는 덩치가 큽니다.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빛을 뽐내면서 활짝 웃습니다. 다 다른 아이를 다 같은 틀에 끼워맞출 수 없습니다.


  학교에 두는 나무를 죄다 똑같은 틀에 따라 깎고 자르고 다듬는 모습은, 다 다른 아이를 이렇게 깎고 자르고 다듬는 모양새를 보여준다고 느낍니다. 몇몇 나무는 가까스로 쭉쭉 뻗으며 자라지만, 웬만한 나무는 우듬지가 없습니다. 머리가 뎅겅 잘립니다. 소나무는 옆으로 눕히고, 이리저리 휘어지게 합니다. 나무가 나무답게 자라지 못하면서 아픕니다. 나무가 나무다움을 잃으면서 앓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학교를 다닐까요. 아이들 마음에 무엇이 깃들까요. 아이들이 아픈 소리는 누가 듣나요. 아이들이 앓는 모습은 누가 알아채나요.


  어른들은 아이한테 무엇을 보여주는지 궁금합니다. 어른들은 아이가 어떻게 자라기를 바라는지 궁금합니다. 어른들은 사회를 바보스레 어지럽히면서 아이들을 죽음터로 내몰지 않나 궁금합니다. 여느 자리 여느 때 여느 마을 여느 학교 모양새가 바로 어른들 모습이지 싶습니다. 여느 자리 여느 때에 억지스러운 틀을 짜기에, 아이들은 제 빛을 잃으면서 ‘틀에 박힌 붕어빵’과 같은 넋이나 몸짓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4347.4.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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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 구멍난 바지 기우기



  큰아이가 입는 바지 무릎에 구멍이 났다. 처음에는 작더니, 차츰 커진다. 어제 자전거를 타고 면소재지 마실을 하면서 쳐다보니 무릎 구멍에 주먹이 들어갈 만큼 크다. 그런데 큰아이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입는다. 아무래도 이 모습은 아니다 싶어 오늘 아침에 다른 바지를 입으라 하고 구멍을 기우기로 한다. 그냥 기울 수 없을 만큼 큰 구멍이기에 덧댈 천을 살핀다. 아이들이 갓난쟁이일 적에 입힌 바지를 꺼낸다. 네 살 작은아이조차 이 바지에 발 하나를 넣기 힘들 만큼 참으로 작은 바지이다. 그러나 두 아이 모두 이 바지를 입고 잘 크고 놀았다.


  헌 바지 한쪽을 가위로 석석 자른다. 천 조각을 큰아이 구멍난 바지 안쪽으로 댄다. 바늘을 한 땀 두 땀 넣는다. 방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마당으로 나간다. 마당에 놓은 걸상에 앉아서 바느질을 잇는다. 후박나무 꽃에 벌떼가 모여 웅웅거린다. 처마 밑 제비집을 드나드는 제비가 부산스레 날갯짓하면서 노래를 한다. 바람이 분다. 밤새 노래하던 개구리는 아침에 조용하다. 비가 그친 아침바람을 느끼면서 바느질을 한다. 큰아이를 불러 옷을 잡으라고 이른다. 내 어릴 적이 떠오른다. 내 어머니도 내 무릎 구멍을 기울 적에 나를 불러서 이렇게 잡으라고 시켰다. 왜 시켰을까. 혼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얌전히 앉아서 잡는 몸가짐도 익히라는 뜻이었을까. 곁에서 바느질을 지켜보면서 어깨너머로 배우라는 뜻이었을까.


  어머니 바느질을 지켜보는 동안 어느새 구멍은 덧댄 천으로 막히고, 새로운 바지가 태어난다. 큰아이 바지를 기우면서 어릴 적을 떠올린다. 우리 아이는 앞으로 커서 제 아이를 낳으면, 또 제 아이를 불러 옆에 앉히고는 무릎 구멍을 기울까. 4347.4.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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