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명의 보도사진 강의 - 심장으로 진실의 순간을 포착하라
오동명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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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작가 되고 싶은 젊은이한테
 [찾아 읽는 사진책 98] 오동명, 《오동명의 보도사진 강의》(시대의창,2010)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닌대서 ‘사진작가’가 될 수 있지 않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니지 않았대서 ‘사진쟁이’가 될 수 없지 않습니다. 스스로 ‘사진 찍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스스로 사진을 찍으며 살아가면 됩니다. 졸업장은 사진작가 이름표가 아닙니다. 자격증은 사진쟁이 딱지가 아니에요. 어느 이름난 사진쟁이한테서 사진을 배웠으니까 ‘사진 찍는 사람’이라고 내세울 수 있지 않습니다. 값나가는 사진장비를 갖추었으니 ‘사진작가’라고 우쭐거리거나 자랑할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사진작가입니다. 사진을 좋아할 때에 사진쟁이입니다. 사진을 사랑하며 사진과 함께 살아갈 때에 ‘사진 찍는 사람’입니다.


  수십만 원이나 수백만 원이나 수천만 원에 이르는 사진장비를 갖출 때에만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편의점에서 1회용 사진기를 장만할 때에도 사진을 찍습니다. 손전화 기계로도 사진을 찍습니다. 놀이공원 같은 데에서 ‘기념사진 찍어 주는 이’한테 얘기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연필과 종이가 있으면 그림을 그린다 합니다. 그런데, 종이가 없더라도, 또 연필이 없더라도,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돌멩이로 돌벽에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조개껍데기로 모래밭에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오래오래 남길 수 있어야 그림이 아닙니다. 오래도록 남기는 작품을 빚어야 그림쟁이가 되지 않습니다.


  연필에 종이를 갖추면 글을 쓴다 하지요. 그러나, 종이가 없어도, 또 연필이 없어도, 입으로 종알종알 이야기꽃 피우며 글을 쓸 수 있어요. 내 마음속에 이야기보따리를 갖추어, 언제 어디에서라도 말꽃을 피우는 ‘말글’을 쓸 수 있어요. 따로 책으로 묶어야 글쟁이가 아닙니다. 어느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실어야 ‘글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아요.


  오동명 님이 대학교에서 한 해 동안 맡은 사진강의 이야기를 갈무리한 《오동명의 보도사진 강의》(시대의창,2010)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강의는 이 책처럼 대학교에서 교수 한 사람이 학생을 그러모아 조곤조곤 생각을 들려주거나 실기 수업을 하며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다만, “이들은 하나같이 사진 한 장이 글 백 마디보다 힘이 세다고 주장하는데, 제때 제대로 활용했을 때에만 올바른 힘이 됩니다(15쪽).” 하는 말처럼, 사진을 사진답게 바라보면서 사진을 사진다이 다룰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진강의’가 된다고 느껴요.


  오동명 님은 “사진 기술이 뛰어난 사람은 많습니다(18쪽).” 하고 말합니다. 누구라도 이처럼 말해요. 사진기라는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은 많다고 흔히 말해요. 곧, 사진기를 잘 다룰 줄 알거나, 값지거나 값비싼 사진장비를 갖춘다 해서 ‘사진찍기(창작)’를 한다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곧, 대학교 사진학과를 마쳤다든지 나라밖으로 사진공부를 다녀왔다든지 했기에 ‘사진읽기(비평)’를 한다 말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사진기를 쥔 사람 스스로 삶이 있어야 사진을 새로 찍습니다(창작). 사진책과 사진작품을 바라보는 사람 스스로 삶을 누려야 사진을 새로 바라봅니다(비평).


  이리하여, 오동명 님은 “글쓰기 능력은 사진기자가 기본으로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62쪽).” 하고 덧붙입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글을 쓸 줄 알아야 사진을 찍을 줄 알아요. 책을 읽을 줄 알아야 사진을 읽을 줄 알아요. 글은 못 쓰면서 사진만 잘 찍지 않습니다. 책은 읽을 줄 모르면서 사진만 잘 읽지 않습니다.


  달리 얘기하자면, 나 스스로 내 삶이 있어야 ‘내 사진기로 바라보는 내 이웃들 삶이 어떠한가를 느끼면서 읽고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내 사랑을 빛내야 ‘내 사진기로 담는 사진 한 장에 사랑 한 자락 실을’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삶이 없을 때에는 사진을 못 찍고 못 읽습니다. 나 스스로 사랑을 꽃피우지 않을 때에는 사진을 못 이루고 못 나눕니다.


  이제 사진교수 일을 하는 오동명 님은 “더러웠던 건 100달러라는 문명의 관습으로 그들을 현혹하려 했던 알량한 우리였고, 더 미개했던 것 역시 편협하게, 오히려 외양으로만 그들을 단정해 왔던 우리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100쪽).” 하고 뉘우칩니다. 스스로 뉘우칠 줄 아는 까닭은, 스스로 오동명 님 삶을 읽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인을 찍은 사진 대부분이 그럴듯해 보이는 까닭은, 사진가의 촬영 능력보다는 노인의 주름이 전하는 삶의 궤적의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 아쉽게도 노출과 구도 등으로 기계적 멋만 잔뜩 부린 패션사진이 너무 흔합니다. 괴이함을 독특함으로 혼돈하기 때문입니다(109쪽).” 하고 외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오동명 님 스스로 ‘기계자랑’이나 ‘기계멋’을 부리지 않겠다고 외칠 수 있어요. 남들 얘기가 아니라 오동명 님 스스로 ‘할머니 할아버지 주름살 깊이가 들려주는 꿈’이 사진에서 새롭게 피어날 수 있도록 하고프다는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동명 님한테서 사진을 배운 학생들은 무엇을 느끼거나 배웠을까요. “연출을 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연출은 있을 수 없지요. 연출은 연출일 뿐입니다(123쪽).” 하는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무엇을 느끼거나 배웠을까요. 자연스러운 연출이 없기에, 연출은 연출입니다. 왜냐하면, 연출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삶이 아니라, 따로 꾸미는 겉모습이거든요. 자연스럽게 흐르는 삶일 때에는 어떠한 모습이든 ‘자연스럽’고 ‘삶’입니다. 사진 한 장으로 담기는 사람과 사진 한 장으로 적바림하는 사람 모두 ‘자연스럽게 흐르는 삶’일 때에 참으로 아름다이 빛나는 사진열매를 맺을 수 있어요.


  사진책을 읽으며 시집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시를 씁니다.


  나는 오동명 님 사진책을 읽으면서 손세실리아 님 시집을 읽습니다. 나는 우리 집 아이들 시골살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내가 우리 보금자리에서 누리는 사랑을 시로 씁니다.


  좋아하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좋아하는 넋이기에 사진을 찍자고 생각합니다. 좋아하기에 시를 읽습니다. 좋아하는 얼을 북돋우며 시를 즐겁게 쓰자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기쁘게 사진을 누립니다. 겉멋 아닌 즐거움을 맛보며 사진을 누립니다. 스스로 기쁘게 하루를 누립니다. 누군가한테 자랑하려고 보내는 하루가 아닙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며 누리는 하루입니다. 남한테 보여주려는 내 삶이 아니라, 내 꿈과 사랑을 가장 아끼며 보듬는 내 삶입니다.


  “자기 멋에 빠져든 글을 모두 시라고 하지 않듯,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168쪽).” 하는 말처럼, 사진도 글도 삶도 사랑도 겉멋에 빠져들 수 없습니다. 겉치레로 흐를 수 없습니다. 남한테 보여줄 사진이나 글이나 삶이나 사랑은 없습니다. 내가 즐기는 사진이요 글이며 삶이고 사랑입니다.


  사진을 찍고 싶으면 삶을 찾을 노릇입니다. 사진 찍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삶을 누리는 사람이 될 노릇입니다. 오동명 님은 《오동명의 보도사진 강의》를 내놓습니다. 이 작은 책 하나는 사진강의 한 해 발자국이라 할 수 있지만,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니고 싶은 푸름이한테 먼저 맛보기로 보여주는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구태여 대학교 사진학과를 찾아가지 않고 이 책 하나 읽으며 스스로 사진을 배우거나 익히는 길을 찾도록 돕는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진학과뿐 아니라 대학교조차 애써 들어가지 않아도 ‘사진 찍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살며시 보여주는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4345.5.22.불.ㅎㄲㅅㄱ)

 


― 오동명의 보도사진 강의 (오동명 글·사진,시대의창 펴냄,2010.7.1./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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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牛) - 김진선 사진집
김진선 사진 / 사진과예술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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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곁에서 찾는 사랑스러운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96] 김진선, 《소(牛)》(사진예술사,2008)

 


  마당 한쪽에서 스스로 자라는 풀꽃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뒤꼍에 마련한 뒷밭에 첫째 아이와 함께 물을 주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다른 분들은 봄날 어떤 봄꽃을 구경하고 사진으로 담는지 모르나, 나는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들꽃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새로 돋는 풀이 어여쁩니다. 자운영 꽃빛이 예쁘다 느낍니다. 모과나무에 맺힌 앙증맞은 꽃송이를 쓰다듬습니다. 감잎 푸른 사이사이 막 몽글려고 하는 몽우리를 봅니다. 뽕나무는 오디가 맺히는데, 오디가 되기 앞서 피어난 꽃송이는 뽕잎 빛깔하고 같습니다. 느티꽃은 느티잎하고 꽃빛이 같은데, 뽕꽃도 뽕잎하고 꽃빛이 같습니다.


  봄꽃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많습니다. 봄날 들판과 멧자락을 오르내리며 사진을 빛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봄빛을 사진책으로 살며시 옮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봄날 봄빛을 사진으로 옮기는 이들 가운데 ‘사진쟁이 보금자리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봄내음’을 누리면서 사진길을 걷는 이는 드문 듯합니다. 여름날 여름빛을 사진으로 옮기든, 가을날 가을빛을 사진으로 옮기든, 겨울날 겨울빛을 사진으로 옮기든, 스스로 뿌리내려 살아가는 터에서 사진빛을 나누는 이는 퍽 드물지 싶어요.

 

 


  가난한 사람들 찾아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터에서 마주하는 이웃 삶자락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가멸찬 사람들 찾아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더라도, 또 내로라하는 이들 찾아 인물사진을 찍더라도, 언제나 내 삶터에서 가장 가까운 데에서 살아가는 이웃을 마주하며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꼭 어느 호텔 어느 전시장에서 마련하는 잔치마당에서 패션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패션쇼라는 이름이 붙는 곳에서 모델을 앞세워야 패션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도 패션사진은 태어납니다. 내 작은 집 작은 방에서도 패션사진은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생각할 때에 내 사진이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는 결을 살피거나 살릴 때에 내 사진이 아름답습니다.


  사진책 《소(牛)》(사진예술사,2008)는 강원도지사로 일하던 김진선 님이 내놓았습니다. 김진선 님은 “사진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제시해야 하는 사진, 누구보다 자신있어 그 내밀한 진실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내 사진은 어떤 것일까? 그런 고심의 시간, 살아오면서 체험하고 인식한 내 기억을 모두 꺼내놓고 샅샅이 뒤져 보았다(4쪽)” 하고 스스로 묻습니다. 스스로 물은 다음 “그러고 보면 강원도 사람, 소, 사진이 갖는 기본적 공통점이 ‘정직’이다. 강원도지사가 소(牛)를 테마로 한 사진작품을 내놓는 이유다(5쪽).” 하고 스스로 밝힙니다.

 

 


  소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으나 아주 없지 않습니다. 소를 사진으로 찍되, 일소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훨씬 적습니다. 이와 함께, 싸움소를 사진으로 찍는다든지, 농장에서 풀을 뜯다가 고기로 팔릴 소를 찍는다든지, 좁은 우리에서 사료만 먹으며 젖을 내놓다가 머잖아 고기로 팔릴 소를 찍는다든지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어쩌면, 고기소 될 소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남녘땅 곳곳을 돌며 일소를 사진으로 담는 분은 있다 할 테지만, 남녘땅 곳곳 소우리를 찾아다니며 가엾게 갇힌 소를 사진으로 담는 분은 몇 사람쯤 될까요. 젖을 내놓다가는 고기소가 될 젖소를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담는 분은 몇 사람쯤 있을까요.


  김진선 님이 내놓은 사진책 《소(牛)》에는 ‘들판에서 풀을 뜯다가 고기소로 팔릴 날을 기다리는 소’가 나옵니다. 김진선 님은 소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고, 소 멀찍이 떨어진 채 바라보기도 합니다. 소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는 사진이 있고, 소가 어떤 생각을 품는지 가늠하는 듯한 사진이 있습니다. 쉬는 소가 있고 움직이는 소가 있습니다. 무리지은 소가 있고 외따로 떨어진 소가 있습니다.

 

 


  사진책 《소(牛)》를 빚은 김진선 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었을까요. 사진책 《소(牛)》는 우리들한테 무슨 삶을 보여줄 만한 이야기밭이 될까요. 김진선 님이 어린 나날 보던 소와 사진책에 담긴 소는 서로 얼마나 떨어진 채 ‘같은’ 소라는 목숨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까요. 사진책으로 소를 마주하는 오늘날 사람들은 밥상에 오르는 소고기와 사진책에 나타나는 소를 어떻게 맞대어 생각을 북돋울까요.


  김진선 님은 소 아닌 돼지를 사진으로 찍으면서도 당신 꿈을 보여줄 수 있나요. 돼지 아닌 메뚜기를 찍거나, 메뚜기 아닌 개구리를 찍거나, 개구리 아닌 뱀을 찍거나, 뱀 아닌 갈매기를 찍거나, 갈매기 아닌 오징어를 찍는다면, 이때에도 당신 사랑을 보여줄 수 있나요.


  사람들은 마른오징어도 먹고 물오징어도 먹습니다. 오징어 잡는 고깃배가 바다를 넘실넘실 가로지릅니다. 누군가는 오징어잡이배에 올라타고는 오징어 낚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겠지요. 누군가는 바닷속으로 풍덩 들어가서 바닷속 헤엄치는 오징어 모습을 사진으로 옮기겠지요.


  양식장에서 넙치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을까요. 갯벌에서 조개 캐는 할머니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을까요. 굴을 까고 조개를 까는 아줌마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을까요. 스쳐 지나가는 사진이 아니라, 곁에서 오래오래 지켜보거나 함께 일하면서 찍는 사진으로 빚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이들 모습을 예쁘게 찍자면, 아이들하고 함께 살아가며 예쁘게 웃는 어른으로 지내면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난하게 살아가는 힘겨운 나날을 찍어 온누리에 알리자면, 나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하고 한 마을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며 힘겨운 나날을 몸소 겪으면 됩니다. 사진책 《소(牛)》를 내놓은 김진선 님은 ‘들판에서 풀을 뜯다가 고기소로 팔릴 날을 기다리는 소’를 바라보면서 어떤 넋이었고 어떤 얼이었으며 어떤 빛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소를 바라볼 때에 왜 ‘올바르다(정직)’고 여길까요. 흙에 기대어 흙을 일구는 사람이 아주 드문 오늘날에도 소는 옛날처럼 ‘올바르다’고 여길 짐승으로 삼을 만할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 소는 참말 무엇이고, 김진선 님이 사진으로 아로새긴 소에 서린 이야기와 꿈은 이 땅에서 참말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까 궁금합니다.


  해거름에 둥지로 돌아오는 처마 밑 제비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제비들은 새벽 일찍 깨어나 노래하며 먹이를 찾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지런히 먹이를 얻어 새끼들을 먹입니다. 시나브로 새끼들은 어른이 되겠지요. 어른이 된 제비는 날갯짓을 바지런히 익혀 가을날 무르익는 들판을 바라보며 더 따스한 곳으로 날아가겠지요. 그러고는 이듬해 따사로운 새봄에 옛 둥지로 찾아오겠지요. 문득,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처마 밑 제비를 사진으로 담으며 이야기 엮는 사진쟁이는 한국에 몇 사람쯤 될까 궁금합니다. (4345.5.21.달.ㅎㄲㅅㄱ)

 


― 소(牛) (김진선 사진,사진예술사 펴냄,2008.5.28./3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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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씨 주부 전업중! 1
하나코 마츠야마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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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원 말고 가정주부 되셔요
 [만화책 즐겨읽기 150] 마츠야마 하나코, 《쇼코 씨 주부전업중! (1)》

 


  내가 퍽 어려 국민학교에 다닐 무렵,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언제나 ‘장래 직업 조사’를 했습니다. 해마다 한 차례씩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싶은가’ 하고 물었습니다. 6학년쯤이었나, ‘직업 적성 검사’를 받기도 했다고 떠오릅니다. 국민학교 마치고 들어갈 중학교를 어디로 골라야 하는가를 따지는 검사였을 텐데, 이런 검사를 중학교 3학년 때에도 했는지 아리송하지만, 아마 이런저런 비슷한 검사와 조사는 참 많았겠지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하고 묻는 자리에서는, 이를테면 ‘공장 일꾼’이라든지 ‘시골 일꾼’은 아예 목록에조차 들지 않습니다. 도시 학교는 시골에서 살아가는 길을 말하지도 보여주지도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도시 학교는 김을 맨다든지 씨앗을 심는다든지 나무를 사랑한다든지 하는 삶을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도시라는 곳이 움직이자면 공장이 꼭 있어야 하는데, 막상 공장에서 일할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이 되도록 이끌어야 하는가 하는 대목 또한 살피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요. 으레 하는 말이란 ‘회사원’이나 ‘공무원’입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겠다고 적는 일은 교사들한테 트집을 잡히지 않으며, 어버이들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운동선수’나 ‘예술가’를 적는 아이들은 좀 엉뚱하다 여기다가는, 나이 들면 알아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바뀌겠거니 여기곤 했습니다.


  국민학교에서 가시내 가운데 ‘주부’를 적는 아이가 더러 있었습니다. 아마 이 아이 어버이가 ‘가시내이기 때문에 더 학교 보낼 뜻이 없다’고 늘 밝히니 주부라 적었구나 싶어요. 가시내 가운데에는 주부를 적는 아이가 있는데, 사내 가운데에는 주부를 적는 아이가 없습니다. 사내가 ‘장래 희망’이나 ‘장래 직업’으로 주부라 적으면 무슨 미친 짓이느냐며 꾸짖거나 두들겨팼습니다.


- “여보, 일 열심히 하고 와. 우리 집안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니까, 내가 내던지고 온 커리어와 사회적 지위를 대신해 내 몫까지 열심히 하고 와!” (5쪽)
- “글쎄, 우리 남편이! 전업주부는 남자한테 기생해 사는 존재일 뿐이래요! 정말 너무하지 않아요?” “그렇게 따지면, 남편 분도 회사에 기생해 사는 것뿐이잖아요.” (18쪽)

 

 


  나는 국민학교 마친 지 스물다섯 해가 흘렀습니다. 고등학교 마친 지 열아홉 해가 지났습니다. 이제 와 예전 일과 삶을 하나하나 되짚습니다. 내가 열두 해 다닌 학교에서는 나한테든 동무한테든 ‘집안일’ 하기를 가르친 적이 따로 없습니다. ‘집안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가르친 적도 없습니다. 아니, ‘집이란 어떤 곳인가’부터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어떻게 지내’고, ‘집은 어떻게 보살펴야 좋은가’를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집 바깥인 ‘사회’가 어떠한 곳이며, 사회에서 무엇을 하고, 사회는 어떻게 흐르는가를 가르치거나 이야기했다고는 느끼지 못합니다. 학교는 오직 시험공부와 시험성적만 따졌을 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나 넋이나 뜻이나 꿈은 하나도 안 건드리는 데라고 느껴요.


  회사원으로 일하는 분은 회사가 무엇을 하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분은 공공기관이 무엇을 하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회사는 회사원한테 어떻게 일삯을 줄 수 있을까요. 공공기관은 공무원한테 어떻게 일삯을 주고 연금을 줄 수 있을까요.


  회사가 없거나 공공기관이 없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요. 회사가 있거나 공공기관이 있는 이 나라는 얼마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거나 멋지거나 좋거나 훌륭할까요.


  운동선수나 연예인은 이 나라를 얼마나 빛내는가 궁금합니다. 예술가나 문학가는 이 나라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궁금합니다. 교사나 학자는 이 나라를 얼마나 아끼는가 궁금합니다.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은 이 나라를 얼마나 살찌우는가 궁금합니다.

 

 


- “결혼을 결심한 건, 밖에서 잠깐 만나는 것만으로는 그에 대해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전 그를 보고 늘 생각했어요. ‘왜 늘 같은 옷을 입고 나오는 걸까?’ 알고 보니 같은 옷을 몇 벌씩 갖고 있는 거더라고요.” (9쪽)
- “전업주부란 말씀이신가요? 그, 가사를 노동으로 보지 않는 남성지에서 분류상 ‘일을 하지 않는 여성’이라 표기하며 남녀의 ‘협력’ 하에 만들어 가야 할 가정임에도 어째선지 남편만을 ‘가장’이라 부르고, 컴퓨터로 가계부를 쓸 정도로 하이테크 가전을 잘 사용하고 있지만, 무조건 기계치로 단정지을 뿐 아니라, 없어지면 바로 곤란해 하면서도 보통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평가가 너무나도 낮은 바로 그, 전업주부라고요?” “응. 바로 그거.” (75쪽)


  오늘날 한국땅에는 직업군인이 있습니다. 이웃나라에도 직업군인이 있습니다. 낱낱이 살핀다면, 직업군인 숫자는 꽤 많습니다. 직업군인이란 ‘군인을 직업으로 삼는’ 셈인데, 군인이 하는 일이란 ‘사람 죽이기’입니다. 적으로 삼는 사람을 죽이는 짓을 갈고닦거나 배우는 데가 군대입니다. 곧, 적군이든 아군이든 사람을 죽여야 비로소 군인 노릇을 잘 하는 셈이요, 군인이 된 사람이라면 ‘사람을 잘 죽여’야 ‘좋은(?)’ 군인이라 할 만합니다.


  직업군인은 어떤 일을 할까요. 직업군인은 이 나라를 지킬까요. 직업군인은 평화를 아끼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 만한가요. 직업군인으로 일하면서 한 집안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다면, 이이 직업군인은 살붙이와 아이들을 사랑과 믿음과 꿈으로 어여삐 보살필 만한가요.


  회사원으로 일하는 어버이는 살붙이와 아이들한테 어떤 사랑과 믿음과 꿈을 들려줄까요. 공무원으로 일하는 어버이는 살붙이와 아이들한테 어떤 사랑과 믿음과 꿈을 나눌 만할까요.


  아이들이 어버이 뒤를 이어 회사원이 되면 좋은가요. 아이들이 어버이 뒤를 따라 공무원이 되거나 직업군인이 되면 좋은가요. 아이들이 어버이 뒤를 좇아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되면 좋은가요. 우리 아이들은 날마다 무엇을 보고 느끼면서 앞으로 어떤 삶을 꾸려야 좋은가요.

 

 


- “여보세요? 취급설명서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이 끝에 커다랗게 적혀 있는 ‘주부라도 가능하다’란 말의 뜻은 뭔가요? 요즘 나온 가전은 취급상 그렇게 어려운 부분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간단히 조립할 수 있는 걸로 아는데요?” (23쪽)
- “남편 혼자 (집에) 둬도 괜찮아?” “저녁 준비 해 놨으니까 데우기만 하면 돼.” “그, 그 뒤에 그릇은 어떻게 해?” “자기가 씻어 두는데?” “굉장하다! 세상에 그런 남자도 있구나.” “…….” (93쪽)


  마츠야마 하나코 님 만화책 《쇼코 씨 주부전업중!》(대원씨아이,2012) 첫째 권을 읽습니다. 회사에서 ‘부장’ 자리에 있던 아가씨가 ‘혼인을 한다’면서 부장 자리를 덜컥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됩니다. 부장이었던 쇼코 씨는 이제껏 전업주부는 생각해 보지 못했고 겪지 못했다면서, 새롭게 살아가고픈 꿈을 키웁니다. 마지못해 전업주부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전업주부가 됩니다. 밥을 차리며 언제나 새롭게 손맛을 북돋웁니다. 집안을 가다듬고 돌보며 새롭게 살림을 빛냅니다. 다만, ‘아이’는 좋아하지 않는대서 아이를 낳지는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사랑 하나를 빼고는, 쇼코 씨는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길을 스스로 가장 즐겁게 걷습니다.


- ‘쇼코 씨를 지키고 싶다. 그런 일념으로 마코토는 복싱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 프로 라이센스 획득.’ “프로의 주먹은 흉기니까, 경기 외엔 사용하지 말고,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냥 같이 도망가 줘.” (88쪽)
- “아무튼 내가 가사일을 하지 않는 건, 아내를 외조하는 남자가 남자답지 않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생물의 생명활동의 주된 임무는 번식이잖아요. 다시 말해, 아이가 있는 부부의 일은 육아가 훨씬 더 중요하고, 그걸 보조하기 위해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게 아닌가요?” “좋아. 그럼 내가 주부를 하겠어!” (114쪽)

 


  2010년대 한국땅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나라에서 돈을 줍니다. 아이를 둘 낳으면 돈을 더 주고, 아이를 셋이나 넷쯤 낳으면 ‘애국자’라는 이름표까지 붙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넋이나 아끼는 손길이 아닌, 아이를 돈으로 여기는 나라 정책입니다. 왜 갓난쟁이마다 돈셈을 해야 할까요. 왜 갓난쟁이를 돈으로 사고팔려 할까요.


  가만히 보면, 2010년대 한국이라는 나라는 이웃나라에서 ‘색시’를 돈으로 사들입니다. 중국에서 색시를 사들이고, 베트남과 필리핀에서 색시를 사들입니다. ‘혼인해서 아이를 낳으려는 한국 여자’가 너무 적다며, ‘혼인해서 아이를 낳아 줄 여자’를 이웃나라에서 돈을 치러 사들입니다.


  사랑을 빛내며 혼인하는 삶이 차츰 시듭니다. 사랑을 빛내며 혼인하여 살다가 사랑을 꿈꾸며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삶은 자꾸 멀어집니다.


  나라에서 ‘아이를 하나만 낳으라’고 외치기에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하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얼른 혼인해서 아이들 쑥쑥 낳으라’고 외치니까 아이를 여럿 쑥쑥 낳아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될 두 사람이 아름다이 사랑하면서 낳을 뿐입니다. 혼인은 가시내와 사내가 서로 곱게 사랑하면서 맺을 뿐입니다. 일이란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길을 스스로 가장 곱게 밝히면서 찾을 뿐입니다. 직업이란 돈만 버는 일거리가 아니라, 내 삶을 가장 예쁘게 누리면서 좋아할 만한 자리입니다.


  만화책 쇼코 씨는 즐겁게 전업주부가 됩니다. 스스로 전업주부가 되어, 전업주부란 어떻게 좋은가를 느낍니다.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나날은 어떠한 ‘살림꾼’ 노릇을 하면서 이녁 삶을 빛내는가를 생각합니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이던 때, 또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때, 나는 내 ‘장래 희망 설문조사’ 종이에는 다른 이름을 적어 넣었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가정주부’라는 말을 아로새겼습니다. ‘희망 직업’ 1순위나 2순위에는 다른 이름을 적어 넣었고, 3순위쯤에는 ‘살림꾼’이라는 이름을 적어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정주부’라 적었다가 지우개로 지우고 반듯하게 ‘살림꾼’이라고 적었습니다.


  두 아이와 살아가며 집일을 도맡는 내 모습을 되새기니, 내 삶자리는 벌써 어린 나날부터 나 스스로 이렇게 가닥을 잡으며 이어왔구나 싶습니다. ‘가사노동’이나 ‘육아노동’이 아니라 ‘집살림 누리는 삶’입니다. (4345.5.21.달.ㅎㄲㅅㄱ)

 


― 쇼코 씨 주부전업중! 1 (마츠야마 하나코 글·그림,서수진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12.6.15./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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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쿨쿨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74
다시마 세이조 글 그림 / 보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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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른 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64] 다시마 세이조, 《쿨쿨쿨》(보림,2008)

 


  밤 열두 시 반에 쉬 마렵다며 깬 아이는 새벽 세 시에 쉬를 누려고 한 번 더 깹니다. 새벽오줌 누이고 나서 잠자리에 들도록 한 다음, 아이한테 “그래, 아버지도 이제 곧 누울 테니까 먼저 들어가서 누워.” 하고 말하며 다독입니다. 두 아이 아버지는 열두 시 반에 아이와 함께 일어나 글을 씁니다. 새벽 세 시에 아이를 다시 재우고서 적잖이 아쉽다고 느낍니다. 모처럼 고요하게 누리는 이 한때를 조금 더 누리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옆에 누워 함께 자자 말하니 달리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래, 곧 갈게.” 하고 말한 뒤 이십 분 남짓 글조각을 더 붙잡습니다.


  깊은 밤, 아이는 잠들락 말락 하다가 슥슥 기어나와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얼른 와.” 한 마디 합니다. 옆에 누워 잔다면서 왜 안 오느냐 짤막하게 한 소리 합니다. 더 미적미적 할 수 없구나 싶어 글쓰기를 끝냅니다. 졸린 아이가 스르르 잠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만, 곁에서 깊이 잘 재우고 난 다음이 아니라면, 아이가 이렇게 재촉하는 마당에, 늑장을 부릴 수 없습니다.


  아이는 아버지 품에 안깁니다. 이내 아이 스스로 아버지 무릎에 눕습니다. 무릎에 누운 아이를 토닥입니다. 셈틀을 끕니다. 아이를 안고 옆방으로 건너갑니다. 아이를 먼저 반듯하게 누입니다. 나도 옆에 반듯하게 눕습니다. 등허리가 쪼옥 펴지며 개운하구나 싶습니다. 어제 하루 얼마나 고단하게 보냈는가 돌이킵니다. 엊저녁 아이를 처음 재우며 기쁘게 재우지 못해, 아이가 꿈나라에서 즐거이 날아다니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새벽에 오줌을 누고 다시 잠들 때에는 부디, 엊저녁부터 새벽까지 제대로 날지 못했을 꿈나라에서 예쁘고 씩씩하게 날아다니기를 빕니다. 한손으로 아이 머리카락과 볼과 가슴을 토닥토닥 합니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아버지 손을 만지작만지작 합니다. 네 식구 모두 달게 잡니다. 달게 자느라 새벽 다섯 시부터 노래하는 들새와 멧새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새소리와 함께 동이 트는 아침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일곱 시를 조금 지나 눈을 번쩍 뜹니다. 창호지문 바깥이 훤합니다. 얼마나 잤나 시계를 봅니다. 늦잠까지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뒷밭 고랑에 쉬를 하고 뒷밭 감자와 오이와 토마토한테 물을 줍니다. 손바닥만큼 조그마한 뒷밭 감자는 무럭무럭 줄기를 올립니다. 새 잎이 싱그럽습니다. 야들야들한 오이잎은 벌레가 꽤 갉아먹었습니다. 오이꽃 필 무렵까지 오이잎을 잘 건사해야겠습니다.


  이웃 할머니와 할아버지 들은 아침부터 마늘밭이며 논이며 일하러 다니느라 부산합니다. 웃마을 못에서 물꼬를 텄으니, 논에 물 대실 분은 얼른 나와 논에 물 대라며 마을방송 울려퍼집니다.


  달력으로 치면 일요일 아침, 시골마을에는 일요일이 따로 없습니다. 흙하고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절기와 명절이 있지, 주말이나 공휴일이나 기념일은 없으니까요. 햇볕은 따사롭고 바람은 싱그럽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푹푹 찌는 무더위라고들 말하는데, 우리 시골마을 시골집은 밤에 서늘합니다. 아침에도 선선합니다. 햇살은 맑아 이른아침부터 빨래를 널 만하지만, 아직 이슬이 걷히지 않았으니 아홉 시쯤 되어야 이불을 내놓을 만합니다. 한낮에도 그닥 후덥지근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봄밤에도 선풍기나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더워서 잠을 못 이룰까요. 도시에서는 봄밤에도 냉방기를 돌리느라 전기를 많이 써야 할까요. 정부와 기업에서는 우리 시골마을 한쪽에 ‘도시사람 쓸 전기를 만들 어마어마하게 큰 화력발전소’를 짓겠다고 나섭니다. 막상 시골에서는 전기 쓸 일이 아주 드문데, 전기 쓸 일 많은 도시에는 발전소를 짓지 않습니다. 도시사람 쓸 전기 때문에 시골에 발전소를 지으려 하면서, 시골사람이 시골땅 더러워지기에 ‘시골에 발전소 짓지 마셔요’ 하고 외치면, 지역이기주의라도 되는 양 몰아세웁니다. 정작 지역이기주의라 한다면, 전기를 펑펑 쓰느라 전기가 모자란 도시에 발전소를 지어야 하는데 도시에 안 지으니 도시사람이야말로 지역이기주의입니다. 도시에 지어야 할 발전소를 도시에는 ‘위해시설’이 들어서도록 하면 안 된다고 몽땅 시골에 몰아세우는 짓이 참말 지역이기주의입니다.


  그러나, 무슨무슨 이기주의입네 무어네를 떠나 생각할 일입니다. 우리는 왜 봄밤조차 후끈후끈 무덥게 보내야 하나요. 우리는 왜 전기를 이토록 펑펑 쓰는 도시에서 일거리를 얻으며 돈을 벌어야 하나요. 우리는 왜 살랑살랑 봄바람과 따슷따슷 봄햇살 누리는 좋은 숲자락을 어깨동무하지 못해야 하나요.

 


  집 둘레에서 아침노래 신나게 부르는 새들이 두 아이를 깨웁니다. 두 아이는 맑은 눈빛으로 잠을 깹니다. 두 아이는 저마다 예쁘게 웃으며 아침부터 놉니다. 햇살은 포근하고 바람은 보드랍습니다. 좋은 햇살 낮 동안 듬뿍 받으니 좋은 꿈누리에 살며시 접어들겠지요. 좋은 바람 낮 동안 실컷 받아들이니 좋은 꿈나라에서 훨훨 날아다니겠지요.


  다시마 세이조 님이 빚은 그림책 《쿨쿨쿨》(보림,2008)에 나오는 모든 목숨들이 햇살과 바람과 흙과 물을 골고루 누리며 서로 달콤하게 꿈나라에서 날개옷 입고 춤을 춥니다. (4345.5.20.해.ㅎㄲㅅㄱ)

 


― 쿨쿨쿨 (다시마 세이조 글·그림,보림 펴냄,2008.7.2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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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2-05-20 12:21   좋아요 0 | URL
다시마 세이조, 정말 좋은 그림책 작가여요. 사진으로 보니 좋네요.

숲노래 2012-05-21 11:19   좋아요 0 | URL
참 재미나며 아름답게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분이라고 느껴요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 쉽고 재미있게 익히는
배상복.오경순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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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모른다
 [책읽기 삶읽기 103] 배상복·오경순,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21세기북스,2012)

 


  배상복 님과 오경순 님이 함께 쓴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21세기북스,2012)를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잘 모릅니다. 한국땅 학교에서 한국말을 옳게 가르치는 틀이 없기도 하지만, 한국땅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들부터 스스로 한국말을 옳게 배우며 옳게 쓰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도 합니다.


  책을 찬찬히 읽다가, 오늘날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떠올립니다. ‘국어(國語)’라는 한자말은 일제강점기부터 널리 쓰였다 하지만, 이 한자말을 바로잡거나 고치려는 공공기관이나 교사는 그리 안 많습니다. ‘國語’라는 낱말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본말’을 가리키던 낱말이요, 일본 제국주의자가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며 ‘일본말’을 ‘國語’라는 과목으로 가르쳤습니다. 한국말은 ‘조선말’이나 ‘조선어’라는 이름으로 가르쳤어요. 더 깊이 헤아려도 이와 같아요. 한겨레는 예부터 ‘한겨레 말’을 썼을 뿐입니다. 다만, 한겨레 스스로 한겨레 말을 가리키는 이름은 따로 없었어요. 굳이 이런 이름이 있어야 할 까닭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조선 때에 한겨레 글이 태어나기는 했으나, ‘한겨레 글’인 ‘훈민정음’은 여느 사람(백성)이 쓰는 글이 아니라 권력자와 지식인이 쓰는 글이었습니다. 이 나라가 식민지가 되고서야 비로소 학교라는 데가 생기며 여러 과목을 가르쳤고, 이때에 이 나라 이름은 ‘조선’이었기에, 학과목은 ‘조선말’이나 ‘조선어’였어요. ‘국어’라는 말은 안 썼어요.


  그나저나, 국어라는 낱말이 이러하건 저러하건, 이 말을 쓰건 말건, 한국사람이 오늘날 쓰는 한국말이 어떠한가를 학교에서 찬찬히 가르치지 않기도 하지만, 스스로 찬찬히 익히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같은 책을 따로 사서 읽지 않으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 언어라는 것은 태생한 배경과 문화가 있게 마련이다. 과거 전화가 귀해 이장 집으로 달려가 전화를 받고 우체국 먼 길을 가서 전화를 하던 때를 생각하면 “들어가세요.”라는 표현이 충분히 상상이 간다. 언어라는 것이 반드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전달할 때만 사용되는 것도 아니다. 세월이 흘러 어원은 잘 모르지만 그러려니 하면서 써 온 표현도 적지 않다 … 외국어나 외래어는 우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에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구나 엉터리 영어라면 우리 말을 쓰는 게 낫다 ..  (19, 141쪽)


  요즈음 한국사람은 ‘한국말’과 ‘외국말’을 제대로 가누지 못합니다. 한국말과 외국말 사이에 있는 ‘들온말(외래말)’도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외래어(外來語)’처럼 한자로 적으니 못 알아들을 수 있는데, 한자 뜻풀이 그대로 “밖에서 들어온 말”이기에 한국말로는 ‘들온말’입니다. “들어와서 쓰는 말”이라는 뜻으로 ‘들온말’입니다.


  들온말은 아직 한국말이 되지 않았으나, 한국사람이 여러모로 쓰는 낱말을 가리킵니다. 들온말을 쓰는 까닭은, 이제부터 한국말을 새롭게 빚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들온말을 여러모로 쓰면서 이 들온말을 한국말로 알맞고 슬기롭게 가다듬거나 갈고닦아 풀어낼 낱말을 빚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사람은 들온말을 한국말로 갈고닦지 않습니다. 들온말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게다가, 들온말 아닌 바깥말(외국어, 다른 나라에서 쓰는 말)을 마치 한국말처럼 삼으며 버젓이 써요.


  ‘외국어(外國語)’ 또한 한자로 적으니 어떤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할 수 있는데, 말뜻 그대로 “다른 나라에서 쓰는 말”, “이 나라 아닌, 이 나라 바깥에서 쓰는 말”이 ‘외국어’입니다.


  영어도 외국어요 일본어도 외국어입니다. 미국사람 쓰는 미국말이든 일본사람 쓰는 일본말이든, “한국 아닌, 한국 바깥에서 쓰는 말”입니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까닭은 한국 바깥에서 쓰는 영어를 잘 익혀야 한국 바깥으로 나가서 외국사람을 사귈 때에 좋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한국사람끼리 주고받자면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아요.


.. 참고로, 총각김치를 담글 때 쓰이는 어린 무를 ‘총각(總角)무’ 또는 ‘알무’ ‘알타리무’라 하는데, 1988년에 개정된 표준어 규정은 순수 우리 말인 ‘알무’ ‘알타리무’가 생명력을 잃었다고 해서 한자어 계열인 ‘총각무’로 쓰도록 했다. 따라서 ‘총각무’ ‘총각김치’가 표준어이고, ‘알무’ ‘알타리무’ ‘알타리김치’는 표준어가 아니다. 순 우리 말을 버리고 한자어를 표준어로 선정함으로써 비판이 있는 부분이다 … ‘간절기’는 정체불명의 말이다. 한자어권 어디에도 이런 단어는 없다. 일본식 표현을 오역한 것일 뿐이다 … 지난 2000년 국립국어원이 ‘간절기’를 신어 목록에 올렸지만 이는 한 해 동안 신문이나 잡지 등에 새로 등장한 용어를 모은 것일 뿐이다. 이 가운데는 유행어뿐 아니라 비속어도 포함돼 있다. 그 말이 어법상 옳은 것인지는 따지지 않는다 ..  (45, 120쪽)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라는 책에도 군데군데 나오지만, 국립국어원은 나라에서 세운 ‘한국말 지킴터’다운 노릇하고는 좀 동떨어집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알맞고 슬기롭게 쓰도록 돕거나 이끄는 구실을 잘 못합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신문과 잡지에 나타난 말’을 그러모으는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이에 앞서 ‘한국사람이 더 아끼고 사랑할 만한 좋은 말’부터 그러모으도록 힘써야 할 노릇입니다.


  신문이나 잡지에는 누가 글을 쓰겠습니까. 한국말을 옳게 가누거나 가꾸는 사람이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나요. 들온말과 바깥말을 찬찬히 가늠할 줄 아는 사람이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나요.


  교과서도 제대로 서지 않은 한국이고, 학교도 제대로 서지 않은 한국이며, 신문·잡지 또한 제대로 서지 않은 한국입니다.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나머지,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사람을 일깨우는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같은 책을 써야 합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얼마나 모르면 이 같은 책을 애써 써야 할까요.


.. 결국 “5만 원이세요.” “10만 원이세요.”처럼 돈에다 “-세요.”를 붙이는 것은 손님이 아니라 돈을 존대하는 기형적 어투다. 고객을 존중하기는커녕 돈이나 사물을 높여 손님을 놀리는 듯한 표현이다 … ‘쿨비즈’는 일본에서 쓰이는 용어를 우리가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똑같은 운동에 똑같은 이름이 쓰였다. 일본에서 영어를 어떻게 조합해 쓰든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엉터리 영어를 가져다 우리가 국가 정책 용어에 버젓이 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말로 창의적인 이름을 붙이면 얼마나 좋을까 ..  (63, 143쪽)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라는 책은 중학생 즈음이면 읽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 책에 나타나는 낱말이나 말투는 퍽 어렵습니다. “창의적인 이름을 붙이면” 같은 글월이 보이는데, “슬기롭게 이름을 붙이면”처럼 다듬을 만합니다. “돈을 존대하는 기형적 어투다” 같은 글월은, “돈을 높이는 엉뚱한 말이다”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어법상 옳은 것인지는” 같은 글월은 “그 말이 옳은지는”으로 다듬으면 되고, “한자어를 표준어로 선정함으로써 비판이 있는 부분이다”는 “한자말을 표준말로 삼아 비판받는 대목이다”로 다듬으면 즐겁습니다.


  67쪽을 읽으면,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역시 주체와 관련된 것을 높이는 간접 높임이므로 ‘교장 선생님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고 해야 한다. 아예 말을 바꾸어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겠습니다’로 해도 해도 된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말에서 ‘간접 높임’을 쓰든 말든, “교장 선생님 말씀이 있다”라는 말이, 참말 말이 되는지부터 살펴야지 싶어요. 이 대목부터 제대로 따져야지 싶어요.


  먼저, 이렇게 함부로 쓰는 말은 잘못입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겠습니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한국말이니까요. 다음으로, 한국말은 임자말이나 토씨를 줄이거나 지우곤 합니다. 이런 한국말 빛깔을 헤아리며, “너, 할 말 있니?” 같은 말투를 돌아봅니다. “너, 할 말 있니?”에서 가지를 치면, “선생님, 하실 말씀 있어요?”가 되고, 이 흐름에 따라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 때에도 “교장 선생님(이 하실) 말씀이 있겠습니다”처럼 될 수 있어요. 이와 같은 흐름과 결과 무늬를 찬찬히 짚을 때에, 비로소 한국사람 스스로 잘 모르는 말을 잘 생각하도록 도우리라 믿습니다.


  109쪽을 읽으면, “그래도 ‘배워 주다’를 쓰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간첩이 아닌지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갑작스레 웬 ‘간첩’? 북녘에서는 ‘가르쳐 주다’를 ‘배워 주다’로 쓰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누군가 쓴다면 ‘간첩’인지 살피라 하는 소리인데, 이와 같은 말투는 인권과 인격을 깎아내릴 뿐 아니라, 고장말을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북녘을 떠나 남녘으로 온 사람이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요. 중국에서 살다가 남녘으로 와서 살아가는 이웃이 매우 많아요. 이들은 ‘북녘 말투’를 이녁 고장말로 그대로 쓰면서 살아가는데, 이들을 ‘간첩’으로 몰아세우라는 뜻일까요? 북녘말은 북녘말대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껴안을 때에 남북이 하나되는 슬기로운 길을 찾는다고 생각합니다. ‘북녘사람은 이렇게 쓰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 됩니다. 북녘사람 말투는 나쁘거나 못된 말투라도 되는 듯 적바림한 대목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한국사람은 틀림없이 한국말을 잘 모르지요. 그런데, 한국말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한겨레 이웃’이나 ‘한겨레 동무’나 ‘한겨레 살붙이’부터 잘 모르기도 한다고 느껴요. 한국사람은 영어를 배우고 일본말을 배우고 하지만, 정작 경상도말이나 전라도말을 얼마나 배우려 하나요. 서울말만 듣고 익힐 뿐, 막상 인천말이나 수원말이나 평택말이 저마다 어떻게 다른가를 얼마나 살피려 하나요. 북녘말을 헤아리기 앞서, 같은 울타리라는 남녘에서조차 이웃말을 돌아보지 못해요. 강원말에서도 춘천말과 원주말과 고성말과 양구말은 달라요. 경상도말에서도 마산말과 진주말과 거제말과 통영말은 모두 달라요. 통영에서도 마을마다 조금씩 달라요. 섬마다 또 살짝살짝 달라요. 우리 한국사람은 외국말은 외국말대로 배워야겠습니다만, 한국사람으로서 ‘한겨레 이웃말’부터 제대로 살피고, ‘한겨레 이웃삶’ 또한 사랑스레 돌아보며, ‘한겨레 동무마을’을 따사로이 어깨동무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4345.5.19.흙.ㅎㄲㅅㄱ)


―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배상복·오경순 글,이수영 그림,21세기북스 펴냄,2012.5.14./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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