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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牛) - 김진선 사진집
김진선 사진 / 사진과예술사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곁에서 찾는 사랑스러운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96] 김진선, 《소(牛)》(사진예술사,2008)
마당 한쪽에서 스스로 자라는 풀꽃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뒤꼍에 마련한 뒷밭에 첫째 아이와 함께 물을 주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다른 분들은 봄날 어떤 봄꽃을 구경하고 사진으로 담는지 모르나, 나는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들꽃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새로 돋는 풀이 어여쁩니다. 자운영 꽃빛이 예쁘다 느낍니다. 모과나무에 맺힌 앙증맞은 꽃송이를 쓰다듬습니다. 감잎 푸른 사이사이 막 몽글려고 하는 몽우리를 봅니다. 뽕나무는 오디가 맺히는데, 오디가 되기 앞서 피어난 꽃송이는 뽕잎 빛깔하고 같습니다. 느티꽃은 느티잎하고 꽃빛이 같은데, 뽕꽃도 뽕잎하고 꽃빛이 같습니다.
봄꽃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많습니다. 봄날 들판과 멧자락을 오르내리며 사진을 빛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봄빛을 사진책으로 살며시 옮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봄날 봄빛을 사진으로 옮기는 이들 가운데 ‘사진쟁이 보금자리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봄내음’을 누리면서 사진길을 걷는 이는 드문 듯합니다. 여름날 여름빛을 사진으로 옮기든, 가을날 가을빛을 사진으로 옮기든, 겨울날 겨울빛을 사진으로 옮기든, 스스로 뿌리내려 살아가는 터에서 사진빛을 나누는 이는 퍽 드물지 싶어요.
가난한 사람들 찾아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터에서 마주하는 이웃 삶자락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가멸찬 사람들 찾아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더라도, 또 내로라하는 이들 찾아 인물사진을 찍더라도, 언제나 내 삶터에서 가장 가까운 데에서 살아가는 이웃을 마주하며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꼭 어느 호텔 어느 전시장에서 마련하는 잔치마당에서 패션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패션쇼라는 이름이 붙는 곳에서 모델을 앞세워야 패션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도 패션사진은 태어납니다. 내 작은 집 작은 방에서도 패션사진은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생각할 때에 내 사진이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는 결을 살피거나 살릴 때에 내 사진이 아름답습니다.
사진책 《소(牛)》(사진예술사,2008)는 강원도지사로 일하던 김진선 님이 내놓았습니다. 김진선 님은 “사진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제시해야 하는 사진, 누구보다 자신있어 그 내밀한 진실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내 사진은 어떤 것일까? 그런 고심의 시간, 살아오면서 체험하고 인식한 내 기억을 모두 꺼내놓고 샅샅이 뒤져 보았다(4쪽)” 하고 스스로 묻습니다. 스스로 물은 다음 “그러고 보면 강원도 사람, 소, 사진이 갖는 기본적 공통점이 ‘정직’이다. 강원도지사가 소(牛)를 테마로 한 사진작품을 내놓는 이유다(5쪽).” 하고 스스로 밝힙니다.
소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으나 아주 없지 않습니다. 소를 사진으로 찍되, 일소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훨씬 적습니다. 이와 함께, 싸움소를 사진으로 찍는다든지, 농장에서 풀을 뜯다가 고기로 팔릴 소를 찍는다든지, 좁은 우리에서 사료만 먹으며 젖을 내놓다가 머잖아 고기로 팔릴 소를 찍는다든지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어쩌면, 고기소 될 소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남녘땅 곳곳을 돌며 일소를 사진으로 담는 분은 있다 할 테지만, 남녘땅 곳곳 소우리를 찾아다니며 가엾게 갇힌 소를 사진으로 담는 분은 몇 사람쯤 될까요. 젖을 내놓다가는 고기소가 될 젖소를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담는 분은 몇 사람쯤 있을까요.
김진선 님이 내놓은 사진책 《소(牛)》에는 ‘들판에서 풀을 뜯다가 고기소로 팔릴 날을 기다리는 소’가 나옵니다. 김진선 님은 소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고, 소 멀찍이 떨어진 채 바라보기도 합니다. 소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는 사진이 있고, 소가 어떤 생각을 품는지 가늠하는 듯한 사진이 있습니다. 쉬는 소가 있고 움직이는 소가 있습니다. 무리지은 소가 있고 외따로 떨어진 소가 있습니다.
사진책 《소(牛)》를 빚은 김진선 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었을까요. 사진책 《소(牛)》는 우리들한테 무슨 삶을 보여줄 만한 이야기밭이 될까요. 김진선 님이 어린 나날 보던 소와 사진책에 담긴 소는 서로 얼마나 떨어진 채 ‘같은’ 소라는 목숨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까요. 사진책으로 소를 마주하는 오늘날 사람들은 밥상에 오르는 소고기와 사진책에 나타나는 소를 어떻게 맞대어 생각을 북돋울까요.
김진선 님은 소 아닌 돼지를 사진으로 찍으면서도 당신 꿈을 보여줄 수 있나요. 돼지 아닌 메뚜기를 찍거나, 메뚜기 아닌 개구리를 찍거나, 개구리 아닌 뱀을 찍거나, 뱀 아닌 갈매기를 찍거나, 갈매기 아닌 오징어를 찍는다면, 이때에도 당신 사랑을 보여줄 수 있나요.
사람들은 마른오징어도 먹고 물오징어도 먹습니다. 오징어 잡는 고깃배가 바다를 넘실넘실 가로지릅니다. 누군가는 오징어잡이배에 올라타고는 오징어 낚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겠지요. 누군가는 바닷속으로 풍덩 들어가서 바닷속 헤엄치는 오징어 모습을 사진으로 옮기겠지요.
양식장에서 넙치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을까요. 갯벌에서 조개 캐는 할머니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을까요. 굴을 까고 조개를 까는 아줌마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을까요. 스쳐 지나가는 사진이 아니라, 곁에서 오래오래 지켜보거나 함께 일하면서 찍는 사진으로 빚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이들 모습을 예쁘게 찍자면, 아이들하고 함께 살아가며 예쁘게 웃는 어른으로 지내면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난하게 살아가는 힘겨운 나날을 찍어 온누리에 알리자면, 나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하고 한 마을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며 힘겨운 나날을 몸소 겪으면 됩니다. 사진책 《소(牛)》를 내놓은 김진선 님은 ‘들판에서 풀을 뜯다가 고기소로 팔릴 날을 기다리는 소’를 바라보면서 어떤 넋이었고 어떤 얼이었으며 어떤 빛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소를 바라볼 때에 왜 ‘올바르다(정직)’고 여길까요. 흙에 기대어 흙을 일구는 사람이 아주 드문 오늘날에도 소는 옛날처럼 ‘올바르다’고 여길 짐승으로 삼을 만할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 소는 참말 무엇이고, 김진선 님이 사진으로 아로새긴 소에 서린 이야기와 꿈은 이 땅에서 참말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까 궁금합니다.
해거름에 둥지로 돌아오는 처마 밑 제비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제비들은 새벽 일찍 깨어나 노래하며 먹이를 찾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지런히 먹이를 얻어 새끼들을 먹입니다. 시나브로 새끼들은 어른이 되겠지요. 어른이 된 제비는 날갯짓을 바지런히 익혀 가을날 무르익는 들판을 바라보며 더 따스한 곳으로 날아가겠지요. 그러고는 이듬해 따사로운 새봄에 옛 둥지로 찾아오겠지요. 문득,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처마 밑 제비를 사진으로 담으며 이야기 엮는 사진쟁이는 한국에 몇 사람쯤 될까 궁금합니다. (4345.5.21.달.ㅎㄲㅅㄱ)
― 소(牛) (김진선 사진,사진예술사 펴냄,2008.5.28./3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