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에서 온 장미 도둑 - 터키 사진작가 아리프 아쉬츠의 서울 산책
아리프 아쉬츠 지음 / 이마고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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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살며 사진찍기는 온통 물음표
 [찾아 읽는 사진책 99] 아리프 아쉬츠, 《이스탄불의 장미도둑》(이마고,2009)

 


  터키사람 아리프 아쉬츠 님이 빚은 사진책 《이스탄불의 장미도둑》(이마고,2009)을 아주 금세 재미나게 읽습니다. 처음에는 사진만 죽 살피고, 다음으로 글을 찬찬히 읽습니다. 글을 읽으며 ‘사진만 먼저 읽던 느낌’을 떠올립니다.


  터키사람 아리프 아쉬츠 님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아니, 터키사람이든 한국사람이든, 한국이라는 나라를 꾸밈없이 바라본다 할 때에 어떤 빛깔로 드러날까요.


  “여자들 옷의 화려한 문양과 색깔이 두드러져 보였다. 햇빛이 강하지도, 비가 내리지도 않았는데 여자들은 옷만큼이나 화려한 양산을 쓰고 다녔다. 서울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아름다운 청자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건물의 유리창, 건설현장을 둘러싸는 그물, 골프연습장, 간판, 표지판, 가로수, 길거리 노점상의 천막 등 청자빛이나 그와 비슷한 초록색이 녹음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색깔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27쪽).” 하는 대목을 헤아립니다. 그림자빛으로 사진을 찍던 아리프 아쉬츠 님은 한국에 닿아 서울을 돌아보면서 무지개빛으로도 사진을 찍자고 생각합니다. 당신 눈길을 사로잡는 눈부신 무지개빛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합니다.

 

 


  나는 사진을 두 갈래로 찍습니다. 필름으로만 사진을 찍던 예전이든, 필름과 디지털로 사진을 찍는 요즈음이든, 무지개빛으로 찍는 사진기 한 대랑 그림자빛으로 찍는 사진기 한 대를 따로 챙깁니다. 똑같은 사람을 바라보건, 똑같은 집이나 들이나 마을을 바라보건, 무지개빛으로 느끼는 아름다움과 그림자빛으로 누리는 아름다움은 사뭇 다르다 느껴요. 어느 한 가지로만 바라본다면 내 눈길이 한쪽으로 치우치겠다고 느껴요.


  “한국은 한눈을 팔기에는 모든 일이 너무 빨리 돌아가는 나라였다(31쪽).” 하고 말하는 대목을 되뇝니다. 참 그렇습니다.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뒤처진다 하기도 하지만,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뒤에서 밀어댑니다. 사진도 빨리 찍어야 하고, 사진책도 빨리 만들어야 하며, 사진비평도 빨리 쏟아내야 합니다. 무엇이든 먼저, 빨리, 크게 하지 않고서야 한국에서 빛을 보기 어렵습니다. 한국에서는 늘 1등만 바라보는데, 이 1등이란 한 번 1등을 해서는 안 되고 ‘죽는 날까지 내처 1등’을 지키도록 빨리 달리고 죽어라 달려야 해요.


  그러고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한국사진’이라 일컬을 만한 아름다운 사진이 아직 없다고 할 만하구나 싶어요. 스스로 살아가는 꿈과 사랑을 돌보지 않는다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에서 한국사진을 찍기는 할 테지만, 정작 ‘한국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지구별 사진밭’에 즐거이 내놓아 나눌 ‘아름다운 사진’ 하나 누리기 힘들지 않겠느냐 싶어요.

 

 


  “아줌마들의 옷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패턴을 자랑했다. 피카소나 마티스도 그와 같은 패턴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공원이나 지하철 등에서 한 무리의 아줌마들을 보고 다니는 일은 포비즘 전시회보다도 훨씬 더 재미가 있었다(39쪽).” 하는 대목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참말 재미있구나 싶은 모습이겠지요. 참말 재미있구나 싶은 모습을 한국사람 스스로 만들면서 한국사람 스스로 참말 못 느낀다 하겠지요.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찍어 나라밖에 알린다 할 때에 어떤 사람을 어느 곳에서 어떻게 담아서 보여줄까 궁금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사진으로 담아 이웃나라에 알린다 할 때에 어느 도시나 시골을 언제 어떻게 담아서 보여줄까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몇 개월을 살다 보니 반은 한국인이 됐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래서 통일에 대한 친구들의 회의적인 시선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56쪽).” 하는 대목을 곱씹고, “젊은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MP3를 귀에 꽂고 다녔다. 왜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75쪽).” 하는 대목을 되새깁니다. 한국사람이 보여준다 할 만한 ‘한겨레 넋’이란 무엇일까요. 남녘과 북녘을 아우를 만한 넋이란 무엇일까요. 남북녘과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모든 한겨레를 어우를 만한 넋이란 무엇일까요. 지구별 숱한 나라에 저마다 다른 보금자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온 한겨레를 그러모을 만한 넋이란 무엇일까요.


  사진과 글을 한참 읽다가 살며시 책을 덮습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깁니다.

 

 


  터키사람 하나 한국에서 꽤 오래 지내며 한국땅 가운데 서울에서 보고 듣고 겪고 부딪히고 부대끼면서 누린 삶을 적바림합니다. 한국사람 하나 터키로 나들이를 가서 여러 달 살아내며 글과 사진을 적바림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요.


  다시 책장을 넘깁니다. “이스탄불의 소리는 어떤가? 아침 5시, 침실 바로 곁 창가에서 아카시아 나무에 앉은 나이팅게일 한 쌍이 나를 깨운다. 봄여름에는 제비가 재빨리 날며 소리를 낸다(134쪽).” 하는 대목을 읽습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들새 노랫소리로 아침을 연다고 합니다. 한국 서울에서는 어떤 소리로 아침을 여는가요.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제비들 춤사위와 노랫소리를 누릴 수 있는데, 한국 서울에서는 어떤 사위와 소리를 누리는가요.


  스스로 누리는 대로 스스로 글로 담습니다. 스스로 즐기는 대로 스스로 사진으로 빚습니다.


  “‘왜 그렇게 정확하게 바꿔야만 할까?’ 나는 물었다. ‘렘브란트나 베르베르가 이 집을 화폭에 담았을지도 모르니까.’ 역사에 대한 존경심은 네덜란드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시간이 지나면 무엇으로 네덜란드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보여줄까? 박물관의 그림으로? 아니면 현실로(143쪽)?” 하는 대목을 오래도록 헤아립니다. 터키사람 아리프 아쉬츠 님이 만난 네덜란드 벗은 네덜란드 시골자락에 17세기 모습 고스란히 깃든 집이 많다고 말합니다. 네덜란드에서는 퍽 예전부터 옛집을 허물거나 부수지 못하도록 했답니다. 언제나 살아숨쉬는 역사이자 문화이니까요. 역사는 박물관이 아닌 마을에 있으니까요. 문화는 교과서나 도서관이 아닌 ‘여느 사람 여느 살림집’에 있으니까요.

 

 


  한국에서 ‘한국 문화’를 사진으로 담는 이들은 여느 사람 살림집 모습을 사진으로 옳게 담아내지 못합니다. 누구보다 ‘내 집’부터 사진으로 담아 내 집이 곧 한국사회요 한국문화이며 한국예술이라고 즐거이 나누지 못합니다.


  “인사동 위쪽으로 북촌이라는 마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 골목은 잘 단장이 되어 있었지만 아줌마도 개도 시끌벅적한 어린아이들도 없었다. 오래된 집들 같았지만 사실은 옛 스타일로 새로 지은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집들을 보며 밀랍인형을 떠올렸다. 진짜랑 똑같지만 생명력은 없는 … 소나무와 산을 이토록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이 진정 산을 허물고 인공적인 물길을 만든단 말인가? 한국사람들이 진정 눈과 코에 성형수술을 해대는 사람들처럼 자연 전체에 메스를 대고 싶어한단 말인가? 도시의 기억상실증으로도 모자라서 자연의 기억상실증을 만들고자 한단 말인가? 네덜란드만큼이나 부유한 한국사람들에게 역사는 네덜란드사람들보다 덜 중요하단 말인가(144∼145쪽)?” 하는 대목을 밑줄 그으며 읽습니다. 여러 차례 되읽습니다. 참말, 한국사람은 멧줄기를 타려고 멀리 자동차를 타고 나갑니다. 참말, 한국사람은 ‘좋은 자연 구경’을 하려고 자가용을 타든 기차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멀리멀리 나다닙니다.


  내 보금자리 깃든 곳에 좋은 자연을 불러들이지 않습니다. 내 보금자리를 좋은 자연이 싱그러운 데에 마련하지 않습니다.

 

 


  나도 마을도 숲도 한몸입니다. 내가 사랑스러울 때에 나도 마을도 숲도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정갈할 때에 나도 마을도 숲도 정갈합니다. 내가 어여쁠 때에 나도 마을도 숲도 어여뻐요. 곧, 내가 사랑스레 살아가며 내 사진을 나 스스로 사랑스레 일굽니다. 내가 빛나는 눈길일 때에 내 사진은 늘 빛나는 이야기잔치입니다.


  봄날 찔레꽃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내 눈과 머리와 마음과 몸이 온통 찔레꽃이 됩니다. 나는 내 필름이나 디지털파일에 찔레꽃 ‘지식이나 정보’를 아로새기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찔레꽃과 한덩어리가 되어 즐거운 꿈과 사랑을 찬찬히 적바림합니다. 봄날 들딸기를 사진으로 옮기면서 내 입과 귀와 가슴과 꿈이 온통 들딸기가 됩니다. 나는 내 필름이나 디지털파일에 들딸기 ‘지식이나 정보’를 집어넣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들딸기와 하나가 되어 해맑은 웃음과 눈물을 천천히 빚습니다.


  “정치가들은 왜 여전히 탐욕으로 불타 있는 것일까 … 몇 개월 간의 서울 체류 기간 동안 나는 외국인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서울에는 관광객이 드물다. 왜 한국에 와야 할까? 김치를 먹고 아파트를 구경하기 위해서(147쪽)?” 하는 대목을 읽다가 빙그레 웃음이 납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땅 곳곳을 누비는 일이 그리 흔하지 않구나 싶어요. 한국땅 어디를 가도 온통 아파트투성이잖아요.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땅 아파트 구경할 일이 없으니, 애써 한국땅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지 않아요.

 


  서울에서 대구나 대전이나 광주에 간들 무엇이 다를까요. 무엇을 볼 만할까요. 부산에서 인천이나 수원이나 일산에 간들 무엇이 다른가요. 무엇을 볼 만한가요.


  “한국의 십자가들은 달랐다. 그 십자가들은 큰 건물의 꼭대기를 장식하지 않았다. 대신 깔끔하지 않고 지저분한, 그리고 값싸고 허름한 건물 지붕 위에 있었다(168쪽).” 하는 대목을 읽습니다. 너털웃음이 납니다. 아주 마땅하지만, 믿음은 예배당 십자가에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아니, 예배당 십자가에도 있고 내 가슴에도 있겠지요. 하느님은 예배당 뾰족탑에 찔려 피를 흘리기도 할 테고, 내 부질없는 헛생각에 엉덩이 걷어차이며 아파하기도 할 터입니다.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한국땅에서 사진을 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터키사람 아리프 아쉬츠 님이 한국에서 살며 사진을 찍는 나날은 온통 물음표입니다. 그예 물음표투성이 사진을 찍습니다.


  “터키 남부에도 소나무가 많아 어딜 가도 송진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소나무 냄새를 맡기가 어렵다. 수백만 불이 넘는 건물들의 외관이 떨어진 솔잎으로 구겨지지 않도록 청소부들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 서울에서는 소나무 외에도 단풍나무, 아카시아, 감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 잎들도 냄새를 풍길 시간이 없다. 서울시는 도시 미관을 정리하는 데 열심이다(176쪽).” 하는 대목을 읽으며 이 나라 서울이 그지없이 슬프지만, 정작 서울사람 스스로 슬퍼할 일이 있나 알쏭달쏭합니다. 소나무는 있으나 솔내음을 못 맡는 서울에서 살아가는 일이란 얼마나 즐거울까 잘 모르겠습니다. 감나무가 있어도 감내음을 못 나누는 서울에서 살아가는 일이란 얼마나 기쁠까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아리프 아쉬츠 님 이야기는 막바지에 이릅니다. “닫혀 있는 한국의 집에서 살았던 몇 개월 동안 내게는 폐쇄공포증의 징후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184쪽).” 하는 느낌말처럼, 한국땅 여느 살림집은 울타리가 매우 높습니다. 창문은 참으로 작습니다. 대문은 꽁꽁 잠깁니다. 햇볕이 잘 드는 집이 적습니다. 햇볕이 잘 들 만한 높은 아파트라 하더라도 앞뒤옆으로 아파트가 줄줄이 늘어섭니다. 높은 아파트에서도 높은 아파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낮은 다세대주택에서는 이웃 다세대주택 벽돌담이나 시멘트담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사람이라고 잘 느끼며 한국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을까 궁금합니다.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이라는 나라는 사진으로 담을 만큼 재미나거나 놀랍거나 멋스럽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느껴, 자꾸자꾸 나라밖 마실을 다니며 이웃 가난한 나라나 이웃 가멸찬 나라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려 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어떤 사진을 할 만할까요.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사진을 할 때에도 터키사람 아리프 아쉬츠 님처럼 온통 물음표투성이가 될까요. 느낌표투성이가 될 사진을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일굴 수 있을까요. 말줄임표나 마침표가 될 만한 한국사진을, 따옴표나 묶음표가 될 만한 한국사진을, 누군가 곱게 즐길까 모르겠습니다. (4345.5.26.흙.ㅎㄲㅅㄱ)

 


― 이스탄불의 장미도둑 (아리프 아쉬츠 글·사진,이혜승 옮김,이마고 펴냄,2009.3.16./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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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예반 소년들 카르페디엠 29
우오즈미 나오코 지음, 오근영 옮김 / 양철북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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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잎과 환한 꽃 누리는 아이들
 [푸른책과 함께 살기 94] 우오즈미 나오코, 《원예반 소년들》(양철북,2012)

 


- 책이름 : 원예반 소년들
- 글 : 우오즈미 나오코
- 옮긴이 : 오근영
- 펴낸곳 : 양철북 (2012.3.26.)
- 책값 : 9000원

 


  이웃 할머니가 마늘밭 가장자리에서 풀을 뽑습니다. 일손을 거들까 하지만 당신이 혼자 하시겠다며 손사래를 칩니다. ‘지심매기’만 살짝 거듭니다. 할머니가 지심을 맬 때에 ‘부추’가 보이기에 “‘정구지’는 어떡할까요?” 하고 여쭈려다가, 전라남도에서는 달리 가리킬까 싶어 “‘여기’는 어떡할까요?“ 하고 여쭙니다. “응, 그건 놔 둬. ‘솔’이야 솔. 오늘 ‘아’들이 오는데 가져갈랑가 모르겠네.” 하고 말씀합니다.


  첫째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면내 우체국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들딸기를 땁니다. 아이가 집에서 어머니하고 함께 먹으라고 아이 두 손에 가득 담길 만큼 땁니다. 마을 어귀 마늘밭에서 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한창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자전거를 멈춥니다. 아이한테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도 조금 나누어 주렴 하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네가 이걸 나한테 주냐. ‘똘’이네, 똘. 아, 똘 참 맛나다.” 하고 말씀합니다.


.. 문득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전차를 타고 가면 40분 정도 걸린다. 자전거로 가면 두 시간은 걸리겠지만 따듯한 햇살이 등을 떠밀었다 … 흙을 정리할 때 옆을 지나가다가 “뭐 하는 거야?” 하며 아는 척을 했던 같은 반 친구들한테서도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오와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 화단 하나로 입구 느낌이 훨씬 좋아졌는데도 몰라보는 건가. 삭막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는 나도 그 삭막한 녀석들 중 하나였으니까 ..  (5, 91쪽)


  지난주에 둘째 아이 돌떡을 이웃집 모두 돌며 돌리다가, 돌울타리 타고 곱게 자라는 ‘마삭줄’꽃을 잔뜩 보았습니다. 어느 집은 대문 위쪽으로 마삭줄 울타리를 만들기까지 합니다.


  식구들 다 함께 마삭줄꽃을 바라볼 때에는 마삭줄이라는 이름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물어 물어 알아차립니다. 꽃이름은 모르지만 참 어여쁘구나 하고 생각하며 “이 바람개비처럼 생긴 하얀 꽃은 무어라 할까?” 하고 궁금했습니다. 이러다 문득 한 가지 떠오르는데, 꽃이든 풀이든 나무이든 꽃 모양만 놓고 무슨무슨 꽃이라 이름을 붙이는 일이 옳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아이한테 ‘마삭줄’이라는 이름을 가르치면서, ‘흰바람개비꽃’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나한테도 아이한테도, 마삭줄꽃은 그예 하얗게 생긴 작은 바람개비와 닮은 꽃이에요.


.. 옆에 있는 화분을 보니 잎 모양으로 봐서는 같은 종류인 것 같은데 줄기가 쓰러지고 잎은 시들어 축 늘어져 있다. 꼿꼿한 풀은 내가 앉은 바로 옆에 있는 화분뿐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여기만 비가 온 걸까. 그때, 문득 어제 종이컵에 남은 물을 끼얹고 갔던 일이 떠올랐다 … ‘생각해 보면 풀이 축 늘어져 있다가 싱싱하게 살아나는 모습이, 내가 이 학교에 들어온 지 열흘 만에 본 가장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거든.’ … 시미즈라는 머리 긴 아이가 말했다. “흙과 씨름하는 걸 보면서 참 멋지다는 말도 했어.” ..  (17, 27, 124쪽)


  네 식구 밭둑이나 논둑을 다니다가 ‘들딸’을 따서 먹다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멧자락이나 멧등성이 아닌 들판에서 따서 먹기에 ‘들딸’이라고 여기지만, 먼먼 옛날에는 논둑이나 밭둑이 논둑이나 밭둑 아닌 멧자락이었을 수 있습니다. 멧등성이부터 천천히 퍼져 밭둑까지 ‘딸’이 자란다 할 만합니다. 그래서 이 딸, 또는 ‘똘’은 ‘들딸(들똘)’이 아니라 ‘멧딸(멧똘)’이라 해야 바른 이름일 수 있어요.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으레 ‘멧딸’만 말하지 ‘들딸’은 말하지 않습니다. 멧딸 가운데에는 ‘나무딸’이 있습니다. 딸도 숱한 갈래여서, 모든 딸을 멧딸이나 들딸이나 나무딸이라고만 가리킬 수 없습니다. 우리 식구들 지난해 봄 충청북도 음성 멧자락에서 먹던 멧딸이랑 올해 봄 전라남도 고흥 시골자락에서 먹는 들딸이랑 꽃도 열매가 제법 달라요. 꽃빛도 꽃크기도 다릅니다. 꽃잎도 풀잎도 다릅니다. 이처럼 다른 딸을 그냥 멧딸이라느니 들딸이라고만 해도 될까 궁금합니다. 딱히 어떤 이름을 붙여야 좋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자그마한 빨간 열매를 톡 따서 입에 넣을 때 온몸으로 퍼지는 기운을 헤아립니다. 딸은 내 몸속에서 새로운 기운이 되어 내 숨결을 새삼스레 북돋운다고 생각합니다. 딸이 내가 되고, 내가 딸이 됩니다. 딸 목숨은 내 목숨이고, 내 목숨은 곧 딸 목숨입니다.


.. 먼저 오와다가 가져온 스토크 봉투를 열어 보니 아주 작은 씨앗이 나왔다. 씨앗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모래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갖고 온 페튜니아 봉투를 열어 보고는 더욱 놀랐다. 이건 모래도 아니다. 거의 가루에 가깝다 … “여기 있는 식물의 이름이 뭔지, 어떤 방식으로 키워야 할지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약 정말 꽃으로 가득한 화원으로 만들고 싶다면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 “BB, 너희 집 꽃가게 하는 거 맞지?” 오와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어제 원예 책을 한 권 읽었을 뿐입니다.” 쇼지는 정색을 하고 대답하고 나서 오와다를 보았다. “오와다 군은 읽지 않은 겁니까?” ..  (30∼31, 50∼51쪽)


  이제 우리 시골마을이든 면소재지 언저리이든 온통 찔레나무 하얀 꽃잎 잔치입니다. 아이들과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거닐며 마실을 하든, 자전거를 몰며 천천히 돌아보는 마실을 하든, 어디에서나 하얀 꽃잔치입니다.


  때때로 찔레꽃 하얀 송이 따서 입에 넣으며 잘근잘근 씹습니다. 돌을 갓 지난 아이 입에도 찔레꽃잎 밀어넣습니다. 아이들 모두 입을 낼름 벌립니다. 우리 집 처마에 깃든 제비들이 깐 새끼와 같습니다. 입 참 잘 벌립니다.


  찔레꽃잎을 톡 따서 한 닢씩 넣을 때에 살펴보니, 꽃잎 모양새는 이른바 ‘하트’입니다. 찔레꽃잎은 나무에 달린 모습도 예쁘고 한 닢 똑 딸 때에도 예쁩니다. 한 닢에서도 냄새 그윽하고, 무리진 꽃잎에서도 냄새 고즈넉합니다. 찔레꽃 한창인 곁을 지나가면 온몸에 찔레내음이 감돕니다. 찔레내음이 내 내음이 되고, 내 내음은 찔레내음과 하나가 됩니다. 바야흐로 여름이 코앞인 느즈막한 끝봄자락, 조용조용 찔레잔치를 누립니다.


.. “아니, 오와다 군은 아니지만 그런 불량한 차림새는 다른 학생들에게 불쾌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버젓이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더러 상자를 쓰고 학교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혼자 공부해서 고등학교에 들어왔습니다.” … “이름이랑 얼굴 때문에 놀림을 당했다고요! 이런 기분을 오와다 군은 모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를 놀리는 녀석이 없잖아!” ..  (71, 115쪽)


  우오즈미 나오코 님이 빚은 푸른문학 《원예반 소년들》(양철북,2012)을 읽습니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참 재미없겠다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꼭 도시라서 재미없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만, 온통 ‘더 잘난 학교’에 ‘더 높은 시험성적’ 거두는 데에만 온마음 기울이도록 하는 제도권교육일 때에는, 학교 다니는 재미나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보람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동무를 밟고 올라서는 일이란 무슨 재미일까요. 동무랑 점수겨루기를 하는 일이란 무슨 기쁨일까요. 더 높은 학교, 또는 더 잘난 대학교에 붙는 일이란 무슨 보람일까요. 모두 똑같은 옷차림에 머리모양에 생각에 가방에 …… 틀에 맞추는 일이란 무슨 즐거움일까요.


  집과 학교 사이를 오가면서, 이 많은 아이들은 무엇을 바라볼까요. 집과 학교 사이를 오가면서, 이 많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교사는 무엇을 바라보나요.


  아이들은 무슨 삶을 누리는 어른으로 자라야 아름다울까요. 어른들은 무슨 삶을 누리는 푸른 나날을 거쳤을까요.


  사람은 왜 태어나서 살아가는가 생각합니다. 사람은 왜 삶을 누리며 사랑을 꽃피우는가 생각합니다. 사람은 언제 사람다운가 생각합니다. 사람은 어떤 목숨이요, 사람은 어떤 무늬이며, 사람은 어떤 넋인가 생각합니다.


.. 아는 꽃 이름이 늘자 집 근처나 학교를 오가는 길에 갑자기 꽃이 많아졌다. 물론 눈에 띄니까 그런 느낌이 나는 것일 뿐이지, 전부터 늘 있던 꽃이다 … “좋아, 자연을 보러 가자. 누가 뭐래도 우리는 원예반이잖아.” … 초록색이라고 다 같은 초록색이 아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초록색이 산속에 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숲을 바라보니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  (92, 103, 109쪽)


  아이들이 누구보다 스스로 아끼면서 하루하루 좋아할 수 있으면 참 예쁘리라 봅니다. 아이들이 언제나 스스로 보살피고 이웃하고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무척 아름다우리라 봅니다. 착한 아이들이 예쁜 아이들입니다. 참다운 아이들이 아름다운 아이들입니다.


  착한 아이들로 살아가며 착한 어른이 됩니다. 참다운 아이들 삶을 빛내며 참다운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다고 할 때에 갑자기 거듭나지 않습니다. 어른이라는 나이에 들어서며 하루아침에 맑은 빛을 뽐내지 않습니다. 갓난쟁이일 적부터 차근차근 사랑을 누리고 빛을 받으면서 시나브로 자라나는 목숨입니다. 아이들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온갖 사랑을 맞아들이면서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을 때에 씩씩하게 큽니다.


  나는 도시가 나쁘다고 따로 생각하지 않으나,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높다란 건물과 새까만 찻길과 끝없는 자동차와 형광등 켠 건물과 메마른 옷차림만 늘 바라보아야 한다면,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너무 슬프며 어두운 넋이 되겠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이 푸른 나무 푸른 잎과 마알가니 빛나는 환한 꽃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람다운 사랑을 빛낼 수 있겠느냐 싶습니다. (4345.5.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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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아닌 것이 없다 - 사물과 나눈 이야기
이현주 지음 / 샨티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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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아가는가
 [책읽기 삶읽기 104] 이현주, 《사랑 아닌 것이 없다》(샨티,2012)

 


  아침에 일어나서 들새 소리를 들으며 뒷간으로 가서 똥을 눕니다. 똥을 한창 누고 나올 무렵 멧새 소리를 듣습니다. 섬돌에 신을 벗고 들어갈 무렵, 처마 밑 옛 둥지 손질해서 암수 짝을 이루어 새로 들어온 제비 두 마리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집은 시골마을에 작은 집 하나만 마련했습니다. 우리한테는 꼭 이 집 한 채 얻을 돈만 있었거든요. 시골에서 살아가지만, 막상 밭이고 논이고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시골마을에서 예쁘고 즐거이 살아갑니다. 이웃집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보는 밭을 바라보고 논을 들여다봅니다. 때때로 두레를 나가고 곧잘 일손을 거듭니다. 때때로 푸성귀를 얻고 곧잘 쌀을 얻습니다.


.. 마음을 모으지 않고서 어떻게 아름다운 가을의 황금 들녘을 볼 수 있겠는가? … 자네가 누구를 기·다·린·다·면 자네는 영원토록 그를 만나지 못할 걸세 … 사람이 사람으로 살지 않는 수도 있나 ..  (21, 75, 99쪽)


  이제 마을 논마다 물을 가득 댑니다. 물이 가득 찬 논은 무논이라 합니다. 무논에는 개구리가 오붓하게 살아갑니다. 아침이고 낮이고 저녁이고 개구리 노랫소리가 온 고을을 채웁니다. 낮보다는 저녁이나 밤에 더 개구지고 힘차게 울어대는데, 아무래도 낮에는 온갖 새들이 날아들어 저희를 잡아먹으려 하기 때문일 테지요. 깊은 밤이나 새벽에 첫째 아이 오줌 누이러 바깥으로 나오면, 언제나 곽곽 크게 울어대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즐깁니다. 첫째 아이는 오줌그릇에 앉아 쉬를 누며 꾸벅꾸벅 졸고, 아버지는 곁에서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붙들면서 개구리 이야기를 듣습니다.


  논 옆을 지나갈 때에 가끔 개구리가 뽀롱 튀어나옵니다. 멋모르는 개구리는 찻길로 올라섭니다. 찻길로 올라선 개구리라 하더라도 우리 마을 언저리로 지나가는 차는 매우 드뭅니다. 한참을 내다 보더라도 차 한 대 지나갈 일이 없습니다. 다른 곳과 달리 우리 마을 무논 개구리는 나그네 자동차한테 치여 죽거나 밟혀 떡이 될 일이 없다 할 만합니다. 아이들과 마실을 다니며 길바닥을 내려다보아도 납짝꿍이 된 떡개구리는 아직 못 보았어요.


.. 기차에서 내리기 직전, 서둘러 안경알을 닦는다. 안경이 스스로 안경을 닦지 못한다는 사실이 따스한 위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면서 … 타고난 목소리보다 크게 말하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나무 이름이지 나무가 아니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나무 이름이 아니라 나무에 붙여진 이름이다 ..  (46, 58, 177쪽)


  엊그제 이웃집 마늘밭 일손을 조금 거들었습니다. 그리 안 넓은 밭뙈기인데, 땡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마늘을 캐고 엮고 나르고 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당신 딸아들을 모두 도시로 보내고 늙은 몸 움직여 마늘을 심고 돌보다가 캡니다. 도시 사람은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허리 구부러지며 일군 마늘을 돈 몇 푼 치러서 사다 먹습니다.


  참 고된 일이기에 당신 딸아들한테 마늘밭 일이건 무논 일이건 물려주고 싶지 않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돈을 더 벌려고 짓는 흙일이 아니라, 시골마을에서 조용하면서 오붓하게 살아가는 꿈과 사랑을 누리려고 짓는 흙일이라 한다면, 굳이 밭뙈기에 마늘만 가득 심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여러 푸성귀를 골고루 심을 만하고, 여러 열매나무를 알뜰히 심을 만해요.


  식구들 먹을 푸성귀라면 아주 마땅히 풀약이고 비료이고 안 쓰겠지요. 살붙이들 먹을 열매라면 아주 마땅히 거름만 낼 테며, 흙이 보드랍고 기름지도록 땀을 흘리겠지요. 이렇게 일구어 거두는 열매와 곡식과 푸성귀라 한다면, 저잣거리에 내다 팔더라도 제값을 옳게 받을 수 있으며, 흙일꾼이건 도시사람이건 모두 좋으며 흐뭇하리라 느껴요.


.. 사랑 아닌 것도 사랑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명심해 두어라. 이 세상에는 사랑의 표현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없음을 … 세상에 순결하지 않은 물건이 있는가 … 이 땅에 생명이 있든 없든, 존재하는 것은 모두 사랑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길밖에는 걸어야 할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  (84, 96, 164∼165쪽)


  우리한테 아직 땅이 없지만, 오래지 않아 넉넉하고 너르며 푸른 땅뙈기가 찾아오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식구는 우리 땀과 똥오줌으로 땅뙈기를 한결 푸르며 어여삐 아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마을마다 흙을 살찌우고 땅을 북돋우며 이웃을 사랑하는 꿈결이 널리 퍼지리라 생각합니다. 이제껏 시골에서는 어린이와 젊은이를 온통 도시로 보내기만 했지만, 앞으로는 도시 어린이와 젊은이가 모두 시골로 찾아오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서로서로 겨루거나 서로서로 밟고 올라서서는 살아갈 수 없거든요. 사람은 서로서로 믿고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거든요. 사람은 서로서로 기대고 돌보며 얼싸안을 때에 살아갈 수 있어요. 사람은 서로서로 웃고 얘기하며 밥을 나눌 때에 살아갈 수 있어요.


  돈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밥을 먹는 사람이에요. 기름이나 자가용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풀을 먹고 열매를 먹는 사람이에요. 아파트를 먹지 못하고, 아파트는 오래지 않아 허물어야 해요. 사람은 흙을 먹고 흙을 누며 흙을 물려받아요.


.. 자네가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고 있는데, 내가 무슨 말로 장단을 맞춘단 말인가 … 누가 나를 버렸는지 그건 모를 일이나 나는 버림받지 않았네. 아무도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버릴 수 없으니까 … 나는 나무요 흙이요 물이요 공기요 태양이요, 나는 모든 것이다 ..  (64, 92, 111쪽)


  이현주 목사님 생각주머니를 담은 《사랑 아닌 것이 없다》(샨티,2012)를 읽습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온갖 ‘것’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먼저 말문을 열기도 하고, 나중에 말문을 열기도 합니다. 돌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개구리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마, 파리라든지 제비라든지 모기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요.

  책을 다 읽고 나서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누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까.


  뒤꼍 뽕나무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앞마당 노랑붓꽃이랑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처마 밑 제비들이랑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마을 들새랑 멧새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논둑 자운영이랑 광대나물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오월이 무르익으며 한껏 해맑은 찔레꽃이랑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벌써 꽃씨 날리는 민들레 줄기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나는 내가 사랑할 만한 누군가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며 서로 어깨동무할 만한 벗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내 손길이 그득 밴 부엌칼이랑 도마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빨래비누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내 책들과 연필과 베개와 자판과 옆지기 뜨개실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느 무엇보다 우리 사랑스러운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며, 우리 어여쁜 두 아이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하고, 우리 좋은 동무들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또, 하느님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지구별이랑, 숲이랑, 바다랑, 해랑, 달이랑, 별이랑, 구름이랑, 빗물이랑, 무지개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4345.5.24.나무.ㅎㄲㅅㄱ)


― 사랑 아닌 것이 없다 (이현주 글,샨티 펴냄,2012.3.9./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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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보도사진 강의 - 심장으로 진실의 순간을 포착하라
오동명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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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작가 되고 싶은 젊은이한테
 [찾아 읽는 사진책 98] 오동명, 《오동명의 보도사진 강의》(시대의창,2010)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닌대서 ‘사진작가’가 될 수 있지 않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니지 않았대서 ‘사진쟁이’가 될 수 없지 않습니다. 스스로 ‘사진 찍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스스로 사진을 찍으며 살아가면 됩니다. 졸업장은 사진작가 이름표가 아닙니다. 자격증은 사진쟁이 딱지가 아니에요. 어느 이름난 사진쟁이한테서 사진을 배웠으니까 ‘사진 찍는 사람’이라고 내세울 수 있지 않습니다. 값나가는 사진장비를 갖추었으니 ‘사진작가’라고 우쭐거리거나 자랑할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사진작가입니다. 사진을 좋아할 때에 사진쟁이입니다. 사진을 사랑하며 사진과 함께 살아갈 때에 ‘사진 찍는 사람’입니다.


  수십만 원이나 수백만 원이나 수천만 원에 이르는 사진장비를 갖출 때에만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편의점에서 1회용 사진기를 장만할 때에도 사진을 찍습니다. 손전화 기계로도 사진을 찍습니다. 놀이공원 같은 데에서 ‘기념사진 찍어 주는 이’한테 얘기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연필과 종이가 있으면 그림을 그린다 합니다. 그런데, 종이가 없더라도, 또 연필이 없더라도,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돌멩이로 돌벽에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조개껍데기로 모래밭에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오래오래 남길 수 있어야 그림이 아닙니다. 오래도록 남기는 작품을 빚어야 그림쟁이가 되지 않습니다.


  연필에 종이를 갖추면 글을 쓴다 하지요. 그러나, 종이가 없어도, 또 연필이 없어도, 입으로 종알종알 이야기꽃 피우며 글을 쓸 수 있어요. 내 마음속에 이야기보따리를 갖추어, 언제 어디에서라도 말꽃을 피우는 ‘말글’을 쓸 수 있어요. 따로 책으로 묶어야 글쟁이가 아닙니다. 어느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실어야 ‘글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아요.


  오동명 님이 대학교에서 한 해 동안 맡은 사진강의 이야기를 갈무리한 《오동명의 보도사진 강의》(시대의창,2010)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강의는 이 책처럼 대학교에서 교수 한 사람이 학생을 그러모아 조곤조곤 생각을 들려주거나 실기 수업을 하며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다만, “이들은 하나같이 사진 한 장이 글 백 마디보다 힘이 세다고 주장하는데, 제때 제대로 활용했을 때에만 올바른 힘이 됩니다(15쪽).” 하는 말처럼, 사진을 사진답게 바라보면서 사진을 사진다이 다룰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진강의’가 된다고 느껴요.


  오동명 님은 “사진 기술이 뛰어난 사람은 많습니다(18쪽).” 하고 말합니다. 누구라도 이처럼 말해요. 사진기라는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은 많다고 흔히 말해요. 곧, 사진기를 잘 다룰 줄 알거나, 값지거나 값비싼 사진장비를 갖춘다 해서 ‘사진찍기(창작)’를 한다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곧, 대학교 사진학과를 마쳤다든지 나라밖으로 사진공부를 다녀왔다든지 했기에 ‘사진읽기(비평)’를 한다 말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사진기를 쥔 사람 스스로 삶이 있어야 사진을 새로 찍습니다(창작). 사진책과 사진작품을 바라보는 사람 스스로 삶을 누려야 사진을 새로 바라봅니다(비평).


  이리하여, 오동명 님은 “글쓰기 능력은 사진기자가 기본으로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62쪽).” 하고 덧붙입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글을 쓸 줄 알아야 사진을 찍을 줄 알아요. 책을 읽을 줄 알아야 사진을 읽을 줄 알아요. 글은 못 쓰면서 사진만 잘 찍지 않습니다. 책은 읽을 줄 모르면서 사진만 잘 읽지 않습니다.


  달리 얘기하자면, 나 스스로 내 삶이 있어야 ‘내 사진기로 바라보는 내 이웃들 삶이 어떠한가를 느끼면서 읽고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내 사랑을 빛내야 ‘내 사진기로 담는 사진 한 장에 사랑 한 자락 실을’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삶이 없을 때에는 사진을 못 찍고 못 읽습니다. 나 스스로 사랑을 꽃피우지 않을 때에는 사진을 못 이루고 못 나눕니다.


  이제 사진교수 일을 하는 오동명 님은 “더러웠던 건 100달러라는 문명의 관습으로 그들을 현혹하려 했던 알량한 우리였고, 더 미개했던 것 역시 편협하게, 오히려 외양으로만 그들을 단정해 왔던 우리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100쪽).” 하고 뉘우칩니다. 스스로 뉘우칠 줄 아는 까닭은, 스스로 오동명 님 삶을 읽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인을 찍은 사진 대부분이 그럴듯해 보이는 까닭은, 사진가의 촬영 능력보다는 노인의 주름이 전하는 삶의 궤적의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 아쉽게도 노출과 구도 등으로 기계적 멋만 잔뜩 부린 패션사진이 너무 흔합니다. 괴이함을 독특함으로 혼돈하기 때문입니다(109쪽).” 하고 외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오동명 님 스스로 ‘기계자랑’이나 ‘기계멋’을 부리지 않겠다고 외칠 수 있어요. 남들 얘기가 아니라 오동명 님 스스로 ‘할머니 할아버지 주름살 깊이가 들려주는 꿈’이 사진에서 새롭게 피어날 수 있도록 하고프다는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동명 님한테서 사진을 배운 학생들은 무엇을 느끼거나 배웠을까요. “연출을 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연출은 있을 수 없지요. 연출은 연출일 뿐입니다(123쪽).” 하는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무엇을 느끼거나 배웠을까요. 자연스러운 연출이 없기에, 연출은 연출입니다. 왜냐하면, 연출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삶이 아니라, 따로 꾸미는 겉모습이거든요. 자연스럽게 흐르는 삶일 때에는 어떠한 모습이든 ‘자연스럽’고 ‘삶’입니다. 사진 한 장으로 담기는 사람과 사진 한 장으로 적바림하는 사람 모두 ‘자연스럽게 흐르는 삶’일 때에 참으로 아름다이 빛나는 사진열매를 맺을 수 있어요.


  사진책을 읽으며 시집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시를 씁니다.


  나는 오동명 님 사진책을 읽으면서 손세실리아 님 시집을 읽습니다. 나는 우리 집 아이들 시골살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내가 우리 보금자리에서 누리는 사랑을 시로 씁니다.


  좋아하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좋아하는 넋이기에 사진을 찍자고 생각합니다. 좋아하기에 시를 읽습니다. 좋아하는 얼을 북돋우며 시를 즐겁게 쓰자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기쁘게 사진을 누립니다. 겉멋 아닌 즐거움을 맛보며 사진을 누립니다. 스스로 기쁘게 하루를 누립니다. 누군가한테 자랑하려고 보내는 하루가 아닙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며 누리는 하루입니다. 남한테 보여주려는 내 삶이 아니라, 내 꿈과 사랑을 가장 아끼며 보듬는 내 삶입니다.


  “자기 멋에 빠져든 글을 모두 시라고 하지 않듯,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168쪽).” 하는 말처럼, 사진도 글도 삶도 사랑도 겉멋에 빠져들 수 없습니다. 겉치레로 흐를 수 없습니다. 남한테 보여줄 사진이나 글이나 삶이나 사랑은 없습니다. 내가 즐기는 사진이요 글이며 삶이고 사랑입니다.


  사진을 찍고 싶으면 삶을 찾을 노릇입니다. 사진 찍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삶을 누리는 사람이 될 노릇입니다. 오동명 님은 《오동명의 보도사진 강의》를 내놓습니다. 이 작은 책 하나는 사진강의 한 해 발자국이라 할 수 있지만,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니고 싶은 푸름이한테 먼저 맛보기로 보여주는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구태여 대학교 사진학과를 찾아가지 않고 이 책 하나 읽으며 스스로 사진을 배우거나 익히는 길을 찾도록 돕는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진학과뿐 아니라 대학교조차 애써 들어가지 않아도 ‘사진 찍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살며시 보여주는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4345.5.22.불.ㅎㄲㅅㄱ)

 


― 오동명의 보도사진 강의 (오동명 글·사진,시대의창 펴냄,2010.7.1./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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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牛) - 김진선 사진집
김진선 사진 / 사진과예술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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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곁에서 찾는 사랑스러운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96] 김진선, 《소(牛)》(사진예술사,2008)

 


  마당 한쪽에서 스스로 자라는 풀꽃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뒤꼍에 마련한 뒷밭에 첫째 아이와 함께 물을 주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다른 분들은 봄날 어떤 봄꽃을 구경하고 사진으로 담는지 모르나, 나는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들꽃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새로 돋는 풀이 어여쁩니다. 자운영 꽃빛이 예쁘다 느낍니다. 모과나무에 맺힌 앙증맞은 꽃송이를 쓰다듬습니다. 감잎 푸른 사이사이 막 몽글려고 하는 몽우리를 봅니다. 뽕나무는 오디가 맺히는데, 오디가 되기 앞서 피어난 꽃송이는 뽕잎 빛깔하고 같습니다. 느티꽃은 느티잎하고 꽃빛이 같은데, 뽕꽃도 뽕잎하고 꽃빛이 같습니다.


  봄꽃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많습니다. 봄날 들판과 멧자락을 오르내리며 사진을 빛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봄빛을 사진책으로 살며시 옮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봄날 봄빛을 사진으로 옮기는 이들 가운데 ‘사진쟁이 보금자리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봄내음’을 누리면서 사진길을 걷는 이는 드문 듯합니다. 여름날 여름빛을 사진으로 옮기든, 가을날 가을빛을 사진으로 옮기든, 겨울날 겨울빛을 사진으로 옮기든, 스스로 뿌리내려 살아가는 터에서 사진빛을 나누는 이는 퍽 드물지 싶어요.

 

 


  가난한 사람들 찾아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터에서 마주하는 이웃 삶자락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가멸찬 사람들 찾아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더라도, 또 내로라하는 이들 찾아 인물사진을 찍더라도, 언제나 내 삶터에서 가장 가까운 데에서 살아가는 이웃을 마주하며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꼭 어느 호텔 어느 전시장에서 마련하는 잔치마당에서 패션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패션쇼라는 이름이 붙는 곳에서 모델을 앞세워야 패션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도 패션사진은 태어납니다. 내 작은 집 작은 방에서도 패션사진은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생각할 때에 내 사진이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는 결을 살피거나 살릴 때에 내 사진이 아름답습니다.


  사진책 《소(牛)》(사진예술사,2008)는 강원도지사로 일하던 김진선 님이 내놓았습니다. 김진선 님은 “사진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제시해야 하는 사진, 누구보다 자신있어 그 내밀한 진실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내 사진은 어떤 것일까? 그런 고심의 시간, 살아오면서 체험하고 인식한 내 기억을 모두 꺼내놓고 샅샅이 뒤져 보았다(4쪽)” 하고 스스로 묻습니다. 스스로 물은 다음 “그러고 보면 강원도 사람, 소, 사진이 갖는 기본적 공통점이 ‘정직’이다. 강원도지사가 소(牛)를 테마로 한 사진작품을 내놓는 이유다(5쪽).” 하고 스스로 밝힙니다.

 

 


  소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으나 아주 없지 않습니다. 소를 사진으로 찍되, 일소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훨씬 적습니다. 이와 함께, 싸움소를 사진으로 찍는다든지, 농장에서 풀을 뜯다가 고기로 팔릴 소를 찍는다든지, 좁은 우리에서 사료만 먹으며 젖을 내놓다가 머잖아 고기로 팔릴 소를 찍는다든지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어쩌면, 고기소 될 소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남녘땅 곳곳을 돌며 일소를 사진으로 담는 분은 있다 할 테지만, 남녘땅 곳곳 소우리를 찾아다니며 가엾게 갇힌 소를 사진으로 담는 분은 몇 사람쯤 될까요. 젖을 내놓다가는 고기소가 될 젖소를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담는 분은 몇 사람쯤 있을까요.


  김진선 님이 내놓은 사진책 《소(牛)》에는 ‘들판에서 풀을 뜯다가 고기소로 팔릴 날을 기다리는 소’가 나옵니다. 김진선 님은 소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고, 소 멀찍이 떨어진 채 바라보기도 합니다. 소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는 사진이 있고, 소가 어떤 생각을 품는지 가늠하는 듯한 사진이 있습니다. 쉬는 소가 있고 움직이는 소가 있습니다. 무리지은 소가 있고 외따로 떨어진 소가 있습니다.

 

 


  사진책 《소(牛)》를 빚은 김진선 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었을까요. 사진책 《소(牛)》는 우리들한테 무슨 삶을 보여줄 만한 이야기밭이 될까요. 김진선 님이 어린 나날 보던 소와 사진책에 담긴 소는 서로 얼마나 떨어진 채 ‘같은’ 소라는 목숨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까요. 사진책으로 소를 마주하는 오늘날 사람들은 밥상에 오르는 소고기와 사진책에 나타나는 소를 어떻게 맞대어 생각을 북돋울까요.


  김진선 님은 소 아닌 돼지를 사진으로 찍으면서도 당신 꿈을 보여줄 수 있나요. 돼지 아닌 메뚜기를 찍거나, 메뚜기 아닌 개구리를 찍거나, 개구리 아닌 뱀을 찍거나, 뱀 아닌 갈매기를 찍거나, 갈매기 아닌 오징어를 찍는다면, 이때에도 당신 사랑을 보여줄 수 있나요.


  사람들은 마른오징어도 먹고 물오징어도 먹습니다. 오징어 잡는 고깃배가 바다를 넘실넘실 가로지릅니다. 누군가는 오징어잡이배에 올라타고는 오징어 낚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겠지요. 누군가는 바닷속으로 풍덩 들어가서 바닷속 헤엄치는 오징어 모습을 사진으로 옮기겠지요.


  양식장에서 넙치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을까요. 갯벌에서 조개 캐는 할머니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을까요. 굴을 까고 조개를 까는 아줌마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을까요. 스쳐 지나가는 사진이 아니라, 곁에서 오래오래 지켜보거나 함께 일하면서 찍는 사진으로 빚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이들 모습을 예쁘게 찍자면, 아이들하고 함께 살아가며 예쁘게 웃는 어른으로 지내면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난하게 살아가는 힘겨운 나날을 찍어 온누리에 알리자면, 나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하고 한 마을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며 힘겨운 나날을 몸소 겪으면 됩니다. 사진책 《소(牛)》를 내놓은 김진선 님은 ‘들판에서 풀을 뜯다가 고기소로 팔릴 날을 기다리는 소’를 바라보면서 어떤 넋이었고 어떤 얼이었으며 어떤 빛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소를 바라볼 때에 왜 ‘올바르다(정직)’고 여길까요. 흙에 기대어 흙을 일구는 사람이 아주 드문 오늘날에도 소는 옛날처럼 ‘올바르다’고 여길 짐승으로 삼을 만할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 소는 참말 무엇이고, 김진선 님이 사진으로 아로새긴 소에 서린 이야기와 꿈은 이 땅에서 참말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까 궁금합니다.


  해거름에 둥지로 돌아오는 처마 밑 제비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제비들은 새벽 일찍 깨어나 노래하며 먹이를 찾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지런히 먹이를 얻어 새끼들을 먹입니다. 시나브로 새끼들은 어른이 되겠지요. 어른이 된 제비는 날갯짓을 바지런히 익혀 가을날 무르익는 들판을 바라보며 더 따스한 곳으로 날아가겠지요. 그러고는 이듬해 따사로운 새봄에 옛 둥지로 찾아오겠지요. 문득,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처마 밑 제비를 사진으로 담으며 이야기 엮는 사진쟁이는 한국에 몇 사람쯤 될까 궁금합니다. (4345.5.21.달.ㅎㄲㅅㄱ)

 


― 소(牛) (김진선 사진,사진예술사 펴냄,2008.5.28./3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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