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아이들 0100 갤러리 20
앨런 세이 글 그림, 엄혜숙 옮김 / 마루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이 그림책은 아쉽게도 품절이로군요. 저는 지난 5월에 경기 파주 책도시에 갔을 때에 장만했습니다. 미처 사진을 찍어 놓지 못해, 겉그림 사진만 끝자락에 붙입니다 ㅠ.ㅜ

 


 어디에서나 해맑은 얼굴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67] 앨런 세이, 《빛의 아이들》(마루벌,2007)

 


  지난날,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서른여섯 해를 모질게 괴롭히고 짓밟았습니다. 이 같은 이야기는 아직 백 해가 지나지 않았고, 역사책에든 사진책에든 잘 아로새겨졌으니 퍽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꽤 알려진 이야기라 하더라도 안 받아들이는 사람이 퍽 많아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런저런 식민지 이야기를 옳게 살피지 못하는 어른이 무척 많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지난날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괴롭힌 이는 ‘일본’이 아니라 ‘일본 권력자’입니다. ‘일본에서 총칼을 휘두르는 권력을 거머쥔 사람’이 한국땅 ‘여느 사람들’을 괴롭히고 짓밟았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권력자는 한국 권력자를 괴롭히거나 짓밟지 않았습니다. 한국땅에서 권력이나 지식이나 돈을 누리거나 거머쥐던 이들은 한국땅이 식민지가 되든 아니든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이나 지식이나 돈을 누리거나 거머쥐었어요.


.. 그는 땅 밑 터널을 흐르는 물에서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희망이 사라져 갈 즈음 희미한 빛이 보였습니다. 빛은 천천히 밝아졌습니다 ..  (8쪽)


  한미자유무역협정 때문에 나라가 무너진다고 하는 목소리가 한때 드높‘았’습니다. 이제 이러한 목소리는 거의 가라앉거나 안 들리거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제 한국사람들은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는지’를 들여다봅니다. 아마, 대통령으로 아무개가 뽑히고 나면,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에 눈길을 돌릴 테지요. 새 논쟁거리를 찾고 새 기삿거리를 밝히며 새 논란거리를 만들겠지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기보다 참 마땅한 셈인데, 한국사람한테 자유무역협정은 살갗으로 안 와닿는 이야기요 마음으로 안 스며드는 이야기입니다. 삶과 동떨어진 이론이거나 논쟁이거나 지식이거나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 스스로 흙을 일구어 밥과 푸성귀를 얻는다 할 때에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다른 눈길로 바라볼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스스로 흙과 벗삼으며 바람과 햇살과 나무와 풀과 꽃을 가까이 사귄다 할 때에는 4대강사업을 다른 눈길로 들여다볼밖에 없습니다.


  몸으로 느낄 때에 비로소 알아차리는 삶입니다. 마음으로 읽을 때에 바야흐로 깨닫는 삶입니다.


.. 근처에 흙으로 지은 건물 몇 채가 무너진 채 있었습니다. ‘인디언 보호 구역인가 보다.’ 두 사람이 흙벽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  (12쪽)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무언가 빼앗거나 거머쥐려던 일본 권력자는 일본땅에서도 힘이 없고 돈이 없으며 이름이 없는 사람들을 짓누르면서 무언가 빼앗거나 거머쥐었습니다. 일본땅에서 일본 여느 사람들을 짓누르며 돈이든 힘이든 이름이든 빼앗거나 거머쥐며 콧노래를 부르다 보니, 자꾸자꾸 검은 생각이 커지며 더 큰 돈과 힘과 이름을 바라고, 시나브로 이웃나라로 쳐들어갈 생각을 키웁니다. 한국땅이 식민지가 된 뒤에도 힘과 돈과 이름을 드날리는 사람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한국사람이건 일본사람이건 그리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두머리로 있든 힘과 돈과 이름을 누리기만 하면 좋다고 여깁니다.


  나쁜 길을 걷는 사람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나쁜 길을 걷습니다. 착한 길을 걷는 사람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착한 길을 걷습니다. 시골에 살기에 더 슬기롭지 않고, 도시에 살아서 더 바보스럽지 않습니다. 도시에 사니까 더 악착스럽지 않고, 시골에 사는 만큼 더 너그럽지 않아요. 늘 누리는 보금자리를 둘러싸고 어떤 이웃 목숨이 있는가를 대수로이 살펴야 하는 한편, 내 마음자리에 어떤 이야기가 깃드는가를 찬찬히 살펴야 합니다.


  먼먼 지난날을 돌이킵니다. 역사책에 안 적힌 이 나라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를 떠올립니다. 이를테면, 조선왕조실록이라 하는 역사책은 있는데, ‘조선 백성 이야기’라는 역사책은 없습니다. 고려사라 하는 역사책은 있지만, ‘고려 백성 이야기’라는 역사책은 없어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라 하는 역사책은 있어도, 고구려·백제·신라·가야·부여·발해 무렵 여느 흙일꾼 이야기를 다룬 책은 없어요.


  옛조선 이야기는 단군신화라 하는데, 정작 이무렵 여느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어떤 집을 지으며 어떤 옷을 깁고 어떤 삶을 누렸는가 하는 이야기는 대물림되지 않습니다. 옛조선이라는 나라가 서기 앞서, 이 땅 곳곳에서 조용하면서 착하게 살아가던 여느 사람들 꿈과 사랑과 빛과 믿음을 담은 이야기는 도무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 그들은 나무판자로 지은 건물이 늘어선 곳에 이르렀습니다. 창문은 전부 캄캄했습니다. “수용소예요.”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  (18쪽)


  누가 ‘있는’ 사람일까요. 누가 ‘없는’ 사람일까요.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임금님이나 신하나 사대부나 군인이나 모리배라 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일까요. 나를 낳은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를 낳은 …… 여느 흙일꾼 어머니와 아버지는 ‘없는’ 사람일까요.


  우리 집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해맑은 얼굴입니다. 내가 우리 집 아이들만 한 나이였을 적에도 언제나 해맑은 얼굴이었습니다. 내 어버이가 우리 집 아이들만 한 나이였을 때에도 늘 해맑은 얼굴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해맑은 얼굴이요 해맑은 목소리입니다. 아이들은 어떤 곳에서 어떤 어버이와 살아가더라도 해맑은 손길이요 해맑은 꿈길입니다.


  그래요, 식민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도 식민지 백성이던 여느 시골마을 흙일꾼 아이들 또한 해맑은 얼굴이었을 테지요. 식민지 조선을 짓누르던 일본 제국주의라 하지만, 일본에서도 시골마을 흙일꾼 집안 아이들은 해맑은 얼굴이었겠지요.


.. 아이들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꺼번에 작은 입을 열었습니다. “집으로 보내 줘요!”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어디선가 매서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모두 몸을 돌렸습니다. 아이들 뒤에 있는, 어두운 하늘 속의 감시탑 두 채가 빛을 내뿜었습니다 ..  (22쪽)


  앨런 세이 님이 빚은 그림책 《빛의 아이들》(마루벌,2007)을 읽습니다. 빛을 빼앗긴 아이들은 수용소에 갇힌 채 빛을 그리워 한답니다. 수용소에 갇힌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아이들은 수용소에 갇힐 만큼 무섭거나 무시무시할까요.


  제국주의 일본은 전쟁을 끔찍하게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미국에서 살던 일본 ‘여느 아이’들을 샅샅이 훑듯 사로잡아 외딴 두메에 수용소를 짓고 가두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미국땅을 미국 토박이한테서 빼앗으며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들었듯, 전쟁을 일으킨 사람은 일본에서 제국주의를 부르짖고 권력을 휘두르던 어른이지만, 애꿎게 ‘여느 아이’들이 웃음을 빼앗긴 채 시무룩하고 파리한 얼굴이 되어 수용소에서 옴쭉달싹하지 못합니다.


  한국 역사책에는 고구려가 땅을 무척 넓혔다고 적힙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먼먼 옛날, 고구려라는 나라가 칼을 휘두르며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땅을 넓힐 적, 고구려한테 땅을 빼앗기고 마을을 빼앗기며 식구들을 빼앗긴 ‘여느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여느 사람들네 여느 아이들 얼굴은 어떤 빛이었을까요.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서로 툭탁거리는 동안, 이들 나라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다가 군인으로 끌려가 이웃 ‘흙일꾼 아저씨’를 칼로 베어 죽여야 하던 ‘여느 어른들’네 ‘여느 아이들’은 어떤 마음 어떤 얼굴 어떤 빛이었을까요.


  아이들은 웃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빛나는 목소리로 노래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환한 얼굴로 누구하고라도 포근하게 얼싸안으며 예쁘게 놀고 싶습니다. (4345.6.5.불.ㅎㄲㅅㄱ)

 


― 빛의 아이들 (앨런 세이 글·그림,엄혜숙 옮김,마루벌 펴냄,2007.5.7./11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은 땅, 맑은 희망
이대성 지음 / 램블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삶으로 배운 사진 사랑하기
 [찾아 읽는 사진책 97] 이대성, 《검은 땅, 맑은 희망》(Rambler,2011)

 


  내 삶만큼 나한테 좋은 길잡이가 없다고 느낍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내 한길만큼 나한테 좋은 스승이 없다고 느낍니다. 하루하루 살을 부비는 살붙이들과 누리는 보금자리만큼 나한테 좋은 꿈벗이 없다고 느낍니다. 나는 스스로 내 삶을 일구면서, 나는 스스로 내 삶을 가르치고 이끌며 배웁니다.


  밥상에 놓인 밥그릇을 보며 생각합니다. 밥알을 하나하나 씹으며 생각합니다. 우리 집 깃든 마을을 돌아보며 생각합니다. 내 보금자리 살림살이를 살피며 생각합니다. 밥을 차리는 손길을 느끼며 배웁니다. 옷가지를 빨래하는 손길을 돌아보며 배웁니다. 아이들과 얼크러지는 하루를 되새기며 배웁니다. 내가 아이들한테 가르치는 말 한 마디는 곧 나 스스로를 가르치는 말 한 마디입니다. 내가 아이들과 디디는 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내 몸으로 살아내는 하루는 내 일기이자 교과서이고 성경입니다. 내 마음으로 피우는 생각은 내 꿈이자 사랑이고 믿음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까닭이라 한다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내 몸을 찬찬히 읽는 눈길을 익힐 때에 도와주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머리에 어떤 지식을 집어넣는다든지, 점수따기 어떤 시험을 치러 더 높다는 학교에 들어가는 정보를 쌓으려고 학교에 다닌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한국말로 풀어내자면 “배우는 터”를 뜻하는 ‘학교(學校)’입니다. 가만히 돌이키면, 한국사람으로 한국말을 써야 마땅한 만큼, 우리 한국사람은 ‘학교’라는 낱말이 아니라 “배우는 터”를 가리킬 가장 뚜렷하고 가장 맑으며 가장 사랑스러운 낱말을 스스로 빚어 스스로 누려야 알맞으리라 봅니다.

 

 


  누군가한테는 “배우는 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사랑하는 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이야기 나누는 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놀이하는 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꿈을 이루는 터”입니다.


  그런데 어느 어른 한 사람이 어느 아이 한 사람을 어느 한길로 이끌 수 없어요. 어른은 아이를 이끌지 못해요. 어른은 어른 삶을 아이한테 보여줄 뿐이에요. 아이는 둘레 어른들 삶을 바라보면서 아이 나름대로 어느 삶길을 스스로 찾아 걸어갈 때에 스스로 가장 좋으며 기쁘고 아름다울까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며 무언가를 배운다 한다면, ‘사회를 이루는 어른 한 사람’이 ‘사회를 이루며 스스로 빚은 생각’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아이인 나도 함께 받아들일 만한’가를 살피고, 함께 받아들일 만하지 않다면 ‘아이 스스로 어떤 길을 새롭게 찾아야 하는’가를 곱씹는 한편, 함께 받아들일 만하더라도 ‘아이 깜냥껏 어떻게 삭힐 때에 빛날’ 수 있는지를 찾습니다. 교과서나 교재로는 아무 가르침도 배움도 이루어지지 않아요. 오직 삶으로, 삶을 일구는 마음으로, 삶을 아끼는 몸뚱이로 가르치고 배워요.


  이대성 님이 빚은 다큐사진책 《검은 땅, 맑은 희망》(Rambler,2011)을 읽습니다. 이대성 님은 “(대)학교 수업이 사진 결과물에 대한 토론 중심의 수업이다 보니,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과 노하우 등을 배울 기회가 별로 없었다(108쪽).”고 말합니다. 그래서 “1999년 가을, 결국 난 휴학을 하고 안산에 있는 공단에서 일하며 6개월가량 돈을 모았다. 그리고 무작정 루마니아로 떠났다. 따분하고 지루한 학교에서의 수업이 나의 마음엔 도무지 들어오지 않는데다, 나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318쪽).”고 덧붙입니다.

 

 


  이대성 님은 스스로 삶길을 찾습니다. 학교에서 지식으로 배우는 사진이 아니라, 이대성 님 스스로 삶으로 느끼며 깨달을 사진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책에는 “무작정 루마니아로 떠났”다고 밝히지만, 무턱대고 떠난 먼길은 아니라고 느껴요. 이대성 님 마음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루마니아로 떠났겠지요. 이대성 님 마음속에서 ‘난 어떤 사진을 누리며 어떤 삶을 빛내고 싶을까’ 하는 물음을 풀어내고 싶어 공장에서 일하고 머나먼 길을 나섰을 테지요.


  이대성 님으로서는 “나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실길이라기보다는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은 마실길이었으리라 느낍니다. 스스로 사랑할 때라야 ‘사진으로 이루는 빛을 삶으로 누리는 꿈’을 찾아 마실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사랑하기에 비로소 ‘내 마음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주 가볍고 홀가분한 손길로 사진기 단추를 누를 수 있어요.


  다큐사진책 《검은 땅, 맑은 희망》은 책이름 그대로 검은 땅에서 사진을 찍는 이대성 님 스스로 맑구나 싶은 빛을 느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검은 땅에서 마주하는 ‘지구별 이웃’을 바라봅니다. “길지 않은 길임에도 짐을 내려놓고 숨 돌리기를 몇 번씩 하고 나서야 분화구 정상에 다다르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들을 따라다니며 촬영을 해도 신경 쓸 여력도 없는지 묵묵히 발걸음만 옮긴다(53쪽).” 하는 말처럼 지구별 이웃은 군말도 덧말도 없이 스스로 삶을 일굽니다. 이대성 님은 곁에서 군말도 덧말도 붙이지 않고 사진을 찍습니다. “아이들은 가장 좋은 모델입니다. 천진난만한 그들이지만, 삶의 소박함과 깊이를 맑은 눈망울에 새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자연 역시 소박한 일상과 만나, 더없이 소중한 풍경을 만듭니다(83쪽).” 하는 말처럼 지구별 이웃이 누리는 삶은 환합니다. 검은 땅에서 살아가든 하얀 땅에서 살아가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가 대수롭습니다.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가 서로 어떤 마음이 되어 서로 아끼거나 사랑하느냐가 대수롭습니다.

 

 


  이리하여, 이대성 님은 검은 땅에서 마주한 지구별 이웃 얼굴을 살피다가는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온 길을 말해 주는 책과 같습니다(91쪽).” 하고 깨닫습니다. 덧붙여, “기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그곳에 남겨져 있는 삶과 이야기이다(198쪽).”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교사는 결국 삶입니다(240쪽).” 하고 배웁니다.


  이대성 님 스스로 배우고 싶던 이야기는 바로 ‘가장 좋은 교사는 삶’이라는 대목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대목을 배우되, 지식 아닌 온몸으로 배우고 싶었기에, 마음이 부르는 소리에 따라 대학교를 그만두고 머나먼 지구별 마실을 떠나며 사진을 찍는다고 느낍니다.


  찬찬히 살피면, 사진기를 손에 쥔 이들 가운데 아직 못 깨닫는 이가 참 많습니다. 사진으로 담을 이야기는 ‘사진기를 손에 쥔 이들 마음속’에 다 있어요. 무엇을 찍고 어떻게 찍으며 왜 찍어야 하느냐는 까닭과 이야기와 실타래와 궁금함과 설렘과 반짝임 모두 우리 가슴속에 있어요. 스스로 깨워야 합니다. 스스로 깨달으며 깨워야 합니다.

 


  사진강의나 사진학교에서 일깨울 수 없습니다. 사진강의나 사진학교는 ‘이런 삶도 있다고 보여줄’ 뿐입니다. 곧, 사진강의를 하는 이나 사진학교를 여는 이 또한 굳이 더 이끌지 않아요. ‘이런 삶도 있다고 보여주’면서, 사진기를 손에 쥔 이 스스로 사진길을 걸어가기를 바랄 뿐이에요.


  “주위를 둘러보니 할퀴어진 땅들이 그 규모를 짐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넓게 펼쳐져 있다. 마주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데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이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며 사진을 찍으란다. 나중에는 옆에 있는 동료까지 잡아끌며 카메라 앞에 세운다. 나에 대한 그들의 호기심을 카메라에 담고 다시 마을로 내려오는 통근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광부들이 사는 마을에 내려주고는 휑하니 먼지를 날리며 떠나갔다(279쪽).” 하는 대목을 읽으며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이 같은 이야기는 이대성 님이 마음속 소리를 들으며 먼먼 사진마실을 다니기에 비로소 온몸으로 느끼며 사진과 글로 적바림할 수 있습니다. 온몸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사진으로 못 찍고 글로 못 씁니다. 스스로 부대낄 때에 비로소 사진으로 찍고 글로 씁니다. 스스로 겪어야 깨닫습니다. 스스로 살아내야 알아차립니다. 스스로 사랑해야 마음이 움직입니다.


  밤하늘 별은 밤하늘 별을 보고 싶어 밤하늘에 별이 보이는 터로 몸소 찾아가 살아가는 사람한테만 밝은 빛을 베풉니다. 밤하늘 별은 도시에서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어떠한 빛도 드리우지 않습니다. 밤하늘 달도 이와 같아요. 낮하늘 해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햇볕을 느끼고 싶다면 햇볕이 있는 데로 가야 합니다. 소나기를 느끼고 싶으면 소나기 내릴 만한 뭉게구름이 피어나는 데로 가야 합니다. 무지개를 보고 싶다면서 서울 한복판 높직한 아파트 창가에 턱을 괴고 먼 하늘 바라본대서 볼 수 없어요. 무지개가 있는 데로 삶터를 옮겨야지요.

 


  무지개를 본 적 없는 사람은 무지개를 말하지 못하지만, 무지개를 그림으로도 못 그리고, 무지개 같은 결과 무늬가 살아숨쉬는 이야기를 사진이나 글로도 적바림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바라보면서도 사랑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랑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내 아이가 되든 이웃 아이가 되든, 숱한 아이들 바라보며 사랑을 사진으로 빚습니다. 사랑을 빚는 사람이라면 살구 한 알을 바라보더라도 사랑스레 찍습니다. 사랑을 찾는 사람이라면 나뭇가지 하나에 붙은 나뭇잎들 푸른 무늬에서도 사랑을 찾아 따사로이 사진을 찍습니다.


  삶으로 배운 사진을 사랑합니다. 삶이 아닌 지식으로 배운 사진은 머리속에 갖가지 정보조각으로 쌓입니다. 삶으로 배운 사진은 어여쁜 사랑씨앗 되어 온누리에 차곡차곡 퍼집니다. 삶이 아닌 지식으로 물려받는 사진은 숱한 이론과 실기를 낳을 뿐, 이야기 담긴 꿈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4345.6.5.불.ㅎㄲㅅㄱ)

 


― 검은 땅, 맑은 희망 (이대성 글·사진,Rambler 펴냄,2011.12.28./14000원)

 

 

 

 

이 사진책이 뜻밖에 잘 알려지지 못하고

잘 읽히지도 팔리지도 못하는 듯한데,

참 잘 만든 예쁜 책인 만큼

이제부터라도 널리 사랑받으며

알뜰히 읽힐 수 있기를 빌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3
콘노 키타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자연과 가까운 아이들
 [만화책 즐겨읽기 154] 콘노 키타,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3)》

 


  자연과 가까운 아이들하고 잘 놀며 잘 지내자면, 어른 스스로 자연하고 가까이 지내면 됩니다. 자연을 닮은 아이들하고 사이좋게 놀며 사이좋게 지내자면, 어른부터 자연을 닮은 삶으로 고칠 수 있으면 됩니다.


  자연과 가까운 아이들한테서 자연을 떼어내니, 아이들은 아이다움을 잃습니다. 오늘날 아이다움을 잃은 아이들은 모두 자연하고 멀리 떨어지고 만 슬픈 얼굴입니다. 자연과 가까이 지내고 싶으나, 아이들 어버이가 아이들을 자연하고 동떨어진 데에서 먹고 자고 입고 배우게 해요. 자연을 닮은 아이들한테서 자연스러움을 벗겨 물질과 문명과 교육과 제도권이라는 옷을 입혀요.


  어른들은 아이한테서 자연을 벗기며 무엇을 얻을까요. 어른들은 아이를 자연과 동떨어지게 하면서 무엇을 누릴까요. 어른들은 아이들 모두 어른하고 똑같이 자연을 모르거나 잊거나 짓밟거나 망가뜨리는 모습으로 크도록 내몰지 않나요.


- “반짝반짝 은하수다.” “응? 그 노래 말이구나. 대나무잎 살랑살랑.” (9쪽)
- “별님 손톱이다! 고마워, 리카코 고모.” “별 말씀을.” “아빠, 아빠, 예쁘지?” “사야 손톱은 아무것도 안 발라도 예쁘단다.” (10쪽)
- “비가 내리면 지상에서 별이 보이지 않긴 하지만, 구름 위의 사람들에겐 아무 문제도 없지 않을까?” (21쪽)
- “하늘은 점점 높아지고, 밤은 점점 길어지고, 까맣고 커다란 주머니 같은 밤하늘에 별빛이 초롱초롱 콕콕 박혀서, 가슴이 두근두근해.” (144∼145쪽)

 

 


  대통령 한 사람이 밀어붙일 수 없는 ‘4대강 사업’과 같은 토목공사입니다. 공무원 몇몇이 밀어붙일 수 없는 ‘국립공원 터널·케이블카 사업’과 같은 토목공사입니다. 재벌회사 몇몇이 밀어붙일 수 없는 ‘원자력발전소·화력발전소 새로 짓기’와 같은 토목공사입니다.


  토목공사를 꾀하는 어른 누구나 ‘해맑던 갓난쟁이’와 ‘싱그럽던 어린이’ 나날을 지났어요. 전쟁무기 만드는 데에 나라돈 펑펑 쓰는 이들 또한 티없던 갓난쟁이 나날을 지나 푸르던 어린이 나날을 보냈어요. 그런데 이들 모두 어른이 되어 토목공사와 전쟁질에 휩쓸립니다.


  이웃을 괴롭히던 어른도 갓난쟁이로 태어났습니다. 동무를 짓밟고 올라서려는 어른도 착한 어린이로 지냈습니다. 돈에 눈이 먼 사람들도, 좁은 골목에서 빵빵거리며 자동차 모는 사람들도, 입시지옥 굴레를 더 깊게 만드는 사람들도, 모두 사랑스럽던 아기였고 귀엽던 어린이였어요.


  그렇지만, 이들 어른 모두 슬픈 낯빛으로 살아갑니다. 이들 어른 모두 고단한 얼굴빛으로 살아갑니다. 왜, 무엇 때문에, 어떤 뜻을 이루려고 슬픈 낯빛이 되고 고단한 얼굴빛이 되나요. 어른이 되어 낳은 아이들을 먹여살리려고? 식구들을 입히고 재우며 학교에 보내려고?


- “와아, 사야는 빠른 년생이라서 키는 작지만, 굉장히 야무지구나! 역시 하루카 동생이야!” “나도 깜짝 놀랐어.” (19쪽)
- “그래, 엄마 눈에는 아직 한참 어린애로 보일지도 모르지. 여자아이는 성장이 빨라서, 그만큼 더 소중하게 아껴 줘야 하는데 말이야.” “빠르지 않아. 사야는 우리 반에서 제일 작은걸.” “여자아이의 몸은 비밀을 숨기고 있단다. 지금은 남자아이들과 다르지 않아도, 조금씩 조금씩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앞으로 소중한 변화의 계절이 찾아올 거야.” (50∼51쪽)

 

 


  해 지고 어두운 저녁, 아이 둘을 하나하나 재웁니다. 둘 모두 더 놀려 애쓰고, 둘 모두 졸린 눈을 비비며 더 놀려 힘쓰다가는, 아버지가 자전거수레에 태워 밤자전거 마실을 하니, 먼저 둘째가 스르르 잠들고, 이윽고 첫재가 사르르 잠듭니다. 둘째는 집에 닿아 어머니가 품에 안고 자리에 눕혀 새근새근 재우려 할 때에 깹니다. 첫째는 아버지가 품에 안고 자리에 눕혀도 깨지 않습니다. 둘째는 밤자전거 마실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지 두 시간 만에 비로소 잠듭니다. 한참 놀아 주고 한참 노래 불러 준 끝에 천천히 잠듭니다. 그래, 아이들은 실컷 놀지 않고서야 잠들지 않는가 봐요.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놀고픈 만큼 개운하게 놀아야 신나게 잠들는지 몰라요.


  아이들은 자연이니까요. 아이들은 자연과 같으니까요. 흐드러지게 놀고 흐드러지게 꽃피우는 아이들이라 할 테니까요. 해맑게 푸른 잎 틔우고 해맑게 꿈을 나누는 아이들이라 할 테니까요.


  모든 자연은 새벽에 기지개를 켜고 아침에 일어나며 낮에 신나게 움직이다가 저녁에 시나브로 잠듭니다. 모든 자연은 밝은 낮에 밝은 기운 뿜고, 어두운 밤에 새근새근 잠자며 쉽니다.


- “엄마랑 아빠도 너무너무 사이가 좋아서 신이 심술을 부린 걸까.” (24쪽)
-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깜짝 놀랄 만큼 많은 걸 깨닫게 돼요. 난 사소한 일에도 짜증내고 화내고 언성을 높이는, 아직 부족하고 못난 엄마지만, 마음은 언제까지나 중력을 거스르고 위로 위로 뻗어 나가고 싶어요.” (58쪽)

 


  오늘은 마루문을 닫지 않고 모기문만 닫습니다. 마루문을 안 닫으니 시골집 둘레 무논마다 개구리 노랫소리 집안으로 한가득 들어옵니다. 마루에 서면 마당에 있을 적이나 논가에 설 적이나 엇비슷하게 개구리 노랫소리 우렁찹니다. 마루에서 방으로 한 걸음 들어서면 노랫소리는 살짝 잦아드는가 싶지만, 그래도 되게 크게 들려요.


  옆지기 코 자고, 두 아이 새근새근 자는 집에서 홀로 깨어 개구리 노랫소리를 즐깁니다. 아니, 나는 멀쩡히 깬 몸으로 개구리 노랫소리를 즐기고, 세 식구는 고단히 잠든 몸으로 개구리 노랫소리를 즐깁니다. 아직 잠들지 않은 내가 듣는 개구리 노랫소리도 좋지만, 깊이 잠든 식구들이 몸으로 받아들일 개구리 노랫소리도 좋으리라 느껴요. 생각해 봐요. 자동차 붕붕 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있을까요. 술 얹힌 사람들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며 잠들 만한가요. 가게에서 튼 기계소리를 들으며 잠들기에 좋은가요.


- “사야, 너한테는 내가 있단다. 부족하지만 여자 선배로서, 리카코 고모는 언제든지 사야 네 편이야. 그러니까, 마음 놓고 쑥쑥 자라렴.” (51∼52쪽)
- “눈을 뗄 수가 없네요.” “네?” “어린아이들은 잠시만 눈을 떼도 변하는 것 같아요.” “네, 어린아이들의 시간은 단위가 다르니까요.” (54쪽)
- “어릴 때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도, 쓸데없는 게 아닐지도 몰라요. 그런 시간도 성장하기 위한 에너지로 필요한 것 아닐까요. 성장이란 굉장해요. 중력을 거스르고 위로 뻗어 가는 거잖아요. 입에 넣는 밥 한 숟가락, 앞으로 내딛는 작은 한 걸음. 모든 것이 성장이라는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어요. 키가 작은 만큼 대지가 가깝고, 키가 작은 만큼 하늘이 멀죠. 어려운 말을 모르는 만큼,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요. 어린아이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짧은 만큼, 시간은 천천히, 소중하게 흘러가는 거예요.” (55∼57쪽)

 

 


  잘 자는 식구들 이불을 여밉니다. 방 온도계는 25도입니다. 한국땅 남녘은 바람도 햇살도 한결 따사로운데, 시골마을 온도계는 그리 높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따로 부채를 안 쓰면서 즐거이 잠을 잡니다. 선풍기이든 에어컨이든 부질없습니다. 우리 시골마을이든 이웃 시골마을이든, 집안에 선풍기나 에어컨 놓은 집을 못 보았어요. 모기그물 치고 문을 열면 아주 시원해요. 외려 썰렁하다 싶어 긴소매를 입거나 두툼한 이불을 덮어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벌써부터 푹푹 찌든 무더위 밤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왜 무더위 밤이 되는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니, 지난 5월 첫머리에 경기도 파주 책도시에 한번 마실을 갔다가 푹푹 쪄서 죽는 줄 알았으니, 어느 만큼 헤아릴 만하기도 합니다. 흙땅 없이, 숲 없이, 나무 없이, 풀 없이, 냇물도 멧자락도 없이,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가득한 도시는 봄밤조차 무더위로 후끈후끈 달아오를밖에 없습니다. 작은 아파트나 살림집이나 가게라도 식힌다며 냉방기를 돌린다지만, 냉방기를 돌리며 바깥으로 내보내는 후끈후끈한 바람은 도시를 더 뜨겁게 달구고 맙니다. 그렇다고 냉방기를 안 쓸 수 없고, 그렇다고 자동차가 안 돌아다닐 수 없으니, 도시는 스스로 굴레에 빠져요. 도시는 스스로 어수선해지고 말아요. 도시는 스스로 죽음수렁과 같은 데가 되고 말아요.


  돌이켜보면, 밤에 별을 올려다볼 수 없는 곳은 사람도 여느 짐승도 푸나무도 목숨다이 살아갈 수 없구나 싶어요. 내 어릴 적 살던 도시이든, 첫째 아이 낳던 도시이든,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냈는지 참 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더위 그 후끈거림 그 땀내음 어떻게 견디었는치 퍽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골버스는 에어컨이 없어도 됩니다. 창문을 열면 시원합니다. 도시버스는 창문을 열지 않을 뿐더러, 아예 창문이 없기도 합니다. 고속도로 달리는 시외버스는 온통 통유리예요. 고속도로를 달리며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쐴 만하지 않으니까 창문을 못 열도록 만들어요. 도시에 있는 건물도 고속버스와 비슷해서, 창문을 활짝 열게끔 짓지 않기 일쑤예요. 햇살도 바람도 마음껏 스며들 수 없어요. 회사도 집도 학교도 가게도, 도시에서는 자연하고 너무나 동떨어져요.


- ‘그래,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바통을 이어서 달리면, 누구 한 사람이 늦어도 다른 사람이 금방 커버할 수 있구나.’ (116쪽)
- “우리가 어렸을 땐 거의 매일 밖에서 뛰어놀곤 했는데. 세상에 이렇게 위험이 가득하다는 것도, 어린아이가 이렇게 가냘프고 약한 존재라는 것도 몰랐어.” (138쪽)


  콘노 키타 님 만화책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대원씨아이,2012) 셋째 권을 읽습니다. 오직 사랑을 받아먹으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홀가분하며 기쁘고 예쁜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화책을 읽으며 즐겁습니다. 아직 한글을 모르는 첫째 아이가 머잖아 한글을 익히고 나면 혼자서 예쁘게 읽을 만한 만화책이 되리라 생각하며 참말 즐겁게 읽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아먹을 수 있을 때에 씩씩하게 자라듯, 나는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책을 읽으며 씩씩하게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아이들은 자연과 가깝기에 자연을 마음껏 누리는 보금자리에서 예쁘게 자라듯, 나는 아이들이랑 자연을 곱게 누리는 보금자리에서 자연스러운 넋으로 사랑을 가꾸도록 돌보면서 빙긋 웃습니다. 아이들 웃음은 어버이한테 스며들고, 어버이 웃음은 아이들한테 젖어듭니다. 자연과 가까운 아이들은 자연을 살가이 보듬고, 자연과 가까운 아이들을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자연을 사랑으로 맞아들이며 고운 꿈을 빛냅니다. (4345.6.4.달.ㅎㄲㅅㄱ)

 


―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콘노 키타 글·그림,김진수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12.6.15./5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친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 않은가 - 세상이 쓸쓸하고 가난할 때 빛나는 그들에게, 삶을 물었다
이승환 지음, 최수연 외 사진 / 이가서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밥 한 그릇 함께 나눌 이웃
 [책읽기 삶읽기 105] 이승환·최수연, 《거친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 않은가》(이가서,2009)

 


  《거친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 않은가》(이가서,2009)라는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돈 버는 걱정’에 목매달며 살아간다 하지만, 막상 스스로 ‘돈 버는 걱정’에 목매달고픈 사람은 없구나 하고. 사람들 누구나 ‘돈 버는 걱정’이 아니라 ‘즐겁게 누리고픈 삶’을 생각하는구나 하고.


.. 아지매들에게는 유명한 사진가보다는 생선 한 마리 더 파는 것이 중요하다. 그에게는 알은체하지 않고 ‘니 맘대로 찍어라’며 가만히 놔두는 것이 고맙다 ..  (12쪽/최민식)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합니다. 왜 돈을 벌려고 할까요? 아주 마땅한 얘기지만, 사람들은 돈을 쓰려고 돈을 법니다. 돈을 쓸 생각이 없다면 돈을 벌지 않아요. 이를테면, 어느 재벌회사 우두머리라 하더라도 돈을 쓰려고 돈을 벌지, 그저 쟁이기만 하려고 돈을 벌지 않아요. 1억을 쓰고 싶으니 1억을 벌고, 100억을 쓰고 싶으니 100억을 벌어요.


  곰곰이 따지면, 시골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도 돈을 법니다. 돈을 써야 할 곳이 있으니 돈을 법니다. 돈 버는 걱정 때문에 돈을 벌지는 않아요. 이모저모 돈을 써야 할 곳이 있다고 여겨 돈을 법니다.


  그런데, 돈 쓸 곳을 여러모로 많이 만들지 않으니까 굳이 돈을 많이 벌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좋은 나날을 더 기쁘게 여기기에, 돈을 벌려고 애쓸 품보다 하루하루 마음껏 누릴 품에 더 마음을 기울입니다. 홀가분하게 누릴 삶이 좋지, 돈을 버느라 보낼 나날이 좋을 수 없어요.


  곧, 나는 나대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나대로 내가 가장 좋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스스로 가장 좋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갑니다.


.. 이철수는 겨울에만 판화 일을 한다. 봄·여름·가을에는 들일만 한다. 겨울 동안 꼬박 판화에 매달려 100여 점을 만든다. 1년에 100점이라는 이야기에 ‘기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 이철수는 ‘밥 먹고 하는 일이 이건데 도대체 그대들은 뭐 하는가’라고 되묻는다 ..  (30쪽/이철수)


  우리 식구는 자동차 없이 살아갑니다. 우리 식구는 자전거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식구는 자전거에 앞서 두 다리로 살아갑니다. 두 다리로 걷다가, 버스를 얻어타거나 택시를 잡아탑니다. 때로는 기차를 타 보고, 두 번쯤 비행기도 타 보았으며, 이렁저렁 배도 타 봅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자동차 없으면 퍽 힘들겠다고 여겨 버릇하지만, 젊은이도 늙은이도 꼭 자동차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잘 헤아릴 수 있으면 가장 즐겁습니다.


  곧, 무엇이 있어야 좋은 삶이 아닙니다. 무엇이 없으면 나쁜 삶이 아닙니다. 즐길 줄 아는 삶이 좋은 삶입니다. 누릴 줄 아는 삶이 예쁜 삶입니다. 생각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 때에 빛나는 삶입니다.


  더 있으니 좋을 수 없습니다. 덜 있어서 나쁠 수 없습니다. 하나를 누리든 둘을 누리든, 하나도 못 누리든 둘은 엄두도 못 내든 스스로 홀가분하게 생각하며 사랑할 때에 아름다운 삶입니다.


  자동차를 얘기했지만, 멀리멀리 자주 나다녀야 한다면 자동차가 있으면 홀가분하겠지요. 그런데, 혼자 나다닌다 하면 자전거로 넉넉해요. 둘이나 셋이 나다닐 때에는 자전거에 수레를 달거나 저마다 자전거를 몰면 돼요. 꼭 빨리 움직여야 하지 않고, 어느 때에 맞추어야 하면 더 일찍 길을 나서면 됩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택시를 불러 짐을 싣고 달리면 돼요.


.. 먹을 것 아껴서 필름과 인화지 사는 처지를 빤히 알기에 극구 사양했으나, ‘손님 대접할 정도는 버니 걱정 말라’며 검지로 헛총을 놓고는 낡은 르망을 몰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는 따뜻한 삐딱이였다 ..  (45쪽/김영갑)


  밥 한 그릇 나누는 삶이란 남한테 밥 한 그릇을 내어주는 삶이 아닙니다. 나부터 내 몸을 살찌우는 밥 한 그릇이면 넉넉하다고 느끼는 삶입니다. 나 스스로 밥 한 그릇으로 내 삶이 넉넉하기에 내 이웃과 동무한테 밥 한 그릇 나눌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밥 한 그릇으로 내 삶이 넉넉하다고 여기지 못하면, 내 이웃이나 동무한테 밥 한 그릇 내밀지 못해요.


  내 마음속에 사랑이 예쁘게 피어날 때에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두루 사랑을 나누어 줘요. 내 마음속에 사랑이 피어나지 못한다면 내 이웃은커녕 바로 나 스스로를 사랑으로 돌보지 못해요.


  그러니까, 《거친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 않은가》에 나오는 이 땅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밥 한 그릇 넉넉히 누릴 줄 알면서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라면 《거친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 않은가》 같은 책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름값이나 가방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이러한 책에 실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참 얄궂다 해야 할 텐데, 오늘날 한국땅 사람들은 《거친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 않은가》 같은 책을 사다 읽으면서, 막상 이녁 삶은 ‘밥 한 그릇으로 넉넉히 살찌울 사랑’이 되도록 건사하지 않습니다. 삶을 살찌우는 길은 오직 사랑인 줄 머리로 안다 하지만, 몸으로 느끼지 않고,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아요.


..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시인들은 다 위대하며, 심지어 문학의 열병을 앓고 있는 문청들에게는 시인은 곧 하느님이다 ..  (117쪽/김용택)


  도시사람들이 아파트를 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파트를 버리고, 아파트를 빌리거나 장만하느라 들인 돈으로 ‘마당과 텃밭 있는 작은 집’을 마련해 오붓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호젓하게 햇볕을 누리는 마당이 집마다 있으면 좋겠습니다. 즐겁게 햇살을 머금으며 돌볼 텃밭이 집마다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참말 예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사람들 누구나 예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좁은 틈바구니에서 시멘트랑 아스팔트에 둘러싸이지 말고, 숲과 그늘과 나무와 흙과 햇살과 바람과 냇물이 시원한 터전에서 어깨동무할 수 있기를 빕니다.


.. “늘 내 운동의 마지막은 땅과 생명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예전에는 남녀평등, 노사평등을 외쳤으나 이제는 사람과 자연의 평등을 외쳐 나가야지. 이것도 지난날의 치열한 운동 못지않게 중요한 운동이거든. 이러한 소박하고 잔잔한 움직임이 계속 번져 나가 큰 물결이 됐으면 해요.” ..  (243쪽/조화순)


  도시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4대강 반대’를 외칩니다. 그런데, 스스로 살아내지 않는 이야기를 목청 높이 외친다 한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4대강 반대’를 하자면, 참말 이 같은 정책을 밀어붙이는 정치집권자 정책하고 맞설 만한 삶을 꾸려야 마땅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4대강 반대’를 하고 싶으면, ‘4대강 언저리에 작은 집을 얻어 작은 시골살림 누리면’ 돼요. ‘4대강 둘레 작은 땅뙈기를 장만해서 작은 살림 즐기면’ 돼요.


  시골 땅값은 도시 집값하고 견주면 매우 싸요. 시골에서 내 밭과 땅을 누릴 때에는 먹고 입으며 자는 품은 아주 적어요.


  사람들 스스로 누릴 줄 알고, 가꿀 줄 알며, 사랑할 줄 알면 돼요. 사람들 스스로 누리지 못하고 가꾸지 못하는데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정치집권자는 ‘4대강 사업’을 밀어붙여요. 사람들이 온통 도시로만 몰려드는데, 아주 마땅히 이런 토목공사를 밀어붙이겠지요. 사람들은 온통 도시로만 몰려들었으니까, 시골에서 살아가며 참말 온몸 부딪혀 ‘4대강 사업 얼마나 나쁜 줄 알아?’ 하고 따질 사람이 없어요.


  통계나 숫자나 이론이나 비평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오직 내 몸뚱이로 움직이는 삶으로만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어요. 밥 한 그릇을 나누자면, 내 몸을 움직여 밥 한 그릇을 지어야지요. 밥을 하고 밥을 푸고 밥그릇을 내밀어야지요. 머리로만, 입으로만, 말로만 외친다 해서 어느 하나 이룰 수 없어요. 밥 한 그릇 나눌 이웃이 누구요, 밥 한 그릇 내밀 내 모습이 어떠한가를 슬기롭게 살펴야 해요. (4345.6.4.달.ㅎㄲㅅㄱ)


― 거친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 않은가 (이승환 글,최수연·임승수·방상운·장기훈 사진,이가서 펴냄,2009.11.25./12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끼 드롭스 4
우니타 유미 지음, 양수현 옮김 / 애니북스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즐거이 살아가는 넋
 [만화책 즐겨읽기 152] 우니타 유미, 《토끼 드롭스 (4)》

 


  하루 스물네 시간 갓난쟁이하고 붙어서 보내는 삶을 헤아리자면,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때로는 스스로 아이를 낳지 않더라도 ‘다른 이가 낳은 아이를 맡아서 돌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은 목숨입니다. 사람은 귀염둥이짐승이 아닙니다. 물과 먹이를 차려 놓고 휭 하고 집을 나선 다음 슬그머니 돌아와도 안 죽고 스스로 끼니를 챙겨먹는 집짐승과 같지 않아요.


  갓난쟁이도 아직 많이 어린 아이도 ‘어버이’ 노릇을 할 어른 한 사람이 늘 곁에 붙어야 합니다. 아이가 밥을 먹을 때이든, 아이가 잠을 잘 때이든, 아이가 똥오줌을 눌 때이든, 아이가 뛰놀 때이든, 아이가 노래할 때이든, 아이가 옷을 갈아입을 때이든, 곁에서 어버이 노릇 하는 어른 한 사람 스물네 시간 꼼짝없이 붙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 “여기 희한하네. 처음 왔는데도 할아버지 집 같아.” “대체 무슨 일이야? 일요일에 (아이) 책가방까지 다 챙겨 오고!” “아, 미안.” (17쪽)
- “레이나를 생각해 봐도, 그리고 내 생활력을 봐도, 그걸 실행에 옮기는 건 절대 만만하지 않을 테니까. 결국에는 그냥 지금 이대로가 그나마 나은 것 같아. 난 취직하자마자 바로 결혼했으니까, 젊을 때는 좋은 아내가 되는 것만 생각하고 살았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레이나를 지킬 방법도 그것밖에. 아, 그래도 오늘 아무것도 안 하고 느긋하게 지냈더니 기분이 좀 나아졌어.” (62∼63쪽)

 

 


  대통령이라고 다르지 않아요. 나이 일흔 넘은 할아버지라고 다르지 않아요. 사람들한테서 독재자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아요. 이들 모두 갓난쟁이였을 적, 당신 어머니나 아버지한테서 깜찍하게 사랑받으며 살았어요. 당신 어버이가 하루 스물네 시간 꼬박 붙어서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놀리고 하면서 사랑으로 돌보았어요.


  오늘날 도시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아줌마’를 참 나쁘거나 얄궂은 모습으로 그립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몽땅 도시에 몰려들어 살아가기에, 이 도시 물질문명 사회가 엉터리로 그리는 ‘아줌마’ 모습에 쉬 길듭니다.


  시골에서 지내는 아줌마와 도시에서 지내는 아줌마는 아주 달라요. 게다가 ‘도시 아줌마’라 하더라도 이 아줌마들은 ‘누군가한테 어머니’입니다. 이 아줌마들은 내 어머니일 수 있고, 내 이웃이나 동무 어머님일 수 있어요. 모두 누군가 ‘어른이 된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고 돌본 어버이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이 대목을 놓치거나 잊거나 젖힙니다. 아줌마라 하는 자리는 아무나 들어설 수 없는 줄 살피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 아줌마라는 자리에 서는 여자가 맡는 몫을 ‘아저씨’ 자리에 서는 남자가 옳고 사랑스레 나누어 맡지 않을 뿐더러, 아줌마와 아저씨가 낳아 사랑으로 돌본 딸아들 또한 스스로 즐거이 나누어 맡지 않아요.


- “말은 이렇게 해도, 남편도 날 안 봐 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보람이 없어. 누구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면서 사는 건지.” (36쪽)
- “나는 항상, 결혼하고 나서부터 계속, 내 마음을 닫고서 살아왔단 말야! 가끔 내 맘대로 하면 안 돼? 그 사람들(시집 식구) 조금은 괴롭히면 안 돼?” (40쪽)

 

 


  집안일을 반씩 갈라 맡는대서 남녀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남자가 설거지와 청소와 빨래쯤 한대서 여남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집 등기나 은행계좌를 반씩 가르거나 공동명의를 한대서 절대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등은 금긋기나 편가르기는 아니거든요. 평등은 돈이나 재산이나 보배나 숫자로 따지지 않거든요.


  오직 사랑으로만 살피는 평등입니다. 오직 사랑일 때에만 이야기할 수 있는 평화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빛내는 자유이고 민주입니다.


  자유나 민주는 참말 자유나 민주가 되려면 반드시 ‘사랑’을 품어야 합니다. 사랑 없이 펼치려는 자유나 민주는 껍데기 자유나 겉치레 민주입니다.


  흔히들 ‘언론 자유’를 외치는데, 언론 자유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글 한 줄을 쓰거나 기사 한 꼭지 쓰거나 사진 한 장 찍으며 스스로 사랑을 담지 않을’ 때에는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리거나 해코지하는 언론이 되고 맙니다. 이럴 때에는 ‘언론 자유’가 아닌 ‘언론 폭력’이 돼요.


  정당 이름에 ‘진보’라는 낱말을 넣어야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정당 이름에 ‘민주’라는 낱말을 넣기에 민주가 이루어지던가요? 아닙니다. 진보도 민주도 스스로 ‘사랑’을 나누거나 펼치거나 빚으려는 매무새가 아닐 때에는 으레 껍데기일 뿐이에요. 무엇을 하려는 진보일까요. 무엇이 되려는 민주일까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뽑는 자리에서만 진보나 민주라 한다면, 얼마나 부질없거나 덧없을까요. 삶에서 사랑을 누리지 않는 사람들이 이루려는 진보나 민주가 참으로 진보나 민주다울 수 있을까요. 삶에서 사랑스러운 글과 말을 빚지 않는 사람들이 언론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 ‘당연한 일이지만, 보호자의 나이며 직업, 출신이 전부 제각각이고, 할아버지 할머니에 큰 형제들도, 어린애들도 있고, 취직했을 땐 세상이 넓어진 기분이 들었는데, 어떻게 보면 여기(학교)가 더 넓을지도 몰라.’ (85쪽)
- ‘아아 그런가. 나도 마찬가지인가. 작년 겨울에 린도 감기에 걸리긴 했지만, 하루이틀 사이에 나아서 회사도 그렇게 오래 쉴 필요 없었다. 하지만 가령 그게 독감이었다면? 회사는 어떻게 했을까? 게다가 나도 옮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끔찍! 솔직히 작년에는 둘이서 사는 데 익숙해지기 바빠서 그런 것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지.’ (96∼97쪽)

 

 


  즐거이 살아가는 넋을 생각합니다. 즐거이 살아가자면 이때에도 반드시 사랑을 품어야 합니다. 사랑 없는 삶이라면 즐겁지 않습니다. 사랑 있는 삶이라야 즐겁습니다. 곧, 남녀평등이든 여남평등이든 무슨무슨 평등이든 평화이든, 바로 사랑을 담아야 즐겁고 오롯하며 빛납니다.


  남녘과 북녘은 서로서로 끔찍한 전쟁무기를 비무장지대에 잔뜩 갖다 놓고 두 나라 젊은이를 왕창 몰아 놓습니다. 전쟁무기를 서로한테 들이대면서 평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더구나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총알을 재고 머리통을 겨누면서 ‘나는 평화를 바라요’ 하고 말한대서 평화이지 않아요. 총알도 총부리도 모두 녹여 호미나 낫이나 가래나 쟁기로 바꾸어 즐겁게 흙을 일구어야 비로소 평화예요. 전투기도 잠수함도 구축함도 전차도 모조리 없애야 바야흐로 평화예요. 군대도 군인도 모두 사라져야 시나브로 평화예요.


  그런데, 전쟁무기가 사라졌어도 학력이 남으면 평화란 찾아오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제도권교육을 밀어붙이면 평화는 깃들지 못합니다. 교과서로 아이들을 옭아매고 입시지옥으로 아이들을 괴롭힌다면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시골 흙일꾼이 되자며 입시지옥에서 다투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도시에서 돈을 더 많이 벌고, 아파트 평수 더 넓은 집을 차지하며, 더 비싸고 커다랗고 새까만 자가용을 몰고 싶어 입시지옥에서 머리 터지게 다툽니다. 아이들은 오로지 돈 때문에 입시지옥 싸움을 벌이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런 불구덩이에서 헤매도록 밀어붙입니다.


- “다이키치 씨, 이럴 때는 허둥거리면 안 돼요. 어른부터 침착해야죠. 괜찮다고 말해 줘야죠.” “글쎄, 그게요, 린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거라.” “그렇지 않아요. 할 수 있어요! 문화제 다녀오는 길에 린은 다이키치 씨한테 계속 매달려 있었어요. 아이는 고열이 나기 전에 남한테 달라붙거나 어리광을 부리거든요.” (116∼117쪽)
- ‘린의 체력은 열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소진됐다. 왜 린에게 이런 일이. 왜 내가 아닌 걸까? 나라면 이런 감기는 아무것도 아닌데. 이 안타까움은 뭘까. 젠장 젠장 젠장.’ (120∼121쪽)

 


  우니타 유미 님 만화책 《토끼 드롭스》(애니북스,2010) 넷째 권을 읽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다이키치’는 여자친구도 애인도 없이 살아가는 ‘아저씨’입니다. 짝꿍이 될 ‘아줌마’가 없으면서도 아이를 맡아 돌봅니다. 아이를 맡아 돌보는 아저씨 삶을 일구면서 회사 일거리를 바꾸었습니다. 살아가는 흐름도 바꾸고, 집안살림도 바꿉니다. 사귀는 동무가 바뀌고, 스스로 찾는 이야기를 바꿉니다. 낳은 아이가 아니지만 스스로 사랑으로 맡아 돌보는 아이입니다. 아저씨인 다이키치는 스스로 아저씨 삶을 좋아합니다. 아저씨로 살아가며 둘레 아줌마가 어떤 사람인가를 찬찬히 헤아리며 깨닫습니다. 아저씨이자 아버지로 당신 삶과 꿈과 사랑을 맑게 빛냅니다.


- “아이랑 있는 시간도 자기 시간이니까.” “남의 부모라고 딱히 특별한 건 없지 않을까.” “나가서 둘러보면, 사방에 엄마 아빠들인걸.” “아아, 그래. 그렇구나!” (204∼205쪽)


  책을 덮으며 곰곰이 돌이킵니다. 나는 두 아이와 살아가는 아버지 자리에 있기는 있는데, 막상 아버지 자리를 얼마나 잘 헤아리는지 스스로 궁금합니다. 아버지 노릇, 아버지 삶, 아버지 사랑, 아버지 꿈, 아버지 이야기, …… 들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집 처마에서 함께 살아가는 제비들은 바지런히 새끼들을 먹이며 돌봅니다. 이제 날갯짓을 가르치며 서로서로 파란하늘 마음껏 휘저으리라 봅니다.


  내가 아이들한테 물려줄 날갯짓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스스로 누리는 날갯짓은 어떤 사랑일까요. 내가 즐거이 빛내면서 아이와 함께 어여삐 돌볼 삶은 어떤 그림일까요. 즐거이 살아가는 넋을 나부터 어떤 무늬와 결로 아로새기는가를 천천히 되새깁니다. (4345.6.4.달.ㅎㄲㅅㄱ)

 


― 토끼 드롭스 4 (우니타 유미 글·그림,양수현 옮김,애니북스 펴냄,2010.7.16./8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