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아이들 0100 갤러리 20
앨런 세이 글 그림, 엄혜숙 옮김 / 마루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이 그림책은 아쉽게도 품절이로군요. 저는 지난 5월에 경기 파주 책도시에 갔을 때에 장만했습니다. 미처 사진을 찍어 놓지 못해, 겉그림 사진만 끝자락에 붙입니다 ㅠ.ㅜ

 


 어디에서나 해맑은 얼굴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67] 앨런 세이, 《빛의 아이들》(마루벌,2007)

 


  지난날,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서른여섯 해를 모질게 괴롭히고 짓밟았습니다. 이 같은 이야기는 아직 백 해가 지나지 않았고, 역사책에든 사진책에든 잘 아로새겨졌으니 퍽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꽤 알려진 이야기라 하더라도 안 받아들이는 사람이 퍽 많아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런저런 식민지 이야기를 옳게 살피지 못하는 어른이 무척 많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지난날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괴롭힌 이는 ‘일본’이 아니라 ‘일본 권력자’입니다. ‘일본에서 총칼을 휘두르는 권력을 거머쥔 사람’이 한국땅 ‘여느 사람들’을 괴롭히고 짓밟았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권력자는 한국 권력자를 괴롭히거나 짓밟지 않았습니다. 한국땅에서 권력이나 지식이나 돈을 누리거나 거머쥐던 이들은 한국땅이 식민지가 되든 아니든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이나 지식이나 돈을 누리거나 거머쥐었어요.


.. 그는 땅 밑 터널을 흐르는 물에서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희망이 사라져 갈 즈음 희미한 빛이 보였습니다. 빛은 천천히 밝아졌습니다 ..  (8쪽)


  한미자유무역협정 때문에 나라가 무너진다고 하는 목소리가 한때 드높‘았’습니다. 이제 이러한 목소리는 거의 가라앉거나 안 들리거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제 한국사람들은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는지’를 들여다봅니다. 아마, 대통령으로 아무개가 뽑히고 나면,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에 눈길을 돌릴 테지요. 새 논쟁거리를 찾고 새 기삿거리를 밝히며 새 논란거리를 만들겠지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기보다 참 마땅한 셈인데, 한국사람한테 자유무역협정은 살갗으로 안 와닿는 이야기요 마음으로 안 스며드는 이야기입니다. 삶과 동떨어진 이론이거나 논쟁이거나 지식이거나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 스스로 흙을 일구어 밥과 푸성귀를 얻는다 할 때에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다른 눈길로 바라볼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스스로 흙과 벗삼으며 바람과 햇살과 나무와 풀과 꽃을 가까이 사귄다 할 때에는 4대강사업을 다른 눈길로 들여다볼밖에 없습니다.


  몸으로 느낄 때에 비로소 알아차리는 삶입니다. 마음으로 읽을 때에 바야흐로 깨닫는 삶입니다.


.. 근처에 흙으로 지은 건물 몇 채가 무너진 채 있었습니다. ‘인디언 보호 구역인가 보다.’ 두 사람이 흙벽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  (12쪽)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무언가 빼앗거나 거머쥐려던 일본 권력자는 일본땅에서도 힘이 없고 돈이 없으며 이름이 없는 사람들을 짓누르면서 무언가 빼앗거나 거머쥐었습니다. 일본땅에서 일본 여느 사람들을 짓누르며 돈이든 힘이든 이름이든 빼앗거나 거머쥐며 콧노래를 부르다 보니, 자꾸자꾸 검은 생각이 커지며 더 큰 돈과 힘과 이름을 바라고, 시나브로 이웃나라로 쳐들어갈 생각을 키웁니다. 한국땅이 식민지가 된 뒤에도 힘과 돈과 이름을 드날리는 사람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한국사람이건 일본사람이건 그리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두머리로 있든 힘과 돈과 이름을 누리기만 하면 좋다고 여깁니다.


  나쁜 길을 걷는 사람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나쁜 길을 걷습니다. 착한 길을 걷는 사람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착한 길을 걷습니다. 시골에 살기에 더 슬기롭지 않고, 도시에 살아서 더 바보스럽지 않습니다. 도시에 사니까 더 악착스럽지 않고, 시골에 사는 만큼 더 너그럽지 않아요. 늘 누리는 보금자리를 둘러싸고 어떤 이웃 목숨이 있는가를 대수로이 살펴야 하는 한편, 내 마음자리에 어떤 이야기가 깃드는가를 찬찬히 살펴야 합니다.


  먼먼 지난날을 돌이킵니다. 역사책에 안 적힌 이 나라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를 떠올립니다. 이를테면, 조선왕조실록이라 하는 역사책은 있는데, ‘조선 백성 이야기’라는 역사책은 없습니다. 고려사라 하는 역사책은 있지만, ‘고려 백성 이야기’라는 역사책은 없어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라 하는 역사책은 있어도, 고구려·백제·신라·가야·부여·발해 무렵 여느 흙일꾼 이야기를 다룬 책은 없어요.


  옛조선 이야기는 단군신화라 하는데, 정작 이무렵 여느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어떤 집을 지으며 어떤 옷을 깁고 어떤 삶을 누렸는가 하는 이야기는 대물림되지 않습니다. 옛조선이라는 나라가 서기 앞서, 이 땅 곳곳에서 조용하면서 착하게 살아가던 여느 사람들 꿈과 사랑과 빛과 믿음을 담은 이야기는 도무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 그들은 나무판자로 지은 건물이 늘어선 곳에 이르렀습니다. 창문은 전부 캄캄했습니다. “수용소예요.”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  (18쪽)


  누가 ‘있는’ 사람일까요. 누가 ‘없는’ 사람일까요.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임금님이나 신하나 사대부나 군인이나 모리배라 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일까요. 나를 낳은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를 낳은 …… 여느 흙일꾼 어머니와 아버지는 ‘없는’ 사람일까요.


  우리 집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해맑은 얼굴입니다. 내가 우리 집 아이들만 한 나이였을 적에도 언제나 해맑은 얼굴이었습니다. 내 어버이가 우리 집 아이들만 한 나이였을 때에도 늘 해맑은 얼굴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해맑은 얼굴이요 해맑은 목소리입니다. 아이들은 어떤 곳에서 어떤 어버이와 살아가더라도 해맑은 손길이요 해맑은 꿈길입니다.


  그래요, 식민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도 식민지 백성이던 여느 시골마을 흙일꾼 아이들 또한 해맑은 얼굴이었을 테지요. 식민지 조선을 짓누르던 일본 제국주의라 하지만, 일본에서도 시골마을 흙일꾼 집안 아이들은 해맑은 얼굴이었겠지요.


.. 아이들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꺼번에 작은 입을 열었습니다. “집으로 보내 줘요!”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어디선가 매서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모두 몸을 돌렸습니다. 아이들 뒤에 있는, 어두운 하늘 속의 감시탑 두 채가 빛을 내뿜었습니다 ..  (22쪽)


  앨런 세이 님이 빚은 그림책 《빛의 아이들》(마루벌,2007)을 읽습니다. 빛을 빼앗긴 아이들은 수용소에 갇힌 채 빛을 그리워 한답니다. 수용소에 갇힌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아이들은 수용소에 갇힐 만큼 무섭거나 무시무시할까요.


  제국주의 일본은 전쟁을 끔찍하게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미국에서 살던 일본 ‘여느 아이’들을 샅샅이 훑듯 사로잡아 외딴 두메에 수용소를 짓고 가두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미국땅을 미국 토박이한테서 빼앗으며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들었듯, 전쟁을 일으킨 사람은 일본에서 제국주의를 부르짖고 권력을 휘두르던 어른이지만, 애꿎게 ‘여느 아이’들이 웃음을 빼앗긴 채 시무룩하고 파리한 얼굴이 되어 수용소에서 옴쭉달싹하지 못합니다.


  한국 역사책에는 고구려가 땅을 무척 넓혔다고 적힙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먼먼 옛날, 고구려라는 나라가 칼을 휘두르며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땅을 넓힐 적, 고구려한테 땅을 빼앗기고 마을을 빼앗기며 식구들을 빼앗긴 ‘여느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여느 사람들네 여느 아이들 얼굴은 어떤 빛이었을까요.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서로 툭탁거리는 동안, 이들 나라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다가 군인으로 끌려가 이웃 ‘흙일꾼 아저씨’를 칼로 베어 죽여야 하던 ‘여느 어른들’네 ‘여느 아이들’은 어떤 마음 어떤 얼굴 어떤 빛이었을까요.


  아이들은 웃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빛나는 목소리로 노래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환한 얼굴로 누구하고라도 포근하게 얼싸안으며 예쁘게 놀고 싶습니다. (4345.6.5.불.ㅎㄲㅅㄱ)

 


― 빛의 아이들 (앨런 세이 글·그림,엄혜숙 옮김,마루벌 펴냄,2007.5.7./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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