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땅, 맑은 희망
이대성 지음 / 램블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삶으로 배운 사진 사랑하기
 [찾아 읽는 사진책 97] 이대성, 《검은 땅, 맑은 희망》(Rambler,2011)

 


  내 삶만큼 나한테 좋은 길잡이가 없다고 느낍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내 한길만큼 나한테 좋은 스승이 없다고 느낍니다. 하루하루 살을 부비는 살붙이들과 누리는 보금자리만큼 나한테 좋은 꿈벗이 없다고 느낍니다. 나는 스스로 내 삶을 일구면서, 나는 스스로 내 삶을 가르치고 이끌며 배웁니다.


  밥상에 놓인 밥그릇을 보며 생각합니다. 밥알을 하나하나 씹으며 생각합니다. 우리 집 깃든 마을을 돌아보며 생각합니다. 내 보금자리 살림살이를 살피며 생각합니다. 밥을 차리는 손길을 느끼며 배웁니다. 옷가지를 빨래하는 손길을 돌아보며 배웁니다. 아이들과 얼크러지는 하루를 되새기며 배웁니다. 내가 아이들한테 가르치는 말 한 마디는 곧 나 스스로를 가르치는 말 한 마디입니다. 내가 아이들과 디디는 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내 몸으로 살아내는 하루는 내 일기이자 교과서이고 성경입니다. 내 마음으로 피우는 생각은 내 꿈이자 사랑이고 믿음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까닭이라 한다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내 몸을 찬찬히 읽는 눈길을 익힐 때에 도와주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머리에 어떤 지식을 집어넣는다든지, 점수따기 어떤 시험을 치러 더 높다는 학교에 들어가는 정보를 쌓으려고 학교에 다닌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한국말로 풀어내자면 “배우는 터”를 뜻하는 ‘학교(學校)’입니다. 가만히 돌이키면, 한국사람으로 한국말을 써야 마땅한 만큼, 우리 한국사람은 ‘학교’라는 낱말이 아니라 “배우는 터”를 가리킬 가장 뚜렷하고 가장 맑으며 가장 사랑스러운 낱말을 스스로 빚어 스스로 누려야 알맞으리라 봅니다.

 

 


  누군가한테는 “배우는 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사랑하는 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이야기 나누는 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놀이하는 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꿈을 이루는 터”입니다.


  그런데 어느 어른 한 사람이 어느 아이 한 사람을 어느 한길로 이끌 수 없어요. 어른은 아이를 이끌지 못해요. 어른은 어른 삶을 아이한테 보여줄 뿐이에요. 아이는 둘레 어른들 삶을 바라보면서 아이 나름대로 어느 삶길을 스스로 찾아 걸어갈 때에 스스로 가장 좋으며 기쁘고 아름다울까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며 무언가를 배운다 한다면, ‘사회를 이루는 어른 한 사람’이 ‘사회를 이루며 스스로 빚은 생각’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아이인 나도 함께 받아들일 만한’가를 살피고, 함께 받아들일 만하지 않다면 ‘아이 스스로 어떤 길을 새롭게 찾아야 하는’가를 곱씹는 한편, 함께 받아들일 만하더라도 ‘아이 깜냥껏 어떻게 삭힐 때에 빛날’ 수 있는지를 찾습니다. 교과서나 교재로는 아무 가르침도 배움도 이루어지지 않아요. 오직 삶으로, 삶을 일구는 마음으로, 삶을 아끼는 몸뚱이로 가르치고 배워요.


  이대성 님이 빚은 다큐사진책 《검은 땅, 맑은 희망》(Rambler,2011)을 읽습니다. 이대성 님은 “(대)학교 수업이 사진 결과물에 대한 토론 중심의 수업이다 보니,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과 노하우 등을 배울 기회가 별로 없었다(108쪽).”고 말합니다. 그래서 “1999년 가을, 결국 난 휴학을 하고 안산에 있는 공단에서 일하며 6개월가량 돈을 모았다. 그리고 무작정 루마니아로 떠났다. 따분하고 지루한 학교에서의 수업이 나의 마음엔 도무지 들어오지 않는데다, 나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318쪽).”고 덧붙입니다.

 

 


  이대성 님은 스스로 삶길을 찾습니다. 학교에서 지식으로 배우는 사진이 아니라, 이대성 님 스스로 삶으로 느끼며 깨달을 사진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책에는 “무작정 루마니아로 떠났”다고 밝히지만, 무턱대고 떠난 먼길은 아니라고 느껴요. 이대성 님 마음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루마니아로 떠났겠지요. 이대성 님 마음속에서 ‘난 어떤 사진을 누리며 어떤 삶을 빛내고 싶을까’ 하는 물음을 풀어내고 싶어 공장에서 일하고 머나먼 길을 나섰을 테지요.


  이대성 님으로서는 “나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실길이라기보다는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은 마실길이었으리라 느낍니다. 스스로 사랑할 때라야 ‘사진으로 이루는 빛을 삶으로 누리는 꿈’을 찾아 마실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사랑하기에 비로소 ‘내 마음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주 가볍고 홀가분한 손길로 사진기 단추를 누를 수 있어요.


  다큐사진책 《검은 땅, 맑은 희망》은 책이름 그대로 검은 땅에서 사진을 찍는 이대성 님 스스로 맑구나 싶은 빛을 느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검은 땅에서 마주하는 ‘지구별 이웃’을 바라봅니다. “길지 않은 길임에도 짐을 내려놓고 숨 돌리기를 몇 번씩 하고 나서야 분화구 정상에 다다르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들을 따라다니며 촬영을 해도 신경 쓸 여력도 없는지 묵묵히 발걸음만 옮긴다(53쪽).” 하는 말처럼 지구별 이웃은 군말도 덧말도 없이 스스로 삶을 일굽니다. 이대성 님은 곁에서 군말도 덧말도 붙이지 않고 사진을 찍습니다. “아이들은 가장 좋은 모델입니다. 천진난만한 그들이지만, 삶의 소박함과 깊이를 맑은 눈망울에 새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자연 역시 소박한 일상과 만나, 더없이 소중한 풍경을 만듭니다(83쪽).” 하는 말처럼 지구별 이웃이 누리는 삶은 환합니다. 검은 땅에서 살아가든 하얀 땅에서 살아가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가 대수롭습니다.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가 서로 어떤 마음이 되어 서로 아끼거나 사랑하느냐가 대수롭습니다.

 

 


  이리하여, 이대성 님은 검은 땅에서 마주한 지구별 이웃 얼굴을 살피다가는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온 길을 말해 주는 책과 같습니다(91쪽).” 하고 깨닫습니다. 덧붙여, “기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그곳에 남겨져 있는 삶과 이야기이다(198쪽).”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교사는 결국 삶입니다(240쪽).” 하고 배웁니다.


  이대성 님 스스로 배우고 싶던 이야기는 바로 ‘가장 좋은 교사는 삶’이라는 대목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대목을 배우되, 지식 아닌 온몸으로 배우고 싶었기에, 마음이 부르는 소리에 따라 대학교를 그만두고 머나먼 지구별 마실을 떠나며 사진을 찍는다고 느낍니다.


  찬찬히 살피면, 사진기를 손에 쥔 이들 가운데 아직 못 깨닫는 이가 참 많습니다. 사진으로 담을 이야기는 ‘사진기를 손에 쥔 이들 마음속’에 다 있어요. 무엇을 찍고 어떻게 찍으며 왜 찍어야 하느냐는 까닭과 이야기와 실타래와 궁금함과 설렘과 반짝임 모두 우리 가슴속에 있어요. 스스로 깨워야 합니다. 스스로 깨달으며 깨워야 합니다.

 


  사진강의나 사진학교에서 일깨울 수 없습니다. 사진강의나 사진학교는 ‘이런 삶도 있다고 보여줄’ 뿐입니다. 곧, 사진강의를 하는 이나 사진학교를 여는 이 또한 굳이 더 이끌지 않아요. ‘이런 삶도 있다고 보여주’면서, 사진기를 손에 쥔 이 스스로 사진길을 걸어가기를 바랄 뿐이에요.


  “주위를 둘러보니 할퀴어진 땅들이 그 규모를 짐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넓게 펼쳐져 있다. 마주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데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이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며 사진을 찍으란다. 나중에는 옆에 있는 동료까지 잡아끌며 카메라 앞에 세운다. 나에 대한 그들의 호기심을 카메라에 담고 다시 마을로 내려오는 통근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광부들이 사는 마을에 내려주고는 휑하니 먼지를 날리며 떠나갔다(279쪽).” 하는 대목을 읽으며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이 같은 이야기는 이대성 님이 마음속 소리를 들으며 먼먼 사진마실을 다니기에 비로소 온몸으로 느끼며 사진과 글로 적바림할 수 있습니다. 온몸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사진으로 못 찍고 글로 못 씁니다. 스스로 부대낄 때에 비로소 사진으로 찍고 글로 씁니다. 스스로 겪어야 깨닫습니다. 스스로 살아내야 알아차립니다. 스스로 사랑해야 마음이 움직입니다.


  밤하늘 별은 밤하늘 별을 보고 싶어 밤하늘에 별이 보이는 터로 몸소 찾아가 살아가는 사람한테만 밝은 빛을 베풉니다. 밤하늘 별은 도시에서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어떠한 빛도 드리우지 않습니다. 밤하늘 달도 이와 같아요. 낮하늘 해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햇볕을 느끼고 싶다면 햇볕이 있는 데로 가야 합니다. 소나기를 느끼고 싶으면 소나기 내릴 만한 뭉게구름이 피어나는 데로 가야 합니다. 무지개를 보고 싶다면서 서울 한복판 높직한 아파트 창가에 턱을 괴고 먼 하늘 바라본대서 볼 수 없어요. 무지개가 있는 데로 삶터를 옮겨야지요.

 


  무지개를 본 적 없는 사람은 무지개를 말하지 못하지만, 무지개를 그림으로도 못 그리고, 무지개 같은 결과 무늬가 살아숨쉬는 이야기를 사진이나 글로도 적바림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바라보면서도 사랑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랑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내 아이가 되든 이웃 아이가 되든, 숱한 아이들 바라보며 사랑을 사진으로 빚습니다. 사랑을 빚는 사람이라면 살구 한 알을 바라보더라도 사랑스레 찍습니다. 사랑을 찾는 사람이라면 나뭇가지 하나에 붙은 나뭇잎들 푸른 무늬에서도 사랑을 찾아 따사로이 사진을 찍습니다.


  삶으로 배운 사진을 사랑합니다. 삶이 아닌 지식으로 배운 사진은 머리속에 갖가지 정보조각으로 쌓입니다. 삶으로 배운 사진은 어여쁜 사랑씨앗 되어 온누리에 차곡차곡 퍼집니다. 삶이 아닌 지식으로 물려받는 사진은 숱한 이론과 실기를 낳을 뿐, 이야기 담긴 꿈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4345.6.5.불.ㅎㄲㅅㄱ)

 


― 검은 땅, 맑은 희망 (이대성 글·사진,Rambler 펴냄,2011.12.28./14000원)

 

 

 

 

이 사진책이 뜻밖에 잘 알려지지 못하고

잘 읽히지도 팔리지도 못하는 듯한데,

참 잘 만든 예쁜 책인 만큼

이제부터라도 널리 사랑받으며

알뜰히 읽힐 수 있기를 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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