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 시인선 82
김정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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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3



비바람에 새를 부르는 나무

― 다시 시작하는 나비

 김정한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89.11.20.



  어제 낮부터 비바람이 드세게 몰아칩니다. 큰나무도 줄기가 휘청휘청 흔들릴 만큼 바람이 불면서 빗줄기가 굵습니다. 이런 비바람을 느끼며 마당에 서서 가만히 구름과 하늘을 살펴보는데, 온 마을 참새가 우리 집으로 모여듭니다. 이 참새들이 왜 우리 집으로 모여드는가 하고 궁금해서 지켜봅니다. 참새들은 우리 집 마당에 선 커다란 후박나무로 모입니다. 아하, 그렇구나. 그렇습니다.


  참새처럼 조그마한 새는 이 비바람에 날려갈 수 있습니다. 비바람을 그을 수 있을 만한 자리를 찾아보았겠지요. 그런데, 마을에 큰나무가 없어요. 우리 마을 다른 집을 보면, 마당에 나무를 건사하는 집이 없습니다. 마을 밭이나 논에도 나무 한 그루조차 없어요. 가끔 감나무가 한둘 있더라도 가지를 죄 칩니다. 열매만 더 얻으려고 온갖 나무가 다 줄기가 싹둑 잘리고 가지는 앙상하게 끊어집니다.



.. 네 곁에서 / 내 모가지가 길게 자란다. / “그늘에서 꽃이 피는 거야.” / 내가 장난말을 한다. / 네가 쓸쓸하게 웃고 / 손가락을 조금 움직인다 ..  (쓸쓸한 몇 편의 사랑 노래)



  우리 집 후박나무에 모여든 참새는 모두 몇 마리인지 모릅니다. 아무튼 대단히 많습니다. 이 참새들은 후박나무에 모여서 찰싹 달라붙는지 촘촘히 앉아서 버티는지 모릅니다. 다만, 참새가 들려주는 엄청난 노래를 내내 듣습니다. 바람소리와 빗소리 사이에 어우러지는 재미난 봄노래를 듣습니다. 이 아이들은 비가 그치고 바람이 멎으면 다시 이 후박나무를 떠나 이곳저곳 나들이를 다니겠지요.



.. 엄마…… / 응? / 그곳은 어떤 곳이유? …… 사뭇 다르우? …… / 글쎄, 무어랄지……형식의 저 너머……안개 무리랄지…… / 우리가 생각나서 온 거유, 엄마? …… / …… 낮은 소리의 웃음, 작게, 아주 작은 메아리 같은 …… / 우리가 보고 싶었수? / 그래, 하지만 그곳에선 그 때문에 시달리지는 않는단다 ..  (죽은 엄마에 의한 엄마의 교정)



  새한테는 나무가 꼭 있어야 하는 줄 안 지 얼마 안 됩니다. 몇 해 앞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그동안 내가 살던 집 둘레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습니다. 도시에서는 집 앞이나 옆이나 둘레에 다른 집이 촘촘하게 있을 뿐, 나무가 깃들 틈이 없습니다.


  사회에서는 해마다 사월 오일이 나무 심는 날이라고 외치지만, 막상 ‘집 둘레’에 나무 심을 땅이 없습니다. 나무 심을 빈터조차 없는데, 사회나 정치에서 아무리 ‘나무 심자!’고 떠든들 나무를 심을 수 없습니다.


  나무를 어디에 심어야 할까요? 내 보금자리 둘레에 나무를 못 심는다면 나무를 어디에 심어야 할까요? 내가 돌보지도 못할 머나먼 곳에 덩그러니 심고 내버려 두면 나무가 알아서 잘 자랄까요?



.. 돌이거나 풀이거나 흔들리는 물바가지이거나 떡갈나무에 매인 노란 리본이거나 한 나의 詩는 당신을 꿈꿉니다. 당신에게 가는 것이 나의 궁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겨울입니다. 그러나 얼어붙은 겨울의 연못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  (나의 詩-그대에게 가기 위하여)



  나무는 사람 손길을 안 받아도 스스로 씨앗을 떨구어 새로운 나무를 키웁니다. 나무는 사람이 굳이 안 심어 주어도 스스로 어린나무를 돌보면서 숲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애써 나무를 따로 심을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은 그저 지켜보면 됩니다. 오늘날 공무원이나 전문가라는 이들이 ‘숲을 가꾸겠다’면서 나무를 심는다거나 가지치기를 하는 짓은 모두 나무를 망가뜨리거나 숲을 어지럽히는 짓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나무는 즈믄 해를 삽니다. 나무는 두 즈믄 해나 세 즈믄 해를 삽니다. 사람은 기껏 백 해조차 못 삽니다. 백 해조차 못 사는 사람으로서 어찌 즈믄 해를 사는 나무를 돌보겠다면서 어설피 손길을 뻗을까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즈믄 해쯤 살아내면서 ‘과학과 이론을 갈무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무를 심든 돌보든 숲을 가꾸든 할 만하겠지요. 그러나, 제대로 쌓은 과학이나 이론조차 없이 어설피 나무를 건드리는 사람들입니다. 도시 바깥에 나무를 심는다고 하더라도 몇 해 뒤에 솎아내기를 한다느니 고속도로를 낸다느니 송전탑을 박는다느니 하면서 다시 나무를 밀어 버립니다. 도시에서는 재개발을 한다면서 나무를 아무렇지 않게 베어서 죽입니다.



.. 내 육체가 나를 속였다 /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은 / 육체의 시간에게 잡아먹혔다 / 존재하는 일이 나를 / 탕진시켰다 젊음이 ..  (詩와 힘)



  김정란 님 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문학과지성사,1989)를 읽으면서 문득문득 나무가 떠오릅니다. 나무와 삶이 떠오르고, 나무와 사람이 떠오릅니다.


  나비를 이야기하는 시를 읽으면서 왜 나무가 떠오를까요. 아무래도, 나비는 나무가 우거진 숲이나, 나무가 함께 있는 들에서 싱그럽게 깨어나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나무가 없는 곳에 나비가 없습니다. 나무가 짙푸르게 그늘을 드리워 주는 곳이 아니라면 나비가 없습니다.


  나비와 나무는 한삶입니다. 나비와 나무는 한넋입니다. 이러면서, 사람과 나비도, 사람과 나무도, 언제나 한마음이요 한꿈이면서 한사랑입니다.



.. 눈이 내리고, /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맨발로 / 달려가는 소리를 듣는다. // 태초에, 우리가 꿈이었을 때, / 우리가 애벌레의 날개이며, 봄의 움이며, / 神의 숨결이었을 때, / 그때, 그렇게 작은 소리로 속살거렸듯이 ..  (눈)



  비바람에 새를 부르는 나무처럼, 나와 너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서로 부릅니다. 맑은 날에도 새를 부르는 나무처럼, 나와 너는 기쁘거나 즐거운 잔치가 있으면 서로서로 부릅니다.


  어깨를 다독이려고 부릅니다. 어깨를 겯고 노래할 마음으로 부릅니다. 따스히 얼싸안으려고 부릅니다. 포근히 감싸면서 신나게 춤을 추려고 부릅니다.


  삶이 노래로 피어나고, 삶이 꽃처럼 활짝 터집니다. 삶이 춤사위로 드러나며, 삶이 나비 날갯짓처럼 눈부시게 날아오릅니다.



.. 나는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아니 우리는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 그리고 비로소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나는 /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그들이, 우리가,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을. / 넌 누구니……누군가가 대답했다…난 나야…다른 누군가가 / 또 말했다…난 나야…우리는 똑같이 말했다, 난 나야. / 우리는 태아처럼 물 위에서 퐁당거리고 놀았다. / 하지만 우리 중의 누군가가 갑자기 말했다. / 우리들의 엄마도 다 엄마야? 그래? 엄마는 어때? 부정할 수 있어? ..  (엄마 버리기, 또는 뒤집기)



  나비는 늘 새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늘 새로 태어납니다. 나무는 늘 새로 태어납니다. 새와 벌레는 늘 새로 태어납니다.


  새로 태어나는 줄 느끼는 숨결은 그야말로 새로운 빛과 노래로 아름답습니다. 새로 태어나면서도 새로 태어났다고 느끼지 못하는 숨결은 그야말로 슬픔과 아픔만 가득한 채 스스로 아름다움을 피워내지 못합니다.


  번데기를 벗으면서 새로 태어나는 나비처럼, 나는 내 슬픔과 아픔을 훌훌 벗으면서 나비와 같이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데기에 갇힌 채 그 모습 그대로 잠들 수 있고, 내 슬픔과 아픔을 꽁꽁 가둔 채 그대로 죽음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나는 줄거리를 참을 수 없다. 나는 일상을, 역사를 참을 수 없다. / 즉 나는 발단과 결말을, 원인과 결과를, 요컨대 얽힘을 참을 수 없다 ..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또는 막가는 나의 詩法)



  어느 길로 가든 내 삶은 내가 짓습니다. 아름다운 삶도 내가 짓고, 안 아름다운 삶도 내가 짓습니다. 사랑도 내가 짓고, 사랑 아닌 몸짓도 내가 짓습니다. 무엇을 짓든 늘 짓습니다. 어느 때에는 좋거나 나쁜 틀을 지을 테고, 어느 때에는 옳거나 그른 틀을 지을 테지요. 틀짓기도 ‘짓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삶짓기도 ‘짓기’ 가운데 하나예요.


  날갯짓을 하려면 삶을 지어야 합니다. 날갯짓을 하면서 새롭게 바람을 가르면서 파란 하늘과 하나가 되려면 사랑을 지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꿈을 심으면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을 푸른 숨결로 갈마들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눈을 뜹니다. 4348.4.5.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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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문학과지성 시인선 81
이창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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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82



시를 읽는 날

―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이창기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89.5.30.



  아이들과 읍내로 저자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제비를 봅니다. 나는 올해 첫 제비를 사월 삼일에 봅니다. 아직 우리 집으로는 찾아들지 않았으나, 다른 마을에는 찾아들었구나 싶고, 바다와 가까운 우리 마을보다 읍내에 더 일찍 찾아왔네 싶어서 놀랍니다. 그러나, 가만히 헤아리니 신안 같은 섬마을에는 이른 삼월에도 제비가 찾아듭니다. 완도나 진도도 퍽 일찍 제비가 찾아들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울음소리만 들어도 ‘아, 제비네.’ 하고 알아챕니다. 울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면 아주 잽싼 날갯짓으로 바람을 휙 가르면서 제비가 벌써 저만치 날아갑니다.


  아이들은 “제비? 어디? 어디?” 하며 두리번거리지만, 제비는 벌써 저쪽으로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래도 찌익짹 찌익짹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니, 아이들도 제비가 돌아왔구나 하고 알아챕니다.



.. 앨범 속에서뿐이다 / 내가 벌거벗고 사진을 찍는 것도 / 검은 교복을 입고 버짐처럼 웃는 것도 / 십여 년 전에 죽은 털이 짧은 벙어리 개를 / 끌어 안고 하모니카를 부는 저녁도 모두 ..  (앨범 속에서)



  보려고 하는 사람은 늘 봅니다. 보려고 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늘 마음으로 먼저 알아채거나 느낍니다.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늘 못 봅니다. 보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기에 늘 코앞에서 마주하더라도 하나도 안 알아채거나 못 느낍니다.


  내가 제비 날갯짓을 알아채는 까닭은 늘 제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 깃드는 제비를 언제나 눈여겨보기 때문이고, 마음 가득 제비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꾀꼬리를 늘 생각하면 꾀꼬리 노랫소리나 날갯짓을 보며 바로 알아챕니다. 뻐꾸기를 늘 생각하면 뻐꾸기 노랫소리나 날갯짓을 보며 바로 느낍니다.


  우리 집 작은아이는 늘 자동차를 생각하기 때문에, 마루에서 놀다가도 군내버스가 마을 어귀로 지나가는 소리가 나면 “와, 버스다! 버스 지나간다!” 하고 알아챕니다. 택배 짐차가 대문 앞으로 지나가거나 우리 집 앞에 서면 “택배 차다!” 하고 찻소리만으로도 알아채요.



.. 해가 지는 속도로 길을 걷는다 / 내 사랑하는 발바닥아 ..  (비상구를 향해 날아가다)



  이창기 님 시집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문학과지성사,1989)을 읽습니다. 꿈에서도 별을 읽고, 삶에서도 별을 읽습니다. 별을 보려고 하기에 내 마음속에 온갖 별이 가득 뜹니다. 별을 느끼려고 하기에 내 가슴속에 갖은 별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꿈을 꾸려 하기에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고, 눈을 뜨며 지내는 아침저녁으로도 언제나 꿈을 꿉니다.


  마음에 따라 살고, 마음에 지은 생각대로 하루를 열어요. 마음이 있기에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하고, 마음에 따라서 하루가 흐릅니다.



.. (선데이서울은 가명으로 간통이나 이별을 하고 / 투데이서울은 야구를 하고 책임자는 처벌된다) ..  (이상한 나라의 노래)



  사람들은 별을 으레 밤에만 봅니다. 낮별을 보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그러나 별은 밤낮으로 우리한테 찾아옵니다. 별은 하루 내내 우리를 지켜봅니다. 그저 우리 몸뚱이는 밤에만 별을 환하게 알아챌 뿐이에요. 먼먼 온별누리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별이지만, 우리는 고작 밤에만, 게다가 밤에도 전깃불을 더 밝게 비추어 아예 별을 잊어버리는 하루로 지나갑니다.


  별을 잊기에 삶을 잊지만, 별을 잊는 줄 모르기에 삶을 잊는 줄 모릅니다. 별을 못 보기에 삶을 못 보지만, 별을 못 보는 줄 모르니까 삶을 못 보는 줄 몰라요.



.. 나는 우리 집 개를 해피라고 부른다 /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난 해피 / 검둥 개와 누런 개 슬픈 개와 추운 개 배고픈 개 새끼 / 다섯 마리의 어미를 해피라고 / 부른다 밥을 먹고 피똥을 싸는 ..  (해피 엔드)



  나는 우리 집에 얼마나 많은 새가 깃들어 지내는지 잘 모릅니다. 아무튼 온갖 새가 많이 삽니다. 아침저녁으로 온갖 새소리를 듣습니다. 하루 내내 집안과 집밖에서 숱한 새노래를 듣습니다.


  아이들도 이 소리와 노래를 함께 듣겠지요. 귀로도 듣고 마음으로도 듣겠지요. 눈으로도 보고 마음으로도 보겠지요. 가슴으로도 느껴, 마음 가득 기쁨을 채우겠지요.


  따로 시집을 펴야 시가 흐르지 않습니다. 눈을 떠서 새를 볼 수 있고, 별을 볼 수 있으며, 하늘을 볼 수 있으면 모두 시입니다. 굳이 시집을 장만해서 읽어야 시가 흐르지 않습니다. 귀를 열어 노래를 들을 수 있고, 귀를 활짝 열어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귀를 모두 열어 숨결을 들을 수 있으면, 우리 삶은 언제나 노래입니다.



.. 외상술을 마시고 화장실에서 미란다를 먹고 온 골목의 아가씨는 / 입가에 하얀 분말을 묻힌 채 트림을 하며 미련없이 멸치대가리를 / 떼어내어 한쪽 모서리에 가지런히 쌓아갔다 간간이 ..  (여행 보고서―K市에서)



  밤이 깊습니다. 큰아이가 스스로 일어나서 쉬를 가립니다. 다시 제자리에 눕습니다. 이불깃을 여밉니다. 이 아이가 밤오줌을 가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지난날이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떠올리는 삶은 오늘 이 아이가 보여주는 몸짓입니다. 오늘 함께 누리는 삶을 바라보고, 오늘 함께 짓는 삶을 헤아리며, 오늘 함께 사랑하는 삶을 느낍니다.


  까르르 웃는 몸짓이 노래이면서 시이고 삶입니다. 밥을 끓이는 소리가 노래이면서 시이고 삶입니다. 등허리를 펴려고 토닥토닥 두드리다가 자리에 눕는 하루가 노래이면서 시이고 삶입니다. 들풀을 뜯어 밥상머리에 나란히 둘러앉아 냠냠 짭짭 먹는 손길이 노래이면서 시이고 삶입니다. 우리 삶은 늘 모두 노래이면서 시입니다. 4348.4.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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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시간 창비시선 152
백무산 지음 / 창비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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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9



시와 사람

― 인간의 시간

 백무산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6.9.1.



  며칠 앞서부터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바야흐로 봄이니까요. 우리 집 마당과 뒤꼍에서 사는 개구리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으나, 제법 먼 곳에 있는 어느 논에는 개구리가 깨어나서 노래합니다. 해질녘 뒤꼍에 서서 가만히 바람을 쐬다 보면, 바람을 타고 우리 집까지 퍼지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아스라이 듣습니다.


  어느 논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어느 논에서 개구리가 맨 먼저 깨어났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옛날 같으면 논개구리는 걱정없이 깨어나서 근심없이 알을 낳았으나, 오늘날에는 논개구리가 그야말로 바삐 움직여야 합니다. 기계가 논바닥을 한 차례 뒤집고, 기계가 논바닥을 한 번 썰며, 기계가 논바닥을 한 번 훑어서 어린 벼를 심으니까요. 게다가 이 다음에는 농약입니다. 할매와 할배가 둘이서 논뙈기 구석구석 농약을 뿌리기도 하지만, 요새는 농협 헬리콥터로 농약을 엄청나게 뿌려댑니다.



.. 솔숲길 헐고 큰길 공사 한창인데 / 길가 집들 헐리고 집 마당의 / 고목 매화나무들 길 밖에 나앉아 / 포클레인 삽날이 밑둥에 척 걸쳐질 참인데 ..  (매화)



  농협 헬리콥터가 마을마다 아침저녁으로 논을 훑는 날이면 아주 시끄러우면서 고요합니다. 기곗소리 때문에 시끄럽고, 개구리와 새가 모조리 사라지기 때문에 고요합니다. 농약을 듬뿍 싣고 신나게 뿌리는 헬리콥터는 다른 모든 소리를 잠재우면서, 다른 모든 소리를 죽입니다.


  그런데, 시골 할매와 할배로서는 농협에 돈을 주어 헬리콥터를 사서 농약을 뿌릴밖에 없습니다. 늙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는 ‘도시로 떠난 아이들’이 시골로 돌아와 논일을 거들어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도시로 떠난 아이들도 시골로 돌아와서 바쁜 일철에 농약을 뿌려 주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골 어버이한테 ‘이제 농약 그만 뿌리라’고 말하거나 알려주거나 가르칠 만한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아주 드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전문직이나 공장 노동자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도시로 가서 논일이나 밭일을 익히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도시로 가서 논일과 밭일을 새롭게 배운 뒤 시골로 돌아와서 즐겁게 일하려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 꿈을 좇을 때와 생활에 충실할 때 / 어느 때를 위해 사는가 / 어느 때가 일상이며 어느 때가 꿈이냐 ..  (부리가 붉은 새)



  아스라이 먼 옛날까지 아니더라도,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는 독재정권 정책이 이 나라에 휩쓸기 앞서까지, 이 나라 사람들은 ‘해와 바람과 비와 흙과 풀이 어우러지는 밥’을 먹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농약과 비료와 비닐과 항생제를 몰고 시골을 뒤죽박죽으로 흔들 무렵부터 이 나라 사람들은 ‘농약과 비료와 비닐과 항생제로 키우는 밥’을 먹습니다.


  쌀이라고 다 같은 쌀이 아닙니다. 푸성귀라고 다 같은 푸성귀가 아닙니다. 돈을 받고 내다팔 ‘생산품’을 땅에서 뽑아내야 하는 ‘산업’이 되다 보니, 사람들은 더 값싸고 푸짐한 것을 좇습니다. 몸을 헤아리는 아름다운 밥을 찾지 않고, 돈을 따지는 셈속이 됩니다.


  유기농이나 친환경이라는 테두리가 아니라, ‘몸을 살리고 마음을 가꾸는 밥’을 먹을 노릇인데, 왜 우리는 이 길하고 자꾸 엇나가야 할까요. 왜 이 나라는 전쟁무기와 물질문명과 문화예술과 학교교육을 키우는 데에 무시무시하도록 엄청난 돈을 퍼부으면서, 막상 ‘밥다운 밥’을 먹도록 땅을 살리거나 북돋우는 길에는 한푼조차 안 쓸까요?


  농약을 만들거나, 농약 뿌리는 헬리콥터를 만드는 데에 참으로 큰돈을 들이는 이 나라입니다. 이와 달리, 흙을 기름지게 살리거나 시골지기가 흙을 알뜰히 가꾸는 길에는 돈 한푼 안 씁니다.



.. 내 이십대 기억을 찾을 길 없다 / 남긴 것도 없거니와 살았던 기억도 희미하다 / 폭발 직전의 흉기를 지니고 살았던 감정 기억뿐 / 열네 시간 열여섯 시간 기계 앞에 섰던 기억뿐 ..  (두 그림)



  백무산 님이 빚은 시집 《인간의 시간》(창작과비평사,1996)을 읽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 아리송한 사회를 마주하는 ‘조그마한 사람’으로서 제 목소리를 내는 시를 담은 책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 수 없도록 짓누르거나 짓밟는 이 땅에서 ‘조그마한 사람’으로서 두 다리 꺾이지 않고 우뚝 선 몸짓으로 쓴 시를 엮은 책입니다.


  책끝에 어느 문학평론가가 퍽 재미난 이야기를 붙입니다. 웬만한 시집은 책끝에 붙이는 ‘시평(시 비평)’이 대단히 재미없을 뿐 아니라, 한국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알쏭달쏭한 한자말과 영어를 뒤섞는데, 《인간의 시간》에 붙은 느낌글(시평) 첫머리에는 아주 재미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89년도였던가, 문학과지성사가 주관한 제1회 이산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상을 수상한 시인은 수상 연설에 앞서 멀리 지방에서 상경한 동료 노동자들과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노동해방의 구호를 외친 후 노동해방가요를 우렁차게 합창했고, 자유주의적 문인교수들로 가득한 식장은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서늘한 침묵으로 휩싸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인은 노동해방의 시대적 당위성과 다급함을 역설하는 연설을 마친 후,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식장 분위기를 의식한 듯 지체없이 남루한 단색 점퍼 차림의, 메마른 그러나 강철 같은 동료들과 식장을 빠져나갔다. 시인의 예기치 못했던 행동은 자유주의 논객이나 글쟁이들에겐 소름돋는 충격을 주었을는지도 모른다(130쪽/해설,임우기).”


  ‘자유주의 문인교수’와 ‘자유주의 논객·글쟁이’한테 소름돋는 일이었다고 하는 시상식을 가만히 그려 봅니다. 저는 그 자리에 간 일이 없고, 그 자리 이야기를 듣거나 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이 글을 읽으면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어림할 뿐인데, ‘자유주의’를 외치는 글쟁이나 교수나 논객은 ‘노동해방’ 같은 말을 외치는 일이 없습니다. ‘노동해방’이 아니더라도 ‘참다운 남녀평등’이나 ‘올바른 평화’를 외치는 일은 있을까요?



.. 조상 대대로 살던 마을에 / 무장경찰이 왔고 이어 포클레인이 왔다 / 시청에서 공해지역 재개발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 민간업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 그는 그곳 삼선 국회의원의 브로커였다 / 시에서 평당 육천원에 사들여 십팔만원에 분양했다 / 십만 평이 넘으므로 백원은 거저먹었다 / 그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백만원을 기탁하고 티비에 나왔다 / 지역문화발전기금 이백만원 내고 귀빈석에 앉았다 / 출신교 축구 발전을 위해 오백만원 내고 감투를 유지했다 ..  (운이 나빴다)



  ‘일하는 사람’은 많으나, ‘일하는 이야기’가 시로 태어나는 일은 대단히 드뭅니다. 교사나 교수로 있으면서 시를 쓰는 사람은 제법 많은데, 공장 일꾼이나 시골 농사꾼으로 있으면서 시를 쓰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시만 쓰는 시인은 무척 많은데, 아이를 돌보거나 살림을 가꾸면서 시를 쓰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공장 노동자는 그저 공장 노동자로 있는 한국 사회입니다. 전업주부는 마냥 전업주부로 있는 한국 사회입니다. 학생은 언제나 학생으로 있는 한국 사회입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은 그대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있는 한국 사회입니다. 교사와 교수는 언제까지나 교사와 교수 자리에 머무는 한국 사회입니다. 서로 넘나들지 못하고,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서로 손을 잡지 못하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지 않습니다.



.. 지구는 우주라는 물위에 떠 있는 배 / 인간과 자연은 하나이면서 둘이다 ..  (자연과의 협약)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흐릅니다. 밤하늘에 별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이 별은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도시에서는 하늘이 너무 뿌연 탓에 별이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기도 하고, 도시에서는 별 볼 일이 없기도 하며, 도시에서는 별이 건물과 전깃줄 따위에 막혀서 안 보이기도 합니다.


  도시에 넘치는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이 바람을 타고 시골로 흐릅니다. 도시와 시골에 잔뜩 지은 공장에서 내뿜는 매연도 바람을 타고 시골과 도시를 감쌉니다. 시골에 조금 남은 들과 숲에서 푸른 숨결이 깨어나서 이 숨결이 바람을 타고 도시로 흐릅니다.


  ‘글만 쓰는’ 사람은 이제 사라지고, ‘글을 쓰는’ 사람이 깨어날 때입니다. ‘말만 하는’ 사람은 이제 사라지고, ‘말을 하는’ 사람이 태어날 때입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며 함께 노래할 때입니다. 서로 아끼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보듬을 때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할 때입니다. 4348.4.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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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04-04 01:28   좋아요 0 | URL
마지막 석 줄의 글이 유난히 마음에 닿는 때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숲노래 2015-04-04 01:30   좋아요 0 | URL
깊은 저녁에 깨어 밤빛을 누리시네요. appletreeje 님이 계신 곳에도 개구리 노랫소리가 고이 퍼지기를 빌어요. 고맙습니다.
 
강 깊은 당신 편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109
김윤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0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8



시와 님

― 강 깊은 당신 편지

 김윤배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91.10.30.



  내 님은 늘 나한테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으니까요. 내 님은 바깥에 없습니다. 바깥에 있는 사람은 짝이요, 짝님입니다. 내가 그릴 수 있는 내 님은 바로 내 마음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 님은 옆이나 곁에 없습니다. 옆이나 곁에 있는 사람은 옆님이나 곁님입니다. 내 님은 그저 님이면서 모든 것을 이루는 하느님입니다.


  예배당에서 님을 찾는 사람은 ‘예배당님’을 섬깁니다. 예배당님이라고 해서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예배당님을 섬기느라, 내 마음속에 깃든 님을 못 볼 뿐입니다. 종교에서 님을 찾는 사람은 ‘종교님’을 모십니다. 종교님이라고 해서 얄궂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그예 종교님을 모시느라, 내 가슴속에서 사랑으로 피어나는 하느님을 못 알아볼 뿐입니다.



.. 당신 슬픈 살 속에서 눈물꽃 아름다운 날은 몸 내내 흐르는 물소리 풀잎 소리 들었습니다 눈물꽃 시들고 슬픔으로 숨쉬던 살 시들어 당신은 당신 영혼 만나기 위해 당신 속으로 길 떠납니다 ..  (눈물꽃 아름다운 날은)



  앵두나무를 바라보면서 앵두나무님을 느낍니다. 모과나무를 바라보면서 모과나무님을 느낍니다. 구름을 바라보면서 구름님을 느끼고, 참새를 바라보면서 참새님을 느껴요.


  우리를 둘러싼 숱한 목숨붙이는 저마다 고운 님입니다. 그리고, 나도 나답게 고운 님입니다. 서로 아낄 님이면서, 서로 사랑할 님입니다. 서로 반가울 님이면서, 서로 고마운 님입니다.



.. 바람 소리 무섭습니다 저 바람의 아우성에 맡겨 불씨가 되고 싶습니다 긴긴 밤 눈 내리고 온 산 눈 덮여 당신 먼 날은 스스로 불 일으켜 타오르고 싶습니다 ..  (예다원 가는 길)



  김윤배 님 시집 《강 깊은 당신 편지》(문학과지성사,1991)를 읽습니다. 이 시집은 김윤배 님한테 그리운 님한테 띄우는 글이라고 할 만합니다. 님을 그리는 글이요, 님을 노래하는 글입니다.


  님은 글쓴이가 좋아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님은 아득히 먼 누구일 수 있습니다. 님은 글쓴이가 짝사랑으로 애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님은 우리 둘레에서 아프거나 슬픈 이웃일 수 있습니다. 님은 바로 글쓴이 모습일 수 있습니다.



.. 그리운 사람들 몸 냄새 옆에 다가서면 그리운 사람들 숨소리 말소리 들립니다 그리운 사람들 그리움 삭아 그 눈빛 더욱 정겹고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생각 때없이 눈물입니다 ..  (박물관 입구에서)



  사랑을 씨앗으로 심으니 사랑을 열매로 거둡니다. 꿈을 씨앗으로 심어서 꿈을 열매로 거둡니다. 이야기를 씨앗으로 심으면 이야기를 열매로 거두어요. 우리는 저마다 무엇을 씨앗으로 심을까요? 우리는 우리 삶에 어떤 씨앗을 심고 어떤 열매를 거두는 하루를 누릴까요? 우리는 내 마음속 고운 님한테 어떤 말을 속삭이고, 어떤 생각을 밝히며, 어떤 길을 걸어갈까요?



.. 나를 버린 것은 여름밤 풀잎에 듣는 풀벌레 소리였나니 그것들은 나를 길들였으므로 나를 버릴 수 있습니다 내가 길들였으나 내가 버릴 수 없는 사람 나를 길들였으나 나를 버릴 수 없는 사람 내게 있어 그 사람 때로 시가 됩니다 ..  (시)



  시를 쓰려면 시를 써야 합니다. 시를 쓰려고 하면서 소설을 생각하면 시를 못 씁니다. 시를 쓰려고 했는데 춤만 춘다면 춤만 출 뿐입니다. 시를 쓰려고 했다가 담배만 태운다면 담배만 줄줄이 태우고 말지요.


  오로지 하나를 생각합니다. 오로지 하나에 온마음을 싣습니다. 오로지 하나에 모든 기운을 실어서 삶을 짓습니다. 시집 《강 깊은 당신 편지》에 흐르는 단출한 노랫말은 내가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길에서 마음을 가다듬는 몸짓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전거는 자동차나 오토바이처럼 탈 수 없습니다. 자전거는 오로지 자전거답게 탈 뿐입니다. 두 다리를 써야 하고, 두 손과 온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자동차는 자전거처럼 탈 수 없습니다. 자동차는 오로지 자동차에 맞게 손발을 쓰고 눈을 움직이면서 몰아야 합니다.


  님을 그리는 마음을 시로 쓴다면, 오로지 님을 그리기만 해야 하고, 님을 마음에 담아야 하며, 님을 싯말에 얹어야 합니다.



.. 바람 소리 자라듯 숲이 자랍니다 숲그늘 아래 몸 무거운 바위가 된 긴 침묵과 침묵을 지켜온 당신의 체온이 이끼로 돋아 풍화만큼 더디게 바위를 덮습니다 ..  (산이 자라는 동안)



  봄에 봄바람이 붑니다. 봄이니까요. 여름에는 여름바람이 불어요. 여름이니까요. 철에 따라 바람이 바뀝니다. 철바람입니다. 봄을 봄답게 하는 봄바람이고, 봄바람은 우리한테 봄노래를 들려줍니다.


  님이기에 님을 노래하는 바람이 붑니다. 님을 그리는 마음이 님을 노래하는 싯말로 거듭납니다. 그러니까, 시는 누구나 씁니다. 시를 쓰려고 마음을 기울일 줄 안다면, 누구나 시를 쓰고 언제나 시를 씁니다. 손에 연필과 종이만 쥐면 됩니다. 기쁘게 노래하면서 연필을 사각이면 됩니다. 즐겁게 꿈을 꾸면서 종이에 이야기를 차곡차곡 쓰면 됩니다. 봄바람을 마시는 사람은 봄을 노래하는 시를 쓰고, 담뱃재를 털며 한숨을 쉬는 사람은 담뱃재를 털며 한숨을 쉬는 삶을 시로 씁니다. 4348.4.1.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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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의 불 시작시인선 80
이대흠 지음 / 천년의시작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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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7



시와 역사책

― 물 속의 불

 이대흠 글

 천년의시작 펴냄, 2007.1.30.



  나무는 나무도감에 없습니다. 나무는 숲에 있습니다. 풀은 식물도감에 없습니다. 풀은 들에 있습니다. 사랑은 책이나 영화에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들 가슴에 있습니다. 역사는 역사책이나 대학교에 없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우리가 짓는 삶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나무와 풀과 사랑과 역사를 책이나 도감이나 영화나 신문이나 학교 같은 데에서만 찾기 일쑤입니다. 나무를 찾으려고 숲에 가는 사람이 드물고, 풀을 사귀려고 들을 가꾸는 사람이 드물며, 사랑을 일구려고 마음을 가다듬는 사람이 드뭅니다.


  책이나 영화를 본대서 사랑을 알지 않습니다. 여행이나 관광이나 답사를 다닌다고 해서 역사를 배우지 않습니다. 인문 강좌를 듣거나 인문 지식을 쌓는다고 해서 역사를 바로알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바로세울 때에 비로소 바로서는 역사입니다.



.. 찌시가 익어가고 / 누이와 나는 진흙을 빻아서 / 떡을 만들고 아이를 만들고 // 어머니는 장에 가셨고 ..  (모래의 금요일 3)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는 숨결은 육아책에 없습니다. 학교에서도 사랑을 가르치거나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기를 몸에 품고 마음에 담아서 열 달 동안 아끼면서 이 땅으로 나오도록 이끈 어머니 마음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젖을 물리는 손길이 사랑이고, 기저귀를 빠는 손길이 사랑이며, 젖떼기밥을 먹이고 몸을 정갈하게 씻기고 자장노래를 부르는 온갖 손길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아기를 사랑하는 넋은 바로 어머니처럼 아버지 가슴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될 사람은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는다고 해서 사랑을 익히지 못합니다. 아기를 품에 안아서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놀리면서 날마다 따사롭게 어루만지고 아낄 때에 비로소 가슴 가득 일어나는 사랑을 깨닫습니다.


  삶을 읽으면서 사랑을 알아야 하고, 삶을 가꾸면서 사랑을 지어야 합니다. 삶을 노래하면서 사랑을 나누어야 하고, 삶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 철푸덕 철푸덕 뒤척이며 / 철푸덕 철푸덕 지고 나고 / 이 나라 강이 그렇고 산이 그렇고 / 이 나라 바다도 철푸덕 철푸덕 ..  (철푸덕 철푸덕)



  이대흠 님이 빚은 시집 《물 속의 불》(천년의시작,2007)을 읽습니다. 물 속에 있는 불이란 무엇일까요. 물 속에 잠긴 불이란 무엇일까요. 물 속에서 타오르는 불이란 무엇일까요.


  이대흠 님은 싯말로 어떤 역사 한 가지를 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녁 가슴에 사랑이라는 숨결로 갈무리하는 역사를 싯말로 들려주려고 합니다.


  역사는 싯말로 노래할 수 있을까요. 역사는 싯말로 갈무리해서 이웃들과 나눌 수 있을까요. 역사는 싯말로 지어서 이 땅 아이들한테 차곡차곡 물려줄 수 있을까요.



..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 하는 사람을 보면 일 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  (동그라미)



  봄은 바람과 함께 찾아옵니다. 따사롭게 부는 바람이 겨울눈을 깨우고 들풀을 일으킵니다. 봄은 백화점이나 짧은치마에는 없습니다. 봄은 달력이나 인터넷에 없습니다. 사람들 가슴에 따순 바람을 바라는 넋이 있기에 봄은 해마다 기쁘게 찾아옵니다.


  정치권력자는 왜 우악스러운 짓을 일삼을까요? 경제 우두머리는 왜 바보스러운 짓을 자꾸 꾀할까요? 정치권력을 거머쥐면 이녁한테 무엇이 기쁠까요? 돈을 온통 긁어모으면 이녁 삶이 얼마나 빛날까요?


  군대를 앞세워 대통령이 된다 한들, 숨을 못 쉬면 바로 죽습니다. 큰돈을 앞세워 어마어마한 돈을 긁어모은다 한들, 숨을 마시지 못하면 바로 죽습니다. 기껏 쉰 해쯤 독재권력을 부린다 한들, 애써 100조 원이나 1000조 원을 주물럭거린다 한들, 맑고 싱그러운 바람은 돈으로 사들일 수 없습니다.



.. 도시를 둘러싼 산 속에는 / 귀신들이 우글거린다 머리가 텅 빈 귀신들이 / 술을 마신다 얼핏 보기에는 사람 같은 / 숲 속의 새들은 다른 하늘로 날아가고 / 피어난 꽃들은 모가지가 꺾였다 ..  (물 속의 불 6-위대한 탄생)



  봄바람이 불지 않으면 도시는 와장창 무너져야 합니다. 봄바람이 불어서 온누리를 따스하게 감싸지 않으면 도시는 그대로 무너져야 합니다. 봄이 오지 않으면 시골에서 아무것도 못 심고 아무것도 못 거두겠지요.


  한 해라도 봄이 없다면 시골뿐 아니라 도시도 무너집니다. 한 해라도 겨울이 없다면, 여름과 가을이 없다면, 지구별 사람들은 모조리 죽어야 합니다.


  역사란 무엇이고, 문화와 예술이란 무엇이며, 경제와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읽어야 하며,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역사책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하고,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우리가 이야기할 역사는 어떤 숨결이어야 할까요.



..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발바닥에 / 입을 맞추라 붉은 혀로 / 그가 살아온 내력에 침을 묻히라 ..  (물 속의 불 3-미친 꽃)



  동그란 지구별은 둥글게 돕니다. 동그란 지구별을 둥근 해가 비춥니다. 지구별은 스스로 둥글게 돌면서 둥근 해 둘레를 또 둥글게 돕니다. 풀과 나무가 베푸는 열매는 으레 둥글고, 어버이는 아이한테 둥근 마음을 나누어 줍니다. 아이들은 서로 둥글게 어우러지고, 둥글둥글 활짝 웃습니다.


  시인을 낳은 시골 어머니는 언제나 둥글둥글 노래하듯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시인을 낳은 시골 어머니는 시를 쓴 적도 읽은 적도 없으리라 느끼는데, 시인을 낳은 시골 어머니는 역사책이나 문학책에 이녁 이름을 올리지 못할 테지만, 시를 쓰고 역사를 말할 줄 아는 아이를 따사롭게 돌보면서 사랑했습니다.


  시를 낳는 힘이 어머니한테 있습니다. 역사를 적는 손길이 어머니한테서 태어납니다. 시가 노래로 거듭나는 숨결이 바람을 타고 어머니 가슴으로 찾아듭니다. 역사를 노래처럼 부르면서 이야기꽃으로 피울 수 있는 사람은 봄바람을 마시면서 가슴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4348.3.30.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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