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이생진 / 작가정신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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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6



시와 섬노래

― 거문도

 이생진 글

 작가정신 펴냄, 1998.8.17.



  섬은 바다로 둘러싸인 터전입니다. 뭍은 커다란 땅덩이입니다. 그런데 지구별을 통틀어서 헤아리면, 뭍도 바다에 둘러싸인 터전입니다. 제아무리 커다란 땅덩이라 하더라도 바다가 훨씬 넓어서 뭍을 널따랗게 껴안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별이라는 테두리에서 보면 섬도 섬이고 뭍도 뭍인 셈입니다. 굳이 ‘섬’이라는 낱말을 지었다면, 조그마한 땅덩이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뭍’은 커다란 땅덩이라는 뜻이라고 할 만합니다.


  눈길을 넓혀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온누리를 헤아리면, 지구별은 대단히 작은 별입니다. 그야말로 가없는 온누리에 조그맣게 뜬 별조각입니다. 커다란 땅덩이 옆에 조그마한 섬이 있듯이, 드넓은 온누리에 조그마한 지구별이 있습니다.



.. 갈매기와 나는 한배에서 태어났으니까 / 나는 구름 타고 가고 / 저는 바람 타고 오고 / 나는 끝없는 데로 가고 / 저는 끝없는 데서 오고 ..  (시인과 갈매기)



  이생진 님이 빚은 시집 《거문도》(작가정신,1988)를 읽습니다. 이생진 님은 거문도에서 고즈넉히 지내면서 시를 길어올립니다. 거문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도 아니면서 거문도에서 지냅니다. 거문도가 이녁 보금자리가 아니면서도 거문도에 머물면서 바닷바람을 마십니다. 그저 거문도를 마음으로 담아서 사랑하려는 손길이기에 거문도에서 시를 씁니다. 그예 거문도를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껴안으려는 하루이기에 거문도에서 시를 읊습니다.



.. 외롭다는 말을 꽃으로 한 거야 / 몸에 꽃이 필 정도의 외로움 / 이슬은 하늘의 꽃이고 외로움이지 / 눈물은 사람의 꽃이며 외로움이고 / 울어보지 않고는 꽃을 피울 수 없어 ..  (혼자 피는 동백꽃)



  이생진 님은 ‘성산포’를 노래하는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젊은 날부터 ‘바다’를 노래했고, ‘섬’을 그렸으며, ‘갈매기’와 놀았습니다. 그러니, 《거문도》라는 시집을 내놓을 만합니다. 그러면, 거문도에 머물면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거문도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이야기가 마음으로 하나둘 스며들었을까요.


  “담쟁이덩굴이 소나무를 감고 /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구나 / 거기서 하늘이 보이느냐 / 줄기가 있으면 너랑 나랑 감고 올라가 / 하늘을 보자꾸나(가는 곳마다 무덤이)” 같은 이야기처럼, 섬에서 담쟁이덩굴을 보고, 소나무를 보며, 하늘을 봅니다. 담쟁이덩굴이랑 함께 하늘을 보고, 소나무랑 함께 바닷바람을 마십니다.


  시 한 줄은 풀줄기처럼 뻗습니다. 시 두 줄은 풀꽃처럼 피어납니다. 시 석 줄은 하늘처럼 파랗게 열립니다. 시 넉 줄은 바닷내음을 물씬 실어나르는 바람처럼 흐릅니다.



.. 고개 넘어가다가 돌에 챘다 / 그래서 무릎에서 피가 났다 / 돌이 내게 돌 던질 리 없으니 / 이는 돌의 잘못이 아니라 / 내 잘못이다 하고 지나가니 / 아무 탈이 없다 ..  (돌의 성품)



  거문도에서 나고 자라서 늙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문도에서 나고 자랐으나 거문도하고 사뭇 먼 곳에서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문도라는 이름을 한 번조차 못 들으며 사는 사람이 있고, 한두 차례 거문도를 마실한 적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삶이 흐릅니다. 어디에서나 우리 이야기가 흐릅니다. 거문도에서도 뭍에서도 다른 섬에서도 “쑥 냄새 풍기는 섬 / 가을걷이 한창인데 / 돌담 너머 쑥밭은 / 아직 철모르는 봄이다(동도 쑥 냄새)”와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어디에서나 봄에 꽃이 피고, 여름에 볍씨를 심으며, 가을에 나락물결을 만나고, 겨울에 눈밭이 됩니다. 어느 고장에서나 봄에 쑥을 캐고, 여름에 시원한 바람과 소나기를 맞으며, 가을에 너른 하늘을 누리고, 겨울에 얼어붙은 별빛을 마주합니다.


  섬에서 살며 섬노래를 부르고, 바다에서 살며 바다노래를 부릅니다. 시골에서 살며 시골노래를 부르고, 서울에서 살며 서울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노래를 즐깁니다. 아이도 노래와 함께 놀고, 어른도 노래랑 같이 일합니다. 노래 한 마디를 읊으면서 빙그레 웃고, 노래 두 마디를 듣고는 신나게 춤을 춥니다.



.. 등대로 가다가 갯쑥부쟁이꽃을 만나 / 그 옆에 나란히 누워 / 엷은 가슴에 별을 묻고 자다가 들킨 기분 / 우리는 깨어나기 싫었다 ..  (녹산 등대로 가는 길 2)



  시집 《거문도》를 덮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쓰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부산’이나 ‘광주’라는 이름으로 시를 쓰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거문도에 뿌리를 내려서 사는 시인은 거의 없다시피 할 텐데, 시집 《거문도》는 섬노래가 되어 태어납니다. 서울에 뿌리를 내려서 사는 시인은 대단히 많은데 ‘서울’이라는 이름을 척 붙이면서 서울살이와 서울사람과 서울사랑과 서울내음을 곱게 삶노래로 부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아이가 태어납니다. 섬에서도 뭍에서도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자랍니다. 시골에서도 서울에서도 아이가 자랍니다. 어버이는 어디에서나 어버이입니다. 모든 어버이는 모든 아이를 오직 사랑으로 돌봅니다. 모든 아이는 모든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습니다.


  거문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줄 두 줄 적은 싯말은 고요히 번지는 노래가 됩니다. 삶을 사랑하고 이웃을 아끼는 마음으로 석 줄 넉 줄 쓰는 싯말은 어느새 환하게 퍼지는 노래로 거듭납니다.


  나는 오늘 우리 보금자리에서 우리 집 두 아이랑 곁님하고 오늘 하루 부를 노래를 차분히 곱씹습니다. 두 아이는 아침부터 마당에서 앵두알을 훑습니다. 그저께까지는 시큼하기만 하더니 오늘은 달달한지, 두 아이 손이 멈출 새가 없습니다. 4348.6.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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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토끼 난다詩방 2
성미정 지음, 배재경 그림 / 난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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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58



아이하고 누리는 하루는 모두 노래

― 엄마의 토끼

 성미정 글

 배재경 그림

 난다 펴냄, 2015.2.15.



  아이는 노래를 반깁니다. 어떤 노래가 들려와도 아이는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대중노래이든 민중노래이든, 자장노래이든 놀이노래이든, 들노래이든 일노래이든, 아이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습니다. 그저 노래라면 모두 기쁘게 듣고는 재미나게 따라 부릅니다.


  아이는 노래를 짓습니다. 어른이 들려주는 노래를 아이 나름대로 고쳐서 부르기도 하고, 아무도 아이한테 안 들려준 노래를 아이가 처음으로 지어서 부르기도 합니다. 가락을 몰라도 노래를 부르고, 글만 덩그러니 있어도 새롭게 가락을 입혀서 부릅니다.


  노래하는 아이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노래하는 아이는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습니다. 노래하는 아이는 맞고 틀림을 재지 않습니다. 그저 노래합니다. 마냥 웃으면서 노래하고, 여기에 춤을 곁들여서 온몸에 땀이 흐르도록 시원하게 놀 줄 압니다.



.. 이 몸은 이제 1학년이니까 / 초등학교 다니는 형이니까 // 친구들과 있을 때 엄마가 부르면 / 금방 대답하지 않습니다 ..  (1학년 형)



  나도 아이였을 적에 노래를 몹시 즐겼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러다가 둘레 어른한테서 꾸지람을 듣습니다. 버스라든지 기차 같은 데에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다가는 꿀밤을 맞습니다. 다른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하니까요. 학교에서도 노래를 부를 수 없어요. 길을 걸어가면서도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노래는 언제 불러야 할까요? 학교에서 음악 시간이 되어야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음악학원 같은 데를 나가야 비로소 노래를 부를 만할까요? 연예인이나 가수를 꿈꿀 때에 비로소 ‘노래 연습’을 해도 될까요? 아니면 노래방에 가서 돈을 내야 노래를 불러도 될까요?



.. 길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 요즘 애들은 혼자 자라서 / 저밖에 모른다 하셔 // 나는 친구들과 장난감도 / 과자도 사이좋게 나눠 먹는데 ..  (외둥이 1)



  동시집 《엄마의 토끼》(난다,2015)를 읽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 성미정 님이 글을 쓰고, 아이 배재경 님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빚은 동시집이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동시를 씁니다. 아이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아이가 누리는 삶’을 동시로 담습니다. 아이는 어머니도 지켜보지만, 둘레에서 마주하는 여러 가지 모습을 찬찬히 헤아린 뒤 그림에 담습니다.



.. 친구들한테 개새끼라고 했다가 / 선생님께 혼쭐난 다음부터 // 민이는 선생님 몰래 / 친구들 귀에 대고 / 개새끼라고 속삭였어 / 내 귀에도 개새끼를 넣어주었어 ..  (개새끼)



  아이와 함께 빚은 동시집 《엄마의 토끼》는 다른 여느 동시집하고는 여러모로 다릅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한집에서 함께 누리는 살내음이 흐르고, 두 사람이 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학교 안팎에서 겪는 이야기가 동시로 태어납니다. 아이가 집 언저리에서 마주치는 이야기가 동시로 거듭납니다.


  동시에 깃드는 이야기는 꼭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개새끼〉 같은 동시를 읽으면, 오늘날 초등학교에서조차 엿볼 수 있는 쓸쓸한 모습이 흐릅니다.


  참말 아이들은 왜 초등학교 다니는 나이에도 ‘개새끼’ 같은 거친 말을 입에 담아야 할까 궁금합니다. 어떤 어른이 아이한테 이런 거친 말을 들려주거나 물려주었을까 궁금합니다. 도시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아이들은 이런 거친 말을 아주 쉽게 내뱉습니다. 시골 군내버스에서도, 시골 면소재지 놀이터에서도, 시골 읍내나 면내 길거리에서도 아이들은 이런 거친 말을 참으로 쉽게 읊습니다.



.. 친구 따라서 피아노 학원 구경 간 날 / 피아노가 싫어졌다 // 친구가 건반을 잘못 누르면 선생님이 / 볼펜으로 친구 손가락을 때렸다 ..  (피아노)



  우리는 배우려고 학교에 갑니다. 우리는 삶을 배우려고 학교에 갑니다. 아이를 학교에 넣을 적에는 ‘더 높은 학교’에 ‘더 나은 성적’으로 들어가도록 하려는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더 이름난 대학교’에 뽑히도록 어릴 적부터 길들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삶과 사랑과 꿈을 배워서, 날마다 새로운 기쁨을 스스로 길어올리는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도록 학교를 다닌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는 아이가 씩씩하게 두 다리로 서서 두 손으로 모든 사랑과 꿈을 지어서 삶을 따사롭고 넉넉하게 가꾸기를 바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른으로서 동시를 써서 아이하고 나눈다고 할 적에는, 어른하고 아이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새롭게 지을 삶을 담으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현실을 고스란히 담는 동시가 아니라, 삶을 새롭게 지으려는 꿈을 담는 동시일 때에 기쁘게 노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아픈 사회와 슬픈 학교를 동시로도 보여줄 수 있습니다만, 아픔과 슬픔을 보여줄 적에도 이 아픔과 슬픔에 얽매이거나 맴도는 얼거리가 아니라, 아픔과 슬픔을 사랑과 꿈으로 삭이거나 녹이는 슬기로운 숨결을 들려줄 수 있을 때에 동시라고 하는 문학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 엄마가 되기 전의 엄마는 / 삐삐 롱스타킹이었어 / 닐슨 씨보다 나무를 잘 탔지 / 인어공주였던 적도 있어 / 왕자한테 메롱 / 지느러미 흔들며 바닷속으로 돌아갔지 ..  (엄마가 되기 전의 엄마)



  동시집 《엄마의 토끼》는 살가운 손길로 또박또박 쓴 씩씩한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다만, 아이가 스스로 짓거나 가꾸는 사랑이나 꿈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동시는 어른이 쓰니까 아무래도 어른 눈길이나 눈높이가 될 수밖에 없는지 모르나, 《엄마의 토끼》에 실린 동시는 사회현실과 학교현실은 흘러도, 이러한 현실을 씩씩하게 맞아들이면서 기쁘게 노래하는 이야기까지 뻗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수학 공부하는 일요일엔〉이나 〈팬지〉나 〈까닭이라는 닭을 본 적이 있니〉나 〈무지개 점수〉나 〈문제지 풀 때마다〉 같은 작품을 보면, 고작 초등학교 1학년 모습인데에도 학교와 집에서 아이가 짓눌리는 ‘시험공부’나 ‘입시공부’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 문제지 풀 때마다 / 곁에 앉아 있는 / 엄마 얼굴을 살피는 / 내게 // 엄마는 / 이 녀석아 / 답이 네 머릿속에 있지 / 엄마 얼굴에 써 있냐 / 핀잔을 주지만 ..  (문제지 풀 때마다)



  모든 동시가 언제나 노래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어떤 동시이든 아이들이 읽을 적에 가락을 입혀서 흥얼흥얼 기쁘게 노래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무리 사회현실이나 학교현실이, 게다가 집이나 마을이나 학원에서도 으레 ‘시험공부’와 ‘입시공부’에 얽매여야 한다고 하더라도, 늘 이런 공부 이야기만 동시로 쓴다면, 아이들이 너무 힘들고 따분해 하리라 느낍니다. 아이들이 꿈을 꾸고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 동시를 쓴다면, 아이하고 함께 어른도 언제나 꿈을 꾸고 사랑을 빛낼 동시를 노래한다면, 삶도 집도 마을도 학교도 모두 아름답게 새로 태어나는 바탕이 튼튼히 서리라 생각합니다. 4348.5.29.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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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남자 시코쿠 문학과지성 시인선 R 3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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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5



시와 하룻밤

― 여장남자 시코쿠

 황병승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2.11.30.



  새벽바람을 느끼면서 문득 눈을 뜹니다. 시골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설렁합니다. 설렁설렁 파고드는 바람을 느끼면서, 옆에 누운 아이들이 이불을 잘 덮고 자는가 하고 살핍니다. 이불을 뻥 걷어차고 자다가 새우처럼 옹크린 아이를 보면 반듯하게 눕힌 뒤 이불을 고이 여밉니다. 이불을 고이 여미어 주면 새우처럼 옹크린 아이는 기지개를 켜면서 이불을 두 손으로 꼭 쥡니다. 밤새 수없이 잠을 깨면서 이불깃을 여미어 준 뒤, 조용한 새벽에 씩씩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아침을 지으려고 부엌으로 갑니다.



..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  (주치의 h)


..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어요 / 어머니 빗소리가 좋아요 ..  (이파리의 저녁 식사)



  황병승 님이 빚은 시를 엮은 《여장남자 시코쿠》(문학과지성사,2012)를 읽습니다. 황병승 님이 쓰는 시를 놓고 ‘실험시’나 ‘현대시’라고 하는 문학비평이 있고, 이녁을 가리켜 ‘문제적 시인’이라고도 말하는 듯합니다. 나는 실험시나 현대시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나는 문학비평도 잘 모릅니다. 시집을 바라보면 시집을 읽고, 수필책을 마주하면 수필책을 읽으며, 동시집을 손에 쥐면 동시집을 읽습니다.


  곰곰이 보면, 아이들이 쓰는 글이야말로 ‘실험정신’이 가득하고, 언제나 새롭구나(현대시) 하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어떤 굴레에도 안 갇히면서 글을 쓰니까 모든 글이 실험정신이 가득하다고 할 만하며, 아이들은 어른들 흉내를 낼 까닭이 없으니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글에 담는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글쓰기 학원을 다닌다거나 학교에서 수업을 받으면서 정형 틀에 짜맞추도록 길들이면, 아이들 글에서도 실험정신이나 현대시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 산에 들에 진달래 개나리 피거나 말거나 / 봄을 선언하고 나는 봄 속에 갇혔습니다 ..  (사성장군협주곡)


..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  (여장남자 시코쿠)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는 황병승 님 이야기입니다. 황병승 님이 스스로 겪는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요, 황병승 님을 둘러싼 수많은 이웃과 동무가 살아가는 하루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황병승 님이 두 다리를 딛고 선 이 땅에서 짓는 하룻밤을 갈무리한 이야기가 시집 하나에서 찬찬히 드러납니다.


  시는 글잣수를 착착 맞추어서 쓸 수도 있습니다. 시는 줄을 알맞게 띄어서 쓸 수도 있습니다. 시는 쉽게 맑은 낱말을 골라서 쓸 수도 있습니다. 시는 숲이나 들이나 바다를 노래하는 가락에 실어서 쓸 수도 있습니다. 시는 사회를 나무라거나 정치를 꾸짖거나 진보를 외치려는 뜻을 담아서 쓸 수도 있습니다. 아픈 이웃과 어깨동무하면서 시를 쓸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무 괴로워서 죽겠노라 하는 마음을 시로 쓸 수도 있습니다.


  시로 쓰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시로 쓸 수 없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시로 써서는 안 될 이야기는 없습니다.



.. 항상 떼쓰는 사람 이제 다른 시간이에요 당신의 붉은 뺨이 무서워요 새 사람을 만나세요 그만 그만해요 난 죽은 년이잖아요! 단 한 번뿐인 날이에요 날 잊기 위해서 모두들 몰려올 거라구요 ..  (그 여자의 장례식)


.. 나는 일어나지 않았네 꿈이겠거니 했지 자네도 알지 않나 생크림을 한 스푼 떠먹고 잠드는 습관 달콤한 입술을 혀로 핥으며 나는 계속 잤지 뭐야 잠결에 다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네 이번엔 사부로였지 ..  (혼다의 오·세계五·世界 살인 사건)



  우리 집 다섯 살 작은아이는 장난감 자동차를 갖고 놀다가, 자동차끼리 쿵 부딪히게 해서 ‘사고가 났다!’ 하고 외칩니다. 그러나 여느 어른이 보기에 장난감 자동차는 깨지지도 망가지지도 부서지지도 않습니다. 아이 마음속에서는 두 장난감 자동차가 와장창 깨지거나 망가지거나 부서졌습니다. 아이는 이내 두 장난감 자동차를 한손에 쥐고 하늘로 날립니다. 사고가 난 자동차는 곧바로 말끔해졌고, 어떤 추진동력장치도 없이 하늘을 멋지게 납니다.


  아이가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이가 누리는 하루를 헤아립니다. 노는 아이들은 저마다 새롭게 이야기를 꾸밉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신나게 놀면서 온갖 이야기를 마음껏 짓습니다.


  아이들 놀이짓은 모두 ‘실험정신’이 가득합니다. 아이들은 낡은 옛 틀에 맞추어서 놀지 않습니다. 언제나 ‘바로 오늘 이곳(현대)’에 맞추어 즐겁게 놉니다.


  문학평론을 하는 분들은 어느 시는 서정시요 어느 시는 실험시라고 금을 긋지만, 굳이 금을 그어야 하지 않습니다. 평론을 해야 하니 금을 그을 테지만, 평론이 아닌 ‘시를 쓴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을 헤아리고 ‘시를 쓴 사람이 지은 삶’을 돌아본다면, 어떤 시이든 제 삶을 찬찬히 아로새기려고 흘린 눈물과 땀방울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작년 겨울의 일이었네 우리는 그 뒤로 두 번 다시 그때의 감정으로 연주할 수 없었다, 라고 말하면 너희는 오우, 약간 과장된 표정을 지을 수도 있겠지 ..  (밍따오 익스프레스 C코스 밴드의 변)


.. 뒤뜰의 작은 창고에서 처음으로 코밑의 솜털을 밀었고 / 처음으로 누이의 작은 치마를 훔쳐 입었다. 생각해보면 / 차라리 쥐고 되고 싶었다 / 꼬리도 없이 늘 그 모양인게 싫어 ..  (너무 작은 처녀들)



  황병승 님은 ‘여장 남자’일까요? 황병승 님을 둘러싼 이웃이나 동무는 ‘여장 남자’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습니다. ‘여자처럼 꾸미는 남자’가 있고, ‘남자처럼 꾸미는 여자’가 있습니다. ‘나는 여자이고 싶은데 왜 남자로 태어났을까?’ 하고 끝없이 물으면서 괴로운 사람이 있고, ‘나는 왜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났는가?’ 하고 가없이 되물으면서 고단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이러한 뜻이 있습니다.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김없이 어떤 뜻이 있습니다. 괴롭거나 고단하지만, 아프거나 슬프지만, 이 삶을 그만두지 않으면서 뜻을 찾고 길을 헤아립니다. 이 삶이 온통 가시밭길이지만, 이 가시밭길을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 걸음씩 새롭게 내딛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태어난 새 목숨일까요? 무엇을 하면서 즐거운 보람을 누릴 새 숨결일까요? 어디에서 어떻게 살면서 어떤 곳을 바라보아야 내 마음에 기쁜 노래가 흐를 만할까요?



.. 이봐, 이 글은 지옥에서 적는 글. / 너는 끝까지 나의 손을 붙잡으려 했다고 우기지만, 입술을 쫑긋거렸을 뿐 / 너는 너무 많은 술과 알약에 빠져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  (How does it feel?)


.. 우리는 이상하게 예쁘게 지구에 남아 / 밤 풍경을 바라보는 쓸쓸한 궤도에서 ..  (앨리스 맵map으로 읽는 고양이좌座)



  내가 스스로 지옥이라고 생각하면 내 삶은 날마다 지옥입니다. 내가 스스로 천국이라고 여기면 내 하루는 언제나 천국입니다. 내가 스스로 즐겁다고 생각하면, 김치 한 조각이랑 찬밥을 먹으며 잔칫밥입니다. 내가 스스로 지겹다고 여기면, 잔칫상을 번듯하게 차렸어도 더없이 짜증스럽고 싫습니다.


  내 마음에 하느님이 있습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삶을 짓도록 북돋우는 하느님이 곱게 웃으면서 나를 쳐다봅니다. 네 마음에 하느님이 있습니다. 네가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사랑을 짓도록 도와주는 하느님이 맑게 노래하면서 너를 바라봅니다.


  내 하느님과 네 하느님이 만납니다. 아침에 흐르는 멧새 노랫소리를 함께 들으면서 두 하느님이 만납니다. 저녁에 퍼지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같이 누리면서 두 하느님이 춤을 춥니다.


  시골에서 울려퍼지는 시골노래가 도시로 흩어집니다. 도시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시골로 번집니다. 하늘이 매캐하거나 뿌옇더라도 온누리를 가득 채우는 밤별은 눈부시게 빛납니다. 이곳에 앓아누운 할아버지가 있으면, 저곳에 새로 태어나는 아기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숨을 거둔 슬픈 이웃 할머니가 있으면, 저곳에 새로 태어나서 무럭무럭 자라는 기쁜 이웃 아이가 있습니다.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를 차근차근 읽으면서 삶노래와 사랑노래와 꿈노래를 가만히 부릅니다. 4348.5.1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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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6-11-04 17:46   좋아요 0 |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879993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8&aid=0003667793

황병승이라는 사람을 놓고 이런 대자보가 나왔다고 합니다.
별점을 1점으로 바꾸려다가
그래도 2점을 주는 쪽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늑한 얼굴 랜덤 시선 12
한영옥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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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4



시와 입술

― 아늑한 얼굴

 한영옥 글

 랜덤하우스 펴냄, 2006.4.10.



  아이가 어버이 볼에 입을 맞춥니다. 어버이도 아이도 볼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릅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어른과 어른이 입을 맞춥니다. 두 어른은 새로운 마음이 되어 볼이 발갛게 달아오릅니다. 입술은 그냥 입술일 뿐이지만, 이 입술과 저 입술이 만나서 새로운 숨결이 흐릅니다. 바람을 받아들이는 입은 언제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서 둘레에 따사롭거나 차갑거나 포근하거나 매몰찬 기운을 퍼뜨립니다.



.. 들나물꽃은 봄에 피네 / 산나물꽃은 여름에 피네 // 더러는 늦어져 / 여름에도 들나물꽃은 피지 / 가을에도 산나물꽃은 피지 ..  (꽃피는데)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입술이요, 미움을 외칠 수 있는 입술입니다. 꿈을 노래할 수 있는 입술이요, 아픔을 터뜨릴 수 있는 입술입니다. 참말을 할 수 있는 입술이면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입술입니다.


  어떤 입술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저마다 어떤 입술이 되어 하루를 여는가요? 서로서로 어떤 입술로 마주할 때에 기쁘거나 즐겁거나 서운하거나 섭섭할까요?



.. 보슬비 마알갛게 얼비치고서 / 국수나무 순 소복소복해지면 / 국수나무 순 삶아 먹고 / 내처 장대비 쏟아지고서 / 국수버섯 소복소복해지면 / 버섯국 끓여 먹으며 ..  (봄비로, 가을비로)



  한영옥 님 시집 《아늑한 얼굴》(랜덤하우스,2006)을 읽습니다. 조곤조곤 흐르는 삶노래를 읽으면서 내 얼굴은 내가 보기에 어떠한가 하고 헤아립니다. 집에 거울을 두지 않고, 어디 가서도 거울을 보지 않기에 내 낯빛이 어떠한지 잘 모릅니다. 다만,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내 낯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쁠 때에는 기쁜 낯빛이 될 테고 슬플 때에는 슬픈 낯빛이 되겠지요. 아플 때에는 아픈 낯빛이 되다가는 고단할 때에는 고단한 낯빛이 될 테고요.


  반가운 사람하고 있으면 반가운 낯빛이 됩니다. 거북한 사람이랑 있으면 거북한 낯빛이 됩니다.


  문득 다시 생각합니다. 내가 반갑게 여길 사람은 나를 반갑게 맞이할까요? 내가 거북하게 여길 사람도 나를 거북하게 마주할까요? 나를 마주해야 하는 이웃이나 동무는 내가 반가울까요, 거북할까요?



.. 목화 송이인 양 굴뚝에 들어가서 / 저녁 연기로 보송보송 다시 피는 / 그런 마알간 날은 만나는 얼굴마다 / 볼수록 목화솜처럼 푸근하여라 ..  (그런 마알간 날)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기에 낯빛을 잘 알지 않습니다. 낯빛은 ‘살갗 빛깔’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낯빛은 ‘마음 빛깔’을 나타냅니다.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한 사람은 환한 낯빛입니다. 마음이 아픔으로 얼룩진 사람은 파리한 낯빛입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은 발그스름하게 따스한 낯빛입니다. 마음이 어둠으로 그득한 사람은 새까만 낯빛입니다.


  어느 곳에 깃들든 따사로운 보금자리라고 느끼는 마음이라면, 어느 곳에 깃들더라도 환한 낯빛이 됩니다. 어느 곳에 머물든 갑갑한 감옥이라고 여기는 마음이라면, 어느 곳에 머물든 새까만 낯빛이 됩니다.


  우리 낯빛은 마음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 낯빛은 마음을 스스로 바꾸면서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기에 감추거나 숨기거나 바꾸는 낯빛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려 할 때에 비로소 바꿀 수 있는 낯빛입니다.



.. 눈 비비며 일어나 몇 걸음 하면 / 큰엄마 계시고 작은엄마 계셨다 / 사촌 언니랑 메뿌리 캐어가면 / 큰엄마 메떡 쪄주시고 / 사촌 동생이랑 소루쟁이 뜯어가면 / 작은엄마 소루쟁잇국 끓여주셨다 / 큰집 사시는 할머니는 쇠죽가마에서 / 뜨끈한 감자알 수북이 골라주셨다 ..  (홍초 잎사귀)



  시집 《아늑한 얼굴》을 생각합니다. 시를 쓴 한영옥 님은 이녁한테 아름답거나 즐거웠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포근한 말씨로 삶을 노래합니다. 시를 쓴 한영옥 님 스스로 아프거나 고되거나 벅차거나 까마득한 이야기를 되새길 적에는 그야말로 아프거나 고되거나 벅차거나 까마득한 말씨로 바뀌어 삶을 풀어놓습니다.


  싯말 하나는 억지로 꾸밀 수 없습니다. 이런 낱말과 저런 말투로 싯말을 엮더라도 속내를 감출 수 없습니다. 시는 문장기교나 수사법이 아닙니다. 시는 문예사조나 유행이나 흐름이 아닙니다. 시는 오로지 마음입니다. 싯말 한 마디는 언제나 마음빛이요 마음결이며 마음씨입니다.



.. 그가 없는 지금, /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는다 /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 서로를 말아들이며 / 얼굴 속에 집어넣으려 애쓰고 있다 ..  (아슬아슬한 몸)



  그를 만나는 나는 그이 때문에 시를 쓰지 않습니다. 그를 만나는 ‘내’가 있기에, 나 스스로 생각을 가다듬고 마음을 추슬러서 시를 씁니다. 그를 만나기에 새롭게 노래하는 몸과 머리와 마음이 될 테지만, 그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바뀌거나 달라지는 것은 바로 ‘내’ 몸이요 머리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내 시를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마주하는 ‘내(글쓴이)’가 스스로 시를 바꿉니다. 그 사람을 떠올리거나 되새기는 ‘내(글쓴이)’가 바로 시를 새롭게 쓰는 숨결이고 손길입니다.


  사랑에 입을 맞추고, 삶에 입을 맞춥니다. 꿈자락에 입을 맞추고, 노랫가락에 입을 맞춥니다. ‘내(글쓴이)’ 입술은 사랑과 삶과 꿈을 노래와 같이 맞추면서 춤을 추고 싶은 마음입니다. 4348.5.1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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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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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4



어머니가 물려주는 노래

― 해질녘에 아픈 사람

 신현림 글

 민음사 펴냄, 2004.7.10.



  말은 어머니가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랄 적에 아기는 어머니가 여느 때에 하는 말을 고스란히 듣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느긋하게 자라고 나서 이 땅에 태어난 뒤에는 어머니 품에서 젖을 먹으면서 새롭게 자라는데, 이동안 어머니가 아기한테 들려주는 말을 새삼스레 듣습니다.


  아기한테는 어머니 뱃속에서 지낼 무렵과 어머니 젖을 빨며 자라는 동안에 배우는 말이 새롭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 목소리랑 손길을 나란히 누리면서 말을 노래처럼 듣다가, 이 땅에 태어난 뒤에는 어머니 눈길이랑 몸짓을 나란히 지켜보면서 말을 춤사위처럼 익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한테서 말을 물려받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말을 물려받았고, 우리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말을 물려받았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어머니가 아이를 낳아 온 사랑으로 말을 물려줍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쓰는 말은 아스라히 먼 옛날부터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면서 물려준 말입니다.



.. 가난에 갇힌 것보다 / 힘없는 나라에 사는 일보다 / 체념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서러워 / 슬픈 눈을 땅에 떨어뜨리며 ..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 무섭게 흐르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 시간 / 달리는 바다는 달리지 않는 바다 / 시간이란 아예 없는 겁니다 최대의 재산인 꿈이 있을 뿐이죠 ..  (우울한 로맨스-휘말려 가다)



  말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찬찬히 물려줍니다. 어머니는 따사로운 사랑노래를 물려주고, 아버지는 슬기로운 삶노래를 물려줍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따사롭게 흐르는 사랑으로 노래와 같은 말을 물려주고, 아버지는 언제나 한결같이 기쁜 삶으로 웃음짓는 말을 물려줍니다.


  아기를 낳으려 한다면, 어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로서 이녁 삶을 새롭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기를 낳으려 하는 어버이는 돈만 많이 벌어서는 안 됩니다. 아기는 돈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사랑을 바랍니다. 아기가 바라는 사랑을 물려줄 수 있게끔, 돈은 좀 적게 벌더라도 사랑을 한결같이 물려줄 수 있을 만한 너른 가슴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아기 눈망울을 바라보셔요. 아기 눈망울은 오직 어버이 사랑을 바랍니다. 아기가 피자나 케익을 바랄까요? 아기가 떡이나 밥을 바랄까요? 아기는 오직 어머니 젖이랑 물을 조금씩 받아먹으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젖이랑 물이랑 바람, 이렇게 세 가지만 있으면 아기 몸은 씩씩하게 큽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어야지요. 바로 사랑스러운 말입니다. 노래로 불러서 물려주는 사랑스러운 말이 있어야 합니다.



.. 오래된 꿈과 비밀을 간직한 부드러운 사람이고 싶어 / 부드러움은 / 망가진 것을 소생시킬 마지막 에너지라 믿어 ..  (해질녘에 아픈 사람-세월아,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를 더 아프게 해라)



  갓난쟁이한테 그림책이나 동화를 읽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갓난쟁이는 이야기책을 받아먹지 않습니다. 갓난쟁이는 책을 읽어 주는 ‘목소리’만 받아먹습니다. 그러니까, 아기를 옆에 누이고 영어 그림책이나 영어 동화책을 읽어 준다면, 아기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어버이는 아기가 일찌감치 영어를 잘 배우기를 바랄는지 모르나, 아기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아요. 아기는 오직 한 가지 목소리만 듣고 싶습니다. 저를 이 땅으로 부른 어버이가 얼마나 깊고 너른 사랑으로 저를 바라보는가 하는 대목을 알고 싶습니다.


  일하면서 부르는 모든 노래는 삶노래이면서 자장노래이고, 일노래이면서 놀이노래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여느 때에 흔히 부르는 일노래를 귀여겨들은 뒤 저희끼리 놀면서 이 일노래를 놀이노래로 삼아서 부릅니다. 나중에는 일노래를 조금씩 바꾸어요. 노랫가락과 노랫말을 아이 나름대로 바꾸어 새로운 놀이노래를 짓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 곁이나 둘레에서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모든 말을 다 받아먹으니까요. 아이들이 기쁜 눈망울로 아름답게 받아먹을 만한 가장 사랑스럽고 착하면서 참다운 말을 하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어른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운 숨결이 되어야 하고, 어버이라면 누구나 가장 착하고 참다우면서 고운 넋이어야 합니다.



.. 나는 나를 깨워 이렇게 말하겠죠 / “내가 나를 가질 수 없는데 /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서 뭐 하냐”고요 ..  (가질 수 없는 건 상처랬죠?)


.. 사랑 안에 들어가 살고 싶어 / 사랑으로 이승을 건너고 싶어 .. (사랑)



  신현림 님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민음사,2004)을 읽습니다. 사랑을 바라고, 사랑을 찾으며, 사랑을 노래하고 싶은 신현림 님이 젊은 날에 쓴 시를 그러모은 책입니다(그렇다고 신현림 님이 이제는 ‘안 젊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해질녘에 아픈 사람은, 해뜰녘에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해질녘에만 아프고, 해뜰녘에는 안 아플까요. 해질녘뿐 아니라 해뜰녘에도 아플까요.



.. 전쟁이나 대구 참사처럼 사람이 만든 재앙은 / 어미가 막을 순 없지만 / 네가 그린 코끼리를 하늘로 띄울 수 있고 / 어미의 눈물로 한 사발 밥을 만들 수 있고 / 어미의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 희망의 폭동을 일으킬 수 있지 / 고향 저수지를 보면 나는 멋진 쏘가리가 되고 / 너를 보면 섬이 된단다 / 너라는 근사한 바다를 헤엄치는 섬 ..  (싱글 맘-엄마는 너를 업고 자전거 탄단다)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읽으면 ‘싱글 맘’ 이야기가 흐릅니다. 신현림 님은 가시내를 낳아 씩씩하게 이 아이와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이가 받아먹을 삶노래를 언제나 싱그러이 부르고, 아이와 함께 어른도 함께 누릴 사랑노래를 늘 해맑게 부릅니다.


  때로는 아픔이 사무쳐서 슬픈 노래를 부르지만, 아이 얼굴을 바라보면서 새삼스레 빙그레 웃음짓고는 씩씩하게 기쁜 노래로 고쳐서 부릅니다. 이 지구별에서 살아갈 기쁜 숨결로 거듭나려고 스스로 애씁니다. 이 땅에서 꿈꾸며 노래하는 예쁜 사람이 되려고 스스로 온힘을 기울입니다.



.. 만화는 단추만한 구멍을 뚫어 여유로운 바람을 불어넣는군.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란 말에 사랑 받는 기분에 휩싸여 오전 열한 시에 쏟아지는 햇살같이 따뜻하고, 창밖 행인들이 아름다워 뵈는군. 시냇물엔 하얀 벚꽃잎이 쌓여 흐르고 봄바람에 보들보들 길이 미끄러지는군 ..  (순정 만화에 중독되겠네)


.. 벨벳처럼 부드러운 어둠 속에 내가 있고 / 여자의 몸보다 사람의 몸이길 바라는 내가 있소 ..  (우울한 육체의 시-생각이 많은 몸)



  어머니랑 아버지가 들려주는 노래를 물려받은 아이는 새로운 어른으로 자랍니다. 새로운 어른이 된 아이들은 이 땅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다시금 새로운 노래를 부르면서 새로운 아이를 낳습니다.


  어제만 바라본다면 슬픔만 가득할 수 있습니다. 오늘만 바라본다면 까마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에 이어 찬찬히 찾아올 모레를 바라본다면, 이 앞날을 눈물이나 슬픔으로만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 발 새롭게 내딛을 모레에는 기쁜 웃음이 넘치도록 맑은 노래를 불러야지요.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활짝 웃음꽃을 피우는 노래를 불러야지요.


  사람이 되는 노래를 부릅니다. 사랑이 되는 노래를 부릅니다. 삶이 되는 노래를 부릅니다. 말 한 마디는 사람노래이면서 사랑노래이고 삶노래입니다. 너와 나 사이를 가르는 쇠가시울타리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아름답게 흐르는 무지개가 되도록 노래를 부릅니다.



.. 나무마저 없다면 이곳은 딱딱한 피자 한 덩이요 / 삭막하오 요즘 사람들은 폭탄 같소 성이 나 있소 ..  (한잔의 서울을 들이마시오)


..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스스로 노래가 됩니다. 꽃씨를 심는 사람은 스스로 꽃이 됩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파란 숨결로 웃는 사람은 스스로 바람이 됩니다.


  무엇이 되든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무엇이 되든 저마다 이루는 꿈입니다. 이리하여,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삶을 짓는 어버이나 어른이라면, 가슴에 고운 꿈씨를 심기 마련입니다. 너와 내가 한넋이 되어 따사로이 손을 맞잡는 삶을 이루고 싶은 꿈씨를 심습니다. 우리가 함께 큰 사랑이 되어 넉넉하게 웃음짓는 하루를 짓고 싶은 노랫말을 씨앗으로 심습니다.


  어머니가 물려준 사랑스러운 말을 물려받은 나는 어느새 새로운 어머니가 됩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아름다운 말을 이어받은 나는 어느덧 새로운 아버지가 됩니다. 너와 나는 이곳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활짝 웃음짓습니다. 4348.5.10.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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