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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의 불 ㅣ 시작시인선 80
이대흠 지음 / 천년의시작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7
시와 역사책
― 물 속의 불
이대흠 글
천년의시작 펴냄, 2007.1.30.
나무는 나무도감에 없습니다. 나무는 숲에 있습니다. 풀은 식물도감에 없습니다. 풀은 들에 있습니다. 사랑은 책이나 영화에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들 가슴에 있습니다. 역사는 역사책이나 대학교에 없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우리가 짓는 삶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나무와 풀과 사랑과 역사를 책이나 도감이나 영화나 신문이나 학교 같은 데에서만 찾기 일쑤입니다. 나무를 찾으려고 숲에 가는 사람이 드물고, 풀을 사귀려고 들을 가꾸는 사람이 드물며, 사랑을 일구려고 마음을 가다듬는 사람이 드뭅니다.
책이나 영화를 본대서 사랑을 알지 않습니다. 여행이나 관광이나 답사를 다닌다고 해서 역사를 배우지 않습니다. 인문 강좌를 듣거나 인문 지식을 쌓는다고 해서 역사를 바로알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바로세울 때에 비로소 바로서는 역사입니다.
.. 찌시가 익어가고 / 누이와 나는 진흙을 빻아서 / 떡을 만들고 아이를 만들고 // 어머니는 장에 가셨고 .. (모래의 금요일 3)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는 숨결은 육아책에 없습니다. 학교에서도 사랑을 가르치거나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기를 몸에 품고 마음에 담아서 열 달 동안 아끼면서 이 땅으로 나오도록 이끈 어머니 마음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젖을 물리는 손길이 사랑이고, 기저귀를 빠는 손길이 사랑이며, 젖떼기밥을 먹이고 몸을 정갈하게 씻기고 자장노래를 부르는 온갖 손길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아기를 사랑하는 넋은 바로 어머니처럼 아버지 가슴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될 사람은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는다고 해서 사랑을 익히지 못합니다. 아기를 품에 안아서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놀리면서 날마다 따사롭게 어루만지고 아낄 때에 비로소 가슴 가득 일어나는 사랑을 깨닫습니다.
삶을 읽으면서 사랑을 알아야 하고, 삶을 가꾸면서 사랑을 지어야 합니다. 삶을 노래하면서 사랑을 나누어야 하고, 삶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 철푸덕 철푸덕 뒤척이며 / 철푸덕 철푸덕 지고 나고 / 이 나라 강이 그렇고 산이 그렇고 / 이 나라 바다도 철푸덕 철푸덕 .. (철푸덕 철푸덕)
이대흠 님이 빚은 시집 《물 속의 불》(천년의시작,2007)을 읽습니다. 물 속에 있는 불이란 무엇일까요. 물 속에 잠긴 불이란 무엇일까요. 물 속에서 타오르는 불이란 무엇일까요.
이대흠 님은 싯말로 어떤 역사 한 가지를 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녁 가슴에 사랑이라는 숨결로 갈무리하는 역사를 싯말로 들려주려고 합니다.
역사는 싯말로 노래할 수 있을까요. 역사는 싯말로 갈무리해서 이웃들과 나눌 수 있을까요. 역사는 싯말로 지어서 이 땅 아이들한테 차곡차곡 물려줄 수 있을까요.
..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 하는 사람을 보면 일 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 (동그라미)
봄은 바람과 함께 찾아옵니다. 따사롭게 부는 바람이 겨울눈을 깨우고 들풀을 일으킵니다. 봄은 백화점이나 짧은치마에는 없습니다. 봄은 달력이나 인터넷에 없습니다. 사람들 가슴에 따순 바람을 바라는 넋이 있기에 봄은 해마다 기쁘게 찾아옵니다.
정치권력자는 왜 우악스러운 짓을 일삼을까요? 경제 우두머리는 왜 바보스러운 짓을 자꾸 꾀할까요? 정치권력을 거머쥐면 이녁한테 무엇이 기쁠까요? 돈을 온통 긁어모으면 이녁 삶이 얼마나 빛날까요?
군대를 앞세워 대통령이 된다 한들, 숨을 못 쉬면 바로 죽습니다. 큰돈을 앞세워 어마어마한 돈을 긁어모은다 한들, 숨을 마시지 못하면 바로 죽습니다. 기껏 쉰 해쯤 독재권력을 부린다 한들, 애써 100조 원이나 1000조 원을 주물럭거린다 한들, 맑고 싱그러운 바람은 돈으로 사들일 수 없습니다.
.. 도시를 둘러싼 산 속에는 / 귀신들이 우글거린다 머리가 텅 빈 귀신들이 / 술을 마신다 얼핏 보기에는 사람 같은 / 숲 속의 새들은 다른 하늘로 날아가고 / 피어난 꽃들은 모가지가 꺾였다 .. (물 속의 불 6-위대한 탄생)
봄바람이 불지 않으면 도시는 와장창 무너져야 합니다. 봄바람이 불어서 온누리를 따스하게 감싸지 않으면 도시는 그대로 무너져야 합니다. 봄이 오지 않으면 시골에서 아무것도 못 심고 아무것도 못 거두겠지요.
한 해라도 봄이 없다면 시골뿐 아니라 도시도 무너집니다. 한 해라도 겨울이 없다면, 여름과 가을이 없다면, 지구별 사람들은 모조리 죽어야 합니다.
역사란 무엇이고, 문화와 예술이란 무엇이며, 경제와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읽어야 하며,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역사책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하고,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우리가 이야기할 역사는 어떤 숨결이어야 할까요.
..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발바닥에 / 입을 맞추라 붉은 혀로 / 그가 살아온 내력에 침을 묻히라 .. (물 속의 불 3-미친 꽃)
동그란 지구별은 둥글게 돕니다. 동그란 지구별을 둥근 해가 비춥니다. 지구별은 스스로 둥글게 돌면서 둥근 해 둘레를 또 둥글게 돕니다. 풀과 나무가 베푸는 열매는 으레 둥글고, 어버이는 아이한테 둥근 마음을 나누어 줍니다. 아이들은 서로 둥글게 어우러지고, 둥글둥글 활짝 웃습니다.
시인을 낳은 시골 어머니는 언제나 둥글둥글 노래하듯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시인을 낳은 시골 어머니는 시를 쓴 적도 읽은 적도 없으리라 느끼는데, 시인을 낳은 시골 어머니는 역사책이나 문학책에 이녁 이름을 올리지 못할 테지만, 시를 쓰고 역사를 말할 줄 아는 아이를 따사롭게 돌보면서 사랑했습니다.
시를 낳는 힘이 어머니한테 있습니다. 역사를 적는 손길이 어머니한테서 태어납니다. 시가 노래로 거듭나는 숨결이 바람을 타고 어머니 가슴으로 찾아듭니다. 역사를 노래처럼 부르면서 이야기꽃으로 피울 수 있는 사람은 봄바람을 마시면서 가슴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4348.3.30.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