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깊은 당신 편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109
김윤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0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8



시와 님

― 강 깊은 당신 편지

 김윤배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91.10.30.



  내 님은 늘 나한테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으니까요. 내 님은 바깥에 없습니다. 바깥에 있는 사람은 짝이요, 짝님입니다. 내가 그릴 수 있는 내 님은 바로 내 마음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 님은 옆이나 곁에 없습니다. 옆이나 곁에 있는 사람은 옆님이나 곁님입니다. 내 님은 그저 님이면서 모든 것을 이루는 하느님입니다.


  예배당에서 님을 찾는 사람은 ‘예배당님’을 섬깁니다. 예배당님이라고 해서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예배당님을 섬기느라, 내 마음속에 깃든 님을 못 볼 뿐입니다. 종교에서 님을 찾는 사람은 ‘종교님’을 모십니다. 종교님이라고 해서 얄궂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그예 종교님을 모시느라, 내 가슴속에서 사랑으로 피어나는 하느님을 못 알아볼 뿐입니다.



.. 당신 슬픈 살 속에서 눈물꽃 아름다운 날은 몸 내내 흐르는 물소리 풀잎 소리 들었습니다 눈물꽃 시들고 슬픔으로 숨쉬던 살 시들어 당신은 당신 영혼 만나기 위해 당신 속으로 길 떠납니다 ..  (눈물꽃 아름다운 날은)



  앵두나무를 바라보면서 앵두나무님을 느낍니다. 모과나무를 바라보면서 모과나무님을 느낍니다. 구름을 바라보면서 구름님을 느끼고, 참새를 바라보면서 참새님을 느껴요.


  우리를 둘러싼 숱한 목숨붙이는 저마다 고운 님입니다. 그리고, 나도 나답게 고운 님입니다. 서로 아낄 님이면서, 서로 사랑할 님입니다. 서로 반가울 님이면서, 서로 고마운 님입니다.



.. 바람 소리 무섭습니다 저 바람의 아우성에 맡겨 불씨가 되고 싶습니다 긴긴 밤 눈 내리고 온 산 눈 덮여 당신 먼 날은 스스로 불 일으켜 타오르고 싶습니다 ..  (예다원 가는 길)



  김윤배 님 시집 《강 깊은 당신 편지》(문학과지성사,1991)를 읽습니다. 이 시집은 김윤배 님한테 그리운 님한테 띄우는 글이라고 할 만합니다. 님을 그리는 글이요, 님을 노래하는 글입니다.


  님은 글쓴이가 좋아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님은 아득히 먼 누구일 수 있습니다. 님은 글쓴이가 짝사랑으로 애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님은 우리 둘레에서 아프거나 슬픈 이웃일 수 있습니다. 님은 바로 글쓴이 모습일 수 있습니다.



.. 그리운 사람들 몸 냄새 옆에 다가서면 그리운 사람들 숨소리 말소리 들립니다 그리운 사람들 그리움 삭아 그 눈빛 더욱 정겹고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생각 때없이 눈물입니다 ..  (박물관 입구에서)



  사랑을 씨앗으로 심으니 사랑을 열매로 거둡니다. 꿈을 씨앗으로 심어서 꿈을 열매로 거둡니다. 이야기를 씨앗으로 심으면 이야기를 열매로 거두어요. 우리는 저마다 무엇을 씨앗으로 심을까요? 우리는 우리 삶에 어떤 씨앗을 심고 어떤 열매를 거두는 하루를 누릴까요? 우리는 내 마음속 고운 님한테 어떤 말을 속삭이고, 어떤 생각을 밝히며, 어떤 길을 걸어갈까요?



.. 나를 버린 것은 여름밤 풀잎에 듣는 풀벌레 소리였나니 그것들은 나를 길들였으므로 나를 버릴 수 있습니다 내가 길들였으나 내가 버릴 수 없는 사람 나를 길들였으나 나를 버릴 수 없는 사람 내게 있어 그 사람 때로 시가 됩니다 ..  (시)



  시를 쓰려면 시를 써야 합니다. 시를 쓰려고 하면서 소설을 생각하면 시를 못 씁니다. 시를 쓰려고 했는데 춤만 춘다면 춤만 출 뿐입니다. 시를 쓰려고 했다가 담배만 태운다면 담배만 줄줄이 태우고 말지요.


  오로지 하나를 생각합니다. 오로지 하나에 온마음을 싣습니다. 오로지 하나에 모든 기운을 실어서 삶을 짓습니다. 시집 《강 깊은 당신 편지》에 흐르는 단출한 노랫말은 내가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길에서 마음을 가다듬는 몸짓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전거는 자동차나 오토바이처럼 탈 수 없습니다. 자전거는 오로지 자전거답게 탈 뿐입니다. 두 다리를 써야 하고, 두 손과 온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자동차는 자전거처럼 탈 수 없습니다. 자동차는 오로지 자동차에 맞게 손발을 쓰고 눈을 움직이면서 몰아야 합니다.


  님을 그리는 마음을 시로 쓴다면, 오로지 님을 그리기만 해야 하고, 님을 마음에 담아야 하며, 님을 싯말에 얹어야 합니다.



.. 바람 소리 자라듯 숲이 자랍니다 숲그늘 아래 몸 무거운 바위가 된 긴 침묵과 침묵을 지켜온 당신의 체온이 이끼로 돋아 풍화만큼 더디게 바위를 덮습니다 ..  (산이 자라는 동안)



  봄에 봄바람이 붑니다. 봄이니까요. 여름에는 여름바람이 불어요. 여름이니까요. 철에 따라 바람이 바뀝니다. 철바람입니다. 봄을 봄답게 하는 봄바람이고, 봄바람은 우리한테 봄노래를 들려줍니다.


  님이기에 님을 노래하는 바람이 붑니다. 님을 그리는 마음이 님을 노래하는 싯말로 거듭납니다. 그러니까, 시는 누구나 씁니다. 시를 쓰려고 마음을 기울일 줄 안다면, 누구나 시를 쓰고 언제나 시를 씁니다. 손에 연필과 종이만 쥐면 됩니다. 기쁘게 노래하면서 연필을 사각이면 됩니다. 즐겁게 꿈을 꾸면서 종이에 이야기를 차곡차곡 쓰면 됩니다. 봄바람을 마시는 사람은 봄을 노래하는 시를 쓰고, 담뱃재를 털며 한숨을 쉬는 사람은 담뱃재를 털며 한숨을 쉬는 삶을 시로 씁니다. 4348.4.1.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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