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시간 창비시선 152
백무산 지음 / 창비 / 1996년 9월
평점 :
일시품절


시를 말하는 시 89



시와 사람

― 인간의 시간

 백무산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6.9.1.



  며칠 앞서부터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바야흐로 봄이니까요. 우리 집 마당과 뒤꼍에서 사는 개구리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으나, 제법 먼 곳에 있는 어느 논에는 개구리가 깨어나서 노래합니다. 해질녘 뒤꼍에 서서 가만히 바람을 쐬다 보면, 바람을 타고 우리 집까지 퍼지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아스라이 듣습니다.


  어느 논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어느 논에서 개구리가 맨 먼저 깨어났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옛날 같으면 논개구리는 걱정없이 깨어나서 근심없이 알을 낳았으나, 오늘날에는 논개구리가 그야말로 바삐 움직여야 합니다. 기계가 논바닥을 한 차례 뒤집고, 기계가 논바닥을 한 번 썰며, 기계가 논바닥을 한 번 훑어서 어린 벼를 심으니까요. 게다가 이 다음에는 농약입니다. 할매와 할배가 둘이서 논뙈기 구석구석 농약을 뿌리기도 하지만, 요새는 농협 헬리콥터로 농약을 엄청나게 뿌려댑니다.



.. 솔숲길 헐고 큰길 공사 한창인데 / 길가 집들 헐리고 집 마당의 / 고목 매화나무들 길 밖에 나앉아 / 포클레인 삽날이 밑둥에 척 걸쳐질 참인데 ..  (매화)



  농협 헬리콥터가 마을마다 아침저녁으로 논을 훑는 날이면 아주 시끄러우면서 고요합니다. 기곗소리 때문에 시끄럽고, 개구리와 새가 모조리 사라지기 때문에 고요합니다. 농약을 듬뿍 싣고 신나게 뿌리는 헬리콥터는 다른 모든 소리를 잠재우면서, 다른 모든 소리를 죽입니다.


  그런데, 시골 할매와 할배로서는 농협에 돈을 주어 헬리콥터를 사서 농약을 뿌릴밖에 없습니다. 늙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는 ‘도시로 떠난 아이들’이 시골로 돌아와 논일을 거들어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도시로 떠난 아이들도 시골로 돌아와서 바쁜 일철에 농약을 뿌려 주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골 어버이한테 ‘이제 농약 그만 뿌리라’고 말하거나 알려주거나 가르칠 만한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아주 드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전문직이나 공장 노동자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도시로 가서 논일이나 밭일을 익히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도시로 가서 논일과 밭일을 새롭게 배운 뒤 시골로 돌아와서 즐겁게 일하려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 꿈을 좇을 때와 생활에 충실할 때 / 어느 때를 위해 사는가 / 어느 때가 일상이며 어느 때가 꿈이냐 ..  (부리가 붉은 새)



  아스라이 먼 옛날까지 아니더라도,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는 독재정권 정책이 이 나라에 휩쓸기 앞서까지, 이 나라 사람들은 ‘해와 바람과 비와 흙과 풀이 어우러지는 밥’을 먹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농약과 비료와 비닐과 항생제를 몰고 시골을 뒤죽박죽으로 흔들 무렵부터 이 나라 사람들은 ‘농약과 비료와 비닐과 항생제로 키우는 밥’을 먹습니다.


  쌀이라고 다 같은 쌀이 아닙니다. 푸성귀라고 다 같은 푸성귀가 아닙니다. 돈을 받고 내다팔 ‘생산품’을 땅에서 뽑아내야 하는 ‘산업’이 되다 보니, 사람들은 더 값싸고 푸짐한 것을 좇습니다. 몸을 헤아리는 아름다운 밥을 찾지 않고, 돈을 따지는 셈속이 됩니다.


  유기농이나 친환경이라는 테두리가 아니라, ‘몸을 살리고 마음을 가꾸는 밥’을 먹을 노릇인데, 왜 우리는 이 길하고 자꾸 엇나가야 할까요. 왜 이 나라는 전쟁무기와 물질문명과 문화예술과 학교교육을 키우는 데에 무시무시하도록 엄청난 돈을 퍼부으면서, 막상 ‘밥다운 밥’을 먹도록 땅을 살리거나 북돋우는 길에는 한푼조차 안 쓸까요?


  농약을 만들거나, 농약 뿌리는 헬리콥터를 만드는 데에 참으로 큰돈을 들이는 이 나라입니다. 이와 달리, 흙을 기름지게 살리거나 시골지기가 흙을 알뜰히 가꾸는 길에는 돈 한푼 안 씁니다.



.. 내 이십대 기억을 찾을 길 없다 / 남긴 것도 없거니와 살았던 기억도 희미하다 / 폭발 직전의 흉기를 지니고 살았던 감정 기억뿐 / 열네 시간 열여섯 시간 기계 앞에 섰던 기억뿐 ..  (두 그림)



  백무산 님이 빚은 시집 《인간의 시간》(창작과비평사,1996)을 읽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 아리송한 사회를 마주하는 ‘조그마한 사람’으로서 제 목소리를 내는 시를 담은 책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 수 없도록 짓누르거나 짓밟는 이 땅에서 ‘조그마한 사람’으로서 두 다리 꺾이지 않고 우뚝 선 몸짓으로 쓴 시를 엮은 책입니다.


  책끝에 어느 문학평론가가 퍽 재미난 이야기를 붙입니다. 웬만한 시집은 책끝에 붙이는 ‘시평(시 비평)’이 대단히 재미없을 뿐 아니라, 한국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알쏭달쏭한 한자말과 영어를 뒤섞는데, 《인간의 시간》에 붙은 느낌글(시평) 첫머리에는 아주 재미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89년도였던가, 문학과지성사가 주관한 제1회 이산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상을 수상한 시인은 수상 연설에 앞서 멀리 지방에서 상경한 동료 노동자들과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노동해방의 구호를 외친 후 노동해방가요를 우렁차게 합창했고, 자유주의적 문인교수들로 가득한 식장은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서늘한 침묵으로 휩싸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인은 노동해방의 시대적 당위성과 다급함을 역설하는 연설을 마친 후,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식장 분위기를 의식한 듯 지체없이 남루한 단색 점퍼 차림의, 메마른 그러나 강철 같은 동료들과 식장을 빠져나갔다. 시인의 예기치 못했던 행동은 자유주의 논객이나 글쟁이들에겐 소름돋는 충격을 주었을는지도 모른다(130쪽/해설,임우기).”


  ‘자유주의 문인교수’와 ‘자유주의 논객·글쟁이’한테 소름돋는 일이었다고 하는 시상식을 가만히 그려 봅니다. 저는 그 자리에 간 일이 없고, 그 자리 이야기를 듣거나 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이 글을 읽으면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어림할 뿐인데, ‘자유주의’를 외치는 글쟁이나 교수나 논객은 ‘노동해방’ 같은 말을 외치는 일이 없습니다. ‘노동해방’이 아니더라도 ‘참다운 남녀평등’이나 ‘올바른 평화’를 외치는 일은 있을까요?



.. 조상 대대로 살던 마을에 / 무장경찰이 왔고 이어 포클레인이 왔다 / 시청에서 공해지역 재개발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 민간업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 그는 그곳 삼선 국회의원의 브로커였다 / 시에서 평당 육천원에 사들여 십팔만원에 분양했다 / 십만 평이 넘으므로 백원은 거저먹었다 / 그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백만원을 기탁하고 티비에 나왔다 / 지역문화발전기금 이백만원 내고 귀빈석에 앉았다 / 출신교 축구 발전을 위해 오백만원 내고 감투를 유지했다 ..  (운이 나빴다)



  ‘일하는 사람’은 많으나, ‘일하는 이야기’가 시로 태어나는 일은 대단히 드뭅니다. 교사나 교수로 있으면서 시를 쓰는 사람은 제법 많은데, 공장 일꾼이나 시골 농사꾼으로 있으면서 시를 쓰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시만 쓰는 시인은 무척 많은데, 아이를 돌보거나 살림을 가꾸면서 시를 쓰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공장 노동자는 그저 공장 노동자로 있는 한국 사회입니다. 전업주부는 마냥 전업주부로 있는 한국 사회입니다. 학생은 언제나 학생으로 있는 한국 사회입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은 그대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있는 한국 사회입니다. 교사와 교수는 언제까지나 교사와 교수 자리에 머무는 한국 사회입니다. 서로 넘나들지 못하고,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서로 손을 잡지 못하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지 않습니다.



.. 지구는 우주라는 물위에 떠 있는 배 / 인간과 자연은 하나이면서 둘이다 ..  (자연과의 협약)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흐릅니다. 밤하늘에 별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이 별은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도시에서는 하늘이 너무 뿌연 탓에 별이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기도 하고, 도시에서는 별 볼 일이 없기도 하며, 도시에서는 별이 건물과 전깃줄 따위에 막혀서 안 보이기도 합니다.


  도시에 넘치는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이 바람을 타고 시골로 흐릅니다. 도시와 시골에 잔뜩 지은 공장에서 내뿜는 매연도 바람을 타고 시골과 도시를 감쌉니다. 시골에 조금 남은 들과 숲에서 푸른 숨결이 깨어나서 이 숨결이 바람을 타고 도시로 흐릅니다.


  ‘글만 쓰는’ 사람은 이제 사라지고, ‘글을 쓰는’ 사람이 깨어날 때입니다. ‘말만 하는’ 사람은 이제 사라지고, ‘말을 하는’ 사람이 태어날 때입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며 함께 노래할 때입니다. 서로 아끼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보듬을 때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할 때입니다. 4348.4.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ppletreeje 2015-04-04 01:28   좋아요 0 | URL
마지막 석 줄의 글이 유난히 마음에 닿는 때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숲노래 2015-04-04 01:30   좋아요 0 | URL
깊은 저녁에 깨어 밤빛을 누리시네요. appletreeje 님이 계신 곳에도 개구리 노랫소리가 고이 퍼지기를 빌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