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각대장 존 ㅣ 비룡소의 그림동화 6
존 버닝햄 지음, 박상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4월
평점 :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53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지옥’일 뿐인가?
― 지각대장 존
존 버닝햄 글·그림
박상희 옮김
비룡소 펴냄, 1996.11.10. 8500원
우리 집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니 ‘학교에 늦는다’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집은 시골마을에 있기에 ‘버스가 지나가는 때’에 맞추어서 마을 어귀에 나가지 않으면 ‘버스를 놓칩’니다. 시골버스는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데, 제때에 맞추지 않고 ‘늦’으면 버스를 탈 수 없어요. 읍내에서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도 제때를 살피지 않으면 집으로 못 옵니다. 아니면 택시를 불러서 몇 곱에 이르는 찻삯을 치러야 합니다.
한참을 가는데 하수구에서 악어 한 마리가 불쑥 나와 책가방을 덥석 물었습니다. 존은 책가방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악어는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4∼5쪽)
학교라는 곳은 배우는 곳입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 있는 어른들한테서 배웁니다. 학교라는 곳은 가르치는 곳입니다. 학교가 일터인 어른들은 학교로 오는 아이들한테 이것저것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교과서를 바탕으로 어른한테서 이야기를 들으며 배웁니다. 어른들은 교과서를 책상에 펼쳐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르칩니다. 아이들이 배우거나 어른들이 가르치는 것은 모두 교과서에 나옵니다.
그러고 보면, 교과서만 들여다보면 될 노릇이라고도 할 만하기에 굳이 학교를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교과서만 떼어도 ‘학력’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을 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어른으로 있는 교사가 보여주는 몸짓’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교과서는 혼자서 얼마든지 읽으면서 익힐 수 있어요. 교과서에 없는 삶과 사회와 사람과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바로 ‘어른으로서 뭔가 가르치려고 하는 교사’한테서 배웁니다.
“이 동네 하수구엔 악어 따위는 살지 않아! 넌 나중에 학교에 남아서 ‘악어가 나온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또, 다시는 장갑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를 300번 써야 한다. 알겠지?” (9쪽)
존 버닝햄 님이 빚은 그림책 《지각대장 존》(비룡소,1996)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학교에 안 다니고 집에서 노는 우리 집 아이들로서는 이 그림책을 보면 ‘학교는 참 무섭구나!’ 하고 여길 만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교사가 ‘괴물처럼 이빨이 뾰족뾰족하고 손가락이 흐늘흐늘 길다랗’거든요. 이런 무시무시한 몸으로 아이들을 윽박질러요. 아이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안 듣고, 그저 ‘어른 권위’만 무섭게 내뱉어요.
《지각대장 존》에 나오는 아이는 언제나 스스로 겪은 대로 말합니다. 《지각대장 존》에 나오는 어른은 언제나 ‘아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습니다. 아무래도 교칙만 따지고 교과서만 살피겠지요. 교칙을 어기는 아이가 못마땅하고 교과서대로 움직이지 않는 아이가 미울 테지요.
존은 구석에 돌아서서 400번 외쳤습니다. “다시는 사자가 나온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바지를 찢지 않겠습니다.” (18쪽)
그림책에 나오는 교사는 아이한테 자꾸 ‘벌’을 줍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괴물처럼 생긴 교사가 아이한테 내리는 벌은 ‘주먹다짐’이나 ‘손찌검’이 아닙니다만, ‘아이 괴롭히기’입니다. 이는 ‘아이 사랑’일 수 없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교사는 아이가 ‘학교에 늦은’ 일을 놓고 차분히 앞뒤를 따지지 않습니다. ‘늦으면 무엇이 잘못인가’를 아이가 잘 알거나 깨닫도록 도우려고 하지 않고 그저 윽박지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뭔가 ‘규칙이나 교과서대로 따르지 않을 적’에 괜히 골부터 내거나 짜증부터 내거나 이맛살부터 찡그리는 어른들 모습이라고 할 만합니다. 아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몸짓이며, 아이 눈높이에서 함께 실마리를 찾으려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는 몸짓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무엇을 배울까요? 바로 이런 윽박지름을 배웁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참말 무엇을 배우나요? 언제나 이런 꾸짖음을 배웁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그야말로 무엇을 배우는가요? 어제나 오늘이나 이런 바보짓을 배웁니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 난 지금 커다란 털복숭이 고릴라한테 붙들려 천장에 매달렸다. 빨리 날 좀 내려 다오.” “이 동네 천장에 커다란 털복숭이 고릴라 따위는 살지 않아요, 선생님.” (30∼31쪽)
그림책 《지각대장 존》을 그린 ‘존 버닝햄’ 님은 어릴 적에 ‘지각대장’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책 ‘존’하고 그림책 작가 ‘존’은 같은 사람이리라 싶습니다. 아무튼, 아이는 어른이 늘 저한테 보여주던 대로 따라합니다. 딱히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여느 때에 어른이 저한테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꽃을 피웠으면, 아이도 어른한테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여느 때에 어른이 저한테 웃음짓는 노래를 들려주었으면, 아이도 어른한테 웃음짓는 노래를 들려주어요.
《지각대장 존》에 나오는 아이는 윽박지름하고 벌주기만 압니다. 사랑이나 이야기를 모릅니다. 아니, 사랑이나 이야기는 가슴속에 깊이 억눌린 채 못 깨어났다고 해야겠지요.
오늘날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아주 많은 어린이와 푸름이가 입시지옥에 짓눌린 나머지 사랑도 이야기도 꿈도 꽃피우지 못하면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녀야 합니다. 대학교에 붙지 않고서야 가슴을 활짝 펴지 못합니다. 대학교에 붙더라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붙어야 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조차도 ‘몇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대학교에 붙어야 합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는 아이라면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이는 전문직 일자리를 아예 얻을 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입시지옥으로 아이들은 늘 짓밟히고, 입시지옥을 헤쳐도 아이들은 자꾸 짓눌리며, 대학교를 마치거나 대학교를 안 다녔어도 아이들은 그예 짓이겨지는 삶에 휩쓸립니다.
부디 아이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어른이 늘기를 빕니다. 부디 아이들 가슴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교사와 어버이가 늘기를 빕니다. 부디 아이들 사랑을 따스히 어루만지는 교육 정책과 사회 정책과 문화 정책이 바로서기를 빕니다. ‘입시 정책’이 아닌 ‘교육 정책’이 서기를 빕니다. 교과서를 가르치는 일이 나쁘지 않습니다만, ‘삶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어른들부터 올바로 설 수 있기를 빕니다. 4348.8.6.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