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의 깊이
김명인 지음 / 빨간소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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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01



이제는 아름다운 길을 가면 되겠지요

― 부끄러움의 깊이

 김명인 글

 빨간소금 펴냄, 2017.3.24. 12000원



  인하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일하는 김명인 님은 산문책 《부끄러움의 깊이》(빨간소금,2017)를 선보입니다. 문학비평을 하는 교수로서 쓴 비평이 아닌, 이녁 삶을 돌아보면서 하루하루가 부끄러운 발자국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 첫머리는 눈이 자꾸 어두워져서 눈에 칼을 댄 이야기로 엽니다. 이윽고 글쓴이 스스로 겉하고 속이 다르다고 하는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글쓴이는 말로는 으레 페미니스트라고 외친다지만 정작 집안일이나 아이키우기는 곁님한테 떠넘긴 고등룸펜일 뿐이라고 밝히기도 합니다. 이러다가 1987년 어느 날 일을 적습니다.



1987년 2월 12일 새벽 5시쯤으로 기억한다. 장인, 장모, 아내, 아이와 함께 사는 집으로 또 그들이 나를 찾아왔다. 겨울 새벽, 철로 된 아파트 현관문을 나직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아름다울 리 없었다. 먼저 잠을 깬 것은 아내였다. 곧이어 나도 잠을 깼고 영문을 모르는 장인 장모님도 방문을 열고 나오셨다. (27쪽)


윤상원은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궁극의 희생이란 아마도 가장 싱싱한 몸을, 가장 살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잔인하게 떼어내 바치는 것이리라. (61쪽)



  1987년은 전두환이라고 하는 군사독재가 무너지던 해이지만, 군사독재는 그냥 무너지지 않았어요. 돌아보면 한 줌조차 안 될 권력이지만, 이들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새 나라를 바라는 물결을 두들겨패거나 짓밟으려고 했습니다. 악다구니라고 할까요. 평화가 아닌 독재로 권력을 움켜쥔 이들은 으레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민주를 짓밟았고, 군홧발은 사회가 기울어지도록 내몰았어요.



나는 그냥 좌파이기 때문이다. 좌파란 본질적으로 의심하는 자이지만, 동시에 회색 지대에 머물러 있는 자가 아니라 흑과 백 사이를 격렬하게 부딪쳐 나가는 자이다. (74쪽)



  이 나라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민주나 평화를 바라거나 찾거나 이룬 힘은 지식인이나 정치인이나 운동가한테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수수한 사람들한테서 커다란 바다 같은 힘이 솟구쳤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물결도, 이승만 독재자를 밀어낸 물결도, 박정희 독재자를 거꾸러뜨리려는 물결도, 전두환·노태우·김영삼에 이르는 독재자를 몰아내려는 물결도, 모두 가장 밑바닥에서 샘솟았어요. 장갑차로 여중생을 깔아뭉갠 미군을 쫓아내자는 물결도, 숱한 막삽질과 시커먼 짓을 끌어내리자고 하는 물결도, 하나같이 수수한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일어났습니다.


  물결은 좌파도 우파도 아닙니다. 촛불은 왼쪽도 오른쪽도 아닙니다. 물결은 언제나 물결 그대로이고, 촛불은 늘 촛불 그대로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어느 쪽에도 서지 않으면서 제 결을 깨달아서 똑똑히 마주할 수 있던 때에 비로소 슬기로운 눈을 틔웠고, 이때에 물결이 일어날 수 있었어요.



진정 위대한 것은 이처럼 밑바닥으로부터, 주변으로부터, 경계로부터 서서히 움터 나와 비로소 어느 날 갑자기 터지듯 나타난다. (174쪽)


이제 신경숙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어 보인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거나 모습을 드러내어 ‘결과적 표절’이라는 답변을 하고 사과를 했으니 미흡하게 느끼더라도 어쩌겠는가. 그것은 그의 몫이고 자기 그릇 크기만큼의 결론일 테니 말이다. (249쪽)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나무라기는 매우 쉽습니다. 눈에 아주 쉽게 뜨이는 잘잘못이거든요. 신경숙 같은 이들을 꾸짖기도 아주 쉽습니다. 너무 뻔한 잘잘못이에요. 그런데 우리 삶은 잘잘못을 따져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잘잘못을 따지기만 해서는 늘 그 자리에서 맴돕니다.


  나라를 바꾸려는 물결은 잘잘못을 따지려는 마음이 아니라고 느껴요. 엄청난 촛불 물결은 아름다움을 바라고 사랑스러움을 꿈꾸며 스스로 거듭나려는 몸짓이라고 느껴요. 이것을 때려눕히거나 저것을 쓰러드린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달라지지 않아요.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가’를 차분히 생각하면서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적에 비로소 달라져요.



밥 먹을 때도 춥고 메말라 장갑을 찾는다. 키보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덕분에 더욱 게을러진다. 설거지는 물론 행주 빠는 일이 무서워 밥 먹은 식탁을 닦아내는 일도 하지 않는다. 부쩍 입맛에 맞는 사과나 감, 배 같은 과일을 먹고 싶어도 맨손으로 한 번 씻어내고 깎는 게 무서워 아내 없이는 찾아 먹지도 못한다. (93쪽)



  내 몸이 추운 날, 나도 춥지만 곁님도 춥습니다. 내 몸이 추운 날, 나도 춥지만 아이들도 춥습니다. 내 몸이 춥다면 내가 사는 집이 따뜻하도록 바꾸어 내려는 몸짓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설거지를 하고, 누가 능금을 깎는지는 대수롭지 않아요. 다만, 말로는 페미니스트라고 외치면서 정작 집안일이나 아이키우기를 하나도 안 한다면, 허울뿐인 앵무새 좌파가 되겠지요. 이런 얘기를 구태여 글로 쓸 까닭 없이 스스로 삶을 바꾸고 살림을 바꿀 노릇이에요. 촛불을 든 사람들은 그저 촛불을 들었지, 이런 토를 달거나 저런 핑계를 붙이지 않았어요. 말없이 촛불을 들면서 스스로 새로운 사람으로 서겠노라 하고 하나하나 모였어요. 이러면서 이 힘이 바로 스스로를 바꾸고 나라를 바꾸는 물결로 되었고요.


  《부끄러움의 깊이》를 썼다면, 이제 이런 글쓰기는 여기에서 끝내고, 다음에는 ‘손수 살림하는 하루’하고 ‘손수 흙을 만지는 하루’로 거듭나는 삶이 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이런 새 하루는 구태여 글로 안 남겨도 됩니다. 몸으로 살아내면 넉넉합니다. “아름다운 하루”와 “사랑하는 살림”은 몸으로 피어나는 이야기꽃으로 저절로 춤추겠지요. 2017.4.25.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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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마음 사전 아홉 살 사전
박성우 지음, 김효은 그림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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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68


‘귀엽다=예쁘다’이고 ‘예쁘다=귀엽다’라니요?
― 아홉 살 마음 사전
 박성우 글
 김효은 그림
 창비 펴냄, 2017.3.10. 11000원


  박성우 시인이 아홉 살 어린이한테 ‘마음을 나타내는 말’을 찬찬히 알려주고 싶은 뜻으로 《아홉 살 마음 사전》(창비,2017)을 써냅니다. 이 책은 모두 여든 가지 낱말을 놓고서 그림 한 점을 붙이고, 그림에 맞는 이야기를 가볍게 한두 줄 붙입니다. 이런 뒤 낱말뜻을 박성우 시인 나름대로 붙이고는, 이 낱말뜻을 한결 쉽고 부드러이 헤아려 볼 만한 이야기를 세 가지씩 더 붙입니다.

  ‘마음 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엿볼 수 있듯이, 동시를 쓰는 어른이 어린이 마음결을 살피면서 엮은 사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걱정스럽다] 노래를 못하는데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할 때 드는 마음
[고맙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나도 빌려줄게.” 짝꿍이 지우개를 빌려줄 때 드는 마음
[궁금하다] 아빠가 싼 여행 가방을 열어 보고 싶은 마음
[사랑하다] 동생에게 내 목도리를 벗어 둘러 주는 마음. “괜찮아. 형은 별로 안 추워.”


  여느 사전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이야기를 그림하고 잘 맞물려 놓은 《아홉 살 마음 사전》이지 싶어요. 아마 아홉 살 어린이는 이 책에 깃든 그림만 보면서도 ‘마음말(마음을 밝히는 말)’을 환하게 알아채리라 생각합니다. 어느 때에 어느 낱말을 쓰면 좋을는지 이끌어 주고, 아이들이 학교 안팎에서 겪는 여러 가지 일을 차근차근 보여주어요.


[서럽다] 언니가 말하는 것은 다 사 주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하나도 사 주지 않아
[조마조마하다] 오빠가 풍선을 크게 불었어. “그만 불어. 터질 것 같아서 못 보겠어.”
[좋다] 아빠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다 보면 스르륵 잠이 잘 와
[찡하다] 잃어버린 강아지를 이틀 만에 찾았어


  잠자리에서 아버지가 아이한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 ‘좋다’고 하는 모습이라든지, 풍선을 불면 터질 듯해 ‘조마조마하다’고 하는 모습이라든지, 잃은 줄 알던 강아지를 이틀 만에 찾아 ‘찡하다’고 하는 모습은 여러모로 애틋합니다.

  그런데 이 《아홉 살 마음 사전》은 그림으로만 이쁘장하게 보여주는 ‘마음말 사전’이지 않아요. 그림을 시원시원 집어넣고 말을 줄이면서 한결 돋보이는 엮음새입니다만, 바로 ‘말’을 다루는 ‘사전’이기 때문에, 말을 제대로 밝히고 엮어내어야 비로소 제값을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여든 가지 낱말을 가볍게 다룬 자그마한 사전인데, 이 작은 사전은 매우 안타깝게도 숱한 올림말이 서로 겹치거나 엉키는 ‘돌림풀이·겹말풀이’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낱말 하나를 그냥 따로 보려고 하더라도 뭔가 아리송한 대목이 자꾸 불거져요. 낱말을 놓고 세 가지씩 붙이는 보기글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무엇보다 낱말풀이가 뒤죽박죽입니다. 가장 뒤죽박죽인 대목은 ‘고맙다·기쁘다·좋다·반갑다’ 같은 낱말 꾸러미입니다.


[고맙다] 남이 친절하게 대해 주거나 도움을 주어서 흐뭇하고 즐겁다
[기쁘다] 바라는 일이 이루어져 기분이 좋고 즐겁다
[신나다] 재미있고 즐거운 기분이 들다
[유쾌하다] 즐겁고 상쾌하다
[좋다] 즐겁고 유쾌하다
[즐겁다] 흐뭇하고 기분이 좋다
[통쾌하다] 일이 뜻대로 이루어져 즐겁고 유쾌하다
[행복하다] 기쁘고 즐겁고 만족을 느끼다
[흐뭇하다] 마음에 들어 기분이 좋다
[반갑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거나 바라던 일을 이루어 즐겁고 기쁘다


  ‘고맙다’를 “흐뭇하고 즐겁다”로 풀이하는데, ‘흐뭇하다 = 기분이 좋다’요, ‘즐겁다 = 흐뭇하고 기분이 좋다’로 풀이합니다. 서로 엉키는 돌림풀이가 되면서 겹말풀이입니다. 여기에 ‘기쁘다’를 “좋고 즐겁다”로 풀이하면서 또 엉키지요. ‘신나다’도 ‘재미’하고 ‘즐거운’으로 풀이하니, 이 대목에서도 엉키고요. ‘행복하다’는 ‘기쁘다’에 ‘즐겁다’에 ‘만족’으로 풀이하는데, 이 느낌은 무엇이라고 해야 알맞을까요? ‘반갑다’도 “즐겁고 기쁘다”로 풀이하고 나면, 아홉 살 어린이가 정작 이 여러 가지 느낌을 제대로 가늠하기란 너무 어려우리라 봅니다.

  그리고 ‘유쾌·통쾌’ 같은 한자말을 보면, ‘유쾌하다 = 즐겁고 상쾌하다’인데, ‘통쾌하다 = 즐겁고 유쾌하다’로 풀이해서 서로 얽혀요. 이런 대목에서도 말풀이가 영 어수선합니다.


[걱정스럽다] 걱정이 되어 편하지 않다
[두렵다] 어떤 대상을 무서워하며 걱정이 되어 불안하다
[무섭다] 걱정하는 일이 벌어질까 봐 불안하다
[불안하다]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다음으로 ‘걱정’하고 얽힌 낱말 꾸러미를 봅니다. ‘걱정스럽다’를 “걱정이 되어”로 풀이한다면, 정작 ‘걱정’이 무엇인지 모를 수밖에 없어요. ‘걱정’이라는 바탕말을 먼저 풀이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렵다’를 풀이하면서 ‘무섭다’하고 ‘불안하다’라는 낱말을 쓰는데, ‘무섭다’는 ‘걱정·불안’ 두 낱말로 풀이하고, 다시 ‘불안’은 ‘걱정’이라는 낱말을 써서 풀이해요.

  이 대목에서는 여러모로 “마음이 편하지 않다”라는 말마디를 엿볼 수 있습니다. “편하지 않다”가 어떤 느낌인가를 먼저 더욱 쉽게 풀어내어야 아홉 살 어린이가 이 마음말을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조마조마하다] 앞으로 닥칠 일이 걱정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다
[초조하다] 애가 타서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조마조마·초조’에서는 ‘초조’를 ‘조마조마’로 풀이해요. ‘조마조마’는 ‘걱정 + 마음이 놓이지 않다’로 풀이하지요. 또 ‘걱정’이 나옵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다”라는 말마디가 나오기에, 앞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에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가 바로 ‘(마음이) 놓이지 않다’하고 맞물리네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미안하다] 마음이 편하지 않고 부끄럽다
[부끄럽다] 잘못을 저질러서 창피하거나 용기가 없어 수줍다
[창피하다] 떳떳하지 못한 일로 몹시 부끄럽다


  ‘미안하다’는 ‘부끄럽다’로 풀이하고, ‘부끄럽다’는 ‘창피하다 + 수줍다’로 풀이하며, ‘창피하다’는 ‘부끄럽다’로 풀이합니다. 《아홉 살 마음 사전》에서는 ‘수줍다’를 안 다룹니다만, 이 세 낱말은 서로 얽히는 돌림풀이입니다. 아이들이 이 책을 보다가 이렇게 돌고 도는 모습을 보면 그만 머리가 빙빙 돌겠네 싶어요.


[그립다] 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다
[보고 싶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립다’를 ‘보고 싶다’로 풀이하면서 ‘보고 싶다’를 ‘그리워하다(그립다)’로 풀이하면 두 말은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소리가 될까요? 굳이 ‘보고 싶다’를 따로 올림말로 안 다루어도 되지 싶어요. ‘그립다’ 하나로 뭉뚱그리면 되겠지요.


[불쌍하다] 남의 처지가 딱해서 가슴 아프다
[안쓰럽다] 가엾고 불쌍하다


  ‘불쌍하다·딱하다·가엾다·안쓰럽다’는 모두 다른 낱말입니다. 생김새도 다르고 뜻이나 결도 저마다 달라요. 이 책에서는 이 네 낱말 가운데 ‘불쌍하다·안쓰럽다’를 올림말로 삼는데, 두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또렷하게 헤아리기에는 말풀이가 매우 엉성합니다.


[나쁘다] 마음이나 기분이 좋지 않다
[불쾌하다] 못마땅하여 기분이 좋지 않다


  ‘나쁘다’나 ‘불쾌하다’는 뜻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쾌하다’는 ‘나쁘다’에 뭉뚱그리는 쪽이 나으리라 느낍니다. 안 써도 되겠지요. 이런 한자말은 어른들이 흔히 쓸 뿐이니까요. 그런데 ‘불쾌하다’를 풀이하며 ‘못마땅하다’라는 낱말을 넣어요. 아홉 살 어린이가 이 ‘못마땅하다’를 얼마나 어림할 만할까요? 한국말사전에서 ‘못마땅하다’를 찾아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 좋지 않다”로 풀이합니다.


[산뜻하다] 기분이나 느낌이 깨끗하고 시원스럽다
[상쾌하다] 기분이 시원하고 산뜻하다


  ‘산뜻하다·상쾌하다’에서는 ‘상쾌하다’를 ‘산뜻하다’로 풀이합니다. 이 책에서는 ‘시원하다(시원스럽다)’를 안 다루기에 더 깊이 살필 수 없는데요, ‘상쾌하다’를 ‘산뜻하다’ 자리에서 뭉뚱그려 주면 좋으리라 봅니다.


[쓸쓸하다] 외롭고 슬프다
[외롭다] 혼자 있거나 기댈 곳이 없어 허전하고 쓸쓸하다


  ‘쓸쓸하다’를 ‘외롭다’로 풀이하다가, ‘외롭다’를 ‘쓸쓸하다’로 풀이하면 어찌해야 좋을까요.


[귀엽다] 하는 짓이나 생김새가 예쁘고 사랑스럽다
[예쁘다] 생김새나 하는 행동이 귀엽고 아름다워 보기에 좋다


  ‘귀엽다’를 ‘예쁘다’로 풀이하고, ‘예쁘다’를 ‘귀엽다’로 풀이합니다. 이 대목에서도 뜻풀이가 빙글빙글 돕니다. 아이도 어른도 매우 흔히 쓰는 두 낱말입니다. 뜻풀이가 이렇게 얽히거나 겹친다면 이 낱말을 제대로 쓰기는 참 힘들겠구나 싶어요.


[감격스럽다] 뿌듯하거나 기뻐서 가슴이 뭉클해지다
[찡하다] 눈물이 나올 만큼 가슴이 뭉클하다


  ‘감격스럽다·찡하다’에서는 ‘뭉클하다’로 풀이하는데, 정작 이 책에서는 ‘뭉클하다’를 다루지 않습니다. 아홉 살 어린이로서는 ‘뭉클하다’ 뜻풀이가 없이 두 낱말을 알아차리기에는 퍽 어려울 듯합니다.


[허무하다] 아무 의미나 보람이 없이 허전하고 쓸쓸하다
[허전하다] 마음이 텅 빈 것처럼 서운한 느낌이 있다


  ‘허무하다’를 ‘허전하다’로 풀이해야 할까요? 그럴 수도 있을 테지만, ‘허무하다’ 같은 낱말은 아홉 살 어린이하고는 좀 안 맞는 낱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낱말을 다루려 한다면, 뜻풀이가 얽히지 않도록 손질해 주어야지 싶습니다.


[설레다] 마음이 들떠서 두근거리다
[철렁하다] 크게 놀라 가슴이 설레다


  ‘설레다·두근거리다’는 서로 비슷하지만 다른 낱말입니다. ‘두근거리다’가 어떤 마음인가를 다루든지 말풀이를 고쳐야지 싶어요. 그리고 ‘철렁하다’를 풀이하면서 ‘설레다’라는 낱말을 쓰면 또 엉켜 버립니다.


[괴롭다] 아프고 힘들다
[따분하다] 재미가 없어 지루하고 심심하다
[부담스럽다] 어떤 일이 짐처럼 느껴지다
[자랑스럽다] 남에게 드러내어 뽐낼 만한 데가 있다
[화나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기분이 나빠서 몹시 성이 나다


  마지막으로 이 다섯 낱말은 뜻풀이만으로는 헤아리기 힘들겠다고 봅니다. ‘괴롭다 = 아프고 힘들다’라면 ‘아프다’하고 ‘괴롭다’는 어느 대목에서 다를까요? ‘따분하다’가 ‘지루하다 + 심심하다’라면 ‘지루하다·심심하다’는 또 무엇일까요? ‘부담스럽다’라는 한자말을 ‘짐’처럼 느끼는 모습으로 풀이한다면, 굳이 ‘부담스럽다’를 쓰기보다는 ‘짐스럽다’를 써도 될 만하겠지요. ‘자랑스럽다’를 ‘뽐내다’로 풀이하지만 ‘자랑스럽다·뽐내다’는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낱말입니다. 서로 다른 결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화나다’를 ‘성나다’로 풀이하는데, ‘화·성’은 무엇이 다를까요?

  《아홉 살 마음 사전》이라는 작은 어린이 사전을 놓고서 이래저래 아쉬운 대목을 많이 따져 보았습니다. 상냥하고 살가운 그림이 보기 좋은 책이요, 쉽고 푸근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하는 얼거리가 반가운 책입니다. 그런데 그림이나 얼거리가 좋더라도, ‘말을 다루는 책’인 사전인 터라, 무엇보다 말을 슬기롭고 알맞으면서 똑똑히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여든 가지 낱말을 다룬 조그마한 어린이 사전인데, 막상 이 여든 가지 가운데 거의 모든 낱말이 서로 얽히거나 겹치거나 빙글빙글 뜻풀이가 돌고 도는 얼거리라 한다면, 사전으로서 제구실을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부디 글쓴이하고 엮은이 모두 다시금 머리를 맞대고 슬기를 가다듬어서 어린이 눈높이와 살림살이에 걸맞게 튼튼하고 알찬 이야기를 새롭게 꾸며 주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이대로는 좀 많이 아닙니다. 2017.3.29.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어린이책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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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 2017-03-29 10:39   좋아요 2 | URL
숲노래님. 안녕하세요. <아홉 살 마음 사전>을 쓴 박성우라고 합니다. 먼저, 깊은 관심에 고개 숙여 감사드리고요. 예쁘다?! 귀엽다?!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국어사전을 펼쳐보기도 하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다시 검색해 보기도 했습니다. 수십 번 망설이다가 정보를 공유하는 게 좋겠다 싶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검색 결과를 올립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시고요. -박성우 올림.

‘예쁘다’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1건)

예쁘다[예ː--] 〔예뻐[예ː-], 예쁘니[예ː--]〕
「형용사」
「1」생긴 모양이 아름다워 눈으로 보기에 좋다. ≒이쁘다「1」.
「2」행동이나 동작이 보기에 사랑스럽거나 귀엽다. ≒이쁘다「2」.

‘귀엽다’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1건)
귀엽다[귀ː-따] 〔귀여워[귀ː--], 귀여우니[귀ː---]〕
「형용사」
【…이】
예쁘고 곱거나 또는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

숲노래 2017-03-29 12:25   좋아요 0 | URL
느낌글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박성우 시인님이 써 주신 책을 읽으면서, 말풀이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그대로 따르거나 조금 손질했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런데 국립국어원 사전은 잘못된 말풀이를 비롯해서, 겹말풀이와 돌림풀이가 수두룩합니다.

그러한 사항은 제가 퍽 오랫동안 제 누리집에서 찬찬히 짚어서 다루었습니다. 이러한 사항을 놓고 올 2017년에 [겹말 바로쓰기 사전]을 내면서 매우 낱낱이 보여주는 책이 나옵니다.

아무튼, 박성우 시인님이 이 이쁘장한 책을 써내 주실 적에는, 국립국어원 잘못된 말풀이를 그대로 옮기는 결보다는 잘못된 돌림풀이나 겹말풀이를 모두 털어내고 새롭게 뜻풀이를 밝혀 주셔야지 싶어요.

국립국어원 사전에서 풀이말을 옮겨다 썼기에, 우리가 아이들한테 아무 말이나 잘못된 채 보여줄 수는 없으리라 생각해요. 이 대목에서 박성우 시인님은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 한국에서 글을 쓰거나 문학을 하는 우리가 국립국어원 사전이 올바르게 바로잡히도록 마음을 기울이고 애써야지 싶어요.

이러저러한 까닭으로 저는 지난 2016년 6월에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을 내놓았어요. 곧 5쇄를 찍을 텐데, 5쇄에서도 이모저모 조금씩 손질하는 말풀이가 있어요. 1쇄를 낼 적까지 새로 붙이고 가다듬은 말풀이를 적었는데, 새로운 판이 나와서 다시 살필 적마다 더 손질하며 가다듬을 말풀이가 보이더군요.

기존 국어사전은 한 번 편집이 된 뒤에 말풀이를 되살피는 일이 거의 없어요. 이러다 보니 겹말풀이나 돌림풀이나 잘못된 풀이가 바로잡히는 일을 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에 나온 잘못된 말풀이를 저한테 보여주셔 보았자, <아홉 살 마음 사전>을 읽을 어린이 독자와 어른 독자한테는 아무 도움이 안 되리라 생각해요.

안타까운 말씀이지만, <아홉 살 마음 사전>은 전면개정판을 내셔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성우 2017-03-29 13:30   좋아요 2 | URL
아, 넵. 안타까운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훌륭하게 내신 사전을 따르지 않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르며 예시 글을 쓴 제 잘 못인 것 같습니다. 챙겨주신 마음에 깊이깊이 감사드리고요. 앞으로는 거룩하신 선생님의 위대한 말씀 잘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국어대사전을 통해 “아무 말이나 잘못된 채 보여”주는 국립국어원을 따끔하게 혼내줘야겠군요. 그럼, 좋은 봄날 되시고요.

숲노래 2017-03-29 13:57   좋아요 0 | URL

이 댓글로 무슨 이야기를 저한테 하시려는지 도무지 알 수 없군요.

왜 저한테 ‘훌륭하게‘라느니 ‘거룩하신‘이라든지 ‘위대한‘이라든지 이런 말을 쓰는지 영 알 수 없습니다.

박성우 시인님이 쓴 책을 읽을 어린이 독자하고 어른 독자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국립국어원을 ‘따끔하게 혼내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아홉 살 마음 사전>은 박성우 시인님이 쓴 책이 아닌지요? 국립국어원 사전풀이를 그대로 따라서 책을 내지 않았는지요?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 도시와 건축을 성찰하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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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76



겉살보다 속살이 아름다운 도시

―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승효상 글

 돌베개 펴냄, 2016.10.10. 14000원



  건축 일을 하는, 그러니까 집을 짓는 일을 하는 승효상 님은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돌베개,2016)라는 책을 내놓으면서 ‘건축가는 인문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밝힙니다. 내가 사는 집이 아닌 남이 사는 집을 짓는 일을 하니, 내가 아닌 남이 살 그 집이 어떠한 살림이 되도록 북돋우거나 이끌 수 있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얘기해요.



남의 집을 짓는 일이 고유 직능인 건축가라면 기본적으로 문학이나 영화, 여행을 통해 그들의 삶을 알아야 하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 역사적이어야 하며, 왜 사는지를 알기 위해 철학을 해야 한다. (30쪽)


분당은 성공하였다. 도시가 성공했을까? 아니다. 도시가 아니라 부동산이 성공한 것이다. (38쪽)



  오늘날에는 ‘집짓기’ 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지난날에도 집짓기 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도 했지만, 지난날에는 누구나 ‘내가 살 집은 내가 짓는다’였어요. 으리으리하게 올리는 커다란 집이라면 일꾼을 사서 짓겠지만, 수수한 사람들이 수수하게 가꾸는 살림집은 누구나 손수 지었어요.


  더 살피면 지난날에는 집뿐 아니라 옷도 누구나 손수 지었어요. 스스로 입는 옷은 늘 손수 지었지요. 그리고 손수 먹는 밥도 손수 지었어요. 지난날 사람들은 따로 건축가나 재단사나 요리사라는 이름은 없었어도 스스로 모든 살림을 지을 줄 알았어요.


  옛날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지난날 사람들 살림을 돌아보려는 뜻이 아닙니다. 집도 옷도 밥도 손수 짓는 지난날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누릴 살림’을 생각하면서 집과 옷과 밥을 지었다는 뜻이에요. 집짓는 일꾼 승효상 님이 들려주는 말마따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인문학자’로서 집을 손수 짓고, 옷이랑 밥도 손수 지었다는 뜻이에요.



도시가 지속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여러 시설이나 장소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신성하고 경건한 침묵의 장소라고 했다.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이 어쩔 수 없는 도시의 일상이라고 해도 동시에 우리의 영혼을 맑게 빚는 고요함이 없으면 도시는 이내 피로하여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105쪽)


지금의 청와대는 전두환을 이은 노태우 대통령 때 지었는데, 정통성에 콤플렉스를 갖는 통치자일수록 권위적 건물을 짓고 싶어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일이다. 조선왕조의 궁을 탐했을까, 봉건 시대 건축의 형식을 빌려 지었으니 이 건물은 시작부터 또한 시대착오적이었다. (125쪽)



  승효상 님은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라는 책으로 ‘안타까운 집짓기(건축)’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부동산으로는 성공했을는지 모르나, 건축이라는 틀에서는 도무지 성공하고는 동떨어진 분당 새도시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권위주의를 앞세운 권력자가 겉만 꾸미려고 때려지은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를 한껏 나무라기도 해요. 파주 책도시를 놓고도 처음 설계할 적에 ‘사람이 걷는 흐름’을 미처 살피지 못한 대목을 찬찬히 짚습니다.



사실 서울의 속살은 대단히 아름답다. 대로변을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서 보시라. 로마네스크 성당이 없다 해도, 한옥이 많아 보전지구로 지정된 곳이 아니라도, 그저 흔해 빠지고 남루하며 보잘것없는 동네의 길이라 해도, 그곳을 걸으면서 가슴속에 스미는 행복과 평화가 있다. (185쪽)



  집짓는 승효상 님이 바라보기에 ‘아름다운 도시’는 겉살이 아닌 속살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으리으리하거나 높직한 건물이 있대서 아름다운 도시가 되지는 않는다고 밝힙니다. 나즈막하면서 수수한 작은 집들이 바로 도시를 아름답게 해 주는 바탕이라고 이야기해요. 큰길에서 벗어나 골목길에 깃든 앙증맞은 집들이 바로 도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다고 밝혀요.


  ‘서울을 비롯한 도시’를 이루는 속살을 새삼스레 헤아려 봅니다. 큰길은 자동차가 끝없이 지나다니면서 몹시 시끄럽습니다. 골목길은 자동차가 뜸하거나 못 다니면서 매우 조용합니다. 우리는 큰길을 거닐며 얘기를 나누기 어렵고, 큰길에서는 자동차에 치이기 마련이요, 마음 놓고 쉬기 어렵습니다. 이와 달리 골목길에서는 나긋나긋 속삭이기에도 좋고, 자동차에 치이지 않기 마련이요, 마음 놓고 쉴 만합니다.


  도시에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집을 높직하게 지어야 한다고 여기는데, 어쩌면 도시에서도 굳이 높직한 집을 짓지 않아도 될는지 몰라요. 재개발이라고 하면 골목집을 온통 허물고 아파트와 쇼핑센터를 높직하고 커다랗게 세워야 한다고만 여기지만, 거꾸로 아파트와 쇼핑센터를 허물고 나즈막한 골목집으로 바꾸는 ‘새로운 집살림 계획’을 세울 만할 수 있어요.


  오래가는 도시를 바란다면, 아름다운 도시를 꿈꾼다면, 사랑스러운 도시를 생각한다면, 이제는 ‘높지 않’고 ‘크지 않’으며 ‘넓지 않’은 살림집을 바라보아야지 싶습니다. ‘즐거운’ 집을 보고, ‘어깨동무하는’ 집을 보며, ‘사랑스러운’ 집을 보아야지 싶어요. 2016.11.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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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 (핑크 에디션)
오리여인 글.그림 / 시드페이퍼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읽기 삶읽기 275



별 하나에 사랑을 빌듯, 말 하나에 노래를 담아

― 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

 오리여인 글·그림

 seedpaper 펴냄, 2016.10.9. 13000원



  한겨레가 오랫동안 쓰다가 어느 한때부터 잃어버린 말이 있습니다. 요새는 이런 말을 가리켜 ‘토박이말’이라 합니다. 한겨레가 스스로 토박이말을 잃어버린 까닭은 한둘이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오랜 신분·계급 사회에 짓눌리는 동안 권력자는 한문과 한자를 높이고 시골사람이 입에서 입으로 주고받던 말을 낮췄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자국은 고스란히 남아서 ‘이’는 낮춤말이고 ‘치아’는 높임말처럼 다룹니다. ‘똥’은 낮춤말이고 ‘대변’은 높임말처럼 다뤄요. ‘진지’라는 높임말이 버젓이 있으나 ‘식사’라는 한자말을 마치 높임말처럼 쓰기도 해요.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툭툭 떨어지는 날에 할매가 가슴에 말랭이들을 폭 안고 방으로 들어오던 모습이 문득 생ㄱ각이 난다. 이제는 병원에 계시기 때문에 할매가 해 주는 무말랭이나 말린 고추를 먹을 수 없지만 난 비가 쏟아질 때 언제나 할매를 떠올리는 손녀일 것이다. (40쪽/비설거지)



  한겨레는 오랜 신분·계급 사회에서 눌리다가 겨우 기지개를 켜면서 이 틀을 깰 즈음 그만 이웃나라한테 식민지가 되어요. 이른바 일제강점기이고, 이때에 한국말을 송두리째 빼앗겨야 했어요. 그래도 이때에 학교에 다닌 사람들이 말을 빼앗겼지만,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던 사람들은 말을 빼앗기지 않았어요. 안타깝다면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한국말보다 일본말을 뛰어나게 잘했고, 말도 글도 일본말로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니, 그만 이분들 입과 손에는 일본말이나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 말투가 익은 모습이 그대로 이어져요.


  1980년대에 민주화 바람이 불며 사회 한쪽에서 ‘우리 말글 바로쓰기’가 살며시 일어났습니다. 오랫동안 억눌리던 한국말을 이제 비로소 살려내자는 물결이었어요. 그런데 이때에 ‘우리 말글 살리기’를 가리켜 ‘고루한 민족주의’라고 깔본 사람이 퍽 많았어요. 막상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할 만한데, ‘한국말사전에 묻힌 한국말’조차 한국사람 스스로 캐낼 길이 가로막혔다고 할까요. 이러면서 ‘세계화’라는 이름을 앞세운 영어 바람이 드세게 불었어요.



그저 스쳐 지나가듯 생긴 일에 아주 오랫동안 신경을 쓴다. 마치 빨랫줄에 바짝 마른 하얀 수건, 이 가벼운 것이 작고 얇은 바람에 툭 하고 땅바닥에 떨어진 느낌이다. 탁탁 털면 금세 다 날아갈 작은 흙먼지임을 알면서도 마음은 단번에 정리가 되지 않는다. (56쪽/쥐뿔)



  오리여인 님이 글과 그림으로 빚은 《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seedpaper,2016)는 여러모로 재미있으면서 살짝 아쉽기도 한 이야기책입니다. 이 책이 재미있는 까닭은 참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한국말사전에 묻힌 예쁜 한국말’을 캐내어서 헤아리고 살려 보자고 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고루한 민족주의’라고 깎아내리는 목소리가 무척 컸는데, 이런 목소리를 가볍게 흘려넘기면서 말맛에 서린 말멋을 찾아나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 잊거나 잃은 한국말이라지만 아직 사전에는 남았어요. 우리 삶이나 살림에서 멀어진 한국말, 이른바 토박이말이라 하더라도, 사전을 읽으면서 얼마든지 새롭게 뜻이나 결을 돌아볼 만해요.


  오리여인 님은 다른 나라에서 그림을 배우는 길에 ‘어머니 말’이 그리우면 사전을 넘겨 ‘오랜 따스한 품’ 같은 말마디를 곱씹어 보았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모오리돌, 박박이, 부엉이살림, 노루글, 갈맷비, 당조짐, 휘뚜루마뚜루, 매얼음, 드레, 동티, 새물내, 문문하다, 잣눈, 버림치, 노랑꽃, 불땀 같은 말마디를 혀에 얹어서 굴렸대요. 때로는 송아리, 지며리, 배참, 무지르다, 옴살, 바림, 주머니떨이, 뜨막하다, 너울가지, 우렁잇속, 발보이다 같은 낱말을 노래처럼 읊었다고 해요.


  《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책을 읽다가 이런 낱말 저런 낱말에 얽힌 내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곁님 아버지이자 나한테 장인어른인 분은 ‘휘뚜루마뚜루’라는 낱말을 자주 쓰셔요. 장인어른이 ‘휘뚜루마뚜루’라는 낱말을 섞으며 이야기를 풀어낼 적에 어쩐지 ‘휘뚜루마뚜루’라는 말마디 때문에 이야기가 더욱 감칠맛이 나면서 즐겁다고 느낍니다.


  나는 고등학생 적에 ‘지며리’라는 낱말을 흔히 썼는데, 어느 날 국어 교사가 나를 부르며 묻더군요. ‘지며리’가 무슨 뜻이냐 하고요. 나는 그 자리에서 “선생님, 사전 펴 보셔요. 사전을 보면 알아요.” 국어 교사는 이녁한테 낯선 낱말을 나더러 쓰지 말라고 합니다. “왜요? 왜 쓰면 안 돼요? 한국말이잖아요?” 아마 1991년이었을 텐데, 그 국어 교사는 두말하지 않고 내 머리통을 몽둥이로 세게 후려치면서 윽박질렀어요. 뜻도 느낌도 사랑스럽구나 싶어서 즐겁게 쓰는 말이었으나 국어 교사한테는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정말 보잘것없을 때에도 내 옆에 있어 주는 그대가 정말 내 사람, 내가 잘할 사람. (103쪽/모둠밥)


우리도 그리 어린 나이는 아닌지라 모두 “뭐 하는 사람이야?”“몇 살이야?” 하고 물었는데, 오직 한 친구만이 “따뜻한 사람이야?” 하고 물었다. (125쪽/베거리)



  《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살짝 아쉬운 대목이라면, 한국말사전에서 캐낸 예쁜 말과 얽힌 오리여인 님 이야기를 잘 풀어내기는 하되, 글로 빚은 이야기에 얄궂은 말투가 자꾸 섞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모국어인 한글(4쪽)”, “좋고 긍정적(13쪽)”, “따뜻한 온기(36쪽)”, “게우듯 토해내고(48쪽)”, “눈부시게 화려하지(67쪽)”, “사랑과 연애(145쪽)”, “열정적 정열적(175쪽)”, “인생과 삶(203쪽)”, “함께 살며 공존(211쪽)”, “외갓집(224쪽)”, “날카롭고 예민하던(229쪽)”, “이야기와 대화(235쪽)”, “나의 못난 자격지심(279쪽)”처럼 겹말이나 얄궂은 말투를 씁니다. 흔히 쓰는 수수한 말마디를 조금 더 가다듬을 수 있으면 참 좋았겠다고 느껴요.


  4쪽에 나오는 “모국어인 한글”은 ‘글(한글)’하고 ‘말(한국말)’을 잘못 헤아린 말투이지요. ‘외갓집’은 ‘처갓집’처럼 흔히 쓰는 말이라고도 하지만 ‘외가·처가’는 ‘집’을 가리키기에 ‘-집’을 덧붙이면 겹말이에요. “역전 앞”만 겹말이지 않습니다. 이밖에 “읽힘 당하다(279쪽)” 같은 번역 말투를 굳이 써야 했을까 싶기도 해요. “읽어 주다”라고만 해도 넉넉할 테고, 예쁜 토박이말을 캐내는 마음을 더 북돋아 한국말을 한껏 살리거나 가꾸는 마음으로 나아가 주면 더 좋을 텐데요.



마음을 담아 애쓴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결과가 어찌 됐든 참 오래도 기억에서 살아간다. (189쪽/모지랑이)



  앞으로도 예쁜 한국말을 살리고 사랑하며 보살피는 이야기가 더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국어학자나 전문가이지 않더라도, 아니 수수하고 투박한 우리 누구나 우리 한국말 이야기를 예쁘고 사랑스레 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딱딱하거나 틀에 박힌 이야기가 아닌, 삶에서 우러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기를 바라요.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를 바라요. 별 하나에 사랑을 빌던 시인처럼, 말 하나에 사랑을 노래하는 이웃님을 즐겁게 기다립니다. 2016.11.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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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장석주 지음, 이영규 사진 / 문학세계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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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71



시골이 베푸는 놀라운 선물을 누리기

―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장석주 글

 문학세계사 펴냄, 2016.7.27. 12000원



  글을 쓰는 장석주 님은 오랫동안 도시에서 책을 만지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도시에서 책을 만지면서 책을 다루는 글을 쓸 적에는 언제나 ‘책하고 글’만 마음에 담았다고 해요. 그런데 이 도시를 떠나 시골로 삶터를 옮긴 뒤에는 ‘책하고 글’하고는 살짝 떨어지면서 새로운 여러 가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문학세계사,2016)는 바로 시골살이가 장석주 님한테 선물처럼 베푼 놀랍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갈무리한 수필책입니다.



시골에서 살다 보니, 세상에 새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새삼 깨닫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뭇새들이 집 안팎으로 날아든다. 동고비, 곤줄박이, 붉은머리오목눈이, 쇠박새, 노랑텃멧새, 되새, 노랑할미새, 방울새, 꾀꼬리, 뻐꾹새, 쑥국새, 딱따구리, 멧비둘기, 쇠찌르레기, 물까치 …… (43쪽)



  장석주 님은 아침저녁으로 으레 찾아오는 수많은 새를 이야기합니다. 이제 시골사람 ‘가까이’ 되었다는 뜻이로구나 싶어요. 도시에서 살며 글을 썼다면 숱한 멧새 이름이 아니라 다른 이름을 들추면서 글을 쓰셨겠지요. 이를테면 자동차 이름이랃느지 아파트 이름이라든지 상표 이름이라든지 말이에요.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를 읽다 보면 멧새 이름뿐 아니라 나무 이름을 줄줄이 읊는 대목도 나옵니다. 참말로 늘 보고 늘 마주하며 늘 생각하고 늘 쓰다듬는 이웃이기 때문에 나무 이름을 줄줄이 읊을 수 있습니다. 새도 나무도, 또 풀도 풀벌레도 모두 시골사람 이웃이에요.



게으름을 피우는 것, 빗소리 들으며 낮잠을 자는 것, 그리고 바둑이나 포커 따위의 잡기를 좋아한다. 순두부, 두부 튀김, 청국장, 무국, 호박젓국, 떡국, 팥죽, 적포도주를 좋아한다. 찬이 화려하지 않아도 소박한 밥상을 좋아한다. (167쪽)


둘러보면, 주위에 천재들이 즐비하다. 여기도 천재, 저기도 천재! 새들은 음계와 발성법을 배우지 않고도 노래를 한다. 벌이나 거미는 건축학을 전공하지도 않고 설계 도면 한 장 그리지 않고도 제가 살 집을 완벽하게 짓는다. (199쪽)



  시골에서 일하는 분들은 새벽바람으로 일어나서 하루를 엽니다. 새벽 네 시쯤 되어도 늦게 일어나는 셈입니다. 새벽 세 시 무렵이면 마을이 복닥거리지요. 이와 달리 저녁 여덟 시면 벌써 늦어서 마을이 고요합니다. 그리고 한낮에는 다들 낮잠을 늘어지게 누려요.


  장석주 님도 이야기를 합니다만, 시골일을 하다가 “빗소리 들으며 낮잠을 자는” 삶이란 무척 느긋하거나 한갓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돌보고 거두는 얼거리에서 한창 바쁠 적에는 부지깽이도 일손을 거든다지만, 쉬엄쉬엄 나아갈 적에는 느긋하거나 한갓지지요.


  이와 달리 도시에서는 철이나 날이나 때에 따라서 달라지는 일이 매우 적어요. 도시에서는 ‘일을 하다가 살짝 쉬면’서 빗소리를 들을 겨를을 내기란 어렵습니다.



세계 평화를 지키는 것은 새벽에 깨어나 마당을 쓰는 늙은 어머니들이다. 반면에 밀실에서 군인들을 증강시키고 군수물자와 무기들을 늘려 비축하는 회의를 하고 결정을 내리는 자들은 그 구실로 평화를 내세우지만, 그 증강의 본질은 더도 덜도 아닌 ‘전쟁’이다. (217쪽)



  장석주 님은 이녁이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나는 천재가 아니네’ 하고 깨달았다고 해요. 빼어나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새나 풀벌레야말로 천재이고, 벌과 거미야말로 천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만히 따지면 사마귀와 개미도 천재이지요. 제비도 박새도 천재예요. 지렁이도 지네도 천재이고요. 숱한 나무하고 풀하고 꽃도 천재라고 할 만합니다. 어찌 본다면 사람만 천재가 아닌가 싶곤 한데, 사람도 사람 나름대로 천재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을 둘러싼 모든 숨결’을 따사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따사로운 손길로 어루만지고 따사로운 사랑으로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사람은 빼어난 재주나 훌륭한 솜씨보다는 ‘따뜻한 사랑’을 마음에 품으며 이웃하고 나눌 수 있는 대목에서 천재이지 싶어요.



내가 그 전보다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숲이 내 마음에 일으킨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208∼209쪽)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이들이 시골로 삶자리를 옮겨서 흙을 만지고 나무를 쓰다듬을 수 있으면 얼마나 예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여느 공무원하고 회사원도 시골에 삶터를 둔 채 도시로 출퇴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집은 시골’에 두고 ‘일터는 도시’에 둘 만해요.


  이리하여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이들도 도시 한복판에 모여서 툭탁거리지 말고, 저마다 시골 보금자리를 두어 아침저녁으로 텃밭을 돌보고 나무를 어루만지는 살림을 가꾸면서 나랏일을 본다면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책을 펼 만하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합니다. 시골이 베푸는 놀라운 선물을 누구나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2016.9.23.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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