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 (핑크 에디션)
오리여인 글.그림 / 시드페이퍼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읽기 삶읽기 275



별 하나에 사랑을 빌듯, 말 하나에 노래를 담아

― 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

 오리여인 글·그림

 seedpaper 펴냄, 2016.10.9. 13000원



  한겨레가 오랫동안 쓰다가 어느 한때부터 잃어버린 말이 있습니다. 요새는 이런 말을 가리켜 ‘토박이말’이라 합니다. 한겨레가 스스로 토박이말을 잃어버린 까닭은 한둘이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오랜 신분·계급 사회에 짓눌리는 동안 권력자는 한문과 한자를 높이고 시골사람이 입에서 입으로 주고받던 말을 낮췄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자국은 고스란히 남아서 ‘이’는 낮춤말이고 ‘치아’는 높임말처럼 다룹니다. ‘똥’은 낮춤말이고 ‘대변’은 높임말처럼 다뤄요. ‘진지’라는 높임말이 버젓이 있으나 ‘식사’라는 한자말을 마치 높임말처럼 쓰기도 해요.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툭툭 떨어지는 날에 할매가 가슴에 말랭이들을 폭 안고 방으로 들어오던 모습이 문득 생ㄱ각이 난다. 이제는 병원에 계시기 때문에 할매가 해 주는 무말랭이나 말린 고추를 먹을 수 없지만 난 비가 쏟아질 때 언제나 할매를 떠올리는 손녀일 것이다. (40쪽/비설거지)



  한겨레는 오랜 신분·계급 사회에서 눌리다가 겨우 기지개를 켜면서 이 틀을 깰 즈음 그만 이웃나라한테 식민지가 되어요. 이른바 일제강점기이고, 이때에 한국말을 송두리째 빼앗겨야 했어요. 그래도 이때에 학교에 다닌 사람들이 말을 빼앗겼지만,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던 사람들은 말을 빼앗기지 않았어요. 안타깝다면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한국말보다 일본말을 뛰어나게 잘했고, 말도 글도 일본말로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니, 그만 이분들 입과 손에는 일본말이나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 말투가 익은 모습이 그대로 이어져요.


  1980년대에 민주화 바람이 불며 사회 한쪽에서 ‘우리 말글 바로쓰기’가 살며시 일어났습니다. 오랫동안 억눌리던 한국말을 이제 비로소 살려내자는 물결이었어요. 그런데 이때에 ‘우리 말글 살리기’를 가리켜 ‘고루한 민족주의’라고 깔본 사람이 퍽 많았어요. 막상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할 만한데, ‘한국말사전에 묻힌 한국말’조차 한국사람 스스로 캐낼 길이 가로막혔다고 할까요. 이러면서 ‘세계화’라는 이름을 앞세운 영어 바람이 드세게 불었어요.



그저 스쳐 지나가듯 생긴 일에 아주 오랫동안 신경을 쓴다. 마치 빨랫줄에 바짝 마른 하얀 수건, 이 가벼운 것이 작고 얇은 바람에 툭 하고 땅바닥에 떨어진 느낌이다. 탁탁 털면 금세 다 날아갈 작은 흙먼지임을 알면서도 마음은 단번에 정리가 되지 않는다. (56쪽/쥐뿔)



  오리여인 님이 글과 그림으로 빚은 《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seedpaper,2016)는 여러모로 재미있으면서 살짝 아쉽기도 한 이야기책입니다. 이 책이 재미있는 까닭은 참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한국말사전에 묻힌 예쁜 한국말’을 캐내어서 헤아리고 살려 보자고 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고루한 민족주의’라고 깎아내리는 목소리가 무척 컸는데, 이런 목소리를 가볍게 흘려넘기면서 말맛에 서린 말멋을 찾아나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 잊거나 잃은 한국말이라지만 아직 사전에는 남았어요. 우리 삶이나 살림에서 멀어진 한국말, 이른바 토박이말이라 하더라도, 사전을 읽으면서 얼마든지 새롭게 뜻이나 결을 돌아볼 만해요.


  오리여인 님은 다른 나라에서 그림을 배우는 길에 ‘어머니 말’이 그리우면 사전을 넘겨 ‘오랜 따스한 품’ 같은 말마디를 곱씹어 보았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모오리돌, 박박이, 부엉이살림, 노루글, 갈맷비, 당조짐, 휘뚜루마뚜루, 매얼음, 드레, 동티, 새물내, 문문하다, 잣눈, 버림치, 노랑꽃, 불땀 같은 말마디를 혀에 얹어서 굴렸대요. 때로는 송아리, 지며리, 배참, 무지르다, 옴살, 바림, 주머니떨이, 뜨막하다, 너울가지, 우렁잇속, 발보이다 같은 낱말을 노래처럼 읊었다고 해요.


  《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책을 읽다가 이런 낱말 저런 낱말에 얽힌 내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곁님 아버지이자 나한테 장인어른인 분은 ‘휘뚜루마뚜루’라는 낱말을 자주 쓰셔요. 장인어른이 ‘휘뚜루마뚜루’라는 낱말을 섞으며 이야기를 풀어낼 적에 어쩐지 ‘휘뚜루마뚜루’라는 말마디 때문에 이야기가 더욱 감칠맛이 나면서 즐겁다고 느낍니다.


  나는 고등학생 적에 ‘지며리’라는 낱말을 흔히 썼는데, 어느 날 국어 교사가 나를 부르며 묻더군요. ‘지며리’가 무슨 뜻이냐 하고요. 나는 그 자리에서 “선생님, 사전 펴 보셔요. 사전을 보면 알아요.” 국어 교사는 이녁한테 낯선 낱말을 나더러 쓰지 말라고 합니다. “왜요? 왜 쓰면 안 돼요? 한국말이잖아요?” 아마 1991년이었을 텐데, 그 국어 교사는 두말하지 않고 내 머리통을 몽둥이로 세게 후려치면서 윽박질렀어요. 뜻도 느낌도 사랑스럽구나 싶어서 즐겁게 쓰는 말이었으나 국어 교사한테는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정말 보잘것없을 때에도 내 옆에 있어 주는 그대가 정말 내 사람, 내가 잘할 사람. (103쪽/모둠밥)


우리도 그리 어린 나이는 아닌지라 모두 “뭐 하는 사람이야?”“몇 살이야?” 하고 물었는데, 오직 한 친구만이 “따뜻한 사람이야?” 하고 물었다. (125쪽/베거리)



  《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살짝 아쉬운 대목이라면, 한국말사전에서 캐낸 예쁜 말과 얽힌 오리여인 님 이야기를 잘 풀어내기는 하되, 글로 빚은 이야기에 얄궂은 말투가 자꾸 섞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모국어인 한글(4쪽)”, “좋고 긍정적(13쪽)”, “따뜻한 온기(36쪽)”, “게우듯 토해내고(48쪽)”, “눈부시게 화려하지(67쪽)”, “사랑과 연애(145쪽)”, “열정적 정열적(175쪽)”, “인생과 삶(203쪽)”, “함께 살며 공존(211쪽)”, “외갓집(224쪽)”, “날카롭고 예민하던(229쪽)”, “이야기와 대화(235쪽)”, “나의 못난 자격지심(279쪽)”처럼 겹말이나 얄궂은 말투를 씁니다. 흔히 쓰는 수수한 말마디를 조금 더 가다듬을 수 있으면 참 좋았겠다고 느껴요.


  4쪽에 나오는 “모국어인 한글”은 ‘글(한글)’하고 ‘말(한국말)’을 잘못 헤아린 말투이지요. ‘외갓집’은 ‘처갓집’처럼 흔히 쓰는 말이라고도 하지만 ‘외가·처가’는 ‘집’을 가리키기에 ‘-집’을 덧붙이면 겹말이에요. “역전 앞”만 겹말이지 않습니다. 이밖에 “읽힘 당하다(279쪽)” 같은 번역 말투를 굳이 써야 했을까 싶기도 해요. “읽어 주다”라고만 해도 넉넉할 테고, 예쁜 토박이말을 캐내는 마음을 더 북돋아 한국말을 한껏 살리거나 가꾸는 마음으로 나아가 주면 더 좋을 텐데요.



마음을 담아 애쓴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결과가 어찌 됐든 참 오래도 기억에서 살아간다. (189쪽/모지랑이)



  앞으로도 예쁜 한국말을 살리고 사랑하며 보살피는 이야기가 더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국어학자나 전문가이지 않더라도, 아니 수수하고 투박한 우리 누구나 우리 한국말 이야기를 예쁘고 사랑스레 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딱딱하거나 틀에 박힌 이야기가 아닌, 삶에서 우러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기를 바라요.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를 바라요. 별 하나에 사랑을 빌던 시인처럼, 말 하나에 사랑을 노래하는 이웃님을 즐겁게 기다립니다. 2016.11.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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