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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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전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는데 그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는 아내의 안쓰러운 고백이 담긴

책 소개를 보니 정말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남겨진 가족에게도 큰 상처와 고통을 주는데, 그것도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아내와 자식을 두고 남편이 자살을 했다니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일 것 같다.

이 책의 첫 작품이자 동명의 제목인 '환상의 빛'은 이렇게 전 남편의 이해되지 않는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의 얘기를 그리고 있다.

처음에는 실종된 남편의 비밀을 밝혀내려는 아내의 얘기를 다룬 마쓰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초점'

같은 얘기가 펼쳐지지 않을까 생각됐는데 예상밖으로 남편의 죽음에 숨겨진 얘기보다는

남겨진 여자가 겪게 되는 감정의 흐름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사실 유미코가 남편이 죽고 나서 다시 재혼을 하기 때문에 죽은 남편에게 그렇게 집착하거나

못 잊고 하는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 그래도 가슴 한 구석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로 남은 것은

아무래도 그가 죽은 이유를 완전히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다른 단편들에서도 한결같이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남겨진 사람들이

그 사람을 회상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모습(밤 벚꽃)이나 중학교때 친구의 죽음을 한참 지나 전해들은 남자의

모습(박쥐), 침대차에서 할아버지의 울음소리를 듣고 문득 떠올린 어릴 때 친구가 죽었던 기억

(침대차)까지 누군가와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 속에서도

여전히 삶을 지속해나가야 하는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이 잔잔하게 그려진다.

보통 죽음이란 게 그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기에 감정이 격해지기 쉬운데

이 책에선 차분한 상태에서 죽은 사람들과의 추억을 되새김질 해서 뭔가 낯선 느낌도 들었지만

이런 담담함이 오히려 죽음의 의미를 보다 날카롭게 부각시킨 게 아닌가 싶다.

죽음이란 격한 이별을 겪는 당사자마저도 그 실체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멍한 상태에 있게 되는데

이를 바라보는 제3자 입장은 잠깐의 반응이 지나면 남의 일이라 별로 와닿지 않게 된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우리가 죽음을 떠올릴 때 연상하는

그런 반응과는 좀 동떨어져 나와 무관한 사람의 죽음을 접할 때의 그런 느낌을 줬는데

오히려 그런 담담함이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보단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삶을 견대내자는 게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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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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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의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성에 색깔이 들어가 있던 아카마쓰, 오우미, 시라네, 구로노

네 명의 친구들과 단짝으로 지내던 다자키 쓰쿠루는 혼자서 도쿄로 진학한 후

방학 때 등에 고향인 나고야로 돌아가 돈독한 우정을 계속 유지해나간다.

하지만 2학년 여름 방학때 나고야로 돌아온 다자키 쓰쿠루가 친구들 집에 전화를 하자

모두들 전화를 피하고 급기야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는 얘기를 듣게 되는데...

 

 '1Q84' 이후 오랜만에 다시 만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작품은

긴 제목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색채가 없는'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어이없게도 5명의 단짝 친구들 중 다자키 쓰쿠루 본인만 이름에 색깔이 안 들어가서였는데,

물론 그런 의미 외에도 개성이 없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렇게 절친했던 친구들 중에 난데없이 혼자만 왕따가 되어 그룹에서 쫓겨나야 했던 다자키 쓰쿠루.

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가 그런 당한 일을 당하고도 그 이유를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통 사람같으면 억울해서라도 이유를 따지고 물었을 것인데

다자키 쓰쿠루는 그냥 네 명의 친구들이 자신을 따돌리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인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시간이 약이라는 진리에 따라

차츰 그의 상처도 아물어가고 좋아하던 역 설계를 하면서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아나간다.

한참 시간이 흘러 서른 여섯 살이 된 다자키 쓰쿠루는 사라라는 연상의 여자를 만나면서

자신의 숨겨진 상처를 드러내보이고 사라는 쓰쿠루에게 그 친구들을 만나 자신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를 물어볼 것을 충고하고 쓰쿠루는 용기를 내어 친구들을 찾아가 진실과 직면하게 되는데...

 

도대체 다자키 쓰쿠루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친구들에게서 외면을 받아야 했는지 정말 궁금했는데

친구들을 만나 밝혀진 사실은 정말 뜻밖이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단순히 왕따시킬 문제가

아니라 형사처벌은 물론 사회적으로 매장시켜야 할 중대한 사건이지만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결국 다자키 쓰쿠루는 핀란드까지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황당한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쓰쿠루 입장이었으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고통받아 왔음에 치를 떨었겠지만

쓰쿠루는 자신에 대한 오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도 상처를 치유하는

대인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을 살다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고

남을 엉뚱하게 오해할 때도 있지만, 다자키 쓰쿠루가 겪는 일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지만 그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다자키 쓰쿠루는 뭐란 말인가.

만약 그가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했다면 네 명의 친구들은 살인자에 진배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는 자신을 괴롭히던 일들의 실체를 알려주고

마음의 짐을 벗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자키 쓰쿠루를 보면서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다자키 쓰쿠루와 비슷한 '색채가 없는' 인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대로 살아오긴 했지만 거북한 진실을 마주하기보단 회피하는 스타일이고

뚜렷한 색채를 드러내기보단 진면목을 감추는 걸 더 선호하기 때문에

쓰쿠루와 뭔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그가 겪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은 것도 다 그런 이유인 것

같았는데 그래도 사라의 도움으로 용기를 낸 순례가 나름의 성과가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가 미스터리에 상당히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거기에 특유의 감수성과 함께 전작에 이어 라자르 베르만의 '순례의 해' 등 음악까지

적절히 배경에 깔아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늘 화제를 모으며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작품도 그런 무라카미 하루키의 긴 여정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이 될 것 같다.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 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역사는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거야. 그건 당신이라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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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담은 배 - 제129회 나오키상 수상작
무라야마 유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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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에 걸친 한 집안의 여섯 편의 사랑얘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충분히 믿고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작품이었다.

어떻게 가족들이 전부 다 잘못된 사랑에 고통스러워 하는지 의아할 정도였는데

굳이 원인을 찾자면 이 집의 가장이라 할 수 있는 시게유키가 뿌린 죄악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시게유키 집안의 가족 구성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전처인 하루요와의 사이에 장남인 미쓰구와

차남 아키라를 두었고 후처인 시즈코와의 사이에 사에와 미키 두 딸을 두었다.

여기까지는 흔히 볼 수 있는 재혼 가정이라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전처인 하루요가 살아 있는

동안에 집에 일을 봐주던 시즈코와 시게유키가 이미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루요가 죽고 나서 시즈코가 데리고 온 딸 사에가 시게유키의 딸이 아닌 줄로 알았던

아키라와 사에가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불륜의 씨앗이었던 사에가 자신의 친자식임을 시게유키가 밝히지 않으면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인줄 알았던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가

사에가 끔찍한 일을 당하면서 그동안 참았던 감정의 봇물이 터지게 된다.

하지만 둘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둘은 서로를 가슴에 품은 채 더 이상 제대로 된 사랑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

이복남매 간에 금기라 할 수 있는 근친상간이 벌어지지만 거북스럽다기보단 왠지 안쓰럽다는

생각이 더 들었는데 둘이 서로 사랑하게 내버려둔 부모의 잘못이 컸다고 할 수 있었다.

막내인 미키와 장남인 미쓰구도 결코 순조로운 사랑을 하지 못했다.

항상 임자가 있는 남자와의 얼마 가지 못할 부적절한 관계만 맺는 미키나

직장의 어린 여직원과 외도를 하는 미쓰구도 어떻게 보면 부모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불행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시게유키의 사연이 드러나는데 

시게유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전쟁에 참전하면서 겪은 끔찍한 일들이 그를 냉정한 사람으로 만들고 말았는데,

전쟁의 끔찍함은 위안부로 끌려 온 미주와 마음을 나누게 되면서 더욱 잘 드러났다.

여전히 위안부 동원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망언을 일삼는 다수의 일본인들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렇게 자신들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들을 솔직히 인정하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그나마 한일관계에 일말의 희망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었다.

문제는 교과서를 비롯한 일본 정부의 역사왜곡으로 인해 전후의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진실이 뭔지 모른 채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망각하고 핵폭탄의 피해자 코스프레나 하면서

자신들이 괴롭힌 이웃 국가들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과거사 문제는 점점 악화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책이 조금이나마

자신들의 잘못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체적으로 한 가족의 대를 이은 불행한 사랑 얘기를 짜임새 있게 엮어 낸 작품이었는데

다들 나름의 사연들이 있기에 비난의 눈낄로만 바라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무엇보다 그릇된 역사인식이 판을 치는 일본에서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작품 속에 담아내어 더욱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만약에'라는 꿀로 포장된 과거는 달콤하지만, 그 달콤함은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빠지면 빠질수록 독이 되어 마음에 쌓인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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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니 스토리 Tiny Stories
야마다 에이미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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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름 일본 작가들의 소설들은 즐겨 읽는 편이라(물론 장르소설에 치우친 감은 있지만)

 

왠만한 작가들은 최소한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의 저자인 야마다 에이미는 사실 생소한 작가였다.

책에 적힌 작가 소개를 보니 나오키상을 비롯해 여러 문학상을 두루 섭렵한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에 필적한 유일한(?) 여성작가란 평가를 받고 있다는데

 

내가 이런 작가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니 좀 의외라 할 수 있었다(좀 과장된 측면이 있겠지만).

사랑에 관한 스물 한 가지 작은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것처럼 21편의 사랑을 소재로 한 단편을

 

싣고 있는 이 책은 여성 작가라 그런지 대부분 여자주인공들의 사랑 얘기를 그려내고 있다.

 

첫 번째 작품인 '마빈 게이가 죽은 날'은 어머니의 유품에서 발견된 메모로 인해

벌어지는 얘기를 담고 있는데, 마빈 게이가 만우절에 죽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알게 되었다.

 

자신의 죽음이 만우절 농담 취급당할까봐 무섭단 어머니의 말이 재밌으면서도

 

갑자기 장국영이 떠올라 뭔가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으론 앵초와 사랑에 빠진(?) 전신주의 얘기가 나오는데,

 

인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전신주의 눈길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소변을 보거나 토하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등 전신주에게 갖은 학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책을 보고 나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전신주가 신경 쓰여 절대 그런 만행을 못할 것 같다.

 

이 책에는 GI라 불리는 미군과 사귀는 여자들의 얘기가 무려 5편이나 실려 있는데

 

작가 자신의 경험이 있는 것인지,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지 궁금했다.

 

미군과의 연애는 필연적으로 시한부 연애인 경우가 많았는데

 

5편 모두 화려한 남성편력(?)을 자랑했다.

무심한 가족들에게 반기를 들며 100살이 되면 저지를(?)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는 가정주부의 얘기,

 

책 읽는 남자를 지성적일 거라 생각하고 낚인 여자의 경험담(좀 뜨끔하다ㅋ) 등

 

이 책을 통해 단번에 수많은 연애를 경험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라카미 류의 '클리토리스에 버터를'이라는 제목을('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원제였다는)

따온 작품이 있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좀 수위가 있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선정적인 그런 느낌이 들진 않았다) 원래 적나라한 게 오히려 솔직담백한 면이 있으니

 

내가 모르는(?) 색다른 세계를 경험한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사랑 얘기를 접하다 보니

 

세상에는 참 여러 가지 모습의 사랑이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사람마다 상대가 누군지에 따라, 그 시기에 따라 사랑의 빛깔이 다름을 잘 보여주었다.

 

야마다 에이미와는 첫 만남이었는데 여전히 조금은 낯선 느낌이 든다.

 

취향 차이라 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여러 편의 단편을 입맛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는 수 있는 즐거움을 안겨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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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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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를 당하던 중학교 2학년생 후지이 슌스케(후지슌)는

자기 집 감나무에 목매달아 자살하면서 유서를 남긴다.

유서 속에는 동급생인 네 명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자신을 괴롭혔던 미시마와 네모토 외에 한때

친한 친구였던 사나다 유를 절친이라 표현했고 다른 반 나카가와 사유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난데없이 후지슌의 절친이 되어 버린 사나다 유는

이제 후지슌을 외면한 죄로 마음 속에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게 되는데...

 

왕따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된 지 오래되었고 왕따 문제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많이 나왔지만

피해자와 가해자 외에 방관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쉽게 만나볼 수 없었다.

주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과 가해자들에 대한 복수 등이 다뤄졌는데

이 책에서는 왕따를 방관했던 학생들이 후지슌의 죽음 이후 겪게 되는 고통의 나날을 그려내고 있다.

사실 왕따 문제가 발생하면 당사자 외에 대다수의 방관자들이 생긴다.

분명 방관자들이 가해자들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피해자를 측은하게 생각하지만 문제제기를

하거나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나서진 않는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연루되고 싶지 않고 괜히 나섰다가

오히려 자기를 괴롭힐까봐 두렵기 때문인데 결국 이런 무관심과 두려움이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기본적으로는 당사자가 적극 대처해야 하는 문제지만 주변에 자기 편이 있었다면

결코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인데 세상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에 빠져 최후의 선택을 하고 만다.

 

후지슌이 남기고 간 후폭풍은 고스란히 남겨진 자들의 몫이었다.

가해자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당연하다 할 것이지만 방관자들에게도 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절친이 되어 버린 유와 짝사랑의 대상이 된 사유리는 십자가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을 비난하는 말엔 나이프의 말과 십자가의 말이 있다고 하는데,

순간적으로 고통을 주는 나이프의 말에 비해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짊어지고 가야 하는 말이었다.

후지슌을 외면하고 방관했던 죄를 같이 지게 된 유와 사유리.

동병상련의 두 사람은 서로 가까워지지만 십자가를 공유한 인연이라

늘 아픈 데를 건드릴 수 있는 위태로운 관계였다.

후지슌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그의 부모들과 어색한 관계를 이어가던 그들은

20년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하는데...

 

상처의 특효약이 세월이라고 하지만 망각의 위력을 발휘하기에는 후지슌의 죽음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부모나 가족은 당연히 평생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유와 사유리가 겪는 마음의 짐도 엄청났다.

대부분의 방관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후지슌을 잊었지만

두 사람은 오랜 세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했다.

직접적인 가해자들이 겉으론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모습에 비하면 가혹하다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자신을 용서하고 후지슌 가족과도 화해를 하기까지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못잔다'는 말이 있지만

요즘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 책의 주인공들을 보면

그래도 아직 양심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소재가 소재인지라 극단적인 선악대비로 흐르기 쉬운데

책은 사건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내면서

누구나 저지르기 쉬운 방관자의 잘못을 되돌아보게 만들어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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