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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피시 - 제23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수상작
오사키 요시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문사 / 2015년 6월
평점 :
새벽 2시에 난데없이 19년 전에 헤어졌던 애인인 유키코로부터 전화를 받은 야마자키는
여전히 그녀와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며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유키코와 스티커 사진을 찍기로 약속을 잡은
야마자키는 유키코와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데...
오사키 요시오의 책은 예전에 '9월의 4분의 1'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감수성이 넘쳐나는 감각적인 작품들이었던 걸로 어렴풋이 기억이 남아 있다.
보통 소설들은 첫 문장을 읽으면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될지 대략 짐작이 가는데
이 책은 정말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을 한다.
'사람은 한 번 만난 사람과는 두 번 다시 헤어질 수 없다. 인간에게는 기억이라는 능력이 있고,
따라서 좋든 싫든 그 기억과 더불어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이다'라는 첫 단락은
이 책이 얘기하고자 하는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헤어졌던 애인에게 무려 19년 만에 뜬금없는 연락을 받은 남자의 얘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아무리 오랜 시간 헤어져 있어도 기억이 있는 한 결코 헤어진 게 아니라는 소설다운 주장을 펼친다.
보통 눈에서 안 보이면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서로 떨어져 있으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멀어지게 되는 게 인지상정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우리 몸 어딘가에 모든 기억들을
담아놓는 거대한 호수에 잠겨 있는 그 사람과의 기억을 끄집어내야 한다.
이 책의 야마자키도 유키코의 전화를 받으면서 유키코와의 지난 날의 기억을 꺼내본다.
방향치였던 야마자키와 친구에게 남자 친구를 빼앗긴 유키코는
이런저런 일들이 인연이 되어 애인사이가 된다.
그렇게 잘 사귀던 두 사람에게 시련이 닥치게 된 건 야마자키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족같이 지내던 와타나베가 갑자기 비행기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되면서부터였다.
우리에게도 충격적이었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폭파된 사건이
이 책에서도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게 만든다. 믿고 따르던 와타나베의 죽음으로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진 야마자키는 유키코의 친구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게 되고
그런 야마자키를 용서하지 못한 유키코와 결국 헤어지게 된다. 이후 문인출판에서 '월간 이렉트'라는
애로 잡지 편집 일을 하던 야마자키가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들려주는데
선정을 불러일으켜 발기시킨다는 의미의 선정적인 잡지에서도 나름의 삶의 애환이 녹아있었다.
다른 물고기가 수조에서 살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주고 버려지는 운명의
'파일럿 피시'에는 야마자키와 유키코 두 사람의 만남과 이별, 재회 사이에 벌어지는
아기자기하면서도 안타까운 사연들을 담아 냈다. 중간중간에 흥미로운 얘기나 표현들도
적지 않았는데 우산을 공용화하자는 얘기는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갑자기 비가 와서 우산이 없어 난감할 때나 비가 그쳐 우산을 잃어버린 기억들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인데 역이나 대형백화점 등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공용으로 사용하는 우산을 둬서
사용한 후엔 공용보관소에 반납하는 방식으로 우산을 사유물이 아닌 자유화하자는 주장인데
신선한 발상이라 할 수 있었다. '솜털처럼 애매모호한 다정함' 등 감각적인 표현들도
자주 등장해서 나중에 써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반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나니 마음 한 구석에서 왠지 모를 아린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의 이별과 재회도 그렇고 야마자키와 가나의 묘한 인연 등
이 책에서 그려지는 만남과 이별은 뭔가 아련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는데, 가나가 야마자키가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파일럿 피시 역할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동안 로맨스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아 감정이 좀 무뎌진 편이었는데
오랜만에 내 몸 어딘가에 깊이 잠들어 있던 감수성을 깨어나게 만들어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