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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어지러이 나는 섬 ㅣ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하숙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친구인 추리작가 아리스와 함께 카라스지마 섬을 찾은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는 오해의 연속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비슷한 이름의 쿠로네지마 섬으로 가게 된다.
까마귀가 어지러이 나는 섬에는 유일한 거주자인 대문호 에비하라 슌과 그를 찾아온 방문객들만 있는
가운데 뜻밖에 등장한 불청객에 다들 당황스러워 하고 불길한 기운은 결국 살인을 부르는데...
최근에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여왕국의 성'을 본 것에 탄력을 받아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 최근 번역되어 출간된 이 책과 만나게 되었다.
사실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국내에 출간된 책들을 순서대로 모두 봤지만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이상하게 인연이 닿지 않았는데 2007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제1위 작품이라 더욱 기대가 되었다.
학생 아리스의 장래 희망이 추리작가인 걸 생각해보면 작가 아리스는 어쩌면 학생 아리스가
성장한 버전이라 할 수 있는데, 학생 아리스 시리즈에선 추리소설연구회 선배인 에가미가 탐정 노릇을
했다면 작가 아리스 시리즈에선 친구인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가 탐정 역할을 한다.
본격 미스터리가 즐겨 사용하는 단골무대인 고립된 섬에 모인 묘한 사람들은 이 분야의 대표작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외딴섬 퍼즐' 등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책에선 그렇게 거창한 스케일의 연쇄살인이 벌어지진 않는다. 까마귀들이 떼로 날아다녀서 왠지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의 섬뜩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연상시켰는데, 죽은 아내의 복제인간을 꿈꾸는
에비하라 슌과 그런 그를 지원하는 사람들의 이상한 관계들은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기에 충분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동안 가장 강한 정자가 난자와 결합해
생명을 탄생시킨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선 나팔관의 어느 쪽에서 난자가 배란될 것인지 알 수
없기에 운도 좋아야 함을 알려주었다. 그야말로 운과 실력을 겸비한 정자만이 난자와 만나서
새로운 생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우리 존재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행운임을 알 수 있었다.
고립된 섬에서 외부인이 아닌 내부에 범인이 있는 소름 끼치는 상황이라면 극도의 긴장과 공포에서
헤어나오기 쉽지 않은데 예상 외로 이 책에선 등장인물들이 그런 극단적인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지진 않고 생각보단 차분히 대처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히무라가 추리를 통해 밝혀내는 범인의
정체와 섬에 모였던 인물들의 비밀은 좀 허탈한 느낌을 주었는데 거창한 본격 추리물을 기대했다면
좀 아쉬운 여운이 남았다. 그래도 작가 아리스 시리즈도 충분히 즐길 만한 매력이 있음을 확인했는데
그동안 학생 아리스 시리즈에 비해 소외받았던 작품들을 한 번 찾아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