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름 지나가는 하늘

 


  비구름 지나가는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비구름은 천천히 내 오른쪽으로 지나갑니다. 내가 올려다보는 하늘 왼쪽은 저 멀디먼 북녘이요, 내가 올려다보는 하늘 오른쪽은 새삼스레 멀디먼 남녘, 곧 태평양입니다. 비구름이 태평양으로 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는, 우리 집에서 칠 킬로미터를 나가면 맞이하는 바다가 태평양 끝자락이네 하고 느낍니다.


  새들 노랫소리 울리는 숲속 바람이 마당을 스치며 집안으로 살포시 깃듭니다. 첫째 아이가 먼저 잠을 깨어 일어납니다. 같이 마당에 내려서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눈이 부시게 파랗습니다. 아침 여덟 시 햇살인데 눈을 바로 뜰 수 없습니다. 좋은 하늘이기에 햇살은 짙게 드리웁니다. 나를 살찌우는 모든 밥과 꿈과 이야기는 바로 이 햇살 한 줄기에서 비롯하겠지요. (4345.6.19.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함께 살아가는 말 99] 땡볕

 

  아이들 누구나 ‘땡볕’ 말밑이 어떻게 이루어진 줄 모르더라도 땡볕이 어떤 날씨인지 압니다. 어른들 누구나 ‘뙤약볕’ 말밑을 깊이 헤아리지 않더라도 뙤약볕이 어떤 날씨인 줄 알아요. ‘무더위’나 ‘강추위’가 왜 무더위요 강추위인가를 살피지 않지만, 이런 날씨 저런 날씨 환하게 살갗으로 느낍니다. 이와 달리, ‘폭염(暴炎)’이나 ‘폭서(暴暑)’는 아이도 어른도 쉬 알아채지 못해요. 한자를 밝혀 알려주어도 쉬 깨닫지 못해요. 한국말로 ‘불볕더위’라 말해야 비로소 누구나 환하게 알아들어요. 그런데, 알아차리기까지 퍽 여러 날이 걸리고 이래저래 따로 더 배워야 한다지만, 어른들이 날마다 ‘폭염’이니 ‘폭서’이니 하고 말하면, 둘레에 있는 아이들은 이 낱말이 한자말이고 아니고를 떠나 차츰차츰 익숙해져요. 곧, 아이들은 ‘안녕(安寧)’이 무얼 뜻하는지 모르면서 이 말을 써요. ‘바이바이(byebye)’가 영어인 줄 알아차리려면 따로 영어를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을 둘러싼 어른들이 으레 ‘안녕’과 ‘바이바이’를 읊기 때문에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이 말을 받아들여서 마음껏 써요. 서로 인사할 때에 쓰는 말이로구나 하고 여겨요. 아이들한테 말을 온몸으로 물려주는 어른들이 말삶을 깊이 돌아본다면, 아이들 앞에서 아무 말이나 함부로 쓰지 못해요. 아이들은 ‘어느 자리에 어떻게 언제 쓰는가’를 느끼기만 하거든요. 어른들부터 스스로 맑게 생각하며 말을 해야 즐거워요. 맑게 생각하며 말하는 어른 곁에는 맑게 생각하며 말하는 아이들이 자라요. 생각없는 어른 곁에서는 생각없는 아이들이 자라요. 오뉴월 땡볕 한복판에서 삶을 생각합니다. (4345.6.19.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함께 살아가는 말 98] 밀분

 

  네 식구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고추장을 찍어 먹다가, 문득, 고추장 담긴 통에 적힌 글월을 읽어 봅니다. 고추장 담긴 통에는 옛 손길을 되살리며 빚었다고 적힙니다. 이 고추장은 ‘고추분’으로 빚었다고 나란히 적혀요. 밥을 먹다가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고추분’이 뭔가? 이윽고, 아하, 하고 깨닫습니다. 그렇구나. 과자 봉지를 보면 으레 ‘밀가루’라 안 하고 ‘소맥분(小麥粉)’이라 적더니, 이 고추장 빚은 이들은 ‘고춧가루’라 안 하고 ‘고추분’이라 적은 꼴이로군요. 밀가루를 밀가루라 하지 못하고 ‘소맥분’으로 적는 사람도 우습지만, ‘밀분’으로 적는다면 더욱 우습습니다. 미숫가루를 ‘미수분’이라 적으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누가 이런 말을 알아볼까요. 콩가루, 떡가루, 눈가루, 쌀가루, 꽃가루 들을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아이와 함께 꽃봉오리 들여다보며 꽃가루를 만져 보기도 하지만, 꽃을 살피는 학자나 전문가와 교사는 으레 ‘화분(花粉)’이라 읊습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가 커서 스스로 이런 말을 듣고 저런 글을 읽을 때에 머릿속이 어떻게 될까 궁금합니다. 어지러운 사람들 어지러운 말과 글 사이에서 아이가 씩씩하며 사랑스레 말빛과 글사랑 보살피기를 빌며, 다시 밥술을 뜹니다. (4345.6.19.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삐삐가 공원에 갔어요! - 9 아이즐 그림책방 9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서정 옮김 / 아이즐북스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햇살은 언제나 따뜻하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75]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잉그리드 나이만, 《삐삐가 공원에 갔어요!》(아이즐books,2006)

 


  오랫동안 비구름이 찾아들지 않았습니다. 거의 한 달만이로구나 싶은 비구름이 그예 찾아와 하루 내내 비를 뿌렸습니다. 마침 둘째 아이는 엊그제 신나게 물놀이까지 한 뒤 몸이 후끈후끈 달았습니다. 여느 날보다 오줌바지와 오줌기저귀가 많이 나옵니다. 틈틈이 둘째 옷가지 빨래를 하지만, 둘째 빨래는 하루가 지나도록 마르지 않습니다. 비오는 날씨이니까요.


  그동안 해가 쨍쨍 내리쬐기도 했고, 해가 안 나더라도 바람이 시원스레 불었습니다.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기만 하면 햇살과 바람이 포근히 감싸며 보송보송 말려 주었어요. 고작 하루 해가 안 났을 뿐이요, 기껏 하루 바깥바람을 쐴 수 없을 뿐이나, 이렇게 빨래 말리기가 고단합니다. 어제 넌 빨래가 아직 하나도 안 말랐으니, 밤새 나온 오줌바지와 오줌기저귀는 언제 빨아야 할까 아득합니다.


.. 삐삐가 사는 스웨덴의 조그만 마을은 정말 평화로운 곳이었어요. 불량배라고는 고작 한둘이었어요. 그나마 그 불량배도 금세 삐삐한테 혼이 나서 다시 얌전해졌고요. 하지만 임금님이 사는 스톡홀름이라는 도시는 그렇지가 않나 봐요. 신문을 보면 불량배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닌대요 ..  (7쪽)


  햇살은 언제나 따뜻합니다. 맑은 날에도 햇살은 따뜻하고, 흐린 날에도 햇살은 따뜻합니다. 더운 날이건 추운 날이건, 햇살은 늘 고운 볕과 빛을 우리한테 베풉니다. 겨울이 되어 춥다 하건, 봄을 맞이해 따스하다 하건, 해님은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우리한테 찾아옵니다.


  멧등성이에 걸린 하얀 구름과 잿빛 구름을 바라봅니다. 밤새 별을 볼 수 없던 하루를 지나고 훤하게 튼 새벽나절 먼 멧자락을 바라봅니다. 구름에 가리기는 했어도 해님은 저 멀리부터 고운 볕과 빛을 흩뿌립니다. 구름에 가린다 하더라도 마을과 들판은 환합니다. 밝은 빛이 온누리를 감돕니다.


  사랑이라 한다면, 아무리 두꺼운 쇳덩어리 울타리라 하더라도 뚫겠지요. 아니, 사랑이라 한다면 제아무리 두꺼운 쇳덩어리가 되든 시멘트가 되든 아랑곳하지 않아요. 천 킬로미터를 떨어진들 만 킬로미터를 떨어진들 사랑은 고이 이어갑니다. 따사로운 사랑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산들산들 바람이 되어 찾아갑니다.


  이승을 건너 저승으로도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저승에서도 이승을 바라보는 사랑입니다. 뭍에서 깊은 바다 밑까지 스미는 사랑입니다. 어떤 비행기보다 빠르고, 어떤 손전화보다 잘 이어집니다. 어떤 셈틀보다 똑똑하며 어떤 신문보다 이야기가 넘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나날이란 바로 사랑을 먹는 나날이고, 사랑을 누리는 나날이며, 사랑을 일구는 나날이리라 생각합니다.

 

 


.. “너, 건축 허가서는 받고 이 집을 짓는 거냐?” 회색 양복 아저씨가 뒤죽박죽 별장을 가리키며 물었어요. “무슨 허가서요?” 삐삐가 대답했어요. “건축 허가서! 집을 지어도 된다는 허락 말이다. 허락은 받은 거야?” 회색 양복 아저씨가 소리쳤어요. “아∼뇨! 그래도 지금까지는 잘 되고 있는데요.”삐삐가 말했어요 ..  (9쪽)


  언제나 좋은 하루입니다. 구름에 가려 눈으로 볼 수 없다지만, 햇살은 늘 우리 곁에 있다고 느낄 수 있어 좋은 하루입니다. 내 곁 좋은 살붙이들 좋은 넋이 늘 나와 함께 싱그러이 숨을 쉰다고 느낄 수 있어 좋은 하루입니다. 내가 품는 꿈이 좋은 기운이 되어 좋은 바람에 실리고 지구별 곳곳으로 살가이 퍼질 수 있으니 좋은 하루라고 느낍니다. 내 이웃과 동무들이 품는 좋은 사랑이 좋은 이야기 되어 널리널리 마실을 다닌다고 느껴 좋은 하루라고 여깁니다.


  오늘 하루, 아이들은 또 무슨 놀이를 하며 스물네 시간을 누릴까요. 오늘 하루, 내 어버이와 옆지기 어버이는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붙잡으며 스물네 시간을 누리실까요.


  시골마을은 한창 바쁜 일철입니다. 시골마을은 유월도 칠월도 한창 바쁩니다. 팔월이나 구월이라 해서 바쁜 일이 잦아들지 않습니다. 학교는 칠월에 접어들며 한 달 즈음 말미를 둡니다. 교사도 숨을 돌리고, 학생도 숨을 돌립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넣고 회사에 다니는 여느 어버이들도 며칠 즈음 숨을 돌립니다.


  도시에서는 여름철 말미를 맞이해 시골로 나들이를 떠나곤 합니다. 누군가는 비행기를 타고 먼먼 나라로 찾아갈 테고, 누군가는 자가용을 이끌고 더 깨끗하고 더 맑다 하는 시골마을 골짜기나 바다나 냇물을 누리려 합니다.


  참 마땅하지만, 지저분한 시골로 찾아가서 물놀이를 할 도시사람은 없습니다.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 곁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골짜기 물을 마시려 할 도시사람도 없습니다. 가까이에 제철소가 있는데 갯벌에 들어가 조개를 잡을 도시사람이 있을까요. 가까이에 송전탑이 있는데 천막을 치며 하룻밤 묵을 도시사람이 있을까요. 가까이에 고속도로가 지나거나 고속철도가 지나는데 옹기종기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으려 할 도시사람이 있을까요.


  어느 시골이든 가장 시골다우면서 가장 맑고 깨끗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골땅에 공장을 짓거나 발전소를 세우거나 쓰레기 메우는 데를 마련하거나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를 내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사람이 먹는 밥을 일구는 시골땅 어디에도 더럽거나 지저분하거나 먼지를 내거나 하는 시설을 세우면 안 될 일입니다. 꼭 칠월이나 팔월 놀이철이나 쉼철이 아니더라도, 한 해 삼백예순닷새 늘 아름답고 싱그러우며 고운 시골마을로 이어갈 수 있어야 해요. 왜냐하면, 삶이고 목숨이며 사랑이거든요.

 

 


..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 안에는 아이들 셋이 앉아 있었지요. 한 아이는 온통 빨간 머리카락에 검정색 양말과 줄무늬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있었어요. 그 아이를 보면 조심해야 한다는 걸 여러분은 알고 있지만, 불량배들은 책을 안 읽거든요 ..  (14쪽)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글에 잉그리드 나이만 님이 그림을 빚은 《삐삐가 공원에 갔어요!》(아이즐books,2006)라 하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삐삐’는 어른이 만든 어떠한 규칙이나 제도도 따르지 않습니다. 삐삐는 스스로 가장 재미나다고 여기는 일을 즐기려 합니다. 삐삐는 스스로 가장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려 합니다. 삐삐는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삶을 누리려 합니다. 삐삐는 스스로 가장 곱다고 느끼는 사랑을 나누려 합니다.


  삐삐한테는 불량배도 임금님도 경찰도 회사원도 따로 없습니다. 삐삐가 바라보기에는 모두 같은 사람이고 모두 같은 동무이며 모두 같은 이웃입니다. 착한 마음을 바라보면 되지, 겉모습이나 옷차림을 살필 까닭이 없습니다. 참다운 넋을 헤아리면 되지, 입에 발린 말이나 책에 적힌 글월이나 규칙을 욀 까닭이 없습니다. 고운 꿈을 예쁜 이야기로 주고받으면 되지, 애써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주민등록증을 앞세울 까닭이 없습니다.


  우람하게 선 느티나무가 이백 살이건 팔백 살이건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나이가 백 살이나 이백 살 더 먹었대서 더 대단한 나무이지 않아요. 모두 느티나무예요. 쉰 살 먹은 감나무이건 열다섯 살 먹은 감나무이건, 말간 빛 어여쁜 감알을 빚습니다. 쉰 살 먹은 감나무이기에 더 달거나 맛난 감알을 맺지 않아요. 길가에 흐드러지는 들꽃 가운데 키가 1밀리미터 더 크대서 더 돋보이는 들꽃이지 않아요. 꽃망울을 한둘 더 달았대서 더 아리따운 들꽃이지 않아요. 토끼풀은 잎사귀가 셋이든 넷이든 다섯이든 언제나 토끼풀이에요. 세 잎만 토끼풀이고 네 잎은 ‘안 토끼풀’이지 않아요.


.. 어느 날 멀리 떨어진 타카투카 섬에서 닐슨 씨의 친구인 고릴라 스벤손 씨가 찾아왔어요. 정말 근사하게 생긴 고릴라였지요. 스톡홀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멋진 고릴라를 직접 볼 수 있었어요. 그래요. 삐삐가 온 뒤로 훔멜 공원에는 이렇게 볼거리가 많이 생겼답니다 ..  (21쪽)

 


  햇살은 언제나 따뜻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포근합니다. 해님은 늘 따사롭습니다. 꿈은 늘 믿음직합니다. 아이들은 노상 해맑게 뛰놉니다. 어른들 또한 누구나 아이들 한삶을 누리면서 무럭무럭 자라 오늘에 이르렀기에 온 하루를 맑게 빛냅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좋은 햇볕을 느끼며 생각하면 넉넉합니다. 밥상 앞에서 좋은 기운과 냄새를 느끼며 먹으면 넉넉합니다. 날마다 새로 맞이하는 아침에 방긋방긋 웃으며 좋은 이야기를 꽃피우면 넉넉합니다. 나는 날마다 따순 햇살을 누리면서 따순 말을 북돋우고 싶은 두 아이 어버이입니다. (4345.6.19.불.ㅎㄲㅅㄱ)

 


― 삐삐가 공원에 갔어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잉그리드 나이만 그림,김서정 옮김,아이즐books 펴냄,2006.5.20./7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전거 밟고 빨래 너는 어린이

 


  빨래줄에서 춤추는 동생 기저귀를 잡아당기며 놀던 누나 사름벼리가 그만 기저귀 하나를 물던 빨래집게를 톡 떨어뜨렸다. 아버지가 이맛살 찡그리며 노려본다. 사름벼리는 싱긋 웃더니 세발자전거를 빨래줄 밑에 세우고는 밟고 올라서며 팔을 쭉쭉 뻗어 기저귀를 줄에 다시 걸치려 용쓴다. 한손으로 줄과 기저귀 끄트머리를 붙잡고는 다른 한손으로 빨래집게를 쥔다. 겨우겨우 빨래집게를 물린다. 하나를 물리고 둘과 셋을 물린다. 빨래줄에 앉아서 쉬던 제비가 놀라서 파드닥 날아간다. (4345.6.18.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