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과 책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입을 옷입니다. 남이 이 옷을 입으라 해서 이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남이 저 옷이 예쁘다 말하기에 저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내 느낌이 좋은 옷을 입고, 내가 아끼며 사랑할 만한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중학교에 들 적에 학교옷을 똑같이 맞추어 입힙니다. 머리카락 길이와 모양을 똑같이 잘라 맞춥니다. 스스로 좋아하기에 학교옷을 입지 않습니다. 스스로 좋아하기에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아요. 아이들이 아름답게 자라리라 생각하며 학교옷을 맞추어 입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저마다 어여쁜 꿈과 사랑을 키우리라 느끼며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아요.


  아이들이 맑게 빛나며 환하게 웃도록 이끌려고 교과서를 마련하는 어른일는지 아닐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밝게 생각하며 사랑스레 꿈꾸도록 돕는 대학입시 굴레에 내모는 어른일는지 아닐는지 궁금합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 가장 좋아할 만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아이도 어른도 스스로 가장 사랑할 만한 책을 찾아서 읽어야 합니다. 이런 지식을 외우도록 읽을 책이 아닙니다. 저런 시험을 잘 치르도록 하자며 곁에 둘 책이 아닙니다. 처세도 경영도 자기계발도 책이 될 수 없습니다. 책이란, 삶을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책이란,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입니다. 책이란, 삶을 스스로 일구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커다란 회사에서 몇 가지 이름을 붙인 옷을 공장에서 찍어서 내다 팝니다. 옷가게는 넘치지만, 사람들 스스로 사랑할 만한 옷을 누군가 만들어서 즐겁게 다루는지 아리송합니다. 오늘날 책방에는 수많은 책이 알록달록 꽂히지만, 이 책들이 참으로 사람들 넋과 얼을 보듬으며 사랑과 꿈을 북돋울 만한지 알쏭달쏭합니다. (4345.6.2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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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보라 누나 곁 물놀이

 


  바가지에 물을 담아 신을 빨래한다고 노는 누나 곁에 달라붙어 저도 물놀이를 하겠다는 산들보라. (4345.6.2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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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6-22 14:25   좋아요 0 | URL
더운 여름날엔 물 갖고 노는 게 최고!!!!!
다른 장난감이 필요없죠. ㅋ

파란놀 2012-06-22 17:08   좋아요 0 | URL
네.. 그렇기는 한데, 아이들은 끝없이 노느라
에구구...
 

 

 빨래 짜는 어린이

 


  동생이 쉬를 한 바지를 어머니가 빨래한다. 아이는 이 옷을 제가 짜겠다며 들고 흔드는데, 용을 쓰듯 짜고 짜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 아직 어떻게 비틀어야 제대로 짜서 물을 빼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4345.6.2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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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아하는 말

 


  아침에 밥을 먹이는 자리에서는 그렇게도 밥을 안 먹으려고 땡깡을 부리며 딴짓을 하던 아이가 낮 한 시 무렵 부엌 밥상 제 밥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더니 아빠 무릎에 털썩 앉고는 밥만 우걱우걱 씹어먹습니다. 배가 고팠겠지요? 진작부터 다른 반찬하고 밥을 먹으면 좋았으련만. 아빠하고 함께 밥먹는 자리에서 다른 데에 한눈 안 팔고 신나게 밥을 먹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러나 이렇게라도 먹어 주니 고맙습니다. 아직 많이 어린 아이가 무엇을 얼마나 더 잘 알겠습니까. 더 놀고 싶고 더욱더 놀고 싶으며 더더 놀고 싶을 뿐인 이 작고 가녀린 목숨이 놀고 싶다고 하는데 억지로 밥숟가락 들도록 다그치며 입에 밥을 퍼 넣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배가 고플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뿐입니다. 놀다가 제풀에 지칠 때까지 기다리면서 배는 고프고 잠도 찾아와 꺽꺽거릴 때까지 가만히 지켜봅니다. 그러고는 아이 스스로 밥을 먹어야겠다 싶을 때 ‘옳지!’ 하고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밥을 먹입니다. 아이는 요즈음 이렇게 한참 졸릴 무렵에 밥을 먹으면서 스르르 잠들곤 합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어버이된 사람으로서 다른 일은 거의 붙잡지 못합니다. 그동안 꾸준히 이어오던 글쓰기조차 하루에 한두 꼭지 쓰기마저 벅찹니다. 아이 보느라 바쁘고 힘들며 고단합니다. 아이가 쓰러져 잠든 다음에 셈틀을 켜고 글을 써야 하는데, 아이가 쓰러져 잠든 다음에는 애 아빠도 드러눕고 싶습니다. 허리가 결리고 두 눈은 감기며 온몸이 뻑적지근합니다.


  하루이틀이 아닌 여러 해째 이와 같이 살면서 제 둘레 사람들한테 편지 한 번 변변히 띄우지 못합니다. 받은 편지에 답장조차 거의 못 씁니다. 바쁘며 고된 나날을 보내면서 아이 키우는 다른 여느 어버이들은 어떠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모두들 우리 집식구처럼 고달프지는 않을 터이나 바쁘고 힘들기는 서로 매한가지가 아니랴 싶습니다. 바쁘고 힘들다지만 어여쁘며 착한 아이를 바라보는 동안 새힘을 얻지 않느냐 싶습니다.


  고이 잠든 아이는 오줌 기저귀를 가는 사이에 오줌을 징하게 눕니다. 이 바람에 아버지가 덮고 자야 할 이불이 홀라당 젖었습니다. 날이 좀 덥기는 하지만 아버지는 이불이 다 마를 때까지 자기 어렵습니다. 그래, 이런 오줌싸기를 바라보면서도 아이를 나무랄 노릇이 아니라, 아버지가 오늘만큼은 좀 늦게까지 글 하나 붙잡고 용을 쓰라는 뜻으로 읽고 싶습니다.


  깊은 밤에 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합니다. 어느 어버이이든 아이한테 못된 밥을 먹이며 ‘아이가 삭이기 나름이지요’ 하고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엉터리 책을 읽히며 ‘아이가 받아들이기 나름이지요’ 하고 이야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이 앞에서 못된 말을 하거나 얄궂은 말을 하거나 틀린 말을 하거나 엉터리 말을 하면서 ‘아이가 좋은 말을 골라서 잘 배울 테지요’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이를 낳아 기를 때뿐 아니라 여느 때에도 말을 바르게 가누고 생각을 옳게 가다듬으며 삶을 아름다이 추스르고자 힘쓰는 사람이 몹시 드뭅니다.


  더 많은 돈만 있으면 되기 때문일까 궁금합니다. 더 많은 돈만 있으면 되니까, 아이한테이든 나 스스로한테이든 아름다이 말하고 알맞게 말하며 착하고 참되게 말하는 매무새를 잃어도 괜찮을는지 궁금합니다.


  더 높은 이름값만 있으면 되기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남 앞에서 우쭐거린다든지 남들을 팔아 제 밥그릇을 채우면 된다고 여기면서 내 속삶을 가꾸는 길하고는 동떨어지는 탓에 자꾸자꾸 말과 넋과 삶이 알차거나 훌륭한 길하고는 멀어지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날 시인 김수영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우리 낱말 열 가지를 든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 김수영 님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우리 낱말 가운데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나?’ 하고 동무들하고 신나게 떠들며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열 가지 고르기란 만만하지 않았을 뿐더러 한 가지만 고르는 일은 더욱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형은 ‘쏠’이라는 낱말 하나를 알아내어 아끼는데, 우리 형이 쓰는 ‘쏠’이라는 낱말을 입으로 굴리거나 마음으로 헤아리면서 ‘우리 누리에 이렇게 어여쁘고 깊은 낱말이 있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부럽고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로서는 내가 좋아하는 낱말로 무엇을 꼽아야 할는지 잘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좋아할 만한 낱말이란, 걸상이나 사람이나 나비나 강아지나 밥이나 엄마나 누나나 잎이나 일이나 땀 …… 이런저런 낱말들입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지 어느덧 스무 해가 훌쩍 지난 오늘날 곰곰이 되돌아봅니다. 내 고등학생 때에는 걸상이나 사람이나 나비나 강아지나 밥 같은 낱말을 좋아했다면, 오늘날에는 어떤 낱말을 좋아하며 곁에 두는가 헤아립니다. 오늘 이곳에서 내가 즐겁게 꼽을 만한 낱말로 무엇이 있을까 하나하나 살핍니다.

 

 어린이, 하늘, 흙, 물, 바람, 햇살, 마을, 꿈, 손, 빨래.

 

  지난날에도 오늘날에도 앞날에도 나로서는 으레 쓰는 낱말이 좋고, 내 삶에서 누리는 낱말이 좋습니다. 내 생각을 드러내는 낱말이 좋고, 내 생각을 이끌 낱말이 좋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는 할머니라는 낱말을 더없이 좋아할 수 있고, 이불이라는 낱말을 참으로 좋아할 수 있습니다. 구름이나 섬돌이나 지팡이라는 낱말을 좋아할는지 모릅니다. ‘먹다·하다·쓰다’ 같은 움직씨를 좋아할 수 있겠지요.


  나로서는 늘 쓰는 낱말이 반갑고, 언제나 입에서 굴리는 낱말이 좋으며, 아이와 부대끼며 떠올리거나 되뇌는 낱말이 고맙습니다. 내 삶과 어깨를 겯는 낱말이 즐겁습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낱말이 아름답습니다. 딱히 수수하다거나 투박하다고 이름붙이지 않아도 될 여느 낱말이 아주 살갑고 푸근합니다. (4343.5.8.흙./4345.6.2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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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6-22 10:15   좋아요 0 | URL
몸이 아플 때에도 이렇게 고운 글을 쓰시네요...

(맨윗줄의 '땡깡'이란 말을 쓰셨네요~ 저도 이제 저 말을 써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된장님도 쓰셨으니까~ ^^)

파란놀 2012-06-22 17:07   좋아요 0 | URL
아파도 살아야지 어쩌겠습니까.

그나저나 자도 일해도
아프기는 똑같으니
그냥 일이든 뭐든 하며 살기는 하네요......

글샘 2012-06-22 09:40   좋아요 0 | URL
뗑깡 (일본어로...) 간질, 지랄병... 이런 말인데요... ㅠㅜ

hnine 2012-06-22 11:52   좋아요 0 | URL
아이쿠, 웃자고 썼답니다~ ^^

파란놀 2012-06-22 17:0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땡'으로는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기에 사투리인가 했는데, 일본말이었네요. 고맙습니다~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25) 산자전거, 길자전거

 

그래도 명색이 산자전거(MTB)인 데다 프레임이 워낙 무겁고 둔탁해서 요즘 타는 길자전거(로드바이크)에 비하면 노면에 대한 반응은 둔한 편이라
《윤준호,반이정,지음,차우진,임익종,박지훈,서도은,조약골,김하림-자전거,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아홉 가지 매력》(지성사,2009) 204쪽

 

  보기글은 여러모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냥저냥 쓸 수 있으나, 차근차근 가다듬을 수 있어요. ‘산자전거’라 적은 다음 ‘MTB’라고 영어를 붙이는데, 이렇게 안 붙여도 얼마든지 알아들을 만해요. 하나하나 짚어 보면, “그래도 명색(名色)이”는 “그래도”나 “그래도 이름이”나 “그래도 허울이”로 다듬습니다. ‘프레임(frame)’은 ‘뼈대’나 ‘몸통’으로 손보고, ‘둔탁(鈍濁)해서’는 ‘투박해서’로 손보며, ‘-에 비(比)하면’은 ‘-에 견주면’이나 ‘-에 대면’이나 ‘-을 생각하면’으로 손봅니다. “노면(路面)에 대(對)한 반응(反應)은”은 “길을 달리는 느낌은”이나 “길을 달리는 맛은”으로 손질하고, ‘둔(鈍)한’은 ‘무거운’이나 ‘묵직한’이나 ‘무딘’으로 손질해 줍니다.

 

 산자전거 / MTB
 길자전거 / 로드바이크

 

 이 글을 쓰신 분은 낱말이나 말투가 썩 싱그럽지 못합니다. 딱딱하고 메마르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 낱말, ‘산자전거’와 ‘길자전거’라는 대목에서는 산뜻합니다. 저로서는 새롭다고 느낍니다. 곧, “산을 타는 자전거”가 “산타는자전거”요, 간추려 “산자전거”가 됩니다. “길을 달리는 자전거”는 “길달림자전거”요, 간추리니까 “길자전거”가 돼요.


  산을 타는 자전거를 가리켜, 알파벳으로 줄이면 ‘MTB’입니다. 미국사람이 만든 자전거라 미국말로 이름이 붙는데, 우리들은 으레 한글로 ‘엠티비’라고 가리키기도 합니다만, 쓰임새 그대로 ‘산타는자전거’라 할 수 있으며, 단출하게 줄여 ‘산자전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로드바이크’라는 말마디를 살필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흔히 ‘싸이클’이라고도 하는 자전거가 바로 ‘로드바이크’입니다만, 말 그대로 “길을 달리는(로드) 자전거(바이크)”이기 때문에 ‘길달림자전거’라 할 수 있는 한편, 가볍게 줄여 ‘길자전거’라 할 수 있어요.


  이를 바탕으로 ‘짐자전거’와 ‘꼬마자전거’와 ‘세발자전거’를 생각해 봅니다. 짐을 실어 짐자전거입니다. 아이들이 타는 자그마한 자전거라서 꼬마자전거입니다. 바퀴를 셋 달았기에 세발자전거입니다.


  아기를 태우고 다니는 자전거라 한다면 ‘아기자전거’라 해 볼 수 있겠지요? 둘이나 셋이서 짝을 지어 함께 타는 자전거라 한다면 ‘짝자전거’나 ‘짝꿍자전거’라 할 수 있습니다. 어른이 타는 자전거 뒤에 어린이가 함께 탈 수 있도록 안장과 바퀴 하나 붙이는 자전거라면 ‘새끼자전거’나 ‘딸림자전거’라 할 수 있어요.


  장사하는 분들이 손수레를 앞이나 뒤에 붙여서 자전거를 끈다면, ‘짐수레자전거’ 또는 ‘수레자전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이 ‘수레자전거’가 거의 없지만,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웬만한 장사꾼들은 하나같이 ‘수레자전거’에 짐과 사람을 잔뜩 태워서 다닙니다.

 

 산자전거 / 길자전거
 짐자전거 / 수레자전거 / 삶자전거
 꼬마자전거 / 어린이자전거
 아기자전거 / 새끼자전거 / 딸림자전거
 세발자전거 / 네발자전거 / 외발자전거
 큰자전거 / 작은자전거
 누워타는자전거
 …

 

 우리가 처음 만든 물건이 아닌 자전거입니다. 나라밖에서 들여온 자전거입니다. 자전거 부속을 가리키는 이름을 살피면, 한자로 지은 이름이나 영어로 지은 낱말투성이입니다. 그래도 요모조모 몇 가지는 우리 나름대로 풀어내어 쓰며, 우리가 생각을 펼치거나 넓히려 한다면 얼마든지 더 많은 부속을 손쉽고 깨끔하게 풀어낼 수 있습니다. 손잡이, 바퀴살, 안장대(안장기둥), 발판, 딸랑이, 뒷거울, 앞등, 뒷등, 기어줄, 브레이크줄, 조임나사, 잠금나사, ……처럼 쓸 수 있어요.


  따지고 보면 ‘자전거’라는 말마디도 우리 말이 아니라 할 수 있을 텐데, 자전거를 놓고 ‘自轉車’라고 적는 일은 없습니다. 굳이 이렇게 한자를 하나하나 뜯어 보면서 이야기를 하려 한다면 할 노릇이지만, 우리한테 자전거는 ‘자전거’일 뿐입니다. 그냥 우리 말이에요. 더욱이, 자전거를 서양에서 만들었다 하여 우리가 굳이 ‘cycle’이나 ‘bicycle’이나 ‘bike’라고 말할 까닭은 더욱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그저 ‘자전거’라는 이름 하나면 알맞춤합니다.


  우리 삶에 스며든 이 자전거라는 탈거리를 우리 깜냥에 따라 알맞게 삭이고 다듬으며 추슬러서 즐기면 됩니다. 우리 나름대로 자전거를 신나게 타면서 우리 삶터를 알차게 북돋우면 넉넉합니다. 자동차를 두고 괜히 ‘car’나 ‘카’라고 해야 제대로 자동차를 타거나 즐긴다고 할 수 없듯, 자전거는 자전거요, 자전거를 가리키는 이름은 얼마든지 내 슬기를 빛내면서 일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나 스스로 내 자전거 이름을 빚어낸다면, 또 내 손으로 내 자전거 삶을 가꾸어 본다면, 한결 아름답고 기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4342.7.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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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산자전거인 데다 몸통이 워낙 무겁고 투박해서, 요즘 타는 길자전거와 견주면 길을 달리는 맛은 좀 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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