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사계 - 흙빛에 담은 한국의 봄여름 가을 겨울 그 길을 따라
이대일 글.사진 / 정신세계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아름답게 찍을 수 있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103] 이대일, 《춤추는 四界》(정신세계사,2005)

 


  사진을 찍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곳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면서 살아가는 곳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누구라도 스스로 살아가지 않는 곳에서는 사진을 못 찍고, 누구라도 스스로 좋아하며 살아갈 만한 곳이 아니라면 즐겁게 사진을 못 찍습니다.


  고향이 서울이기에 꼭 서울에서 사진을 찍지는 않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지만, 스스로 마음으로 바라는 삶터가 있을 때에는, 서울에서는 사진을 안 찍으나 마음으로 바라는 어느 삶터로 나들이나 마실을 할 때에 비로소 사진을 찍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진을 바라보는 아무개는 ‘여행사진’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하는데, 막상 이러한 사진을 찍은 누군가한테는 ‘여행사진’이 아니에요. ‘그냥 사진’이요, ‘그저 스스로 좋아하는 곳에서 지내며 저절로 찍은 사진’입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면, 스스로 사진기를 손에 들 만한 곳이야말로 스스로 마음을 활짝 열며 살아가고 싶은 곳이요, 스스로 사진기를 손에 들 만하지 못한 곳이야말로 스스로 마음이 닫히면서 고단한 곳이에요.

 

 


  한국땅 적잖은 사람들이 ‘스스로 나고 자란 동네’에서 사진을 못 찍거나 안 찍는 까닭을 찾자면 그리 어렵지 않아요. ‘스스로 나고 자란 동네’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사진을 찍을 수 없거든요. 둘레가 아름다운 숲과 바다라 하더라도, 숲과 바다를 스스로 좋아하지 않으면 사진으로 담지 않아요. 숲과 바다를 뒤로 하고서 사진 찍는 일도 없어요. 둘레가 높직높직한 빌딩뿐이라 하더라도, 이 같은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빌딩들을 뒤로 하고서 사진을 찍어요. 서울에서든 부산에서든, 일본 도쿄에서든 프랑스 파리에서든, 스스로 마음에 드는 데에서 찍는 사진입니다.


  집에서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으레 ‘아이 얼굴’만 담고, ‘아이가 지내는 집안 살림살이’가 드러나도록 사진을 담지 못할 적을 헤아려 봅니다. 스스로 느끼지 못할 뿐인데, 내 보금자리를 나 스스로 좋아할 적에는 아주 스스럼없이 ‘아이 얼굴’뿐 아니라 ‘아이 온몸’이랑 ‘아이가 지내는 집안 곳곳’이 잘 드러나도록 사진을 찍기 마련입니다. 아이하고 집 앞에서 사진을 찍어요. 아이하고 마당에서 사진을 찍어요. 집을 좀 멀리서 바라보는 들판에서 사진을 찍어요.


  사진이란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모습을 찍으며 이루어집니다. 글이란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삶을 연필로 적바림하며 태어납니다. 그림이란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야기를 붓으로 놀리며 빛납니다.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스스로 좋아하고, 스스로 좋아하면서 시나브로 살아내기에, 바야흐로 사진으로든 글로든 그림으로든 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대일 님 사진책 《춤추는 四界》(정신세계사,2005)를 읽습니다. 이대일 님은 한국땅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춤추는 네 철”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보여주려 합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여린 싹들의 노래와 춤 앞에서 나는 조금 전 나비의 춤을 떠올렸다(26쪽).” 하고 읊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눈이 알록달록해지는 듯한 단풍잎들은 하오의 햇살 아래 물비늘처럼 반짝였다(92쪽).” 하고 노래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대문을 나서니 곧바로 아스팔트에다가 양식 이층집들이 사방에서 어수선했다. 어리벙벙해졌다. 시간이 잠시 역류를 했음이 분명했다(124쪽).” 하고 외치며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시시각각 모습을 바꿔 가며 골짜기를 타고 오르는 저 가벼운 구름은 무슨 의미일까(166쪽)?” 하고 꿈꾸며 사진기를 어깨에 겁니다.


  어쩌면 너무 마땅한 셈인지 모르나, 이대일 님은 ‘아스팔트와 서양식 빌라’로 이루어진 당신 살림집 둘레에서는 사진을 안 찍습니다. 이대일 님이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살붙이들과 뒤섞이는 보금자리에서는 사진을 안 찍습니다. 아니, 사진을 더러 찍을는지 모르나 바깥으로는 안 보여줄는지 모릅니다. 이대일 님 삶터에서는 으레 ‘어리벙벙해졌다’ 하고 느끼니, 사진기를 손에 쥘 수 없습니다. 사진기를 쥔 손이 흔들릴 테고, 사진기에 박은 눈이 빙글빙글 도는데,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대일 님만 이와 같지 않아요. 한국에서 ‘아름다운 숲과 들과 바다와 내와 메’를 사진으로 담는 분들 거의 모두 이와 같아요. 막상 사진쟁이 스스로 도시 한복판에서 아스팔트와 자동차와 아파트와 빌딩 사이에 갇히듯 살아가면서, 사진을 찍으려고 도시 한복판에서 멀리멀리 벗어납니다. 먼먼 그림자로도 도시 끄트머리조차 안 보일 만한 데에서 사진을 찍으려 해요. 사진책 《춤추는 四界》를 살피면 어느 사진 귀퉁이에도 ‘도시 자취’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온통 시골 삶자락입니다. 온통 시골 숲이요 시골 들판입니다.

 

 


  춤추는 봄이요 여름이며 가을이고 겨울이에요. 시골에서는 언제나 봄부터 겨울까지 춤추는 나날이에요. 시골에서 조그맣게 보금자리 이루어 살아가면, 애써 멀리 마실을 다니지 않아도 날마다 새롭고 새삼스러우며 싱그럽다 싶은 모습을 신나게 사진으로든 글로든 그림으로든 빚을 수 있어요. 날마다 같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를 사진으로 찍어도 날마다 다른 이야기를 얻을 수 있어요.


  꼭 지리산이어야 하지 않아요. 반드시 백두산이어야 하지 않아요. 으레 울릉섬이나 제주섬까지 가야 하지 않아요. 구례가 더 좋거나 경주가 더 좋거나 영월이 더 좋거나 보령이 더 좋거나 하지 않아요. 어느 시골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에서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길 살림을 일구면 돼요. 사진은 스스로 살아가는 결에 따라 찍기 마련이니,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사진기 단추에 손가락 살포시 얹으면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낄 사진을 일구어요. 스스로 사랑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사진기 단추에 손가락 살짝 얹으면서 스스로 사랑스럽네 하고 느낄 사진을 낳아요.


  이리하여 사진책 《춤추는 四界》는 이대일 님이 꿈꾸는 시골 이야기가 담깁니다. 스스로 살아내지 않거나 살아내지 못하면서 그예 꿈꾸듯 마음속에 담은 이야기를 담습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숲, 멀찍이 떨어진 채 지켜보는 냇물, 멀디먼 데에서 스쳐 지나가며 들여다본 들판 이야기를 《춤추는 四界》로 갈무리합니다. (4345.6.27.물.ㅎㄲㅅㄱ)

 


― 춤추는 四界 (이대일 글·사진,정신세계사 펴냄,2005.12.1./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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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알 깨지다

 


  이른아침에 아이 오줌그릇을 비우려 하다가, 자그마한 새알 하나 오줌그릇에 떨어져 깨진 모습을 본다. 메추리알보다 훨씬 작은 새알은 노른자가 동그랗다. 낳은 지 아직 얼마 안 된 알이로구나 싶다. 제비집을 올려다본다. 왜 이 알 하나 떨어졌을까. 틀림없이 제비알일 텐데, 설마 뻐꾸기라도 여기에 들어와서 제비알을 밀어냈을까. 어미 제비가 똥을 누다가 그만 알을 낳는 바람에 이렇게 떨어뜨려 깨지고 말았을까.


  깨진 알을 꽃밭으로 옮긴다. 흙에 닿은 노른자는 차츰 허물어진다. 노른자가 천천히 허물어지는 동안 어느새 개미가 달라붙는다. 제비알은 새끼 제비로 자라나지 못하면서 이렇게 개미한테 밥이 되는구나.


  아침에 잠을 깬 식구들을 불러 제비알을 함께 바라본다. 옆지기와 아이가 손을 뻗어 제비알 크기를 헤아린다. 빈 껍데기만 아이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모든 제비들은 이렇게 조그마한 알에서 태어났겠지. 알도 작고 제비도 작다. 알도 가볍고 제비도 가볍다. (4345.6.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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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6-27 07:55   좋아요 0 | URL
어머나 어쩌다 너무 안타깝네요

파란놀 2012-06-28 06:53   좋아요 0 | URL
그래도 다시 새 목숨이 태어날 테지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목숨도 있고
자연에서 새로 태어나는 목숨도 있어요..

BRINY 2012-06-27 13:0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요즘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귀한 제비.

파란놀 2012-06-28 06:52   좋아요 0 | URL
도시사람들이
제비 볼 수 있는 곳으로
보금자리 옮기면 좋겠어요..
 

 


둘째 아이를 걸린다.
둘째 아이 손을 잡고
천천히 들길을 걸린다.

 

둘째 아이는
첫째 아이보다
키도 작고
손도 작고
머리도 작고
발도 작고
몸도 작다.

 

둘째 아이는
밥그릇도 작고
수저도 작고
옷도 작고
이불도 작고
입이며 눈이며
모두모두 작다.

 

작은 발로
작은 시골마을
작은 논둑길을
한 발짝 두 발짝
천천히 디딘다.

 

작은 발로
작은 몸 가누어
작은 목숨 곱게
작은 사랑으로
움직인다.

 

첫째 아이는
둘째 아이 앞에서
신나게 웃으면서
뛰고 달리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기운을 북돋운다.

 


4345.5.3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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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에 가서 발을 담갔다

 


  집에서 면소재지까지 네 식구 군내버스를 타고 2200원. 면소재지에서 택시를 타고 발포 바닷가로 5000원. 세 시간 동안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발포 바닷가 귀퉁이에는 ‘다도해 국립공원’이라는 푯말이 선다. 국립공원 바닷가이지만, 이곳에 와서 고기를 굽거나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쓰레기를 도로 가져가지 않는다. 이곳에 그냥 버리고 간다. 이 모습을 바라본 도시 손님은 ‘바닷가도 작으면서 왜 이리 더럽느냐’ 하고 말한다. 시골 바닷가가 더러워진 모습이 아니라, 도시사람이 쓰레기를 버려 더럽혀 놓은 손길을 못 느끼는 일이 안쓰럽다.


  이곳 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논다. 내 발은 태평양 끝자락에 선다. 아이도 옆지기도 모두 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태평양 끝자락에서 논다. 태평양은 지구를 덮은 바닷물 가운데 하나. 우리들은 바다를 느끼면서 지구를 느끼고, 지구를 느끼면서 내 목숨이 싱그럽게 살아서 펄떡인다고 느낀다.


  바다에 가서 발을 담그고는 다시 택시를 불러 집까지 돌아온다. 8000원. 고작 15000원에 이르는 적은 돈으로 바다와 태평양과 지구와 나를 느끼며 하루를 누렸다. 작은 시집 하나 가방에 넣어 바다로 왔는데, 작은 시집을 꺼낼 일은 없었다. (4345.6.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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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6-26 09:32   좋아요 0 | URL
와 너무 시원해 보여요 아이들이 좋아했겠어요 요즘은 정말 여름 날씨라서~
바다가 그리운 나날이죠

파란놀 2012-06-26 13:50   좋아요 0 | URL
예전에 갈 적에는 '조금 바가지 택시삯'을 치렀는데,
어제는 '착한 택시삯'을 치를 수 있어서,
앞으로 이 택시 기사님한테만 전화해서
면부터 즐겁게 나들이 하려고 해요.

아이들이 더 크면, 아마 다섯 해쯤 뒤가 되리라 보는데,
그때에는 온 식구가 자전거를 끌고 갈는지 모르고요 ^^;;;

개인주의 2012-06-26 12:35   좋아요 0 | URL
가만 있기만 해도 좋을텐데
저런 곳에서 꼭 고기를 먹어야 하는건지 모르겠어요.

파란놀 2012-06-26 13:49   좋아요 0 | URL
고흥은... 바닷가 둘레에 '식당'이 거의 없어요. 그래도 아예 없지는 않은데, 다들 자가용 몰고 오니까, 자가용 몰고 조금 가서 구워 먹어도 되련만, 굳이 그릴이나 석쇠나 숯까지 챙겨서 바닷가에서 구워 먹고는 그 쓰레기와 찌꺼기를 고스란히 두고, 또 봉지까지 그대로 가는 이들이 꼭 있어요.

마을 젊은이도 어르신도, 한창 바쁜 일철이라, 바닷가에서 이렇게 더럽히고 가더라도 누가 지켜보거나 말리지도 못한답니다. 국립공원에서는 '취사 금지'인 줄조차 생각하지 않으니 어쩌겠어요...
 
청개구리 여행사 - 연못 탐험대 모집 과학 그림동화 30
마츠오카 다츠히데 글.그림, 이영미 옮김 / 비룡소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내 이웃은 어떻게 살아갈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78] 마츠오카 다츠히데, 《청개구리 여행사》(비룡소,2008)

 


  도시에서 살아가며 새벽 일찍 일어나 버스나 전철에 실려 짐짝처럼 짜부라진 채 일터로 간 뒤, 저녁 늦게 하루일을 마치고는 다시 새벽 때처럼 버스나 전철에 실려 짐덩이처럼 찌그러진 채 집으로 돌아가는 굴레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날씨를 알 수 없습니다. 더우면 선풍기나 에어컨을 켜야 합니다. 추우면 보일러를 돌리거나 난로를 때야 합니다. 이뿐입니다. 하늘에 구름 없이 맑으면 얼마나 파란 빛깔이면서 맑은지 못 느낍니다. 하늘에 구름이 조금 낀 채 맑으면, 여름날에는 구름이 해를 가릴 때에 얼마나 시원한지 못 느낍니다. 하늘이 잔뜩 찌푸린 채 빗방울이 듣는다면 빗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못 느낍니다.


  도시에서는 집에서고 일터에서고 또다른 여러 문화시설에서고 공공기관에서고 온통 전기로 밝힌 등불 밑에서 지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거나 일하는 사람은, 똥오줌을 누러 뒷간에 갈 적에도 전깃불을 켭니다. 도시에서 살아가거나 일하는 사람은, 햇볕이 잘 들어오도록 집이나 건물을 짓지 않습니다. 도서관도 책방도 극장도 공연장도 모두 전기로 불을 켭니다. 축구나 야구나 농구나 배구를 한다는 경기장에서도 전기로 불을 켭니다. 아주 맑은 한낮에 햇볕을 쬐면서 벌이는 경기는 매우 드물어요. 헤엄치기마저 냇물이나 바다에서 하지 않아요. 네모난 틀에 가둔 수영장에서 할 뿐입니다.


.. “이 배는 안전한가요? 가라앉으면 어떡해요?” “에이, 걱정 마세요. 이 배는 아주 튼튼하고 물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답니다. 사람들이 버린 페트병으로 만든 제 작품이죠. 하하.” ..  (4쪽)

 


  전기가 사람한테 얼마나 좋거나 도움이 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기가 있기에 셈틀을 켜서 글을 쓸 수 있고, 인터넷도 즐길 수 있어요. 전기가 있으니 디지털사진기를 전지 닳을 걱정 없이 쓸 수 있어요. 전기가 있으니 싱싱한 푸성귀를 퍽 오래도록 냉장고에 건사할 수 있어요. 전기가 있으니, 몸이 힘들거나 이불을 빨아야 할 때에 빨래기계 힘을 빌 수 있어요. 전기가 있어, 땅밑에서 물을 뽑아 끌어올릴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전기를 왜 써야 할까요. 훤한 한낮에 햇빛이 아닌 전기로 밝히는 등불 빛을 쐬야 할 까닭이 있나요. 왜 도서관이나 책방은 햇빛 아닌 전기로 밝히는 등불을 켜야 할까요. 왜 학교나 공공기관이나 여느 회사에서는 햇빛이 아닌 전기로 등불을 키려 할까요. 건물을 짓는 이들은 왜 햇빛을 골고루 누리면서 햇볕을 잘 살리는 길을 안 찾을까요.


  햇빛이 아닌 전기로 밝힌 등불 빛을 받는 사람 몸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궁금합니다. 자연스럽게 흐를 뿐 아니라, 모든 목숨을 살찌우는 햇볕과 햇빛이 아닌, 석유를 태우고 석탄을 태우며 우라늄을 태워서 얻는 전기로 켜는 등불 빛을 받는 오늘날 도시사람 몸은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합니다.


  풀도 꽃도 나무도 햇빛과 햇볕을 골고루 받을 때에 싱그럽게 자라요. 능금도 배도 복숭아도 귤도 수박도 오이도 가지도 배추도 무도 당근도 딸기도 상추도 깻잎도 몽땅 햇빛과 햇볕을 즐겁게 받을 때에 알차게 여물어요. 전깃불이나 난로불로는 푸성귀와 열매를 알차게 무르익히지 못합니다. 겉보기로는 큼직하거나 때깔이 좋아 보이도록 키울 수 있을는지 모르나, 사람을 살찌우는 좋은 숨이 깃들지 못해요. 빗물 아닌 수도물을 마시는 감나무에 맺힌 감알이 맛날까요. 빗물을 못 먹고 수도물을 마시는 벼포기에서 얻은 쌀알이 맛날까요.


.. 손님은 무당벌레, 공벌레 부부, 달팽이예요. 다들 처음으로 물속 구경을 하는 거라 무척 신이 났지요 ..  (6쪽)

 


  비료와 항생제와 풀약을 먹고 자라는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는 한결 굵직해지고 겉보기로는 빛이 곱다 합니다. 비료와 항생제와 풀약에 길든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는 병해충을 잘 못 견딘다 합니다. 비료와 항생제와 풀약으로 큰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는 비바람에 쉬 꺾인다 합니다. 요즈음 ‘농업과학’에서는 비료와 항생제와 풀약을 먹으며 자라는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가 ‘병해충에 잘 견디고 비바람에 잘 안 쓰러지’도록 유전자를 건드립니다. 왜냐하면, 도시사람 누구나 ‘더 싸게 장만해서 더 많이 배를 채울 수 있’는 곡식이나 푸성귀나 열매를 바라거든요.


  알맞게 먹고, 즐겁게 먹으며, 사랑스레 먹는 길을 나날이 잊습니다. 알맞게 누리고, 즐겁게 누리며, 사랑스레 누리는 길을 자꾸자꾸 잃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더 많은 사람을 더 손쉽게 길들이면서 가두려고 자꾸자꾸 과학기술을 부추기면서 무언가 새롭다 싶은 기계와 물질과 문명을 빚는지 모릅니다. 어느 모로 보면, 사람들 스스로 아름다운 꿈과 사랑하고 동떨어지도록 자꾸자꾸 문화나 예술을 북돋우는지 모릅니다.


  아주 마땅하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자면, 밥이든 빵이든 내 목숨을 튼튼히 이을 다른 목숨을 먹어야 합니다. 내 목숨을 이을 목숨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내 몸은 살아내지 못합니다. 이슬을 마시든 바람을 마시든, 내 넋이 깃든 몸뚱이를 지키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 몸뚱이는 이럭저럭 살찌운다 하지만, 내 몸뚱이에 깃드는 넋을 함께 살찌우지 못하면, 내 목숨은 산 목숨이라 하기 어려워요. ‘나’라 하는 사람은 살결과 뼈와 핏줄과 피와 물과 세포로 이루어진 몸뚱이가 아니거든요. ‘나’라 하는 사람은 과학으로 샅샅이 파헤칠 분자 얼거리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세포 조직 꾸러미가 아닙니다. 몸을 움직이는 넋이 있고, 몸을 이끄는 얼이 있어요. 몸을 움직여 사랑을 빚는 마음이 있고, 몸을 이끌어 꿈을 이루는 생각이 있어요.


  ‘두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 얼굴과 몸매’를 ‘그 사람’으로 여길는지 모르나, ‘두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은 ‘얼굴과 몸매’를 ‘그 사람’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두 눈을 못 쓸 뿐 아니라 두 귀를 못 쓸 때에는, 또 내 몸뚱이를 쓸 수 없을 때에는, ‘내 앞에 선 사람’을 어떤 갈래와 모습과 무늬와 빛깔로 헤아리면서 ‘한 사람’인 줄 알아챌 만할까요.


.. “저도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군요. 참개구리 주위에 모여든 물방개, 송장헤엄치개, 거머리, 장구애비는 모두 다른 동물을 잡아먹어야만 살 수 있는 육식 동물이거든요.” 무당벌레가 혼자 중얼거렸어요. “물속 세상도 살아가기 꽤 힘든 모양이로군.” ..  (13쪽)

 

 

 

 


  해마다 날씨가 크게 뒤틀립니다. 곰곰이 들여다보면, 해마다 날씨가 크게 뒤틀리기만 하지 않고, 다달이, 또 나날이 날씨가 크게 뒤틀립니다. 하루에도 숱하게 날씨가 크게 뒤틀립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뒤틀리는 날씨를 살갗으로 느낀다든지 마음으로 느끼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뒤틀리는 날씨를 깨달아 스스로 삶을 바꾸며, 생각을 바꾸고, 사랑을 바꾸는 사람 또한 매우 적습니다.


  모두들 입으로는 떠들고 글로는 시끄럽습니다. 모두들 몸은 움직이지 않고, 마음 또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밥벌이 아닌 돈벌이에 얽매입니다. 여느 살림을 꾸리는 한 사람도 돈벌이에 얽매이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도 돈벌이에 얽매입니다.


  지난해에는 끔찍한 큰물 때문에 힘들었다면 올해에는 끔찍한 가뭄 때문에 힘들다 할 만하지만, 도시사람 살림살이는 하나도 바뀌지 않습니다. 큰물과 가뭄 때문에 힘들 때에 대통령이 누가 되건 말건 무엇이 대수롭겠습니까. 대통령이 큰물이나 가뭄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뻥 하고 터진 마당에 누가 파업을 하건 말건 무엇이 대단하겠습니까. 파업은 민주주의를 누리는 권리 가운데 하나이니,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마땅히 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사람을 살리지는 않아요. 사람을 살리는 길은 사람 스스로입니다. 사람 스스로 깃드는 숲과 들과 내와 메가 곧 사람을 살리는 길입니다. 노동자는 파업을 할 노릇이 아니라, 공장이나 회사를 그만둘 노릇입니다. 공장이나 회사에서 모두 떠나 공장은 공장장 혼자 꾸리고, 회사는 사장 혼자 이끌라 할 노릇입니다. 스스로 노동자 아닌 ‘한 사람’으로 사랑스레 살아갈 길로 찾아들면 됩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 영국 맨체스터 탄광 노동자들이 ‘파업’은 하지만, 그 다음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까마득히 모릅니다. 민주주의에 따라 파업까지는 했지만, ‘삶짓기’로 무엇을 누리면서 아름다운 나날을 빛낼까 하는 대목을 생각하지 못해요. 집에서 아이들한테 윽박지르고, 밥을 제대로 차리거나 청소나 빨래조차 옳게 할 줄 몰라요. 그저 공장이나 회사에서 톱니바퀴 같은 부속품 같은 삶에 얽매이면서 돈만 벌 뿐인 노동자예요. 이래서야 ‘노동자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에요. 노동자로 살고 싶다면, 참말 노동자다우면서 사람다운 길을 걸어야 해요. 이를테면,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고, 텃밭을 일구어 푸성귀를 거두면서, ‘공장이나 회사에서 일삯을 안 받더라도 얼마든지 즐겁게 먹고 누리는 삶’을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빛내면 돼요.


  도시사람더러 하루아침에 도시를 떠나라고 한다든지, 도시에서 물 펑펑 쓰는 짓 그치라고 한다든지, 도시에서 더위에 에어컨이나 선풍기 그만 좀 돌리라고 한다든지 하고 말할 수 없어요. 다만, 도시사람 스스로 이 같은 굴레를 스스로 짊어지니까, 도시사람 스스로 ‘돈을 버는 걱정’이라는 올가미를 스스로 쓸밖에 없어요. 굴레를 짊어지니 올가미를 써요. 사랑을 나눌 때에는 꿈을 이루고, 믿음을 나눌 때에는 뜻을 이루지만, 돈을 벌려 할 때에는 도시에서 울타리에 갇혀요.


.. 청개구리가 말을 마치자마자 꼬마잠자리 세 마리가 나타났어요. 공벌레 아줌마가 놀라며 말했지요. “어머나, 잠자리가 나만큼 작네!” ..  (18쪽)

 


  마츠오카 다츠히데 님 그림책 《청개구리 여행사》(비룡소,2008)를 읽습니다. 청개구리는 왜 이름이 ‘靑개구리’일까 궁금한데, 시골에서 살아가며 이들 청개구리를 보노라면, 언제나 풀숲에서 만납니다. 풀에서 사는 작은 개구리라 할까요. 그래, 이들 개구리는 ‘풀개구리’예요. ‘파란(靑)’ 개구리가 아니라, ‘풀숲에서 사는 풀빛’ 개구리랍니다.


  조그마한 풀빛 개구리는 조그마한 삶을 누립니다. 조그마한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고, 이슬을 마시며 살아갈 수 있어요. 풀잎을 뜯으며 살아갈는지 모르지요. 풀개구리는 언제나 풀개구리로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작은 풀숲을 밀고 빌라를 짓거나 고속도로를 닦더라도, 풀개구리는 다른 풀숲을 찾아 길을 떠나며 목숨을 이어요. 풀개구리는 풀개구리다운 삶을 놓지 않아요. 풀개구리 사랑이 빛나는 길을 찾고, 풀개구리답게 키우는 꿈을 아껴요.


  풀개구리는 풀이 없으면 죽어요. 논개구리는 논이 없으면 죽어요. 멧개구리는 멧자락이 없으면 죽어요.


  아마, 도시사람은 도시가 없어지면 죽겠지요. 이와 마찬가지인데, 시골사람은 시골이 사라지면 죽어요. 시골에서 맑은 햇살과 바람과 냇물과 흙과 푸나무하고 어깨동무하고 살아가는 시골사람은, 도시사람이 돈에 눈이 멀어 고속도로를 더 내느니 관광개발을 하느니 골프장을 짓느니 어쩌니 하면서 자꾸 시골땅 시골흙 시골자락을 더럽히면 숨이 막혀요.


  그림책 《청개구리 여행사》에 나오는 작은 목숨들은 저희가 살아가는 작은 터전 곁에서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는 이웃이 궁금해서 나들이를 떠납니다. 풀개구리가 이끄는 작은 배를 타고 작은 연못을 가로지르며 작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신문이나 역사책이나 영화나 논문 같은 데에는 실리지 않을 작은 이야기를 스스로 누리면서 스스로 즐겁습니다. 이웃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을 돌이킵니다. 내 좋은 이웃들 삶을 헤아리면서 내 좋은 삶을 돌아봅니다. (4345.6.26.불.ㅎㄲㅅㄱ)

 


― 청개구리 여행사 (마츠오카 다츠히데 글·그림,이영미 옮김,비룡소 펴냄,2008.6.26./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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