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가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에
그만 달콤한 낮잠에서
확 깬다.
“아버지, 보라 똥 쌌어요!”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이들 있는 쪽을 좇고,
둘째 아이가
어디다 똥을 질렀는지 살핀다.

 

이불이나 책에는 안 누어
그나마 낫다고 여기며
둘째 아이를 허리춤에 끼듯 안고
씻는방으로 간다.

 

아이 바지를 벗긴다.
아이 웃도리에 똥이 묻었다.
기저귀에도 똥이 묻었다.

 

아이 등판부터 종아리까지
수북히 묻은 똥을
물로 씻으며 살살 닦는다.
아이는 좋아한다.

 

내가 너만 한 아이였을 적
내 어머니는
나를
어떻게 씻겼을까.

 

똥오줌 질펀하게 눈 둘째 아이
벗긴 채 마루에 데려다 놓고
똥빨래 석 점 꾹꾹 비벼
정갈히 마무리짓는다.

 

새 옷가지 꺼내 둘째를 입히고
한손에는 빨래한 옷가지
한손에는 둘째를 안고
마당으로 나온다.

 

둘째 아이 마당에 풀어놓으니
첫째 아이 마당으로 내려온다.

아이들 놀음놀이 바라보다가


젖은 빨래는 널고
마른 빨래는 걷어서 갠다.

 

들새 지저귀는 소리로
한낮이 후끈후끈 흐른다.

 


4345.5.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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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서재이든 일기장이든, 글을 쓰는 분들이 '글이 무엇'이고 '말이 어떠한'가를 찬찬히 헤아리는 길에 살짝 도움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을 알맞게 '바로잡'거나 '고쳐써'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생각하며 말하고 글쓸' 때에 비로소 내 넋과 얼이 살아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2011년 1월 1일에 쓴 글인데, 여러 곳을 크게 손질해서 비로소 이곳에 걸칩니다. '새로운 우리 말글 이야기책'에 실을 원고를 추리면서 나 스스로 새삼스럽다고 느낍니다.

 

..


 ‘합니다’와 ‘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새해를 맞이합니다. 새롭게 맞이한 해인 만큼 나이는 한 살 더 먹습니다. 내 나이는 서른이 되었다가 서른다섯이 되고 마흔을 지나 쉰과 예순을 거칠 테지요. 일흔이나 여든 아흔이나 백까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앞으로 몇 살까지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모르지만, 오늘 내 나이는 대단한 숫자가 아니요, 그리 많은 숫자 또한 아닙니다. 언제나 내 나이답게 살아가면서 내 나이에 걸맞게 생각하고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올바르리라 생각합니다.


  새해 첫날, 내 글투는 어떠한가 하고 새삼스레 곱씹어 봅니다. 지난날 내 글투가 어떠했는가 가만히 헤아립니다. 1998년에 한글학회에서 주는 ‘한글공로상’을 참 어린 나이에 받기는 했으나, 이때에는 신나게 팔뚝질을 하듯이 운동을 했을 뿐, 참다이 말사랑이나 글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사회가 사회이다 보니 팔뚝질 아니고서는 사람들이 귀나 눈을 열지 않기도 했다지만, 차분하게 말사랑 글사랑을 펼치지 못했어요. 이무렵 쓴 글을 돌아보면 ‘것’을 얼마나 자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것도 그저 지나간 일이 되고 마는 것인지” 같은 글을 곧잘 썼어요. 이제는 이렇게 글을 쓰지 않고 말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 또한 그저 지나간 일이 되고 마는지”처럼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아니면 “이마저 한낱 지나간 일로 삼고 마는지”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해요.


  1998년에 쓴 글을 되짚으니 “먼저 풀어야 한다. 더불어, ……” 같은 글투도 보입니다. 이 대목도 엉터리입니다. ‘더불어’를 글 맨앞에 외따로 쓸 수 없어요. “이와 더불어”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2007년부터 2009년 첫머리 사이에는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이라는 낱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놓고 오래도록 머리앓이를 했습니다. 이러한 낱말은 한자말 아닌 우리 말로 삼아서 그대로 써야 하지 않겠느냐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낱말을 쓰고 다시 쓰다 보니 어쩐지 나 스스로 초라하지 않느냐 싶더군요. 고작 이런 낱말조차 예부터 곱게 쓰던 말투를 살피어 새로운 오늘날에 알맞게 담아내지 못한다면 말사랑 글사랑이란 덧없지 않느냐 싶어요. 예전에 쓴 내 글을 가만히 되읽습니다. ‘자신’이나 ‘자기’라는 낱말이 어느 자리에 어떻게 깃드는가 하고 곰곰이 돌아봅니다.

 

 자신은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나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나로서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당신은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그때에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적잖은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뿐 아니라 다른 낱말을 옳게 다듬거나 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과 말은 1:1로 맞추어 고치거나 다듬을 수 없는데, 이 낱말이 이런 자리에 쓰이든 저런 자리에 쓰이든 1:1로만 생각해 버릇하거든요. ‘자신’ 한 가지를 다듬을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맨 처음으로는 ‘나’로 다듬습니다. 글흐름을 살피다 보면 ‘나로서는’처럼 ‘-로서’를 사이에 넣을 때에 한결 부드럽기도 하고, ‘당신’이나 ‘이녁’이나 ‘그 사람’을 넣어야 알맞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때에는’이나 ‘그무렵에는’을 넣어 봅니다. 그야말로 때와 곳에 따라 다듬을 말투가 다릅니다.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 이름을 소담스레 여기고
→ 이름을 대수로이 여기고
→ 이름을 알뜰히 여기고
→ 이름을 아름다이 여기고
→ 이름을 고맙게 여기고
→ 이름을 보배로이 여기고
 …

 

  ‘소중(所重)’이라는 한자말을 놓고도 퍽 오래도록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이만 한 한자말 또한 구태여 한자말로 갈라야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 말 운동이라더니 아주 막 나가는군’ 하고 여길까 싶었습니다.


  나는 퍽 여러 해 앞서부터 ‘소중’이라는 낱말은 되도록 안 쓰지만, 너덧 해쯤 앞서까지는 이 한자말을 그대로 쓰곤 했습니다. 다만, 이제는 이 낱말을 아예 안 써요. 굳이 이 낱말까지 쓰면서 내 마음을 나타내야 하지 않아요. 나는 내 마음을 나타낼 좋은 낱말을 알아요. 나는 내 마음을 한결 사랑스레 빛낼 낱말을 스스로 찾고 살펴요.


  처음에는 ‘소담스럽다’라는 낱말을 써 봅니다. 국어사전에 실린 ‘소담스럽다’는 두 가지 뜻풀이가 달립니다. 첫째는 “생김새가 탐스러운 데가 있다”이고 둘째는 “음식이 풍족하여 먹음직한 데가 있다”입니다. 왜 이 낱말 ‘소담스럽다’를 ‘소중하다’와 맞추었느냐 하면, 어느 날 ‘탐(貪)스럽다’라는 외마디 한자말 뜻풀이를 헤아리니, “마음이 몹시 끌리도록 보기에 소담스러운 데가 있다”로 나오더군요. 이 말풀이에 나오는 ‘소담스러운’이라는 낱말이 눈에 확 들어왔고, “소담스럽게 쌓인 눈”이라는 보기글을 곰곰이 생각하니까, “소담스럽다 : 마음이 몹시 끌리도록 좋다”라는 느낌으로 쓸 만한 낱말이로구나 싶었어요.


  “소중하다 = 매우 귀중하다”입니다. “귀중하다 = 귀하고 중요하다”입니다. “귀하다 = 아주 보배롭고 소중하다”입니다. “중요하다 = 귀중하고 요긴함”입니다.


  여느 사람들은 ‘소중하다’가 무슨 뜻이요 어떤 쓰임인지 제대로 모릅니다. 그냥저냥 쓰는 낱말입니다. ‘보배롭다’가 토박이말인 줄 모르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아니, 생각조차 않겠지요. 그래, ‘보배로이’는 ‘소중하게’하고 거의 똑같은 낱말이에요. 이 낱말을 쓰면 ‘소중하게’는 퍽 말끔히 털어낼 만합니다.


  다만, 모든 자리에 ‘보배로이’를 쓰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때에는 ‘보배로이’를 쓰고, 어느 자리에는 ‘소담스레’를 씁니다. 국어사전은 예나 이제나 ‘소담스럽다’ 말풀이를 두 가지로 못박지만, 얼마든지 세 가지 네 가지 말풀이와 쓰임새가 늘어날 만합니다. 우리 스스로 다섯 가지 여섯 가지 말풀이와 쓰임새를 북돋우면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소담스럽다’ 같은 낱말을 더욱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느껴요. 덧붙여, ‘알뜰히’나 ‘살뜰히’나 ‘알뜰살뜰히’를 쓰면서 ‘소중히’를 털 수 있고, ‘아름다이’나 ‘고이’를 쓰면서 말삶을 북돋울 수 있어요. 여기에 ‘대수로이’를 쓰면 거의 모든 자리에서 깔끔하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펼쳐 보이고 있으니까요 (x)
 펼쳐 보이니까요 (o)

 

  지난 2010년 여름께부터는 ‘있다’라는 말투를 되짚습니다. “하고 있다” 꼴로 쓰는 ‘있다’를 톺아봅니다.


  “보이고 있으니까요”처럼 적는다 해서 이 말투를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거의 모두라 할 만한 이 나라 사람들 누구나 이렇게 말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 말투가 영 낯설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학교교육이라든지 책이나 방송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오던 사람들 ‘말을 담은 글’을 읽으면서 이런 말투를 하나도 찾아보지 못했어요.

 

 바깥말 자리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x)
 바깥말 자리에만 머뭅니다 (o)

 

  제가 쓴 예전 글을 다시금 읽으며 “하고 있다”나 “-고 있다” 꼴 말투를 살펴봅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우리 말법을 영어 말법에 끼워맞추면서 이런 말투가 자꾸 퍼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람들이 영어를 널리 배우거나 가르치면서 이런 말투를 스스럼없이 쓰는구나 싶습니다.


  우리 말글을 조금 배운 사람은 알 텐데, 우리 말에는 ‘지난날 때매김’이 없습니다. ‘현재진행형’ 또한 없습니다. 영어이든 다른 서양말이든 때매김이 똑부러지게 나뉘고, 현재진행형 말투가 참 잦아요. 서양책을 한국말로 옮기며 현재진행형 말투인 “하고 있다”와 “-고 있다”가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을 일본사람이 ‘中’이라는 한자를 써서 풀어내는 모양새를 한국사람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하고 있다”와 “-고 있다”가 자꾸 퍼지는구나 싶습니다. “무엇무엇 하는 中이다”를 “무엇무엇 하는 중이다”라 옮긴다 해서 번역이 되지 않아요. 이를 “무엇무엇 하고 있다”로 손질해도 번역이 될 수 없어요. “무엇무엇을 한다”로 가다듬을 때에 비로소 번역이라 할 만합니다.

 

 토박이말로 짓는 중이라면 (x)
 토박이말로 짓고 있다면 (x)
 토박이말로 짓는다면 (o)

 

  어찌 보면, 이제는 우리 말글에도 ‘지난날 때매김’을 넣거나 ‘현재진행형’을 달아도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예스러운 말투로 말해야 할 까닭이 없다 여길 수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우리는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하고 우리 말글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 넋과 얼을 보듬으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넉넉합니다. 괜시리 서양 말법처럼 우리 말법을 다루어야 하지 않아요.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한글로 글을 쓰면 되고, 일본사람은 일본땅에서 가나로 글을 적으면 돼요. 서양사람은 로마자라 하는 알파벳을 쓰면 되겠지요.


  셈틀을 쓰며 인터넷으로 국어사전을 살필 때에는 국립국어원에 들어갑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창을 보면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다양한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답변은 드리지 않습니다.” 하고 적힙니다. 말글을 다루는 공공기관이자 정부부터 글을 이렇게 써요.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란 무엇이려나요.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말투이고, 이런 글은 어느 나라 글이라 할 만한가요. “표준국어대사전이 어떠한지 여러분 생각을 들려주셔요. 따로 답변하지는 않습니다.”처럼 적어야 할 글이 아닌지요. 그나저나 답변도 안 해 주면서 표준국어대사전이 어떠한가 하고 알려 달라고 적은 모양새가 쓸쓸해 보입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으면 대꾸를 해야 할 텐데, 귀는 있되 입이 없으면 어떡하나요. (4344.1.1.흙./4345.6.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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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으나, 전남 고흥이 대세...라고 한 번 적어 본다. 나도 전남 고흥으로 삶터를 옮겨서 살아가지만, 내 둘레에서 전남 고흥으로 삶터를 옮기면서 예쁜 꿈을 키우는 사람들 이야기가 하나둘 책으로 나오니 더없이 반가우면서 좋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는 책은 훨씬 많을 테지만, 사랑과 꿈과 이야기로 치자면, 아름다운 터전에서 아름다운 넋을 북돋우는 책이 나로서는 한결 예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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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기적 같은 일- 바닷가 새 터를 만나고 사람의 마음으로 집을 짓고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송성영 지음 / 오마이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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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문학과지성 시인선 216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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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빚는 삶, 삶이 빚는 생각
[시를 노래하는 시 23]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책이름 :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글 : 황인숙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1998.6.12.)
- 책값 : 8000원

 


  생각이 빚는 삶이 먼저인지 삶이 빚는 생각이 먼저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어느 쪽이 먼저가 되든, 생각은 삶을 빚습니다. 삶 또한 생각을 빚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생각하는 결이 고스란히 삶으로 태어납니다. 사람들 스스로 살아가는 결이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슬기롭게 생각을 빛낼 때에 슬기롭구나 싶은 아름다운 삶이 펼쳐집니다. 슬기롭게 삶을 일굴 때에 슬기롭구나 싶은 생각이 샘솟습니다.


.. 어젯밤 잠들기 전 나는 대단한 생각을 해냈다. 그리고 깨자마자 그 대단한 생각을 또 해냈다 ..  (어쨌든 그것부터)


  저녁에 잠들면서 꿈을 꿉니다. 나로서는 이런 꿈은 꾸기를 바랄 수 있고, 나로서는 저런 꿈은 안 꾸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이든 저런 꿈이든 아무렇게나 찾아들 수 있고, 이런 꿈이나 저런 꿈을 나 스스로 갈무리하면서 내가 바라는 대로 찾아들도록 할 수 있어요.


  잠자리에서 아이들 새근새근 잘 자라며 자장노래를 부르며 생각합니다. 자장노래는 밉거나 궂거나 모진 마음으로 부를 수 없습니다. 자장노래를 들을 아이들은 고우며 따사로운 목소리일 때에 즐거이 받아들여 예쁘게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고 개구지게 뒹굴 적에도 아이들 어버이가 예쁜 목소리와 고운 눈빛으로 바라볼 때에 훨씬 신나게 뛰놀 뿐 아니라 한결 개구지게 뒹굴 만할 테지요.


  나는 늘 예쁜 손길로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비질을 할 노릇입니다. 나는 언제나 고운 눈빛으로 나무를 바라보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보금자리를 바라볼 노릇입니다. 예쁜 손길일 때에 예쁘게 쓰는 글입니다. 고운 눈빛일 때에 곱게 나누는 사랑입니다. 예쁜 손길로 밭을 일굽니다. 고운 눈빛으로 빨래를 개고 아이를 안습니다.


.. 여기, 변변히 걸어본 적 없는 자, / 고이 늙지 못한다 ..  (거울들)


  둘째 아이 똥바지를 빨래합니다. 2012년 6월 29일, 둘째 아이는 첫돌을 지난 지 한 달 남짓 되었습니다. 앞으로 둘째 아이가 스스로 똥오줌을 가릴 때까지 내 똥바지 빨래는 죽 이어집니다. 아이는 앞으로 무럭무럭 자랄 테고, 머잖아 똥이며 오줌을 가릴 테지요. 똥이며 오줌을 가릴 뿐 아니라 조잘조잘 수다쟁이가 될 무렵이면, 아이는 아이가 똥이나 오줌을 못 가리며 바지뿐 아니라 방바닥 곳곳에 똥을 바르고 오줌을 퍼뜨린 줄 떠올리지 못할는지 모릅니다. 나도 내가 우리 아이들만 하던 갓난쟁이 적에 똥오줌을 얼마나 퍼질러댔는지 잘 떠올리지 못하고, 내 어머니 손이 얼마나 많이 가야 했는지 되새기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는 내 똥바지나 오줌기저귀를 숱하게 갈았고, 꾸준히 밥을 먹였으며, 한결같이 포근한 자장노래로 잠을 재워 주었어요.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곱게 사랑하고 맑게 믿은 마음빛을 먹으며 오늘과 같이 자랐어요. 나는 내 나름대로 내 마음빛을 새롭게 가다듬어 우리 아이들을 돌봅니다. 우리 아이들은 나와 옆지기한테서 새로운 마음빛을 찬찬히 받아먹으면서 하루하루 자랄 테고, 이렇게 자라난 새로운 힘으로 저희 꿈을 펼치면서 새삼스럽게 저희 사랑을 새록새록 꽃피우겠지요.


  그런데 이 고운 마음빛이 맨 먼저 어디에서 비롯했는지는 모릅니다. 어느 어버이가 맨 먼저 고운 마음빛을 펼쳐 이 땅에 태어났는지는 모릅니다.


  어느 하느님이 빚었는지, 어느 땅님이 빚었는지, 어느 사랑님이 빚었는지, 어느 꿈님이 빚었는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누군가 내가 오늘 이곳에서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꿈꾸었습니다. 누군가 마음속으로 곱게 꿈꾸었기에 내가 오늘 이곳에서 태어나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나는 나대로 오늘 하루 새롭게 꿈 하나 곱게 꾸면서 우리 아이들을 보살피고,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저희 아이들을 차근차근 어루만지며 살아갈 수 있어요.


.. 오, 내 흉한 눈, 죽은 눈. / 생각도 감각도 없이 / 바라보는 것을 시들게 하는 ..  (좀 비)


  생각이 삶을 빚습니다. 좋은 생각이 좋은 삶을 빚습니다.


  생각은 삶을 빚어요. 궂은 생각은 궂은 삶을 빚어요.


  삶이 생각을 빚습니다. 좋게 일구는 삶이 좋게 빛나는 생각을 빚습니다.


  삶은 생각을 빚어요. 궂게 팽개치는 삶이 궂게 나동그라지는 생각을 빚어요.


..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 가지 끝에서 가지 끝으로 / 파르르 떨림이 퍼진다. // 혹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 매우 유창한 듯도 하고 / 몹시 더듬는 듯도 하다. / 오참, 내가 언제 / 잠시라도 나무들에게 / 귀기울인 적이나 있었다고 ..  (오월, 하고도 스무여드레)


  아이들 옷가지 빨래는 날마다 수북합니다. 하루 네 차례 빨래를 해야 비로소 숨통을 틉니다. 나는 내 손으로 옷가지를 복복 비비고 슥슥 헹구며 꾹꾹 짭니다. 내 손은 내 몸에 달려 내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데, 내 마음이 좋을 때에는 내 손은 좋게 움직이고, 내 마음이 무거울 때에는 내 손 또한 무겁게 움직입니다.


  이른아침과 늦은아침과 한낮과 늦은낮에 하는 빨래는 고운 햇살과 맑은 바람이 보송보송 말립니다. 어쩌다가 저녁에 다섯 차례째 빨래를 하고야 말면, 이 빨래는 방안 곳곳에 넙니다. 방안 곳곳에서 천천히 마르면서 집안에 메마르지 않게 도와줍니다. 방안 곳곳에 옷걸이에 꿰어 넌 빨래를 아침에 일어나 걷을라치면 뽀독뽀독 잘 말랐어요. 햇살과 바람 먹으며 마른 빨래처럼 상큼하지는 않지만, 느낌이 참 좋아요. 밤새 우리 식구들 살가이 어루만지며 말랐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요.


  그러고 보면, 빨래를 할 적마다 빨래한테 말을 겁니다.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좋아, 좋아, 좋아.


  이 옷가지를 들고 곱게 개어 옷장에 곱게 놓습니다. 이 옷가지를 꺼내어 아이한테 곱게 입힙니다. 때때로 미운 마음으로 옷을 개거나, 미운 마음으로 아이한테 옷을 입힐 때면, 내 미운 마음은 그만 아이한테 옮습니다. 아이한테 옮은 미운 마음은 다시 나한테 찾아듭니다. 아이가 미운 티끌을 털어내면서 온통 내 가슴속에 미운 가시가 박힙니다.


..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  (말의 힘)


  가는 말이 고울 때에 오는 말이 고울밖에 없습니다. 가는 말이 미울 적에 오는 말이 미울밖에 없습니다. 아, 너무나 마땅한 노릇이라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 하지, 미운 아이 꿀밤 한 대 먹인다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미움’이란 살살 달래고 토닥이면서 ‘사랑’이 되도록 할 마음결이지, 꾸짖거나 나무라거나 괴롭히거나 등돌리면서 못살게 굴어 ‘더 아픈 미움’이나 ‘더 슬픈 미움’이 되도록 할 마음무늬가 아니거든요.


  누구나 사랑을 먹고 싶지, 미움을 먹고 싶지 않아요. 누구나 꿈을 먹고 싶지, 가시를 먹고 싶지 않아요.


  내가 바라보기에 고운 아이이든 미운 아이이든, 나는 그저 ‘아이’라 느끼며 바라보면서 떡 하나 함께 나눌 때에 즐겁습니다. 내가 보기에 모든 ‘아이’들 예쁜 모습을 해맑게 맞아들이면서 나도 떡 한 점 먹고 너도 떡 한 점 먹으렴, 하면서 웃음을 나눌 때에 기쁩니다.


.. 누군가 불 붙여놓은 촛불 앞에서 / 재빨리 기도한 적이 있다. / 그 기도는 지극히 속된 것이었다. / 근사한 시를 쓰게 해달라는 것, / 약간의 돈이 생기게 해달라는 것, / 또, 나를, 용서해달라는 것 ..  (지극히 속된 기도)


  황인숙 님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1998)를 읽습니다. 황인숙 님은 어이하여 “내 슬프게 가라앉은 소담스럽게 고운 이”를 노래할까 궁금합니다. 그러나, 황인숙 님 넋이 이와 같으니 이와 같은 넋에 따라 삶을 누리겠지요. 이와 같은 삶에 따라 이와 같은 넋을 보듬겠지요.


  어느 한때는 슬프다가도 어느 한때는 기쁠 테지요. 어느 한때는 잔뜩 가라앉다가도 어느 한때는 한껏 부풀어오를 테지요. 어느 한때는 내 곁 아름다운 이를 노래하다가, 어느 한때는 내 둘레 가여운 이를 노래할 테지요.


  시를 쓰면서 삶을 짓습니다. 삶을 지으면서 시를 씁니다. 시를 쓰면서 넋을 짓습니다. 넋을 지으면서 시를 짓습니다. 나는 나한테 가장 빛나는 시를 생각하면서 삶을 짓습니다. 나는 나한테 가장 좋은 삶을 생각하면서 시를 짓습니다. (4345.6.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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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28) 차모임

 

레니와 헤크마이어는 오후의 차모임에 초대받았다
《오드리 설킬드/허진 옮김-레니 리펜슈탈 : 금지된 열정》(마티,2006) 425쪽

 

  “오후(午後)의 차모임에”는 “낮에 있을 차모임에”나 “낮에 있는 차모임에”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초대(招待)받았다’는 그대로 두어도 되고, “부름을 받았다”나 “가게 되었다”로 손볼 수 있어요. 차근차근 생각을 기울여 한결 알맞고 사랑스레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제도권교육에 길든 말투대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 하더라도, 둘레 사람들은 뜻을 헤아릴 수 있다지만, 사랑스러운 결을 헤아리며 글을 쓴다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뜻읽기뿐 아니라 사랑읽기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문득 궁금해서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티타임(teatime)’이라는 낱말이 국어사전에 실렸을까 궁금했는데, 참말 실립니다. 어, 이런 영어를 국어사전에 실어도 되나 아리송한데, 아무튼 ‘티타임’ 말풀이는 “차 마시는 시간. ‘휴식 시간’으로 순화”라 적힙니다. 곧, ‘국어순화’를 해야 하는 낱말인 ‘티타임’인 셈인데, 고쳐써야 할 낱말이라면 국어사전에 안 올려야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낱말은 국어사전이 아닌 ‘국어순화사전’에 올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티브레이크(Tea Break)’ 같은 영어는 국어사전에 안 실립니다.


  다만, ‘차모임’ 같은 낱말도 국어사전에 안 실려요. 차를 마시는 모임이라는 뜻에서 쓰는 ‘차모임’일 텐데, 국어사전에는 ‘티타임’이 아닌 ‘차모임’ 같은 낱말을 실으면서, 사람들 말매무새를 예쁘게 추스르도록 도와야 아름답지 않겠느냐 싶어요.


  그나저나, 책을 읽다가 깜짝 놀라서 밑줄을 긋고 책을 덮습니다. ‘차모임’이라는 낱말 하나 만나면서 ‘그래,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래, 참말, 이렇게 써도 되지. 더구나 이렇게 책에까지 어엿하게 실린 낱말이니, 우리도 이제는 이와 같이 말하면 되겠네.’ 하고 생각을 잇습니다.


  다시 책을 펼쳐 읽습니다. 한동안 책을 기쁘게 즐기다가 또다시 덮고는, 이제 셈틀을 켜고 인터넷에 들어가서 찾기창에 ‘차모임’이라는 낱말을 넣습니다.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 모임을 가리키는 ‘차모임’이 더러 눈에 뜨이지만, 거의 모든 ‘차모임’은 ‘계모임’과 마찬가지로, 퍽 예전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즐겨쓰는 낱말입니다. 나는 여태 몰랐지만, 사람들은 참 자주 흔히 으레 쓰는 낱말인 줄 처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차 마시는 모임 / 차 즐기는 모임
 차 마심이 모임 / 차 즐김이 모임

 

  인터넷에서 언제 글까지 찾아볼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1998년에 쓰인 ‘차모임’까지는 찾아보기가 됩니다. 아마, 1998년이 아닌 1991년에도 이 낱말을 쓴 사람이 있지 않았으랴 싶고, 1981년이나 1971년에도 이 낱말을 쓴 사람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아마 예전에는 ‘차모임’처럼 붙이지 않고 ‘차 모임’처럼 띄어서 적었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띄어서 ‘차 모임’이라 적으면, ‘보기글 모으기(용례 수집)’에 걸려들지 않아, 국어사전을 엮으며 새 낱말을 넣으려고 할 때에 그물에서 벗어나고 맙니다.


  ‘신나다’ 같은 낱말은 아직까지도 국어사전에 오르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차모임’이나 ‘신나다’나 서로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은데, 처음부터 이 낱말을 한 낱말로 삼아 국어사전에 싣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책과 신문에서 ‘신 나다’처럼 띄어서 썼습니다. 이러다 보니 ‘신 나다’로는 퍽 자주 쓰이기는 하나 ‘신나다’로 적힌 보기글이 없어서, 국어학자들은 “이 낱말 ‘신나다’는 쓰임새를 찾아볼 수 없으니 한 낱말로 삼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뚱딴지 같은 이야기이지만, 오늘날까지 버젓이 이어지는 우리 모습입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북돋우는 길을 가로막은 모양새이고, 새롭게 한국말을 빚어내어 쓰지 못하도록 하는 노릇입니다.

 

 찻집 . 찻값 . 찻잔
 차모임 . 차즐김 . 차때

 

 인터넷에서 ‘차모임’을 찾아니, ‘차모임(Tea Break)’처럼 적는 분들이 곧잘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티타임’이나 ‘티브레이크’라고 말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예전에 함께 어울리던 동아리 동무 하나는, “야, 우리 티타임 하자.” 하고 말하다가, “어? 우리, ‘우리 말 동아리’였잖아. ‘티타임’ 같은 말은 쓰면 안 되지. 그런데, 그럼 뭐라고 하지? ‘차 시간’? 그럼 버스 기다리는 시간하고 헷갈리잖아? ‘차 때’? 음, 이건 좀 이상한데. 아무래도 ‘티타임’은 그냥 ‘티타임’이라고 해야겠다. 안 그러냐?” 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티타임’을 걸러낼 마땅한 낱말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차때’라는 말마디를 혀에 얹어 굴려 보지만, 영 와닿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말마디를 쓰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은 ‘티타임’이나 ‘티브레이크’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데, ‘차때’ 같은 말마디를 쓸 일은 거의 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잖은 사람들이 ‘차모임’이라 쓴다면, 조금씩 가지를 치고 줄기를 뻗을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해 봅니다. 차를 즐기는 사람들 스스로 ‘차즐김이’라 말하고, 차를 즐기는 일을 가리켜 ‘차즐김’이라 해 볼 수 있다고 느낍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어느 분은 스스로를 ‘만화즐김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런 이름 그대로, 저는 저 스스로를 ‘사진즐김이’나 ‘책즐김이’라 일컬을 수 있고, ‘골목즐김이’나 ‘헌책방즐김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즐김이’처럼 제 삶을 이야기해도 어울릴 테지요.

 

 -모임 : 차모임 . 책모임 . 시모임 . 영화모임 . 춤모임 . 노래모임
 -즐김이 : 차즐김이 . 책즐김이 . 시즐김이 . 영화즐김이 . 춤즐김이 . 노래즐김이

 

  한 마디를 곱씹으면서 두 마디를 헤아려 봅니다. 두 마디를 헤아리며 세 마디를 되뇌어 봅니다. 세 마디를 되뇌면서 네 마디를 꿈꿉니다. 우리한테는 우리 말과 생각과 삶을 빛낼 시원하고 깊은 샘물이 깃들어 늘 맑게 솟는다고 느낍니다. 사람들 누구한테나 제 겨레 글과 넋과 삶터를 북돋울 싱그럽고 너른 숨결이 잠든 채 깨워 주기를 기다린다고 느낍니다.


  따순 손길을 기다리는 말이 있습니다. 고운 마음길을 기다리는 글이 있습니다. 맑은 생각길을 뻗치면 맑은 말길 또한 뻗어나가고, 착한 삶길을 일구면 착한 글길 또한 기름지게 일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2.8.25.불./4345.6.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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