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문학과지성 시인선 216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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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빚는 삶, 삶이 빚는 생각
[시를 노래하는 시 23]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책이름 :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글 : 황인숙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1998.6.12.)
- 책값 : 8000원

 


  생각이 빚는 삶이 먼저인지 삶이 빚는 생각이 먼저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어느 쪽이 먼저가 되든, 생각은 삶을 빚습니다. 삶 또한 생각을 빚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생각하는 결이 고스란히 삶으로 태어납니다. 사람들 스스로 살아가는 결이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슬기롭게 생각을 빛낼 때에 슬기롭구나 싶은 아름다운 삶이 펼쳐집니다. 슬기롭게 삶을 일굴 때에 슬기롭구나 싶은 생각이 샘솟습니다.


.. 어젯밤 잠들기 전 나는 대단한 생각을 해냈다. 그리고 깨자마자 그 대단한 생각을 또 해냈다 ..  (어쨌든 그것부터)


  저녁에 잠들면서 꿈을 꿉니다. 나로서는 이런 꿈은 꾸기를 바랄 수 있고, 나로서는 저런 꿈은 안 꾸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이든 저런 꿈이든 아무렇게나 찾아들 수 있고, 이런 꿈이나 저런 꿈을 나 스스로 갈무리하면서 내가 바라는 대로 찾아들도록 할 수 있어요.


  잠자리에서 아이들 새근새근 잘 자라며 자장노래를 부르며 생각합니다. 자장노래는 밉거나 궂거나 모진 마음으로 부를 수 없습니다. 자장노래를 들을 아이들은 고우며 따사로운 목소리일 때에 즐거이 받아들여 예쁘게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고 개구지게 뒹굴 적에도 아이들 어버이가 예쁜 목소리와 고운 눈빛으로 바라볼 때에 훨씬 신나게 뛰놀 뿐 아니라 한결 개구지게 뒹굴 만할 테지요.


  나는 늘 예쁜 손길로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비질을 할 노릇입니다. 나는 언제나 고운 눈빛으로 나무를 바라보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보금자리를 바라볼 노릇입니다. 예쁜 손길일 때에 예쁘게 쓰는 글입니다. 고운 눈빛일 때에 곱게 나누는 사랑입니다. 예쁜 손길로 밭을 일굽니다. 고운 눈빛으로 빨래를 개고 아이를 안습니다.


.. 여기, 변변히 걸어본 적 없는 자, / 고이 늙지 못한다 ..  (거울들)


  둘째 아이 똥바지를 빨래합니다. 2012년 6월 29일, 둘째 아이는 첫돌을 지난 지 한 달 남짓 되었습니다. 앞으로 둘째 아이가 스스로 똥오줌을 가릴 때까지 내 똥바지 빨래는 죽 이어집니다. 아이는 앞으로 무럭무럭 자랄 테고, 머잖아 똥이며 오줌을 가릴 테지요. 똥이며 오줌을 가릴 뿐 아니라 조잘조잘 수다쟁이가 될 무렵이면, 아이는 아이가 똥이나 오줌을 못 가리며 바지뿐 아니라 방바닥 곳곳에 똥을 바르고 오줌을 퍼뜨린 줄 떠올리지 못할는지 모릅니다. 나도 내가 우리 아이들만 하던 갓난쟁이 적에 똥오줌을 얼마나 퍼질러댔는지 잘 떠올리지 못하고, 내 어머니 손이 얼마나 많이 가야 했는지 되새기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는 내 똥바지나 오줌기저귀를 숱하게 갈았고, 꾸준히 밥을 먹였으며, 한결같이 포근한 자장노래로 잠을 재워 주었어요.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곱게 사랑하고 맑게 믿은 마음빛을 먹으며 오늘과 같이 자랐어요. 나는 내 나름대로 내 마음빛을 새롭게 가다듬어 우리 아이들을 돌봅니다. 우리 아이들은 나와 옆지기한테서 새로운 마음빛을 찬찬히 받아먹으면서 하루하루 자랄 테고, 이렇게 자라난 새로운 힘으로 저희 꿈을 펼치면서 새삼스럽게 저희 사랑을 새록새록 꽃피우겠지요.


  그런데 이 고운 마음빛이 맨 먼저 어디에서 비롯했는지는 모릅니다. 어느 어버이가 맨 먼저 고운 마음빛을 펼쳐 이 땅에 태어났는지는 모릅니다.


  어느 하느님이 빚었는지, 어느 땅님이 빚었는지, 어느 사랑님이 빚었는지, 어느 꿈님이 빚었는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누군가 내가 오늘 이곳에서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꿈꾸었습니다. 누군가 마음속으로 곱게 꿈꾸었기에 내가 오늘 이곳에서 태어나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나는 나대로 오늘 하루 새롭게 꿈 하나 곱게 꾸면서 우리 아이들을 보살피고,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저희 아이들을 차근차근 어루만지며 살아갈 수 있어요.


.. 오, 내 흉한 눈, 죽은 눈. / 생각도 감각도 없이 / 바라보는 것을 시들게 하는 ..  (좀 비)


  생각이 삶을 빚습니다. 좋은 생각이 좋은 삶을 빚습니다.


  생각은 삶을 빚어요. 궂은 생각은 궂은 삶을 빚어요.


  삶이 생각을 빚습니다. 좋게 일구는 삶이 좋게 빛나는 생각을 빚습니다.


  삶은 생각을 빚어요. 궂게 팽개치는 삶이 궂게 나동그라지는 생각을 빚어요.


..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 가지 끝에서 가지 끝으로 / 파르르 떨림이 퍼진다. // 혹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 매우 유창한 듯도 하고 / 몹시 더듬는 듯도 하다. / 오참, 내가 언제 / 잠시라도 나무들에게 / 귀기울인 적이나 있었다고 ..  (오월, 하고도 스무여드레)


  아이들 옷가지 빨래는 날마다 수북합니다. 하루 네 차례 빨래를 해야 비로소 숨통을 틉니다. 나는 내 손으로 옷가지를 복복 비비고 슥슥 헹구며 꾹꾹 짭니다. 내 손은 내 몸에 달려 내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데, 내 마음이 좋을 때에는 내 손은 좋게 움직이고, 내 마음이 무거울 때에는 내 손 또한 무겁게 움직입니다.


  이른아침과 늦은아침과 한낮과 늦은낮에 하는 빨래는 고운 햇살과 맑은 바람이 보송보송 말립니다. 어쩌다가 저녁에 다섯 차례째 빨래를 하고야 말면, 이 빨래는 방안 곳곳에 넙니다. 방안 곳곳에서 천천히 마르면서 집안에 메마르지 않게 도와줍니다. 방안 곳곳에 옷걸이에 꿰어 넌 빨래를 아침에 일어나 걷을라치면 뽀독뽀독 잘 말랐어요. 햇살과 바람 먹으며 마른 빨래처럼 상큼하지는 않지만, 느낌이 참 좋아요. 밤새 우리 식구들 살가이 어루만지며 말랐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요.


  그러고 보면, 빨래를 할 적마다 빨래한테 말을 겁니다.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좋아, 좋아, 좋아.


  이 옷가지를 들고 곱게 개어 옷장에 곱게 놓습니다. 이 옷가지를 꺼내어 아이한테 곱게 입힙니다. 때때로 미운 마음으로 옷을 개거나, 미운 마음으로 아이한테 옷을 입힐 때면, 내 미운 마음은 그만 아이한테 옮습니다. 아이한테 옮은 미운 마음은 다시 나한테 찾아듭니다. 아이가 미운 티끌을 털어내면서 온통 내 가슴속에 미운 가시가 박힙니다.


..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  (말의 힘)


  가는 말이 고울 때에 오는 말이 고울밖에 없습니다. 가는 말이 미울 적에 오는 말이 미울밖에 없습니다. 아, 너무나 마땅한 노릇이라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 하지, 미운 아이 꿀밤 한 대 먹인다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미움’이란 살살 달래고 토닥이면서 ‘사랑’이 되도록 할 마음결이지, 꾸짖거나 나무라거나 괴롭히거나 등돌리면서 못살게 굴어 ‘더 아픈 미움’이나 ‘더 슬픈 미움’이 되도록 할 마음무늬가 아니거든요.


  누구나 사랑을 먹고 싶지, 미움을 먹고 싶지 않아요. 누구나 꿈을 먹고 싶지, 가시를 먹고 싶지 않아요.


  내가 바라보기에 고운 아이이든 미운 아이이든, 나는 그저 ‘아이’라 느끼며 바라보면서 떡 하나 함께 나눌 때에 즐겁습니다. 내가 보기에 모든 ‘아이’들 예쁜 모습을 해맑게 맞아들이면서 나도 떡 한 점 먹고 너도 떡 한 점 먹으렴, 하면서 웃음을 나눌 때에 기쁩니다.


.. 누군가 불 붙여놓은 촛불 앞에서 / 재빨리 기도한 적이 있다. / 그 기도는 지극히 속된 것이었다. / 근사한 시를 쓰게 해달라는 것, / 약간의 돈이 생기게 해달라는 것, / 또, 나를, 용서해달라는 것 ..  (지극히 속된 기도)


  황인숙 님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1998)를 읽습니다. 황인숙 님은 어이하여 “내 슬프게 가라앉은 소담스럽게 고운 이”를 노래할까 궁금합니다. 그러나, 황인숙 님 넋이 이와 같으니 이와 같은 넋에 따라 삶을 누리겠지요. 이와 같은 삶에 따라 이와 같은 넋을 보듬겠지요.


  어느 한때는 슬프다가도 어느 한때는 기쁠 테지요. 어느 한때는 잔뜩 가라앉다가도 어느 한때는 한껏 부풀어오를 테지요. 어느 한때는 내 곁 아름다운 이를 노래하다가, 어느 한때는 내 둘레 가여운 이를 노래할 테지요.


  시를 쓰면서 삶을 짓습니다. 삶을 지으면서 시를 씁니다. 시를 쓰면서 넋을 짓습니다. 넋을 지으면서 시를 짓습니다. 나는 나한테 가장 빛나는 시를 생각하면서 삶을 짓습니다. 나는 나한테 가장 좋은 삶을 생각하면서 시를 짓습니다. (4345.6.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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