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읍내 마트와 자가용 선물

 


  오랜만에 네 식구가 읍내로 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사람들이 무척 북적거리는 마트 한 군데를 본다. 고흥시장 한켠에 있는 마트인데, 예전에 이 앞을 지나가며 슬쩍 들여다볼 적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진열장을 바꾸고 가게이름을 살짝 바꾸어 새롭게 여는 듯한데, 이날 이 마트에는 손님이 발디딜 틈 없이 북적거린다. 무슨 일일까. 집으로 돌아가기 앞서 읍내 빵집에 들러 빵 몇 점을 사는데, 빵집 일꾼이 우리한테 튀김빵 두 점을 덤으로 더 얹어 주면서 “경품으로 자동차 준다니까 사람들이 저렇게 몰려요.” 하고 말한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광고종이 한 장을 주워서 펼쳐 본다. 참말 자동차 한 대를 경품으로 줄 뿐 아니라, 한동안 그 마트에서 온갖 물건을 반값으로 판단다. 여느 빵집에서는 3000원에 파는 식빵을 1000원에 판단다. 읍내에 파리바게트가 가게를 넓히며 새로 열면서 이웃한 작은 빵집 손님을 다 끊을 판이더니, 새로 여는 마트에서는 값 후려치기를 하면서 읍내 작은 빵집 손님을 몽땅 쓸어낼 판이로구나 싶다.


  그런데 어떤 물건을 반값에 팔까. 농약이나 비료를 안 쓴 푸성귀를 반값에 팔까. 소포제와 유화제를 안 쓴 두부를 반값에 팔까. 화학조합물 안 넣은 가공식품을 반값에 팔까. 화학세제를, 간장을, 라면을, 참치깡통을, 우유를, 과자를, 달걀을, 소시지를, 바나나를, 수박을 반값으로 판다. 우리 식구가 그 마트에서 살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다. 생각해 보면, 여느 때에 그 마트에 들러 물건을 산 일이 없다. 읍내 마트에서는 곤약이나 천사채를 살 뿐이다.


  군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버지 품에 안긴 첫째 아이는 어느새 스르르 잠든다. 뒤에서 마을 할머니가 “벼리야, 어디 갔다 오니? 응?” 하고 자꾸 말을 걸어도 아이는 못 듣고 곯아떨어진다. 버스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들판과 숲을 바라본다. 시골 읍내가 되든 도시 한복판이 되든, 마트 같은 데가 새로 열면서 손님들한테 줄 만한 경품은 자가용, 텔레비전, 두루말이 휴지쯤이 고작일까. 마트에서 경품으로 책을 준다 하면 손님이 들까. 책 선물을 고맙거나 즐겁게 여길 손님은 얼마나 될까. 아니, 마트에서 책을 선물로 준다 할 때에 어느 책을 선물로 삼으려나. 베스트셀러를? 스테디셀러를? 널리 읽히거나 팔리지는 못하지만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거나 보듬는 아름다운 책을? (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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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2-07-06 02:25   좋아요 0 | URL
사금벼리, 산들보라 둘다 많이 컸겠는걸요~^^

저도 아줌인지라 공짜나 반값엔 혹~하는 경향이 있죠.
근데 얼마전 동네 헌책방에 제가 아끼는 책이 덩치로 진열되어 있는 걸 보니 왠지 씁쓸하더라구요.
빨리 좋은 주인을 만나 귀하게 읽혔으면 싶었어요, ㅋ~.

파란놀 2012-07-06 06:35   좋아요 0 | URL
틈틈이 올리는 사진을 보면
아이들이 참 많이 자랐구나 하고 느끼시리라 믿어요~

큰 가게들 반값 놀이는 너무 지나쳐
서로서로를 무너뜨리겠구나 싶어요.
'제값'과 '제삶'을 잊는다고 할까요..

누군가 동네 헌책방에 '아름다운 책'을 스스럼없이
즐겁게 내놓았나 보군요.
그렇게 책을 내놓아 준 아름다운 넋을 알아볼 분은
금세 나타나겠지요~~ ^^
 

시는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17] ‘이식(移植)’과 ‘착근’

 


  시를 읽습니다. 나는 내가 쓴 시를 나 스스로 좋아하며 읽기도 하고, 다른 이들이 쓴 시를 나 스스로 찾거나 살피며 읽기도 합니다. 마음으로 스미는 시가 좋습니다. 마음을 달래거나 북돋우거나 쓰다듬는 시가 좋습니다. 사랑을 노래하거나 기쁨으로 춤춘대서 반갑다고 느끼는 시는 아닙니다. 슬픔이나 울음이나 눈물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아픔과 고단함과 생채기가 가득하다 하더라도, 삶을 따사로이 보듬는 맑은 손길을 만날 적에 참 반갑구나 하고 느끼는 시입니다.


  목사이면서 어린이책 번역도 하는 고진하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얼음수도원》(민음사,2001)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토지문학공원 2〉이라는 시에서 “이식(移植)된 지 얼마 안 된 듯 / 착근을 위한 안간힘이 보이는 듯했다”와 같은 싯말을 읽다가 오래도록 생각에 잠깁니다. 시인 고진하 님은 왜 ‘이식’이라는 한자말은 묶음표까지 붙이다가는, 왜 ‘착근’이라는 한자말에는 묶음표를 안 붙였을까 궁금합니다. ‘이식’이라는 낱말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이렇게 시를 썼을까요. 〈토지문학공원 2〉이라는 시는 이처럼 한자말을 밝혀서 적어야 빛나겠다고 느끼기에 이와 같이 시를 썼을까요.


  싯말은 시를 쓰는 사람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곧, 시인 ‘마음대로’ 싯말을 노래한다고 했습니다. 시인이 쓰고픈 대로 쓰는 싯말일 테고, 시인이 살아가는 마음이 그대로 담기는 싯말일 테지요. 한 마디로 하자면 ‘자유’를 누리며 쓰는 시요,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쓰는 시입니다.


  시인 고진하 님으로서는 한자말 ‘이식’이랑 ‘착근’이 손과 입과 눈과 귀에 밴 낱말이리라 느낍니다. 딱히 한자말이라 느끼지 않으면서 여느 때에 흔하게 쓰는 낱말이리라 느낍니다. 한자말이건 아니건 그리 대수롭지 않은 낱말이기도 하리라 느낍니다.


  시집을 살짝 덮습니다. 국어사전을 들춥니다. 한자말 ‘이식(移植)’을 찾아봅니다. 뜻풀이에 “= 옮겨심기. ‘옮겨심기’로 순화.”라 적힙니다. 곧이어 한자말 ‘착근(着根)’을 찾아봅니다. 뜻풀이에 “(1) 옮겨 심은 식물이 뿌리를 내림. (2)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자리를 잡고 삶. (3) 어떠한 것이 기반을 잡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적힙니다.


  낱말풀이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식’이나 ‘착근’은 한자말인데, 한자말이기 앞서 한국말이 아니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고쳐서 써야 한다는 낱말이라면, 또 뜻풀이에서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말투가 나타난다’면, 이때에는 이러한 한자말은 그냥 한자말이 아닌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 삶말로 으레 쓰는 낱말일 뿐, 한국사람이 삶말로 여길 만한 낱말이 아니라는 소리라고 느껴요.


  곧, 한국말은 ‘옮겨심기’요 ‘뿌리내리기’ 또는 ‘자리잡기’입니다. 한국사람은 예부터 옮겨서 심었기에 ‘옮겨심기’라 말했습니다. 한국사람은 옛날부터 뿌리를 내리거나 자리를 잡는다고 했기에 ‘뿌리내리기’나 ‘자리잡기’라 말했습니다.


  다시 시집을 집습니다. 다른 시를 천천히 읽습니다. 시를 고즈넉히 읽으며 싯말이 내 혀나 눈이나 입이나 귀에 감기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내 혀나 눈이나 입이나 귀에 감기는 싯말은 무엇이고 도무지 안 감기고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싯말은 무엇인지 헤아려 봅니다.


  시는 누구나 씁니다. 지식인도 시를 쓰고, 흙일꾼도 시를 씁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마친 이도 시를 쓰지만, 공장에서 기계를 붙잡고 기름밥을 먹는 이도 시를 씁니다. 문학을 꽃피우는 이도 시를 쓰지만, 집에서 아이를 낳아 보살피고 밥과 빨래와 청소로 하루를 보내는 이도 시를 씁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다 다른 자리에 걸맞게 시를 씁니다. 누군가는 책으로 많이 배워서 지식이 한껏 도드라지는 시를 씁니다. 누군가는 책으로 배운 적 없이 늘 온몸으로 부대끼는 삶으로 받아들인 이야기를 가장 수수하거나 투박한 말투로 시를 씁니다. 어느 쪽 시가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 시가 더 훌륭하거나 좋거나 빛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거든요. 나는 나대로 예쁘고 당신은 당신대로 예뻐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당신은 당신 삶을 사랑해요. 금을 긋거나 가를 수 없어요. 이 말은 좋고 저 말은 나쁘다고 못박을 수 없어요.


  다만 한 가지뿐이에요. 나는 내가 어떤 말을 사랑하면서 내 넋을 아끼고, 나는 어떤 삶을 꿈꾸면서 내 노래를 시로 담는가 하고 생각하면 될 뿐이에요. 누군가는 ‘환희(歡喜)’를 시로 노래하겠으나, 누군가는 ‘원더풀(wonderful)’을 시로 노래할 테고, 누군가는 ‘놀랍도록 기쁨’을 시로 노래할 만합니다.


  시는 삶으로 씁니다. 누구라도 시는 삶으로 씁니다. 삶에 지식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지식으로 쓰는 시’가 이녁한테 ‘삶으로 쓰는 시’입니다. 삶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사랑으로 쓰는 시’가 이녁한테 ‘삶으로 쓰는 시’예요.


  나는 시를 읽거나 쓰면서 우리 아이들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꿈을 꿉니다. 나는 시를 읽거나 쓰면서 시골마을 이웃집 할매 할배하고 함께 즐길 꿈을 꿉니다. 내 삶과 내 이웃 삶을 생각하면서 내 싯말을 아낍니다. 내 하루와 내 이웃 하루를 돌아보면서 내 싯말을 짓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할 뿐 아니라, 나 스스로 살아가는 꿈이 고이 깃든 말마디가 내 싯말입니다. (4345.7.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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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마을 다이어리 넷째 권이 드디어 나왔다. 조그마한 바닷마을에서 살아가는 네 자매가 꾸리는 아기자기하면서 어여쁜 이야기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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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수 없는 두 사람 : 바닷마을 다이어리 4
요시다 아키미 지음, 조은하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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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코의 술 애장판 7
오제 아키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마음을 고스란히 담는 손길
 [만화책 즐겨읽기 162] 오제 아키라, 《나츠코의 술 (7)》

 


  처음부터 도시는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숲이었습니다. 풀과 나무가 마음껏 우거지던 들판과 멧자락이었습니다. 사람은 풀과 나무 사이에서 꾸밈없이 살림자리를 얻었고, 이 살림자리에서 하루하루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새벽녘에는 새들이 잠을 깨웁니다. 아침에는 푸른 내음으로 온갖 들풀이 밥잔치를 베풀고, 바아갈 내음으로 온갖 나무들이 열매를 베풉니다. 사람들은 좋은 목숨을 좋게 꾸리려고 사냥을 한다거나 농사를 지어야 한다거나 하지 않았어요. 숲이 베푸는 결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넉넉했어요.


  풀과 나무는 사람하고 동무였습니다. 풀과 나무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랐어요. 풀잎은 따사로이 흔들리고, 나뭇잎은 보드라이 흔들렸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풀잎을 따사로이 쓰다듬고, 나뭇잎을 보드라이 어루만졌어요.


- “말 안 해도 알겠습니다.” “뭘 아는데요? 알긴 뭘 아냐고요, 쿠사카베 씨!” “아, 네에.” “아, 네에 좋아하네. 당신은 화나지도 않아요? 할아범한테서 배워서 이제 조금은 술 만드는 방법을 알았어요?” “아니요, 그게 좀처럼.” “답답헤 죽겠네. 어서 어엿한 도지가 되라고요!” (18쪽)
- “우린 품평회를 위해 술을 빚는 게 아니야. 도지에게 있어 가장 큰 상은 뭐니 뭐니 해도 술을 마시는 사람의 즐거운 얼굴이지.” (44쪽)
- “할아범, 도지란 참 아이러니한 예술가야. 아무리 훌륭한 도지도 결국은 외지로 돈벌이를 나섰다 만들어지니 말이야. 농가의 남자들이 겨울 동안 놀고 있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일거리를 찾아 술 곳간의 일꾼이 됐지. 그래서 사람들 살림이 풍요로워지면서 외지로 일을 찾아 떠나는 경우도 줄어들고 있으니, 도지가 사라지는 건 시대의 흐름일지 몰라. 어쩌면 채 10년이 지나기도 전에 술 곳간도 술 곳간 일꾼도 없어질지 모르지.” (225쪽)

 

 


  아이를 어르는 어버이 손길이 따뜻합니다. 어버이한테 내미는 아이들 손길이 부드럽습니다. 서로서로 가장 좋은 사랑을 가슴에 품으며 손길을 내밉니다. 어버이도 아이도 가장 홀가분하면서 가장 기쁜 몸짓을 드러내어 나눕니다. 미운 마음이란 덧없습니다. 샘을 내는 넋이란 부질없습니다. 서로 아끼고 서로 좋아합니다. 서로 믿고 서로 기댑니다. 풀은 나무한테 기댑니다. 나무는 풀한테 기댑니다. 이러면서 저마다 튼튼히 뿌리를 내립니다. 흙은 풀과 나무를 살찌우면서, 풀과 나무는 흙을 단단히 움켜쥐며 싱그러이 북돋웁니다.


  사랑이기에 어깨동무입니다. 사랑이기에 품앗이입니다. 사랑이라서 따스합니다. 사랑인 만큼 너그럽습니다.


  풀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람 또한 풀을 사랑했습니다. 나무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람 또한 나무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도시가 생겨 숲을 밀면서, 사람들은 차츰차츰 풀을 잊고 나무를 잊습니다. 도시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이 늘면서, 사람들은 시나브로 풀을 아끼거나 나무한테 기대던 넋을 잊습니다. 사람들은 공장만 있으면 되는 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동차와 회사만 있으면 되는 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 “아버지 말대로 술의 매력은 숙성이 관건. 아무리 마셔도 질리지 않는 게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분해요.” “신주도 숙성주도 모두 훌륭해요. 비센은 그런 것 같더군요.” “역시 쌀?” “네에.” (33쪽)
- “맛있어요! 이런 술은 처음 마셔 봐요! 신선하고 향기도 진하고.” “으음.” “왜 그러냐 진키치.” “아니, 우리가 이제 지을 쌀이, 이렇게 맛난 술이 될 거라 생각하니.” (41쪽)
- “흙 한 번 만지지 않고, 모 한 번 손대지 않고, 기계로 심어 버려서야 작물에 대한 애정이 솟겠어?” (129쪽)

 


  사람은 나무를 베어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나무는 기꺼이 온몸을 맡겨 잘립니다. 나무는 제 몸뚱이를 사람한테 스스럼없이 내줍니다. 사람은 풀을 뽑아 밭을 일굴 수 있습니다. 풀은 기꺼이 제 목숨을 내주어 밭에서 몇 가지 푸성귀가 새롭게 자라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잊습니다. 나무와 풀이 저희 온 목숨을 사람한테 맡기는 줄 잊습니다. 온 사랑을 담은 온 목숨으로 땔감이 되어 주고 밥과 반찬이 되어 주는 줄 잊습니다. 나무로 집을 지은 사람들 몸과 마음에 ‘나무 한 그루 넋과 얼’이 찬찬히 깃드는 줄 느끼지 않습니다. 풀을 뜯어 먹을 때에 ‘풀 한 포기 넋과 얼’이 곱게 스미는 줄 느끼지 않습니다.


  오얏을 먹으면 오얏이 나한테 스며듭니다. 오얏은 내가 되고 나는 오얏이 됩니다. 세겹살을 구워 먹으면 세겹살이 된 돼지는 나한테 스며듭니다. 돼지는 내가 되고 나는 돼지가 됩니다. 늘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가공식품을 먹는 사람은 가공식품에 깃든 화학조합물을 먹는 셈이라, 화학조합물이 내가 되고 내가 화학조합물이 됩니다.


  자동차가 뿜는 배기가스에 둘러싸이는 사람은 배기가스를 마십니다. 배기가스가 내가 되고 내가 배기가스가 됩니다. 맑은 들바람이나 멧바람이나 바닷바람을 마시는 사람은 맑은 숨을 마시겠지요. 곧, 들바람이 내가 되고 내가 들바람이 돼요. 아주 마땅한 일입니다.


  스스로 전쟁을 꿈꿀 때에는 내 생각과 삶이 온통 전쟁이 돼요. 갖가지 무기와 폭탄으로 나라를 지키는 평화를 이룬다고 생각한다면, 내 넋과 삶과 말은 ‘갖가지 무기와 폭탄’처럼 바뀝니다. 밥 한 그릇 나누는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어 이웃과 어깨동무하자고 생각한다면, 내 넋과 삶과 말은 ‘밥 한 그릇’처럼 되고 ‘사랑’이 천천히 감돌아요.

 

 


- “진키치, 집어서 수분을 확인해 봐라.” “엑? 이걸? 농담해요? 소 오줌 뿌린 걸 어떻게 만지라고.” “네가 그러고도 농사꾼이냐? 퇴비도 제대로 못 만지면서 용케 여태 벼농사를 지었구나! 이게 다 타츠니시키의 밥이 되는 거야! 재배회의 첫 거리라고 생각해!” (49쪽)
- “농작물을 팔아 이익을 얻으려 든다면 그건 이미 농업이 아니야. 장사지.” “그,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럼 우리 농사꾼은 돈을 벌면 안 된다는 거야?” “안 되지!” “고다 씨, 그건 너무 깐깐한 거 아니야?” “넌 농사가 대충대충 해도 되는 일 같냐?” … “원래의 목적이란 게 뭔데.”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농작물은 굶주릴 때나 배부를 때나 서로 나눠야 하는 거야! 하물며 나라나 기업의 이익 추구의 수단이 되어선 절대 안 되지! 농업에 돈과 물질의 논리를 끌어들여선 안 돼! 생명의 논리를 바탕으로 자연에 감사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 그게 농사꾼의 조건이다!” (53∼55쪽)


  내 손길에는 내 마음이 담깁니다.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따사로이 돌보는 나날이라면, 내 넋과 말은 언제나 따사롭습니다.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따사로이 돌보지 못할 적에는, 내 넋과 말이 늘 따사롭지 못해요. 너그러이 돌보는 마음일 때에 너그러운 숨결 가득한 넋이요 말입니다. 아름다이 꾸리는 마음일 때에 아름다운 꽃빛 가득한 넋이자 말이에요.


  생각이 삶이요, 마음이 삶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고, 마음을 기울이는 대로 삽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마음을 기울이는 대로 아이는 어버이한테 마음을 기울입니다. 아이가 어버이한테 다가오는 넋이 고스란히 아이한테 돌아갑니다. 내가 동무한테 쏟는 마음은 동무가 나한테 쏟는 마음이 되고, 동무가 나한테 보내는 사랑은 내가 동무한테 보내는 사랑이 돼요.


  마음은 메아리와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을 나누는 삶은 메아리라 할 만합니다. 맑은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는 맑은 목소리 되어 돌아오고, 거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는 거친 목소리 되어 돌아와요.

 


- “나츠코나 도지가 일본 최고의 술을 만들려 하는 마음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걸 감사해.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줬으면 한다. 술의 원료인 쌀과 물은, 자연의 은혜 없인 생기지 않아. 그 은혜는 무상의 봉사로 양조장에 이익을 가져다주지. 그 사실을 명심하고 모쪼록 돈벌이에만 급급한 양조장은 되지 마라.” (57쪽)
- “양조장 사장 따님에게 술을 먹인 도지는,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거다. 헤헤.” “왜 그랬어? 할아범, 어째서 내게 술을 가르쳤던 거야?” “이런 이런 벌써 잊었나? 9살 때 술을 마시게 해 달라며 목 놓아 울었던 게 누군데? 게다가 벌컥벌컥 맛깔나게 마셨던 건 또 어떻고. 1년 내내 양조장 안을 헤집고 다니며 놀면서, 술밥 냄새며 모로미 냄새를 좋아라 했던 어린애가 누군데? 그런 어린애도 세상에 또 없을 게다. 넌 어쩌면 모로미에서 태어난 건지도 몰라. 너와 야스오 씨(술 신)는. 그래 나츠코는 모로미에서 태어나 자란 효모다. 나츠코 효모야.” (174∼175쪽)


  오제 아키라 님이 빚은 만화책 《나츠코의 술》 일곱째 권을 읽습니다. ‘모로미에서 태어난 아이’를 이야기하는 《나츠코의 술》 일곱째 권인데, ‘모로미에서 태어난 아이’는 술맛만 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술로 담가 술이지만, 술은 ‘쌀’이 없으면 빚을 수 없어요. 쌀은 흙이 없으면 얻지 못해요. 흙은 기름지게 돌보지 않으면 벼를 심어 거둘 수 없어요.


  곧, ‘모로미에서 태어난 아이’는 술을 빚는 일만 꿸 수 없습니다. 술맛을 아는 ‘술 하느님’은 술이 태어나는 밑자리인 ‘쌀’을 함께 알아야 합니다. 술 한 방울 맑고 곱게 빚고 싶은 꿈이란, 술이 될 쌀을 맑고 곱게 얻고 싶은 꿈이요, 술이 될 쌀을 맑고 곱게 얻고 싶은 꿈이란, 술이 될 쌀이 맨 처음 볍씨에서 볏모가 되어 논에 꽂혀 자라기까지 맑고 곱게 자라도록 땀흘리고 싶은 꿈입니다.


  흙이 있어 벼가 있고, 벼가 있어 쌀을 얻으면서 술이 있습니다. 해가 있어 지구가 있으며, 지구가 있어 숲과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흙도 벼도 쌀도, 해도 지구도 숲도, 모두 가장 따사로운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 마음이 있어야 예쁘게 얽힙니다. 가장 따사로운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 마음이 없다면 조금도 어여쁠 수 없는 해요 지구요 흙이요 숲입니다.

 


- “어떻게 보면 보다 좋은 술을 빚을 수 있을지만 궁리했어요. 술밥이며 누룩, 효모에 모로미만. 하지만 벼농사를 모르는 도지는 없어요.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들 농사를 지으니까요. 매년 벼를 키우고 쌀을 피부로 느끼죠. 역시 그걸 모르면 어엿한 도지는 될 수 없어요. 술을 빚는 건 우선 벼농사와 흙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 퇴비부터 공부할 거예요.” (63쪽)
-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사에코. 벼농사 따위 지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 그런 고생은 나 하나 하는 것으로 족해. 하물며 넌 여자다. 여기서 더 잘못되면 어쩌려고. 내 바람은 그저 네가 평범한 회사에 들어가 일하다 평범한 남자를 만나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것뿐이야. 그게 그렇게 과한 욕심이냐, 사에코!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너만!” (137쪽)


  사랑은 서로를 헤아리는 좋은 마음입니다. 사랑은 아파트 열쇠나 자동차 열쇠로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은 땅문서나 집문서나 은행계좌 숫자로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은 얼굴 생김새나 몸 생김새로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은 오직 서로를 헤아리는 가장 맑으면서 곱고 착한 마음으로 이룹니다.


  정치를 하든 문화를 하든 경제를 하든 사회운동을 하든 늘 이와 같아요. 서로를 헤아리는 가장 맑으면서 곱고 착하며 참답고 싱그러운 마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정치가 서고 문화가 서며 교육이나 경제나 사회가 설 수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술을 빚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흙을 일굽니다. 사랑 깃든 손길로 밥을 짓습니다. 사랑 어린 손길로 아이들 손을 맞잡고 서로 즐거이 노래부릅니다. (4345.7.5.나무.ㅎㄲㅅㄱ)

 


― 나츠코의 술 7 (오제 아키라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11.25./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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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54) 절대적 1 : 절대적 신념으로

 

기이하거나 불가사의한 것은 위험할는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을 아예 절대적 신념으로 삼았다
《조안 엘리자베스 록/조응주 옮김-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민들레,2004) 31쪽

 

  ‘기이(奇異)하거나’는 ‘낯설거나’로 손보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은 ‘처음 보는’이나 ‘모르는’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신념(信念)’은 ‘믿음’으로 다듬어 줍니다. ‘위험(危險)할는지’는 그대로 둘 수 있으나 ‘안 좋을는지’나 ‘나쁠는지’나 ‘해코지를 할는지’처럼 다듬어도 됩니다. ‘경계심(警戒心)’은 “경계하여 조심하는 마음”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경계’는 “뜻밖의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여 단속함”을 뜻한답니다. 곧, 국어사전에 실린 말풀이가 엉터리 겹말입니다. 한자말 ‘조심(操心)’ 뜻을 살피면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말이나 행동에 마음을 씀”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경계이든 조심이든 ‘살피는’ 일이에요. 보기글에서는 글흐름을 살피면서 “낯설거나 모르는 것은 안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을”처럼 통째로 손질하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절대적 신념으로 삼았다
→ 절대 믿음으로 삼았다
→ 꼭 지킬 믿음으로 삼았다
→ 단단한 믿음으로 삼았다
→ 아주 단단히 굳혔다
 …

 

  ‘절대(絶對)’는 “(1)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이 붙지 아니함 (2) 비교하거나 상대되어 맞설 만한 것이 없음 (3) [철학] = 절대자 (4) [부사] = 절대로”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한자말에 ‘-적’을 붙인 ‘절대적(絶對的)’은 “(1)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이 붙지 아니하는 (2) 비교하거나 상대될 만한 것이 없는”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낱말이 쓰이는 자리를 살피면, 두 낱말을 굳이 ‘-적’을 붙이거나 말거나 무엇이 다를까 아리송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절대적 안정”이랑 “절대 안정”이란 무엇이 다를까요. “절대적 권력”과 “절대 권력”이란 어떻게 다를까요. “파업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와 “파업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는 서로 얼마나 다를까요.

 

 절대적 신뢰 → 굳은 믿음 / 굳게 믿음
 절대적으로 지지하다 → 굳세게 지지하다 / 아주 지지하다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 웃사람 명령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 웃사람이 시킨 일은 꼭 지켜야 한다

 

  국어사전에서 ‘절대(絶對-)’를 찾아봅니다. 낱말뜻은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라 합니다. 곧, 한국말 ‘반드시’나 ‘꼭’을 한자말 ‘絶對’를 빌어 나타낸다 할 만합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로는 ‘반드시’나 ‘꼭’으로 가리키는 이야기를 한자를 쓰는 사람들 한자말로는 ‘絶對’인 셈입니다.


  꼭 써야만 하는 말이란 없습니다. 한국사람이니까 꼭 이런 말만 쓰고 저런 말은 안 써야 한다는 법이란 없습니다. 어떤 말이든 스스로 이녁 넋과 얼을 담습니다. 어떤 말을 골라서 쓰든, 사람들 스스로 이녁 넋과 얼을 담아서 나타내기에 가장 좋다고 여기는 말을 고르기 마련입니다.


  듣기에도 좋고 쓰기에도 좋은 낱말이 있겠지요. 한국사람 삶과 문화를 잘 드러내는 낱말이 있겠지요. 오늘날 흐름에 걸맞는 낱말이 있겠지요. 따스한 사랑과 수수한 꿈이 묻어나는 낱말이 있겠지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 턱없이 모자라다 / 아주 모자라다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 많이 나쁘다 / 아주 밀리다

 

  “굳은 믿음으로 삼다”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삼다”나 “바꿀 수 없는 믿음으로 삼다” 같은 말마디를 가만히 욉니다. “둘도 없는”이나 “그지없는” 같은 말투를 곰곰이 되뇝니다. 때와 곳마다 알맞게 넣으면 좋겠다 싶은 낱말과 말투를 하나하나 그립니다.


  반드시 이래야 하거나 저래야 한다는 틀은 따분하며 딱딱하고 무섭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르게 생각하면서 다 다르게 일구는 삶을 살찌울 만한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믿음직한 낱말과 말투와 말결과 말무늬를 헤아리고 싶습니다.


  바로쓰기도 좋고 다듬기도 좋습니다. 다만, 바로쓰기나 다듬기에 앞서, 나 스스로 내 꿈을 예쁘게 보살필 만한 말결을 북돋우고 싶습니다. 사랑스레 쓸 말이 반갑습니다. 따사로이 나눌 말이 즐겁습니다.

 

 이런 말은 남에게 절대 하지 마라
→ 이런 말은 남한테 함부로 하지 마라
→ 이런 말은 남한테 섣불리 하지 마라
 나는 절대 만류하지 않겠습니다
→ 나는 굳이 말리지 않겠습니다
→ 나는 조금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국어사전을 여러 차례 뒤지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국어사전 보기글 가운데 하나로 “파업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 같은 글월이 실리는데, 왜 이런 보기글을 실었을까 궁금합니다. 파업을 막아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니, 파업은 왜 일어날까요. 국어사전에서 이처럼 적바림하면서 사람들 생각을 한쪽으로 치우치도록 내몰지는 않을까요. 국어사전이라면 ‘파업’이 아니라 ‘전쟁’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보기글을 실을 때에 참 알맞으면서 걸맞다 할 만할 텐데요.


  좋은 이야기를 좋은 넋으로 빚는 좋은 국어사전이 되기를 빕니다. 아무 말이나 함부로 읊으면서 슬픈 넋이나 슬픈 말이 떠돌도록 하는 국어사전은 사라질 수 있기를 빕니다. (4337.10.22.쇠./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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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거나 모르는 것은 안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아주 믿음으로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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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62) 절대적 2 :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반 데어 포스트는 이 야생 자아의 부활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조안 엘리자베스 록/조응주 옮김-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민들레,2004) 58쪽

 

  “야생(野生) 자아(自我)의 부활(復活)”이라는 글월을 생각해 봅니다. 무엇을 말하려고 쓴 글월일까요. 들판에서 살던 마음이 되살아나는 일일까요, 어떤 마음이 되살아나는 일을 가리킬까요. 굳이 이처럼 적어야 어떤 이야기를 잘 나타낼 만한지, 이렇게 적바림하는 글월이 사람들 넋을 예쁘게 보듬을 만한지 궁금합니다.


  ‘인간(人間)’은 ‘사람’으로 고쳐 주고, ‘생존(生存)에’는 ‘살아가기에’나 ‘살아가는 데에’로 고칩니다. ‘필요(必要)하다고’는 ‘있어야 한다고’로 손보고, “주장(主張)하는 것이다”는 “말하고 있다”로 손봅니다.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살려면 꼭 있어야 한다
→ 살아가려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
→ 살아가는 데에 둘도 없이 대수롭다
 …

 

  아마 이 글월은 “생존에 절대로 필요하다”쯤으로 적을 수 있었겠지요. ‘-적’ 없이 “절대로 필요하다”로도 적을 만한 글월이라 할 텐데, 이렇게 있든 없든 거의 달라지지 않는 말투라 한다면, 우리가 쓸 만한 말투일까 아닐까 알쏭달쏭합니다. 사람들은 거의 아무 생각 없이 ‘-적’을 함부로 멋대로 아무렇게나 바보처럼 붙이는 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좋은 넋을 살피기를 바랍니다. 예쁜 얼을 빛내기를 바랍니다. 고운 말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착한 꿈을 북돋우기를 바랍니다.


  살아가고 생각하는 결 그대로 말과 글로 나타납니다. 살아가고 생각하는 모양새가 아름다울 때에는 저절로 아름답다 싶은 말과 글이 태어납니다.  (4337.11.1.달./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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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데어 포스트는 사람들이 들에서 살던 넋을 되살려서 알뜰히 갖추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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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367) 절대적 3 :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그러나 시간과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다들 물 한 바가지 뒤집어 쓴 채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방으로 돌아와 온기라곤 없는 냉방에서 한참을 떨어야 했다
《조문기-슬픈 조국의 노래》(민족문제연구소,2005) 170쪽

 

  ‘온기(溫氣)’는 ‘따뜻함’이나 ‘따스함’으로 다듬으면 한결 나아요. ‘부족(不足)해’는 ‘모자라’로 손봅니다. ‘냉방(冷房)’은 ‘찬방’이나 ‘차디찬 방’이나 ‘얼음장 같은 방’으로 고쳐 줍니다.

 

 시간과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 시간과 물이 너무도 모자라
→ 시간과 물이 턱없이 모자라
→ 시간과 물이 몹시 모자라
→ 시간과 물이 조금뿐이라
 …

 

  사람은 여럿인데 씻을 물이 없고, 또 쉴 틈이 없다면, “물이 너무 모자라다”고 하거나 “시간이 너무 없다”고 말하면 됩니다. 이 자리에서는 “몹시 모자라”나 “턱없이 모자라”처럼 적으면 잘 어울립니다. 뜻을 살려 “시간과 물이 아주 조금뿐”이라 할 수 있어요. “시간과 물이 쥐꼬리만큼”이라 해도 될 테지요. ‘모자라다’거나 ‘적다’라는 뜻이나 느낌을 잘 나타낼 만한 말투를 생각하면 됩니다. ‘쥐꼬리’나 ‘쥐방울’이나 ‘쥐눈’ 같은 낱말을 넣을 수 있고, ‘코딱지’나 ‘눈곱’이나 ‘먼지’ 같은 낱말을 넣을 수 있어요. 이렇게 하나하나 헤아리고 보면, ‘절대적’ 같은 말투는 눈녹듯 말끔히 사라집니다. (4338.11.23.물./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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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과 물이 턱없이 적어, 다들 물 한 바가지 뒤집어쓴 채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방으로 돌아와, 불기운이라곤 없는 차디찬 곳에서 한참을 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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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506) 절대적 4 : 절대적으로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리처드 파인만/승영조,김희봉 옮김-발견하는 즐거움》(승산,2001) 49쪽

 

  ‘확신(確信)하지는’은 ‘믿지는’이나 ‘굳게 믿지는’으로 다듬어 주고, “그 어떤 것도”는 “그 무엇도”로 다듬습니다. 아무튼, ‘절대적’이라는 말투가 끼어들어 골이 아픕니다.

 

 절대적으로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 언제나 그러하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 늘 그렇기만 하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 틀림없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 꼭 그렇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 딱히 믿지 않습니다
→ 그리 믿지 않습니다
→ 썩 믿을 만하지 않습니다
 …

 

  온누리 모든 일은 한 가지로만 흐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로만 굳어진 사물도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늘 움직인다고, 언제나 새로워진다고, 오늘과 글피가 다르고, 지난날과 오늘날 또한 다르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쓰는 말은 어떠할까요. 말 또한 어제와 오늘이 다르겠지요. 예전 사람들이 쓰던 말이랑 오늘 사람들이 쓰는 말은 사뭇 다르겠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작 쉰 해나 백 해쯤 앞서 살던 사람들은 ‘절대적’ 같은 낱말을 안 썼어요. 시골에서 태어나 흙을 읽던 사람들은 ‘절대적’뿐 아니라 ‘확신’ 같은 한자말이 없어도 즐겁게 말하고 즐겁게 생각을 나누었어요.


  나는 하나하나 헤아립니다. 옛날과 오늘날은 다르다 하지만, 오늘날과 앞날은 또 다르겠지요. 그리고, 언제나 다른 삶이요 사람이듯, 언제나 다른 결을 예쁘게 살리면서 언제나 기쁘게 주고받을 가장 빛나는 말을 사랑하고 싶어요. 내가 오늘 이곳에서 쓰는 가장 예쁜 말이 한결같이 예쁘게 뿌리내리도록 마음을 기울이고 싶어요. (4339.4.17.달./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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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무엇도 꼭 그러리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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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1651) 절대적 11 : 절대적으로 나쁜 것

 

그런데 절대적으로 나쁜 것은 과연 없는 걸까
《이케다 아키코/김경옥 옮김-열네 살의 철학》(민들레,2006) 178쪽

 

  ‘과연(果然)’은 ‘참말’이나 ‘참말로’로 다듬습니다. 이 짧은 보기글에 ‘것’이 두 차례 나오는데, 다듬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예쁘게 다듬으면 훨씬 나으리라 느낍니다. 앞엣것은 그대로 두더라도 뒤엣것은 쉽게 털 수 있어요. “없는 걸까”를 “없을까”나 “없는가”로 손보면 돼요.

 

 절대적으로 나쁜 것
→ 언제나 나쁜 것
→ 늘 나쁜 것
→ 아주 나쁜 것
→ 누구한테나 나쁜 것
 …

 

  생각을 적는 글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글이 달라집니다. 나 스스로 살아가는 결에 따라 내 글이 달라지고, 나 스스로 사랑하는 무늬에 따라 내 글이 달라집니다.


  마음을 쓰는 글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품느냐에 따라 글이 바뀝니다. 나 스스로 겪은 삶에 따라 내 글이 바뀌고, 나 스스로 꿈꾸는 빛살에 따라 내 글이 바뀝니다.


  삶을 가꾸듯 넋을 가꾸면서 말을 가꿀 수 있습니다. 삶을 돌보듯 넋을 돌보면서 말을 돌볼 수 있습니다. 삶을 일구듯 넋을 일구면서 말을 일굴 수 있어요.


  삶이 아무렇게나 흐르도록 내팽개칠 때에는, 넋이나 말 모두 옳게 헤아리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삶을 씩씩하게 보듬으면서 아끼지 않을 적에는, 넋이나 말 모두 슬기롭게 가다듬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절대적’이든 ‘절대’이든 쓰거나 안 쓰거나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삶을 어떻게 사랑하고, 생각과 마음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참말 대수롭습니다. 부디 좋은 삶 좋은 넋을 돌아보면서 좋은 말과 좋은 글이 되도록 애쓰기를 빌어요. (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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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늘 나쁜 것은 참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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