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54) 절대적 1 : 절대적 신념으로
기이하거나 불가사의한 것은 위험할는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을 아예 절대적 신념으로 삼았다
《조안 엘리자베스 록/조응주 옮김-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민들레,2004) 31쪽
‘기이(奇異)하거나’는 ‘낯설거나’로 손보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은 ‘처음 보는’이나 ‘모르는’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신념(信念)’은 ‘믿음’으로 다듬어 줍니다. ‘위험(危險)할는지’는 그대로 둘 수 있으나 ‘안 좋을는지’나 ‘나쁠는지’나 ‘해코지를 할는지’처럼 다듬어도 됩니다. ‘경계심(警戒心)’은 “경계하여 조심하는 마음”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경계’는 “뜻밖의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여 단속함”을 뜻한답니다. 곧, 국어사전에 실린 말풀이가 엉터리 겹말입니다. 한자말 ‘조심(操心)’ 뜻을 살피면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말이나 행동에 마음을 씀”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경계이든 조심이든 ‘살피는’ 일이에요. 보기글에서는 글흐름을 살피면서 “낯설거나 모르는 것은 안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을”처럼 통째로 손질하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절대적 신념으로 삼았다
→ 절대 믿음으로 삼았다
→ 꼭 지킬 믿음으로 삼았다
→ 단단한 믿음으로 삼았다
→ 아주 단단히 굳혔다
…
‘절대(絶對)’는 “(1)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이 붙지 아니함 (2) 비교하거나 상대되어 맞설 만한 것이 없음 (3) [철학] = 절대자 (4) [부사] = 절대로”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한자말에 ‘-적’을 붙인 ‘절대적(絶對的)’은 “(1)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이 붙지 아니하는 (2) 비교하거나 상대될 만한 것이 없는”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낱말이 쓰이는 자리를 살피면, 두 낱말을 굳이 ‘-적’을 붙이거나 말거나 무엇이 다를까 아리송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절대적 안정”이랑 “절대 안정”이란 무엇이 다를까요. “절대적 권력”과 “절대 권력”이란 어떻게 다를까요. “파업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와 “파업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는 서로 얼마나 다를까요.
절대적 신뢰 → 굳은 믿음 / 굳게 믿음
절대적으로 지지하다 → 굳세게 지지하다 / 아주 지지하다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 웃사람 명령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 웃사람이 시킨 일은 꼭 지켜야 한다
국어사전에서 ‘절대(絶對-)’를 찾아봅니다. 낱말뜻은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라 합니다. 곧, 한국말 ‘반드시’나 ‘꼭’을 한자말 ‘絶對’를 빌어 나타낸다 할 만합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로는 ‘반드시’나 ‘꼭’으로 가리키는 이야기를 한자를 쓰는 사람들 한자말로는 ‘絶對’인 셈입니다.
꼭 써야만 하는 말이란 없습니다. 한국사람이니까 꼭 이런 말만 쓰고 저런 말은 안 써야 한다는 법이란 없습니다. 어떤 말이든 스스로 이녁 넋과 얼을 담습니다. 어떤 말을 골라서 쓰든, 사람들 스스로 이녁 넋과 얼을 담아서 나타내기에 가장 좋다고 여기는 말을 고르기 마련입니다.
듣기에도 좋고 쓰기에도 좋은 낱말이 있겠지요. 한국사람 삶과 문화를 잘 드러내는 낱말이 있겠지요. 오늘날 흐름에 걸맞는 낱말이 있겠지요. 따스한 사랑과 수수한 꿈이 묻어나는 낱말이 있겠지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 턱없이 모자라다 / 아주 모자라다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 많이 나쁘다 / 아주 밀리다
“굳은 믿음으로 삼다”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삼다”나 “바꿀 수 없는 믿음으로 삼다” 같은 말마디를 가만히 욉니다. “둘도 없는”이나 “그지없는” 같은 말투를 곰곰이 되뇝니다. 때와 곳마다 알맞게 넣으면 좋겠다 싶은 낱말과 말투를 하나하나 그립니다.
반드시 이래야 하거나 저래야 한다는 틀은 따분하며 딱딱하고 무섭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르게 생각하면서 다 다르게 일구는 삶을 살찌울 만한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믿음직한 낱말과 말투와 말결과 말무늬를 헤아리고 싶습니다.
바로쓰기도 좋고 다듬기도 좋습니다. 다만, 바로쓰기나 다듬기에 앞서, 나 스스로 내 꿈을 예쁘게 보살필 만한 말결을 북돋우고 싶습니다. 사랑스레 쓸 말이 반갑습니다. 따사로이 나눌 말이 즐겁습니다.
이런 말은 남에게 절대 하지 마라
→ 이런 말은 남한테 함부로 하지 마라
→ 이런 말은 남한테 섣불리 하지 마라
나는 절대 만류하지 않겠습니다
→ 나는 굳이 말리지 않겠습니다
→ 나는 조금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국어사전을 여러 차례 뒤지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국어사전 보기글 가운데 하나로 “파업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 같은 글월이 실리는데, 왜 이런 보기글을 실었을까 궁금합니다. 파업을 막아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니, 파업은 왜 일어날까요. 국어사전에서 이처럼 적바림하면서 사람들 생각을 한쪽으로 치우치도록 내몰지는 않을까요. 국어사전이라면 ‘파업’이 아니라 ‘전쟁’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보기글을 실을 때에 참 알맞으면서 걸맞다 할 만할 텐데요.
좋은 이야기를 좋은 넋으로 빚는 좋은 국어사전이 되기를 빕니다. 아무 말이나 함부로 읊으면서 슬픈 넋이나 슬픈 말이 떠돌도록 하는 국어사전은 사라질 수 있기를 빕니다. (4337.10.22.쇠./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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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거나 모르는 것은 안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아주 믿음으로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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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없애야 말 된다
(62) 절대적 2 :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반 데어 포스트는 이 야생 자아의 부활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조안 엘리자베스 록/조응주 옮김-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민들레,2004) 58쪽
“야생(野生) 자아(自我)의 부활(復活)”이라는 글월을 생각해 봅니다. 무엇을 말하려고 쓴 글월일까요. 들판에서 살던 마음이 되살아나는 일일까요, 어떤 마음이 되살아나는 일을 가리킬까요. 굳이 이처럼 적어야 어떤 이야기를 잘 나타낼 만한지, 이렇게 적바림하는 글월이 사람들 넋을 예쁘게 보듬을 만한지 궁금합니다.
‘인간(人間)’은 ‘사람’으로 고쳐 주고, ‘생존(生存)에’는 ‘살아가기에’나 ‘살아가는 데에’로 고칩니다. ‘필요(必要)하다고’는 ‘있어야 한다고’로 손보고, “주장(主張)하는 것이다”는 “말하고 있다”로 손봅니다.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살려면 꼭 있어야 한다
→ 살아가려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
→ 살아가는 데에 둘도 없이 대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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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글월은 “생존에 절대로 필요하다”쯤으로 적을 수 있었겠지요. ‘-적’ 없이 “절대로 필요하다”로도 적을 만한 글월이라 할 텐데, 이렇게 있든 없든 거의 달라지지 않는 말투라 한다면, 우리가 쓸 만한 말투일까 아닐까 알쏭달쏭합니다. 사람들은 거의 아무 생각 없이 ‘-적’을 함부로 멋대로 아무렇게나 바보처럼 붙이는 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좋은 넋을 살피기를 바랍니다. 예쁜 얼을 빛내기를 바랍니다. 고운 말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착한 꿈을 북돋우기를 바랍니다.
살아가고 생각하는 결 그대로 말과 글로 나타납니다. 살아가고 생각하는 모양새가 아름다울 때에는 저절로 아름답다 싶은 말과 글이 태어납니다. (4337.11.1.달./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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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데어 포스트는 사람들이 들에서 살던 넋을 되살려서 알뜰히 갖추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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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없애야 말 된다
(367) 절대적 3 :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그러나 시간과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다들 물 한 바가지 뒤집어 쓴 채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방으로 돌아와 온기라곤 없는 냉방에서 한참을 떨어야 했다
《조문기-슬픈 조국의 노래》(민족문제연구소,2005) 170쪽
‘온기(溫氣)’는 ‘따뜻함’이나 ‘따스함’으로 다듬으면 한결 나아요. ‘부족(不足)해’는 ‘모자라’로 손봅니다. ‘냉방(冷房)’은 ‘찬방’이나 ‘차디찬 방’이나 ‘얼음장 같은 방’으로 고쳐 줍니다.
시간과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 시간과 물이 너무도 모자라
→ 시간과 물이 턱없이 모자라
→ 시간과 물이 몹시 모자라
→ 시간과 물이 조금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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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여럿인데 씻을 물이 없고, 또 쉴 틈이 없다면, “물이 너무 모자라다”고 하거나 “시간이 너무 없다”고 말하면 됩니다. 이 자리에서는 “몹시 모자라”나 “턱없이 모자라”처럼 적으면 잘 어울립니다. 뜻을 살려 “시간과 물이 아주 조금뿐”이라 할 수 있어요. “시간과 물이 쥐꼬리만큼”이라 해도 될 테지요. ‘모자라다’거나 ‘적다’라는 뜻이나 느낌을 잘 나타낼 만한 말투를 생각하면 됩니다. ‘쥐꼬리’나 ‘쥐방울’이나 ‘쥐눈’ 같은 낱말을 넣을 수 있고, ‘코딱지’나 ‘눈곱’이나 ‘먼지’ 같은 낱말을 넣을 수 있어요. 이렇게 하나하나 헤아리고 보면, ‘절대적’ 같은 말투는 눈녹듯 말끔히 사라집니다. (4338.11.23.물./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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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과 물이 턱없이 적어, 다들 물 한 바가지 뒤집어쓴 채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방으로 돌아와, 불기운이라곤 없는 차디찬 곳에서 한참을 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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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없애야 말 된다
(506) 절대적 4 : 절대적으로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리처드 파인만/승영조,김희봉 옮김-발견하는 즐거움》(승산,2001) 49쪽
‘확신(確信)하지는’은 ‘믿지는’이나 ‘굳게 믿지는’으로 다듬어 주고, “그 어떤 것도”는 “그 무엇도”로 다듬습니다. 아무튼, ‘절대적’이라는 말투가 끼어들어 골이 아픕니다.
절대적으로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 언제나 그러하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 늘 그렇기만 하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 틀림없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 꼭 그렇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 딱히 믿지 않습니다
→ 그리 믿지 않습니다
→ 썩 믿을 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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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모든 일은 한 가지로만 흐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로만 굳어진 사물도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늘 움직인다고, 언제나 새로워진다고, 오늘과 글피가 다르고, 지난날과 오늘날 또한 다르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쓰는 말은 어떠할까요. 말 또한 어제와 오늘이 다르겠지요. 예전 사람들이 쓰던 말이랑 오늘 사람들이 쓰는 말은 사뭇 다르겠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작 쉰 해나 백 해쯤 앞서 살던 사람들은 ‘절대적’ 같은 낱말을 안 썼어요. 시골에서 태어나 흙을 읽던 사람들은 ‘절대적’뿐 아니라 ‘확신’ 같은 한자말이 없어도 즐겁게 말하고 즐겁게 생각을 나누었어요.
나는 하나하나 헤아립니다. 옛날과 오늘날은 다르다 하지만, 오늘날과 앞날은 또 다르겠지요. 그리고, 언제나 다른 삶이요 사람이듯, 언제나 다른 결을 예쁘게 살리면서 언제나 기쁘게 주고받을 가장 빛나는 말을 사랑하고 싶어요. 내가 오늘 이곳에서 쓰는 가장 예쁜 말이 한결같이 예쁘게 뿌리내리도록 마음을 기울이고 싶어요. (4339.4.17.달./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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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무엇도 꼭 그러리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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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없애야 말 된다
(1651) 절대적 11 : 절대적으로 나쁜 것
그런데 절대적으로 나쁜 것은 과연 없는 걸까
《이케다 아키코/김경옥 옮김-열네 살의 철학》(민들레,2006) 178쪽
‘과연(果然)’은 ‘참말’이나 ‘참말로’로 다듬습니다. 이 짧은 보기글에 ‘것’이 두 차례 나오는데, 다듬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예쁘게 다듬으면 훨씬 나으리라 느낍니다. 앞엣것은 그대로 두더라도 뒤엣것은 쉽게 털 수 있어요. “없는 걸까”를 “없을까”나 “없는가”로 손보면 돼요.
절대적으로 나쁜 것
→ 언제나 나쁜 것
→ 늘 나쁜 것
→ 아주 나쁜 것
→ 누구한테나 나쁜 것
…
생각을 적는 글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글이 달라집니다. 나 스스로 살아가는 결에 따라 내 글이 달라지고, 나 스스로 사랑하는 무늬에 따라 내 글이 달라집니다.
마음을 쓰는 글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품느냐에 따라 글이 바뀝니다. 나 스스로 겪은 삶에 따라 내 글이 바뀌고, 나 스스로 꿈꾸는 빛살에 따라 내 글이 바뀝니다.
삶을 가꾸듯 넋을 가꾸면서 말을 가꿀 수 있습니다. 삶을 돌보듯 넋을 돌보면서 말을 돌볼 수 있습니다. 삶을 일구듯 넋을 일구면서 말을 일굴 수 있어요.
삶이 아무렇게나 흐르도록 내팽개칠 때에는, 넋이나 말 모두 옳게 헤아리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삶을 씩씩하게 보듬으면서 아끼지 않을 적에는, 넋이나 말 모두 슬기롭게 가다듬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절대적’이든 ‘절대’이든 쓰거나 안 쓰거나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삶을 어떻게 사랑하고, 생각과 마음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참말 대수롭습니다. 부디 좋은 삶 좋은 넋을 돌아보면서 좋은 말과 좋은 글이 되도록 애쓰기를 빌어요. (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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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늘 나쁜 것은 참말 없을까